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43) 일본의 氣 가 살아나다, Ⅱ

Gijuzzang Dream 2008. 7. 20. 20:49

 

 

 

 

 

 

 (43) 일본의 氣 가 살아나다, Ⅱ

 

1629년 겐포(玄方) 일행은 상경을 허용하라고 요구하면서

자신들이 도쿠가와 막부 장군의 명령을 받아 온 사자(國王使)라고 강변했다.

조선 조정은 그들이 진짜 국왕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정홍명(鄭弘溟)을 선위사(宣慰使)로 왜관에 보냈다.

하지만 겐포 일행은 국왕사가 마땅히 지참해야 할 국서(國書)를 갖고 있지 않았다.

조선은 당연히 상경을 다시 거부했다. 겐포는 국왕사라고 우기며 협박을 계속했다.

임진왜란 이후 최초의 상경을 둘러싼 실랑이는 쉽사리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진 전장(戰場)의 현재 모습.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일본은 500여년 간의 긴 중세시대를 마감하고

근세, 즉 에도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외교전문가로 길러진 겐소의 제자 겐포

 

겐포(1588∼1661)는 17세기 초반 조·일 관계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승려였다.

그의 정식 이름은 기하쿠 겐포(規伯玄方)였고 호를 백운(白雲) 또는 회계(晦溪)라고 했다.

규슈 하카다(博多)에서 태어난 그는 출가한 이후 쓰시마로 건너갔는데,

출가한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겐포에게 외교술을 가르쳐준 스승은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였다.

본래 하카다의 성복사(聖福寺) 주지였던 겐소는 1580년 쓰시마로 건너갔다.

겐소는 뛰어난 한문 실력을 바탕으로

쓰시마에서 조선과의 외교 교섭을 담당하는 책임자로 활약했다.

조선과의 교역이 경제적 생명선이나 마찬가지였던 쓰시마의 입장에서는

능숙하게 외교문서를 다룰 수 있는 전문가가 절실했다.

문화적으로 일본인들을 ‘한 수 아래’로 보았던 조선 관인들과 접촉하려면 한문 실력뿐 아니라

시문(詩文) 등을 수작(酬酌)할 수 있을 만큼 문학적 재능도 필요했는데

겐소는 바로 그 같은 임무에 적격이었다.

 

겐소는 임진왜란에도 참전했다.

왜란 당시 명군 지휘부는 그를 일본군의 모주(謀主) 가운데 한 명으로 지목하여

그의 목을 가져오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상금을 주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겐소의 활약은 왜란이 끝난 뒤에도 이어졌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승리를 통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한 이후

쓰시마의 소오씨(宗氏)는 겐소를 내세워 조선과의 강화를 성공시켰다.

 

겐소는 조선 사절의 도일(渡日)을 이끌어내고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조선과의 관계를 놓고 볼 때, 겐소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외교관이었던 셈이다.

 

겐포는 17세부터 쓰시마의 이정암(以酊庵)이란 곳에 머물며 겐소를 보좌하면서

조선과의 외교를 배웠다.

1611년 겐소가 세상을 떠나자 스승을 이어 쓰시마의 외교문서를 담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소오씨는 겐포의 나이가 아직 어린 점을 고려하여

그를 교토(京都)로 보내 좀더 학문을 닦도록 했다.

겐포는 1619년부터 쓰시마의 외교 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1621년에도 국왕사라는 직함을 갖고 부산에 왔던 적이 있었다.

요컨대 겐포는 스승 겐소와 쓰시마 당국에 의해 의도적으로 길러진

외교 전문가, 조선 전문가였던 셈이다.

 

 

조선, 논란 끝에 상경을 허용하다

 

겐포가 상경을 고집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조선 조정은 고민했다. 인조는 강경했다.

그는 ‘왜놈들은 우리의 원수’라고 전제한 뒤

일단 금제(禁制)를 풀면 이후의 폐단을 막을 수 없다는 것과 대의(大義)를 고려하여

상경을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고 했다. 또 ‘상경을 허용하면 공갈과 협박에 굴복하는 셈이 되고,

일본은 분명 조선에 사람이 없다고 여길 것’이라고 우려했다.

 

신료들의 의견은 사뭇 달랐다.

병조판서 이귀(李貴)는 ‘선조(宣祖)께서도 일본을 이웃나라로 대우했는데

이웃 사신의 상경을 불허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했다. 그는 현실론을 내세웠다.

‘호란 때문에 만신창이가 된 현실에서 왜인들의 비위를 거스를 수는 없으며

유순한 태도로 강자를 제압하는 것이야말로 보국(保國)의 방책’이라고 강조했다.

