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40) 정묘호란과 모문룡

Gijuzzang Dream 2008. 7. 20. 20:48

 

 

 

 

 

 (40) 정묘호란과 모문룡

 

1627년 4월21일, 용골산성의 영웅 정봉수로부터 긴급 보고가 올라왔다.

‘평안도 구성부터 곽산까지 후금 군사들이 가득 차 있고 용골산성은 고립되어 있다.

성안에는 7000명 가까운 군사가 있지만

양식이 다 떨어져 굶어 죽은 자가 이미 30명이 넘었다.

후금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해 오는 백성이 무수히 많지만 그들을 먹여 살릴 방도가

없다.’고 했다. 정봉수는 죽어 가고 있는 평안도 백성들을 살릴 진휼(賑恤) 대책을

속히 마련해 달라고 호소했다.

 

 

 

서북 백성들의 비극

 

정묘호란 시기 평안도와 황해도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초는 끔찍했다.

조정에서 버림받은 채 후금군의 칼날 앞에 가장 먼저 노출되었던 그들이었다.

많은 이들이 후금군에 목숨을 잃거나 포로가 되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살던 곳을 버리고 피란을 떠났다.

피란길에 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해에 있는 섬으로 들어갔다.

후금군이 바다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섬으로 들어가면 목숨은 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갑자기 들어간 섬 안에 식량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을 리 없었다.

후금군을 겨우 피했지만 섬에서 굶어 죽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강화가 맺어져 전쟁은 끝났지만 서북 백성들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어느 고을을 가든 굶어 죽기 직전까지 몰린 사람들로 넘쳐났다.

‘황해도의 마을들은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비어 있고, 평양성 안에는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다.’고 했다.

 

압록강 부근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도 처참했다. 후금군에 끌려가던 포로들이 압록강을 건널 때 강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후금군은, 투신을 막으려고 포로들을 결박하고 배에다 울타리를 치기도 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강으로 뛰어들어 압록강이 시체로 뒤덮였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비극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정묘호란이 일어났던 초기, 평안도 백성들 가운데는 후금군의 앞잡이가 되어 모문룡 휘하의 명군(모병: 毛兵)을 공격하는데 가담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난이 일어나기 이전 모병들이 자행했던 극심한 민폐 때문에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었다.

강화가 이루어지고 후금군이 철수하자 모병들의 보복이 시작되었다. 곽산, 구성, 삭주, 선천, 창성, 철산, 의주 등 모병의 주둔지 부근에 살고 있던 무고한 양민들까지 모병들에 살해되었다. 정묘호란 직후 모병들의 살육과 약탈은 극에 이르렀다.

 

1627년 4월19일 무렵, 모문룡의 부하 모유후(毛有厚)는 안주에 정박해 있던 조선 선박 3척을 나포했다.

조선 피란민들이 타고 있는 배들이었다.

모유후는 배들을 기습하여 건장한 남자들과 노약자들은 모두 살해하고

여자들과 화물만을 남겨 끌고 갔다.

중군(中軍) 진계성(陳繼盛)이란 자는

조선 조정이 황해도 장연의 선박들을 쇄환하려는데 불만을 품고

조선인 역관을 잡아다가 곤장을 치고 귀를 자르는 악행을 저질렀다.

서북 지역에서 조선의 행정 체계와 공권력이 허물어진 상황에서

모병들은 마구잡이로 날뛰고 있었다.

 

 

정묘호란 중의 모문룡

 

후금의 홍타이지가 정묘호란을 일으키면서 가장 중요한 목표로 내세운 것은

모문룡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조선에 대한 공격은 사실 부차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모문룡은 후금군의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가도에서 다른 섬으로 도피하여 용케 목숨을 보전했다.

그는 이후 평안도 연해 일대를 돌아다니며 상황을 관망했다.

조선 조정은 그가 배후에서 후금군을 공격하거나 견제해 줄 것을 기대했지만,

그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선 정부의 통제력이 사라진 틈을 이용하여

청북(淸北) 지역 주민들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높이려고 시도했다.

 

실제로 정묘호란 당시 평안도 지역의 조선 의병이나 백성들 가운데는

모문룡에게 의지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용골산성 싸움에서 공을 세웠던 중군 이립(李)과 품관 장희범(張希範)은

자신들이 벤 후금군의 수급(首級-머리)을 모문룡에게 가져다 바쳤다.

용천(龍川)의 군관 김여의(金汝義)는 수급뿐 아니라 후금군에서 노획한 말을 바쳤다.

