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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다시 읽기]

(44) 모문룡의 죽음과 파장, 1

Gijuzzang Dream 2008. 7. 20. 20:49

 

 

 

 

 

 

 

 (44) 모문룡의 죽음과 파장, 1

 

 

정묘호란이 벌어지는 동안 모문룡은 조선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했다.

보탬은커녕 그의 부하들이 끼친 작폐 때문에 청북 백성들의 고통은 극에 달했다.

그럼에도 모문룡은 명 조정에 보낸 보고서에서

‘자신의 활약 덕분에 후금군을 물리치고 조선이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옛날처럼 ‘해외 천자’, ‘밀수 왕초’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드러나기 시작하는 모문룡의 본질

 

모문룡이 가도로 들어가 동강진(東江鎭)을 건설했던 해가 1622년이므로 정묘호란이 끝날 무렵이면 햇수로 5년이 지난 셈이 된다.

모문룡은 그동안 ‘요동 수복’을 외치며 엄청난 군량과 군수 물자를 소모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다할 성과가 없었다는 점이다.

간혹 배를 타고 서해에서 압록강을 오르내리며 게릴라 활동을 벌이고, 봉황성(鳳凰城) 등지에 출몰하여 후금군과 소소한 규모의 전투를 벌였지만

그것은 ‘요동 수복’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오히려 후금을 자극하여 조선의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일 뿐이었다.

 

일찍부터 모문룡의 활동과 효용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1622년 12월, 명의 어사(御史) 하지령(夏之齡)은 황제에게 올린 상소에서

모문룡을 본토로 철수시키라고 건의했다. 모문룡이 고립된 병력을 이끌고

바다 바깥의 조선 땅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를 지원하는 것이 어렵다는 이유였다.

대학사(大學士) 섭향고(葉向高) 또한 당시 어려웠던 명의 재정 형편을 내세워

하지령의 의견에 동조했다.

하지만 당시 희종(熹宗) 황제는 모문룡을 적극 옹호하며 섭향고 등의 건의를 일축했다.  

 

 

원숭환은 산해관 바깥의 방어를 책임진 사령관으로,

최전선인 영원성에서 후금군과 대치했다.

사진은 모문룡에게 종말을 안겨준 원숭환이 지키던 영원성을 끼고

발달한 시가지의 모습.

 

희종 황제가 제위에 있는 동안은 모문룡의 ‘안전’에 별 문제가 없었다.

환관 위충현이 그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문룡 또한 위충현에게 결사적으로 매달려 그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피해 갔다.

그는 위충현을 지극 정성으로 섬겼다.

가도의 동강진에 위충현을 조각한 석상(石像)을 세웠을 정도였다.

명 조정에서 조선으로 사신이 올 때마다 그는 위기 의식을 느꼈다.

사신들이 조선을 왕래하려면 반드시 동강진에 들러야 하는데

행여 그들을 통해 자신의 본질이 탄로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1626년 윤 6월, 조선 방문을 마치고 귀국 길에 올랐던 한림원 편수(編修) 강왈광(姜曰廣)이

동강진에 들렀을 때,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내용은 흥미롭다.

모문룡은 만주 지도를 꺼내 놓고 강왈광에게 자신의 작전 계획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강왈광이 관심을 보이며 “이제 장군이 공을 세워야 할 때”라고 맞장구를 치자

모문룡은 본심을 드러냈다. ‘공을 세우고 싶지만 군량이 없다.’고 하소연했던 것이다.

강왈광도 물러서지 않았다. ‘군량이 부족하면 정예병만을 추려내서 싸우면 된다.’고 충고했다.

강왈광은 더 나아가 ‘군량이 없다는 이유로 조선에서 계속 뜯어내려 한다면

조선이 필시 딴 마음을 품을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이미 서울에 머물면서 조선의 피폐한 실상을 파악했기 때문에 했던 충고였다.

 

 

모문룡의 거취를 둘러싼 논란

 

모문룡을 철수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계속되었다.

1626년 5월, 총독 염명태(閻鳴泰)는

‘바다 바깥에 병력을 배치한 것은 적의 배후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인데 모문룡은 오히려

후금에 견제당하는 신세가 되었다.’며 그를 속히 여순(旅順)으로 철수시키라고 촉구했다.

원임 등래순무(登萊巡撫) 무지망(武之望)도 ‘모문룡은 후금군이 두려워 물러나려고만 하고

조선 군신들과 갈등을 일으켜 나라를 욕되게 하고 있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바야흐로 ‘모문룡 문제’가 정쟁의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순간이었다.