신료들의 생각도 대체로 이귀의 주장과 같았다.

하지만 인조가 워낙 강경하게 반대하여 결론은 쉽사리 내려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현실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겐포가 왔을 무렵 안팎의 사정이 너무 뒤숭숭했기 때문이다.

1629년 2월, 후금 사신 만월개(滿月介)가 서울에 들어왔고,

같은 달 후금군은 선사포에 있는 모문룡의 둔전을 습격했다.

이 때문에 서울에는 후금이 다시 쳐들어올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퍼지면서

피란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3월에는 홍타이지가 국서를 보내와 ‘조선이 맹약을 지키지 않는다.’고 질책하고

‘모문룡과 관계를 끊으라.’고 다시 협박했다.

전국적으로 가뭄이 계속되는 와중에 명화적(明火賊) 등이 발생했다.

이정구(李廷龜)는 이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당시의 조선을 가리켜 ‘공허한 나라(空虛之國)’라고 표현했다.

 

이귀가 다시 나섰다.

그는 ‘후금과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 일본과 사단을 만들 수는 없다.’는 논리로

상경을 허용하자고 주장했다. 이정구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그는 겐포 일행 가운데 몇 사람만 ‘특소(特召)’라는 명목으로 상경을 허용하되

나머지 인원은 부산에서 접대하자고 주장했다.

인조도 상황 논리에 밀려 결국 신료들의 주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조정의 절충안이 부산으로 전달되었다. 조선 조정은 겐포 일행에게 상경을 허용하면서

그들을 국왕사가 아닌 바로 아래의 거추사(巨酋使) 급으로 대우하기로 결정했다.

국서가 없었기 때문이다. 국왕사의 사절 정원은 25인이었는데 거추사의 정원은 15인이었다.

 

겐포는 반발하면서 거추사의 인원에 수행원 4인을 더 추가해야 한다고 강청했다.

또 자신이 ‘보행이 불편하다.’는 핑계를 내세워 가마를 타고 상경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정홍명은 겐포 일행의 집요한 요구에 밀려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이윽고 1629년 4월6일,19명으로 구성된 겐포 일행은 부산을 출발하여 서울로 향했다.

임진왜란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린 상경 길이었다.

 

 

돌아갈 때 목면 600동까지 챙겨

 

겐포 일행은 4월22일 서울로 들어왔다. 그들은 4월25일, 경덕궁(慶德宮, 오늘날의 경희궁)에서

인조에게 인사를 올리는 숙배(肅拜)를 행하고

5월21일 출발할 때까지 약 한 달 동안 서울에 머물렀다.

그들은 인조를 알현할 때 진상품으로 조총 20정을 비롯하여

화약 원료인 유황(硫黃)과 염초(焰硝) 수백 근을 바쳤다.

조선이 후금과 막 전쟁을 치렀던 것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

전쟁을 치른 조선이 가장 아쉬워 할 수밖에 없는 무기류를 헌상함으로써

쓰시마의 존재 가치를 환기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기도 했다.

 

겐포가 이끄는 사절단의 본래 목적은,

막부의 명령을 받아 정묘호란 이후의 조선과 대륙 정세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겐포 일행은 서울에 머무는 동안

조선 내부 사정은 물론 명과 후금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부심했다.

조선인들을 통해 얻어들은 정보를 기행문 등에 꼼꼼하게 적었는가 하면,

대동했던 화가들을 시켜 목도했던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 기록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겐포 일행은 실리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쓰시마 도주(島主)가 특별히 보낸 스기무라(杉村采女)는

무기류 등을 헌상하여 조선의 환심을 사는 한편,

당시 이런저런 이유로 조선으로부터 받지 못했던 목면(木棉)을 지급해 달라고 요청했다.

스기무라가 요청한 목면의 양은 600동(同)이었다. 자그마치 3만 필이나 되는 엄청난 양이었다.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조선 조정은 당연히 거절했다.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겐포 일행은 5월21일 서울을 뛰쳐나갔다.

조선 조정이 쓰시마 도주에게 보내는 서계(書契)의 접수도 거부했다.

조선 조정은 난감했다.

최명길 등은 남변(南邊)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달래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선은 결국 목면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왜관에 머물며 조선의 수락 소식을 들은 겐포 일행은 6월12일 유유히 귀국선에 올랐다.

정묘호란을 겪은 직후 ‘공허지국’ 조선의 외교를 이끌던 당국자들의 고뇌가 눈에 밟힌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7-10-31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