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남한산성과 강화도 (76) 남한산성과 강화도 2008-06-18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남한산성은 천험(天險)의 요새였다. 성곽의 가장 높은 누대에서는 도성과 살곶이(箭串場)가 한눈에 들어왔다. 더욱이 인조가 들어갔던 무렵은 눈보라가 몰아치고 기온이 몹시 떨어져 성으로 오르는 길이 온..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08.07.20
(75) 병자호란이 일어나다, Ⅱ (75) 병자호란이 일어나다, Ⅱ 2008-06-11 28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1636년 12월10일 압록강을 건넜다. 이렇다 할 저항이 없었다. 그들은 곽산(郭山)과 정주(定州)에 사실상 무혈 입성했다. 홍타이지는 투항해 온 곽산과 정주의 군민들을 해치지 말라고 유시하는 한편, 그들..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08.07.20
(74) 병자호란이 시작되다, Ⅰ (74) 병자호란이 시작되다,Ⅰ 2008-06-04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까지 조정에서는 청과의 관계를 복원할지, 그것과 관련하여 사신을 보낼지를 놓고 격심한 논란이 빚어졌다. 척화파는 명분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절교가 불가피하다고 했고,..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08.07.20
(73) 최후의 주화 - 척화 논쟁 (73) 최후의 주화 - 척화 논쟁 2008-05-28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최명길의 주장은, 척화(斥和)하여 청과 싸우겠다는 결심을 굳혔으면 ‘공세적’으로 하자는 내용이었다. 말로만 ‘척화’를 외치며 미적거릴 경우, 청군의 철기(鐵騎)를 조선 영토 깊숙이 불러들이게 ..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08.07.20
(72) 절체절명의 시간들 (72) 절체절명의 시간들 2008-05-21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 인조는 나름대로 분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스스로 자책하는 내용을 담은 교서를 반포하여 실책을 사과하고, 내외 신료들에게 구국의 방책 마련을 위해 협조를 당부했다. 신료들..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08.07.20
(71) 높아지는 명분론, 어정쩡한 방어대책 (71) 높아지는 명분론, 어정쩡한 방어대책 홍타이지의 ‘조선 비난’ 국서에 조정신료 決戰論 들끓어 2008-05-14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몽골 버일러들을 이끌고 왔던 용골대 일행이 도주하고, 청과 관계를 끊겠다는 인조의 유시문마저 용골대 일행에게 빼앗긴 뒤 조..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08.07.20
(70) 홍타이지, 황제가 되다 (70) 홍타이지, 황제가 되다 2008-05-07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평소 여진족을 오랑캐라고 멸시했던 조선이 홍타이지를 황제로 추대하는 데 동참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후금의 힘이 이미 명마저 넘어선 상황에서 조선의 선택은 국가의 존망까지..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08.07.20
(69) 후금 관계 파탄의 시초, Ⅱ (69)후금 관계 파탄의 시초,Ⅱ 2008-04-30 24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용골대와 마부대 일행은 다목적 사절이었다. 새해가 밝았음을 축하하는 사절이자, 인열왕후의 죽음에 문상하기 위한 조문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조선에 온 가장 큰 목적은 홍타이지를 황제로 ..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08.07.20
(68) 후금관계 파탄의 시초 ,Ⅰ (68) 후금관계 파탄의 시초, Ⅰ 2008-04-23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야나가와 이켄’에서 비롯된 일본과의 긴장도 대충 해소되고 있던 1635년 12월, 인열왕후(仁烈王后·1594∼1635) 한씨가 세상을 떠났다. 출산으로 말미암은 후유증 때문이었다. 12월4일에 태어난 대군은..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08.07.20
(67) 유화적인 대일정책,Ⅱ (67) 유화적인 대일정책,Ⅱ 2008-04-16 28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야나가와 이켄(柳川一件)’에 대한 최종 판결은 1635년(인조 13) 3월15일에 내려졌다. 도쿠가와 쇼군은 소오 요시나리(宗義成)의 손을 들어 주었다. 하지만 요시나리에게 그것은 ‘찜찜한 승리’였다. 주..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08.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