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46) 自强論의 이상과 현실

Gijuzzang Dream 2008. 7. 20. 20:50

 

 

 

 

 

 

 

 (46) 自强論의 이상과 현실

 

우여곡절 끝에 후금과 화친함으로써 정묘호란은 끝났다.

조 정권은 어렵사리 종사(宗社)를 보전할 수 있었지만 남겨진 과제는 참으로 버거웠다.

먼저 후금군과 이렇다할 전투 한 번 변변히 치러보지 못하고 강화도로 피란했던 현실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반성론이 제기되었다.

병력을 뽑아 조련시키고, 조총을 비롯한 무기를 확보하며,

군량을 마련할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바야흐로 조정에서는 자강(自强)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높아가고 있었다.

 

 

 

“후금에 복수” 군비 강화론 급부상

 

1627년 4월 1일, 서울로 돌아오기 직전 인조는 신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내가 좋아서 오랑캐와 화친했겠는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화친한 것은 적의 기세를 늦춰 설욕하려는 것이니 그대들은 빨리 장수를 선발하여 병사들을 조련시켜라.”

화친한 것 때문에 척화파 신료들로부터 ‘항복한 임금’이라는 비아냥까지 들어야 했던 인조는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려면 군대를 길러 적과 싸우겠다는 결의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다.

실제 정묘호란 직후 인조는 과거와 달리 부쩍 상무(尙武)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인조는 ‘우리 장사들이 갑옷 착용을 기피한다.’고 비판하고

갑주(甲胄)를 제대로 마련하라고 유시했는가 하면,

1628년 10월에는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무사들을 시험하고 기예가 뛰어난 자들을 시상하기도 했다.

 

인조의 지시를 계기로 호란 직후부터

후금에 복수하기 위해 필요한 군사적 방책들이 활발히 논의되기 시작했다.

1627년 4월, 병조판서 이정구는 전국의 모든 주(州)·부(府)·군(郡)·현(縣)에 지휘관을 파견하여

정예롭고 건장한 장정들을 뽑으면 최소 5만∼6만의 병력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또 지방의 병사(兵使)나 수령들에게 능력 있는 무신을 수시로 천거토록 하여 지휘관을 양성하고,

서울에 도체부군문(都體府軍門)을 설치하여 지휘관들을 집결시켰다가

유사시 지방으로 파견하여 현지의 병력을 지휘토록 하자는 방책을 제시했다.

 

부제학 정경세(鄭經世)를 비롯한 홍문관 관원들은

무기와 군량을 확보하기 위한 대책을 제시했다. 기동력이 탁월한 후금군의 돌격을 막으려면

조총수(鳥銃手)의 확보가 절실하다고 지적하고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지에서 1만의 장정을 뽑아 조총을 교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습이 끝난 뒤에는 사격 시험을 치러 3발을 쏘아 2발 이상을 명중시킨 자를 선발하자고 했다.

또 성능이 뛰어난 일본산 조총을 확보하기 위해 사람을 왜관(倭館)이나 대마도로 보내

수입해 오자고 건의했다.

비변사 또한 각 도에 비축된 군기(軍器)들을 점검하여 병사들의 수와 일치하는지를 조사하고,

감사와 병사들을 채근하여 수시로 점검토록 하자고 강조했다.

 

정경세 등은 군량과 군수 확보를 위한 방책도 제시했다.

그는 먼저 군량 마련과 관련하여 인조와 비변사가 제시한 대책들을 비판했다.

그는, 몇몇 하급 관리와 서리의 숫자를 줄이고 왕실의 제수(祭需)와 어공(御供)을 감축하여

절약된 비용으로 군량에 보태자는 논의는 명분만 그럴 듯 할 뿐 아무런 효용이 없다고 일축했다. 

 

 

역대 임금의 필적을 모아놓은 열성어필(列聖御筆)에 실린

인조의 필적(사진 왼쪽 · 규장각 소장).

“천문산 끊긴 곳에 초강이 열리고/

동쪽을 흐르는 푸른 물은 북쪽에서 돌아드네/

두 언덕의 청산은 마주보고 솟았는데/

한 조각 외로운 배 태양 가로 나오네.”라는 시구가

인조의 고단한 심경을 말해 준다.

유효립 모반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영사공신도감의궤

(寧社功臣都監儀軌 · 사진 오른쪽).

 

군포 징수등 근본 대책 싸고 논란

 

정경세는 반정공신들이 거느리고 있는 군관(軍官)들을 아예 혁파하고,

왕자나 공주 등 궁가(宮家)에서 독점하고 있는 토지와 어장(漁場), 염전(鹽田) 등의 면세 특권을

없애고, 인조의 사금고나 마찬가지인 내수사(內需司)를 없애라고 요구했다.