 

모문룡의 문제점을 들어 철수시키라는 요구가 이어졌음에도

명 조정이 그와 동강진을 계속 유지시키려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물론 희종 황제와 위충현이 모문룡을 비호했던 것이 중요했지만 반드시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명의 신료들 가운데는 모문룡이 지닌 효용 가치를 다른 측면에서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바로 조선을 견제하기 위한 거점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1626년 주문욱(周文旭)은 황제에게 올린 게첩(揭帖)에서

모문룡이 후금을 제대로 견제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진영을 여순으로 옮기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이 후금에게 시달리면서도 명을 배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모문룡이 철산에 머물면서 견제하기 때문’이라며 모문룡의 효용성을 높이 평가했다.

 

풍성후(豊城侯) 이승조(李承祚)도 비슷한 의견을 폈다.

그는 ‘모문룡의 진영을 옮기자마자 조선이 후금에 병탄될 것이고,

그러면 후금은 더욱 거리낌 없이 명을 공격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모문룡의 진을 옮기는 대신 감독관을 보내 군량을 감독하고 그에게 전진하도록 명령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모문룡에 대한 감사(監査)는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정묘호란 이후 모문룡이 보인 태도는 가관이었다.

거짓말로 가득 찬 보고서를 올렸음에도 환관들의 비호 덕분에 황제의 신임을 얻게 되자

그는 더 대담해졌다. 그는 호란 이후 후금 측과 사절을 왕래하면서 사실상 내통하고 있었다.

양측의 사절들이 창성(昌城)을 경유하여 심양을 왕래하는 것은

조선의 수령들에 의해서도 빈번히 목격되었다.

1627년 12월, 서울에 왔던 후금 사신 용골대(龍骨大)도 양측이 ‘화친’ 운운하면서

사절을 서로 왕래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모문룡은 그러면서도 정작 조선에 대해서는 딴 이야기를 했다.

그는 12월26일 조정에 도착한 서한에서 조선이 후금과 화친한 것을 질책한 뒤,

‘자신은 군사를 이끌고 후금을 일망타진할 것이니 조선도 두려워하지 말고 협력하라.’고

촉구했다. 조선으로서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언동이었다.

 

 

원숭환, 모문룡에게 쌍도로 오라고 명령

 

정묘호란 이후에도 ‘감시의 사각 지대’에 머물며 희희낙락했던 모문룡에게도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문룡에게 종말을 가져다 준 당사자는 다름 아닌 원숭환이었다.

원숭환은 모문룡을 극도로 혐오했다.

그가 가도에 ‘퍼질러 앉아’ 군량만 축내며 정작 후금군에 대한 공략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데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원숭환의 반감은,

모문룡을 싫어하는 조정 신료들의 ‘관념적인’ 반감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산해관 바깥의 방어를 책임지고 있는 사령관으로서,

최전선인 영원성에서 후금군과 대치하고 있는 무장으로서 그가 모문룡에게 느끼는 배신감은

훨씬 구체적이고 엄중한 것이었다.

 

백기종(柏起宗)의 ‘동강시말(東江始末)’에 따르면

원숭환은 일찍부터 모문룡을 ‘처리’하려고 했던 것 같다.

조정에 상소를 올릴 때마다 매번 ‘모문룡 문제’를 거론했다고 한다.

문관을 파견하여 모문룡을 견제하도록 건의하는가 하면

그 스스로도 가도에 대해 해금(海禁) 조치를 취하려 했다.

여순을 차단하여 모문룡의 진영으로 장정들이 유입되는 것을 막으려 하는 한편,

명으로 오는 조선 사신들이 가도에 들른 이후에는 반드시 영원성을 거치도록 했다.

모두 모문룡을 견제하려는 조처였다.

 

천계(天啓) 연간에는 모문룡을 제거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희종 황제, 그리고 그와 연결된 위충현의 비호 때문이었다.

1627년 7월, 희종이 세상을 떠났다. 희종의 죽음은 위충현의 종말을 의미했다.

모문룡에게도 불길한 소식이었다.

 

이윽고 1629년(崇禎 2) 5월22일, 원숭환은 가도로 전령을 보냈다.

전령은 요동 경략 원숭환의 명령서를 내밀었다.

원숭환은 모문룡에게 쌍도(雙島)로 오라고 명령했다.

쌍도는 여순에서 육로로 80리, 해로로 4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5월25일, 동북풍이 불자 모문룡은 쌍도를 향해 출발했다.

‘해외 천자’의 마지막 항해가 시작되고 있었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2007-11-07,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