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38) 정묘호란 일어나다, Ⅲ

Gijuzzang Dream 2008. 7. 20. 20:48

 

 

 

 

 (38) 정묘호란 일어나다, Ⅲ

조선 사신이 ‘재조지은을 배신할 수 없다’며 침략을 힐문했을 때 아민은 즉각 반박했다.

반박의 핵심은

‘조선이 명의 은혜만 기억할 뿐 자신들이 베푼 은혜에는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민은 과거 울라(烏拉)의 부잔타이(布占泰)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

자신들이 부잔타이를 설득해 침략을 중지시켰던 것,

심하 전역 때 포로로 잡은 조선 병사들을 송환해 준 것 등 ‘은혜’를 열거했다.

그러면서 조선이 모문룡을 편들고 군량을 제공했던 것,

누르하치가 죽었을 때 조문(弔問)하지 않은 것 등을 침략의 원인으로 제시했다.

   

 

조선 인조 때의 문신인 김상용 선생의 충의를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세운 강화도 김상용 순절비(殉節碑).

김상용은 청군이 강화도를 함락하자

강화산성 남문루 위에 화약을 쌓아놓고 불을 붙여 순국했다.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형제관계를 받아들이다

 

아민은 자신들이 군사를 일으킨 것이 정당하다고 강변하면서,

조선 사신들에게 계속 싸울 것인지 화약(和約)을 맺을 것인지 택일하라고 요구했다.

자신들은 조선의 토지와 백성에 아무런 욕심이 없으며

조선이 화의를 바란다면 국왕이 신임하는 사람을 속히 보내라고 닦달했다.

 

아민은 사신인 강숙 일행이 돌아가는 편에

자신의 사자 아본(阿本)과 동나미(董納密) 등을 동행시켰다.

그들이 떠난 뒤 전진을 멈추고 중화에서 1주일을 더 머물렀다.

휴식을 취하면서 조선의 답변을 기다리자는 심산이었다.

당시 후금군이 화의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월28일 아민이 보낸 사신 일행이 강화도 건너편의 풍덕(豊德) 부근에 당도했다.  

조선 조정은 ‘오랑캐 사신(胡差)’을 어느 길로 들이느냐를 놓고 논란을 벌였다. 

인조는, 조선인들이 평소 이용하지 않는 샛길로 호차를 데려와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호차가 전하는 국서를 직접 받지 않겠다고 했다.  

화약을 맺어 후금군을 돌아가게 하는 것은 급하기는 했지만

‘오랑캐’와 직접 대면하는 것은 도무지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강화도 고려궁터의

강화유수부 동헌 모습.

2월2일, 호차가 갑곶(甲串)을 통해 강화도로 들어왔다. 그가 소지한 국서에는 ‘명과의 관계를 끊되, 후금이 형이 되고 조선이 아우가 되는 형식으로 화약을 맺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인조는 신료들을 불러모았다.

‘명과의 관계를 끊는 것은 대의에 어긋나는 것이니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원칙이 다시 확인되었다. 인조는 형제의 명칭은 다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조선은 후금 측이 조선과 명 사이의 기존 관계를 용인해 준다면 화의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척화파들이 들고 일어났다.

2월3일, 태학생 윤명은(尹命殷) 등이 상소를 올렸다.

‘오랑캐 사신의 목을 베어 명나라로 보내고 의병을 일으켜 성을 등지고 결전을 벌이겠다’는

내용이었다. 예빈직장(禮賓直長) 강유(姜瑜)도 비슷한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인조와 반정공신들이 주축인 비변사는 뜨끔했다.

비변사는 ‘오랑캐와 화친하려는 것은 전쟁을 완화시켜 종사(宗社)를 보전하려는 부득이한 계책’

임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외방에서는 ‘조정이 대의를 망각하고 더러운 오랑캐와

우호를 맺으려 한다’는 유언비어가 떠돌고 있다고 우려했다.

인조는 여론을 의식하여 다시 교서를 반포했다.

‘종사의 위기를 늦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오랑캐와 화친하지만

명과 관계를 끊으라는 요구만은 절대로 따르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오랑캐와 화친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광해군 정권을 타도하고 들어선 인조정권은

광해군대의 ‘화친’을 반복하는 데에 여론의 따가운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강홍립과 유해의 화의 주선

 

2월5일 조정은 회답사 강인(姜絪)을 임시로 형조판서에 임명하여 적진으로 보냈다.

그가 가져간 국서에서 ‘명나라를 배신할 수 없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

또 의연히 천계(天啓) 연호를 사용했다. 후금 측은 반발했다.

그들은 ‘천계’의 ‘계(啓)’ 자 대신 ‘총(聰)’ 자를 쓰라고 종용했다.

자신들의 연호를 사용하라는 요구였다.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서울까지 진격하여 1년 동안 머물며 철수하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당시 후금군 지휘부는 계속 전진할지의 여부를 놓고 의견이 서로 달랐다.

