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39) 정묘호란 이모저모

Gijuzzang Dream 2008. 7. 20. 20:48

 

 

 

 

 

 (39) 정묘호란 이모저모

 

‘인조실록’과 장유(張維)의 ‘계곡만필(谿谷漫筆)’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정묘호란 당시 강화도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불과 100리 밖까지 적의 대병이 압박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정 신료들은 대개 화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척화(斥和)파들도 큰소리를 쳤지만 속으로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론이 무서워 자기 입으로 화의를 말하지 못했는데

유독 최명길(崔鳴吉)만이 주저하지 않고 화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는 것이다.

 

 

 

화의 후에도 전투가 벌어지다

 

1627년 3월3일, 화의를 맺은 사실을 하늘에 고하고 그것을 준수겠다는 맹세 의식을 치름으로써 정묘호란은 일단 끝났다.

후금군은 철수 길에 올랐다.

어렵사리 전쟁을 끝내게 되었지만 인조와 신료들은 상당한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오랑캐’에게 세폐를 제공하고 화의를 맺은 것도 그랬지만 적이 깊숙이 들어올 때까지 변변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화의가 성립된 직후 비변사 신료들은 인조에게 ‘적이 철수할 때 이상한 행동을 하면 지방 지휘관들에게 기회를 보아 공격하라’고 지시할 것을 요청했다.

 

후금군은 예상대로 곱게 물러가지 않았다. 그들은 철수하는 길에 각지에서 약탈을 자행했다.

3월3일에 날아든 보고에 따르면 후금군의 약탈 때문에

평산, 서흥, 봉산, 해주, 문화 등 황해도의 여러 읍들이 텅 비었다고 했다.

 

3월9일 조정은 선전관을 후금군 진영에 보내 약탈을 중지하라고 촉구하는 한편,

강홍립에게도 서신을 보내 후금군 지휘관들을 설득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서북 지방의 조선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철수로 주변에 매복했다가 후금군을 습격하여 병사들을 살해하거나 마필(馬匹) 등을 빼앗는

소규모 유격전을 도처에서 벌였다.

평안도 순안에서는 삭주부사 이명길(李明吉), 평양판관 권이길(權 吉), 좌척후장 정지한(鄭之罕) 등이 이끄는 조선군과 후금군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운산에서는 우후(虞侯) 이직(李 )이 경상도 포수 등 3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후금군 1000명을 야습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후금군에 연행되고 있던 포로들이 탈출하고 가축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  

조선군의 공격이 계속되자

후금군 지휘부 역시 조선 조정에 서신을 보내 공격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조선 조정은 “귀국의 기마병들이 곳곳에서 노략질과 살육을 일삼기 때문에

촌민들이 자발적으로 복수하려고 일어선 것”이라고 응수했다.

 

3월17일 총사령관 아민이 다시 서신을 보내왔다.

그는 ‘서울을 점령하여 팔도를 다 차지할 수 있었고, 조공을 요구할 수도 있었는데

조선을 위해 자제했다.’며 공격을 멈추지 않으면

청천강 이북 지역을 반환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협박했다.

조선과 후금의 화의는 체결 직후부터 이렇게 삐걱거렸다.

하지만 평안도 지역의 전투는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그 중심에는 의병들이 있었다. 

 

 

 

충청도와 전라도의 의병

 

정묘호란 시기에도 의병들이 일어났다.

그런데 의병들이 일어난 지역과 활동의 성격이 임진왜란 당시와는 사뭇 달랐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조선 팔도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났지만

정묘호란 당시 의병 활동의 중심지는 주로 양호(兩湖) 지방과 평안도였다.

 

인조는 정묘호란이 일어난 직후인 1627년 1월19일,

정경세(鄭經世)와 장현광(張顯光)을 각각 경상좌도 호소사(號召使)와 경상우도 호소사로,

전 호군(護軍) 김장생(金長生)을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 임명하여

그들에게 의병을 모집하여 근왕하라고 지시했다.

김장생(1548∼1631)은 당시 여든 살의 고령으로 인조정권의 ‘정신적 지주’였다.

서인들 학통(學統)의 정점에 있던 이이(李珥)의 수제자인 데다

인조반정 성공 직후 반정 주체들에게 전체적인 시정의 방향을 제시한 인물이 김장생이었다.