모문룡은 그들에게 은이나 식량 등을 상으로 주었다.

적과 싸워 군공을 세워도 그에 합당한 포상을 받지 못하던 서북 지역 의병들의 입장에서는

모문룡이 상으로 주는 식량 등이 아쉬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모문룡에게 수급을 바친 사람들 가운데는

조선인의 머리를 후금군의 것으로 속이는 자들도 있었다.

모문룡은 그렇게 얻은 수급을, 마치 자신이 적과 싸워 얻은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명 조정에 군공으로 보고했다.

청북 지역에 대한 조선 조정의 통제력이 사라진 데서 비롯된 비극이었다.

 

조선 조정은 강화가 성립된 후 모문룡에게 문안사(問安使)를 보냈다.

1627년 4월27일, 문안사 신달도(申達道)는 모문룡을 면담했다.

신달도가 “수로와 육로가 모두 막혀 이제야 노야(老爺)를 찾아 뵙게 되었다.”고

공손히 안부의 인사를 전할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괜찮았다.

문제는 신달도가 가져간 자문(咨文)의 내용이었다.

자문 속에는 ‘귀하의 진영에서 조선을 돕기 위해 한 무리의 군대도 동원하지 않아 섭섭하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자문을 읽은 뒤 모문룡은 길길이 날뛰었다.

그는 ‘조선이 후금군을 끌어들여 명군을 도살했고,

의주부윤 이완(李莞)은 후금군이 자신을 죽일 수 있도록 고의적으로 그들을 방임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조선이 후금과 강화를 체결한 것은

명의 은혜를 배신한 ‘패륜행위’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신달도가 ‘강화를 체결한 것은 조선의 본심이 아니며

적을 기미(羈-어르고 달래는 것)하기 위한 목적에서 부득이하게 선택한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모문룡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조선 백성들을 죽이거나 약탈하지 못하도록 부하들을 단속해 달라.’는 신달도의 요청도

묵살했다.

‘조선 사람들이 먼저 자신의 부하들에게 적대 행위를 했기 때문에 보복한 것’이라며 입을 막았다.

 

 

모문룡에 미곡 5만석·은 10만냥 하사

 

4월28일, 정묘호란의 전말을 명 조정에 보고하기 위해

북경으로 가고 있던 주문사(奏聞使) 일행이 가도에 도착했다.

주문사 일행은 모문룡에게 면담을 신청했지만, 그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만나 주지 않았다.

모문룡은 부하들을 시켜 조선의 주문사 일행이 명나라로 가는 것을 저지하도록 했다.

주문사 일행의 보고를 통해 정묘호란 중 자신의 행적이 탄로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모문룡은 아예 주문사 일행에게 명 조정으로 가져 가는 보고서의 내용을 뜯어 고치라고

강요했다. ‘조선이 후금군의 침략을 받아 망하기 직전까지 몰렸는데

모문룡의 활약 덕분에 적이 크게 패하여 철수했다.’는 내용으로 고치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요구를 거부하면 북경으로 가는 해로를 열어 주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주문사 일행은 북경으로 가기 위해 결국 그의 요구대로 따랐다.

 

정묘호란 직후 명의 천계제(天啓帝)는 모문룡의 사기 행각에 완전히 넘어갔다.

요동에 파견되었던 태감(太監) 유응곤(劉應坤)은

정묘호란과 모문룡에 관련된 보고서를 조정에 올렸다. 그것은 한마디로 ‘소설’이었다.

‘오랑캐 군사 6만이 조선을 공격했는데 모문룡이 기책(奇策)을 내어 제압하여

그들이 심양으로 도망쳤다.’는 내용이었다.

모문룡은 다른 경로로 올린 보고서에서는

‘자신이 세 차례 대승을 거둠으로써 조선이 보전되었다.’고 허풍을 치는가 하면

‘조선이 요민들이 끼치는 민폐에 불만을 품고 후금의 첩자 노릇을 하고 있다.’고 무고까지 했다.

 

1627년 5월 천계제는 모문룡의 ‘군공’을 치하하고

그에게 미곡 5만석과 양곡 구입 자금으로 은 10만 냥을 주도록 재가했다.

평소 위충현을 비롯한 환관들을 뇌물로 ‘구워 삶았던’ 모문룡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최고 지도자가 환관과 간신들에게 철저히 농락 당하고 있던 명의 앞날이

어떤 모습일지 예감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7-10-10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