총사령관 아민은 다른 장수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서울로 전진할 것을 고집했다.

귀순한 한인(漢人) 출신 장수 이영방(李永芳)이 반대하자

아민은 이영방에게 “내 어찌 너 같은 오랑캐 놈을 죽이지 못할까?”라고 면박을 주었다.

졸지에 ‘오랑캐’로 전락한 이영방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민의 동생 지르갈랑(濟爾哈朗)과 다른 장수들이 모두 나서서 설득한 뒤에야

아민은 전진하겠다는 고집을 꺾었다.

 

2월9일, 후금 측이 보낸 강홍립과 박난영(朴蘭英), 호차 유해(劉海)가 강화도로 들어왔다.

후금군 지휘부는, 천계 연호를 포기하지 않는 조선 측의 태도가 불만스러웠지만

화친을 깨려는 마음은 없었던 것이다.

2월10일, 인조는 강홍립과 박난영을 접견했다.

두 사람 모두 심하 전역에서 투항했던 이후 9년 만의 귀환이었다.

상당수 신료들은 강홍립의 목을 쳐야 한다고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인조는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강홍립은 인조에게 “모진 목숨 죽지 못하고 9년 만에 전하를 뵈니 드릴 말씀이 없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면서 인조에게 후금 측의 내부 사정을 상세하게 보고하고 강화를 맺는 것이 절실하다고 했다.

 

유해는 본래 한인(漢人)으로 후금으로 귀순한 인물이었다. 후금 측이 그를 사신으로 보낸 것은,

조선이 한인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상황을 염두에 둔 조처였다.

실제로 유해는 조선 조정으로부터 과거 명의 칙사들처럼 대접받고 싶어했다.

그는 ‘조선이 오로지 명분에만 집착하여 종사가 망하고 백성들이 죽어 가는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며 화친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촉구했다.

 

조정은 원창부령(原昌副令) 구(玖)를 원창군(原昌君)으로 삼아

그를 왕제(王弟)라고 칭하여 후금군 진영으로 보내기로 했다. 일종의 볼모였다.

2월15일에는 목면 1만 5000 필, 면주(綿紬) 200 필, 백저포(白苧布) 250 필 등을

후금군 진영에 보냈다. 일종의 세폐(歲幣)였다.

원창군을 파견하고 세폐를 보냄으로써 화친을 위한 기본 토대는 마련되었다.

 

 

인조, 맹세 의식에 태연

 

조선과 후금의 화의 과정에서 마지막 걸림돌은

화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하늘에 고하고 맹세(盟誓)하는 문제였다.

후금 측은 국왕과 후금 사신이 동참한 가운데 흰말(白馬)과 검은 소(黑牛)를 잡아

하늘에 제사지내는 의식을 거행하자고 요구했다.

조선 조정은 그것을 비루하게 여겨 거부하려 했다. 언관(言官)을 비롯한 상당수 신료들은

‘존엄한 천승지국(千乘之國)의 임금이 개돼지와 더불어 맹세하는 것은

죽어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격렬히 반대했다.

 

후금 측은 완강했다. 아민은, 맹세를 기피하는 것은

겉으로만 화친하려는 것으로 끝내 거부한다면 다시 싸워 승부를 가리자고 협박했다.

‘청실록’이나 ‘만문노당(滿文老)’을 보면

누르하치가 주변 부족들을 복속시킬 때마다 희생을 잡아 회맹(會盟)하는 장면이 나오거니와

만주족의 입장에서 맹세는 서로의 신의(信義)를 담보하는 의식이었다.

 

신료들과는 달리 인조는 맹세 의식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맹세는 대의와는 무관하다. 두 마리 가축을 아끼려다가 위망(危亡)을 초래할 수는 없다.”며

맹세와 관련된 책임은 자신이 모두 지겠다고 나섰다.

 

3월8일, 인조는 대청에 나아가 향을 피우고 하늘에 고하는 예를 몸소 거행했다.

조선 신료들과 호차들이 각각 동쪽과 서쪽 계단에 도열하여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인조가 예를 마치고 행궁으로 돌아가자

만주인들이 흰말과 검은 소를 잡아 피와 골을 그릇에 담았다.

조선 신료들과 호차들은 새로 만든 서단(誓壇)에 서서 맹세문을 낭독했다.

‘조선이 향후 후금을 적대시하여 나쁜 마음을 품으면 이와 같이 피와 골이 나오게 되고,

후금이 나쁜 마음을 품으면 역시 피와 골이 나와 하늘 아래서 죽게 될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정묘호란이 화친으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이괄의 난이 남긴 후유증을 비롯한 내정을 추스르기에도 여유가 없었던 조선과

잠시 서진(西進)을 멈추고 내실을 다지는 것이 절실했던 후금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7-09-22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