 

그는 1월23일 향리 연산에 의병 본부를 설치하고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일으킬 것을 호소했다. 그의 호소에 호응하여

연산의 이복길(李復吉), 니성의 윤전(尹 ), 회덕의 송국택(宋國澤), 전주의 송흥주(宋興周),

보성의 안방준(安邦俊), 광주의 고종후(高從厚) 등이 병력을 이끌고 모여들었다.

김장생은 호남의 의병들을 전주로 모이도록 한 뒤,

자신도 호서의 의병들을 이끌고 전주로 내려갔다.

당시 전주는 분조(分朝)를 이끌고 남하했던 소현 세자 일행이 머물 곳이기 때문이었다.

김장생 휘하의 의병은 이후 소현 세자를 호위하는 역할을 맡았다.

후금군이 임진강을 건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분조의 신료들은

소현 세자를 모시고 영남으로 옮겨가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분조를 옮긴다는 소식에 의병 진영은 동요했다.

그러자 김장생은 분조 신료 가운데 최고위 인물인 이원익을 만나 이동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전주를 굳게 지키면서 장기전에 대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비록 후금군과 직접 전투를 치르지는 못했지만

김장생의 의병 활동은 인조정권의 체면을 살려 주는 것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경상도에서는 정묘호란 때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었다.

그것은 인조정권을 바라보는 지역 민심과 관련이 있었다.

경상우도 지역이 광해군대 집권세력의 정치적 근거지였던 것을 고려하면,

광해군 정권을 무너뜨린 인조정권을 위해 지역의 사대부들이 궐기하는 것은

정서상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실 김장생이 궐기를 호소했던 충청도 지역의 민심도 그다지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김장생의 회고에 따르면, 청주 등지에서는 익명서 등을 통해 사족들에게

“의병 활동에 호응하지 말라.”고 노골적으로 선동하는 움직임이 나타났을 정도였다. 

 

 

평안도의 의병

 

조정으로부터 종용을 받은 양호 지역 의병과는 달리

정묘호란 시기 평안도 의병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적의 침입로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데다,

조정이 사실상 임진강 이북의 방어를 포기해 버린 상황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정묘호란 시기 평안도 지역 의병 활동의 중심에 정봉수(鄭鳳壽·1585∼1668)가 있었다.

그는 철산(鐵山) 출신으로 본래 사족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용천 용골산성(龍骨山城) 전투에서의 빛나는 활약 때문이다.

후금군이 의주를 함락시킨 직후 용천부사였던 이희건(李希建)은

휘하 병력 500명과 용천 백성들을 용골산성으로 이주시켜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그가 후금군의 이동을 탐지하여 유격전을 꾀하려 나갔다가 전사되자

그의 부하 장사준(張士俊)은 스스로 머리를 깎고 후금군에게 투항해 버렸다.

후금군 지휘부는 그를 용천부사에 임명했고,

그는 용골산성을 나가 백성들을 선동하여 후금군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했다.

 

바로 그 무렵 정봉수가 용골산성으로 들어왔다. 그는 남은 백성들을 효유하는 한편

인근의 용천, 의주, 철산 출신 피난민들을 불러들여 약 4000명의 병력을 모았다.

1월16일 장사준이 후금군 수백 명을 이끌고 와서 항복하라고 협박했다.

정봉수는 성 밖에 미리 매복시켜 둔 의병들을 이끌고 그들을 공격하여 장사준을 참수했다.

장사준을 처단하여 사기가 오른 의병들은 곧이어 벌어진 전투에서도 후금군의 공격을 물리쳤다.

 

화의가 이루어진 뒤인 3월17일, 후금군의 대병력이 다시 공격해 왔다.

아침 7시경부터 10시간 이상에 걸쳐 모두 5차례의 큰 전투가 벌어졌다.

정봉수 휘하의 의병들은 활과 조총, 돌 등으로 일제히 공격하여 적 기병 수백 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물러났던 후금군은 4월13일에도 청북 지역의 병력을 끌어 모아 공격을 퍼부었으나

끝내 용골산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공격을 포기하고 의주로 철수했다.

용골산성 싸움은 정묘호란 시기 조선군이 가장 큰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조정으로부터 외면당한 채,

고립된 산성에서 처절한 사투 끝에 이뤄낸 승리라는 점에서 더욱 값진 것이었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7-10-03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