정경세 등은 더 나아가 군사 재정 확보를 위해 근본적인 개혁안을 제시했다.

그것은 바로 양반들에게도 군포(軍布)를 거두자는 주장이었다.

조정의 대신들은 물론, 여염의 품관(品官)이나 사대부들에 이르기까지

직접 군역을 지지 않는 양반들에게서 포를 징수하면 1년에 수십만 필을 거둘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재정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법제화하는 것이 부담스러우면 군사 재정이 어느 정도 확보될 때까지

한시적으로라도 실시하자고 촉구했다.

정경세 등은 그러면서 ‘전하께서 애절한 마음으로 솔선수범하려는 자세를 보이면

외방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명령을 따르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호소했다.

참으로 어려운 결단이 요구되는 주문이었다.

인조는 물론, 궁가들과 반정공신, 그리고 일반 양반들까지 지배층 전체가

기득권을 포기할 각오가 있어야만 실현될 수 있는 개혁안이었다.  

인조는 궁가의 특권을 폐지하고 내수사를 없애라는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신료들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그가 내세운 명분은

‘조종(祖宗)의 옛 관행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정경세 등은 ‘군사와 군량이 없어 나라가 보존되지 못하면

궁가의 재산도 결국 적의 소유가 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인조는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광해군 때 궁가들이 점유했다가 인조반정 이후 국가로 소유권을 넘긴

토지와 어장을 본래의 궁가들에게 반환하는 것을 묵인하기도 했다.

전쟁 때문에 빚어진 어려운 현실을 타개하려면 개혁이 절실하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막상 무엇부터 손을 대고, 어떤 특권부터 혁파해야 할지 제대로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이

정묘호란 이후 조선의 현실이었다.

 

 

개혁 부진속 흔들리는 민심

 

1628년 8월, 광주(廣州)의 선비 이오(李晤)는 인조에게 상소를 올려 현실을 진단했다.

그는 당시를 ‘기강이 무너지고 탐풍(貪風)이 치성하여 염치가 사라지고,

민생이 도탄에 빠져 역모가 빈발하고, 오랑캐의 공갈 속에 인심이 흉흉한 상태’라고 표현했다.

그는 호패법(號牌法) 폐지 이후 도망자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장정들을 군적(軍籍)에 올리기 위해 친족과 이웃까지 닦달하면서 민심이 동요하고 있다고 했다.

 

나아가 ‘적이 물러간 지 1년이 지나자마자 비변사 신료들은 끽연과 우스갯소리나 일삼고,

지방의 지휘관들은 기생을 끼고 앉아 술타령을 벌이고 있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상황이 정돈되지 않고 개혁이 지지부진한 상황 속에서 역모 사건이 빈발했다.

 

이인거(李仁居)가 일으키려 했던 반란의 여파가 채 가시지도 않은 1628년 1월,

유효립(柳孝立) 등이 모반을 기도한 사건이 발각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제천에 유배되어 있던 북인 잔당 유효립 등은

“반정공신들이 포학하여 백성들이 고통에 빠져 있다.”는 등의 명분을 내걸고 거사를 도모했다.

그들은 광해군을 복위시켜 상왕(上王)으로 모시고

인성군(仁城君, 宣祖 7子)을 추대한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공초(供招) 과정에서는 ‘환관을 시켜 인조를 시해하려 했다.’는 진술까지 흘러나왔다.

결국 수사 과정에서 관련자 50여 명이 자복(自服) 후에 처형되는 참극이 빚어졌다.

 

1628년 3월에는 유학(幼學) 임지후(任之後)의 고변(告變)이 이어졌다.

“공신들을 모두 죽이고 광해군을 복위시킨 뒤 인성군에게 전위토록 한다.”는 내용으로

‘유효립 사건’과 거의 같은 슬로건을 내걸고 있었다.

관련자 심길원(沈吉元)은 심지어 “반정 당시에도 200명으로 성공했는데

지금 무슨 어려움이 있을쏘냐?”고 진술하여 인조정권을 경악케 했다.

 

정묘호란 이후 인조정권은 분명 기로에 섰다.

전란으로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고 집권 이후 줄곧 내세웠던 명분을 실천하려면

특단의 조처가 필요했다. 하지만 ‘군비를 강화하여 후금에 복수하자.’고 외치면서도

정작 그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는 근본 대책은 마련하기 어려웠다.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조가 내수사를 움켜쥐고 궁가들의 특권을 비호하는 한

양반들에게 군포를 거두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실제 양반들에게 군포를 거두자는 논의(戶布論)는

이후 200년이 훨씬 더 지난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가서야 실현된다.

정묘호란 이후, 자강의 방책을 둘러싼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2007-11-21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