(46) 自强論의 이상과 현실 (46) 自强論의 이상과 현실 2007-11-21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우여곡절 끝에 후금과 화친함으로써 정묘호란은 끝났다. 인조 정권은 어렵사리 종사(宗社)를 보전할 수 있었지만 남겨진 과제는 참으로 버거웠다. 먼저 후금군과 이렇다할 전투 한 번 변변히 치러보지 못..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08.07.20
(45) 모문룡의 죽음과 파장, Ⅱ (45) 모문룡의 죽음과 파장, Ⅱ 2007-11-14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모문룡은 쌍도로 향하면서 엄청난 수의 병력을 대동했다. 수백 척의 선박에 2만 8000명의 병력을 싣고 갔다고 한다. 말하자면 3만명 가까운 경호원을 대동한 셈이다. 원숭환으로부터 소환 통보를 받았..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08.07.20
(44) 모문룡의 죽음과 파장, 1 (44) 모문룡의 죽음과 파장, 1 2007-11-07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정묘호란이 벌어지는 동안 모문룡은 조선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했다. 보탬은커녕 그의 부하들이 끼친 작폐 때문에 청북 백성들의 고통은 극에 달했다. 그럼에도 모문룡은 명 조정에 보낸 보고서에..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08.07.20
(43) 일본의 氣 가 살아나다, Ⅱ (43) 일본의 氣 가 살아나다, Ⅱ 2007-10-31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1629년 겐포(玄方) 일행은 상경을 허용하라고 요구하면서 자신들이 도쿠가와 막부 장군의 명령을 받아 온 사자(國王使)라고 강변했다. 조선 조정은 그들이 진짜 국왕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정홍명(鄭..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08.07.20
(42) 일본의 氣가 살아나다, Ⅰ (42) 일본의 氣가 살아나다,Ⅰ 2007-10-24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정묘호란의 발생은 조선과 일본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쓰시마(對馬島)와 도쿠가와(德川) 바쿠후(幕府)는 동원할 수 있는 채널을 모두 가동하여 전쟁의 추이와 승패를 파악하려 했다. 그들은 조선과 ..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08.07.20
(41) 정묘호란의 후유증 (41) 정묘호란의 후유증 2007-10-17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인조는 1627년 4월12일, 서울로 돌아와 경덕궁(慶德宮)으로 들어갔다. 1624년 이괄의 난을 맞아 서울을 버렸다가 되찾았던 경험을 3년 만에 되풀이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어렵사리 정권은 지킬 수 있었지만 그 ..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08.07.20
(40) 정묘호란과 모문룡 (40) 정묘호란과 모문룡 2007-10-10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1627년 4월21일, 용골산성의 영웅 정봉수로부터 긴급 보고가 올라왔다. ‘평안도 구성부터 곽산까지 후금 군사들이 가득 차 있고 용골산성은 고립되어 있다. 성안에는 7000명 가까운 군사가 있지만 양식이 다 ..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08.07.20
(39) 정묘호란 이모저모 (39) 정묘호란 이모저모 2007-10-03 28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인조실록’과 장유(張維)의 ‘계곡만필(谿谷漫筆)’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정묘호란 당시 강화도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불과 100리 밖까지 적의 대병이 압박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정 신료..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08.07.20
(38) 정묘호란 일어나다, Ⅲ (38) 정묘호란 일어나다, Ⅲ 2007-09-22 21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조선 사신이 ‘재조지은을 배신할 수 없다’며 침략을 힐문했을 때 아민은 즉각 반박했다. 반박의 핵심은 ‘조선이 명의 은혜만 기억할 뿐 자신들이 베푼 은혜에는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민은..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08.07.20
(37) 정묘호란 일어나다,Ⅱ (37) 정묘호란 일어나다, Ⅱ 2007-09-19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1627년 후금이 갑자기 정묘호란을 도발했던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복합적이었다. 조선과 후금, 명과 후금, 그리고 조선과 명(-모문룡 문제를 포함) 사이의 문제점들이 서로 얽혀 있었다. 특히 누르하치..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08.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