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37) 정묘호란 일어나다,Ⅱ

Gijuzzang Dream 2008. 7. 20. 20:48

 

 

 

 

 

 

 (37) 정묘호란 일어나다, Ⅱ

 

1627년 후금이 갑자기 정묘호란을 도발했던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복합적이었다.

조선과 후금, 명과 후금, 그리고 조선과 명(-모문룡 문제를 포함) 사이의 문제점들이

서로 얽혀 있었다. 특히 누르하치가 죽은 뒤 추대 형식으로 즉위했지만

한(汗)의 위치에 걸맞은 권력과 권위를 갖지 못했던 홍타이지는

전쟁을 통해 여러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려고 했다. 

 

 

조선과 무역 통한 식량 확보도 전쟁 도발 배경

 

홍타이지는 조선에 대해 강경론자였다.

그는 일찍부터 부친 누르하치에게 조선을 공격하라고 청했다.

특히 1619년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이 심하 전역에서 패하여 투항한 뒤에는

‘후금과의 화의에 미온적인 조선의 장졸들을 전부 살해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누르하치나 홍타이지의 형 다이샨(代善)의 입장은 달랐다.

두 사람은 ‘조선이 명의 배후에 있는 점을 고려하여 적대하지 말고 포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결국 조선을 삐딱하게 보고 있었던 홍타이지가 한으로 즉위한 것 자체가

조선에는 재앙이었던 셈이다.

홍타이지는 조선 정벌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즉위 당시 홍타이지의 권력은 미약했다.

그는 명목상으로는 한이었지만 실제로는 그의 형제들과 연정(聯政)을 펼 수밖에 없었다.

사촌형 아민은 홍타이지 추대에 반발하여 자신의 기(旗)를 이끌고 독립하려고 시도했다.

 

 

이 같은 배경을 염두에 두면 홍타이지가

조선을 치러 가는 원정군 사령관으로 아민을 임명한 것은 시사적이다.

아민에게 원정의 모든 책임을 지움으로써 그의 충성심을 시험할 수 있고,

결과가 좋지 않을 경우에는 정치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도 있었다.

아민은 실제 원정 도중 홍타이지의 방침과는 배치되는 독단적인 행보를 보임으로써

홍타이지의 ‘기대’에 부응한 바 있다.

 

후금이 전쟁을 도발했던 원인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경제적 문제였다.

홍타이지의 즉위 직후 만주 지역에는 심각한 기근이 닥쳤다.

‘청태종실록’에는 ‘굶어죽는 자가 속출하여 사람이 서로를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고

돈이 있어도 식량을 구할 수 없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점령 지역은 늘었지만 농작에는 아직 서툴렀던 후금은 식량을 자급하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에는 명나라 상인들과 곡물 무역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명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당시 상황에서는 그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심각한 기근 때문에 위기에 처한 후금에 조선의 존재는 특별했다.

자신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유일한 나라였다.

후금은 정묘호란을 일으켜 조선으로부터 식량을 무역하겠다는 약속을 얻어내고자 했다.

 

후금의 전쟁 도발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핵심은 역시 ‘모문룡 문제’였다.

모문룡이 가도에 머무는 한, 후금의 서진(西進) 시도는 언제나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모문룡의 존재 때문에 한인들이 계속 후금을 탈출하고 있었다.

모문룡이 군사적으로는 미약했지만 후금에는 ‘목에 걸린 가시’였다. 그 ‘가시’를 제거하여

‘후고(後顧)의 여지’를 없애는 것이야말로 전쟁을 일으킨 결정적 배경이었다.

 

 

아민, 홍타이지에 증원군 긴급 요청

 

조선 조정은 황해도 이북의 방어선이 붕괴되자 전열을 다시 정비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도원수 장만과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에게

평안도 지역의 패잔병과 함경도, 강원도 등지의 병력을 모아 임진강을 방어토록 했다.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에게는 남한산성을 본거지로 삼아 하삼도 군사를 통괄 지휘하여

한강을 방어토록 했다. 그리고 통제사 구인후(具仁)가 거느리는 수군 병력으로써

적의 강화도 상륙을 저지하도록 조처했다.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역시 인조가 머물고 있는 강화도를 수비하는 문제였다.

 

전쟁 초반의 전체적인 전황(戰況)은

조선이 일방적으로 몰리는 상황이었지만 후금군은 의외로 신중했다.

후금군은 의주성을 함락시킨 직후 총사령관 아민의 명의로 평안감사 윤훤에게 서신을 보내

화의(和議)를 제의했다. 윤훤은 후금 측에, 조정에 품의(稟議)한 후 회답을 주겠다고 했고

1월18일 조정은 윤훤의 장계를 통해 후금이 화의를 제의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승승장구하던 시점에 후금이 갑자기 화의를 제의한 까닭은 무엇일까?

먼저 당시 후금군의 병력이 충분하지 않았던 점이다.

후금은 조선 침략에 약 3만명의 병력을 동원했는데

아민은 그 숫자로는 서울까지 진격하는 것이 어렵다고 보았다.

그는 청천강 이북을 점령했던 직후,

이미 홍타이지에게 사람을 보내 증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

3만명의 병력으로는 한편으로 전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점령 지역을 방어하고 그곳의 조선 관민들을 통제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까닭은 원숭환의 위협이었다.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이 조선으로 쳐들어가면서 가장 우려했던 것은

명군이 자신들의 배후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미 살폈듯이 1626년 누르하치가 영원성을 공격했다가 실패한 이후,

후금군의 서진은 좌절되었고 오히려 영원성에 주둔하는 원숭환으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실제로 정묘호란 당시 명의 병부는,

후금군이 조선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간 틈을 이용하여 후금 지역을 공격하자고 건의한 바 있다.

산해관과 영원의 병마와 모문룡의 병력을 동원하여 배후를 협공함으로써

조선을 원조하자는 내용이었다.

 

 

답장 내용 놓고 설전

 

후금이 화의를 제의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조선 조정은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양사(兩司) 관원들은

‘평안감사 윤훤이 엄한 말로 오랑캐의 서신을 물리치지 못하고 답장을 주겠다.’고 응답한 것을

비난하고 인조에게 신중히 대처하라고 촉구했다.

이윽고 후금 측은 강홍립의 종자인 언이(彦伊) 등을 다시 윤훤에게 보내

‘화의를 논의하기 위해 사람을 서울로 보내겠다.’고 협박했다.

 

윤훤의 장계를 통해 두번째 화의 제의를 받자 인조는 비변사 신료들을 불러모았다.

인조는 “서신을 받자마자 화친을 허락하면 우리가 겁을 내서 그런다고 여길 것”이라고 우려했다.

신흠(申欽)은 ‘명나라도 그들과 화친하려는 판에 우리만 화친을 피할 수 없다.’고 했고,

이귀는 ‘적이 평양으로 진격해 오면 사태 수습이 불가하다.’며

답서를 꾸며 강홍립의 아들 강숙 편에 부치자고 했다.

 

최명길의 의견은 달랐다.

그는 먼저 서신을 보낸 주체가 후금의 한 홍타이지가 아니라 사령관 아민임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도체찰사 장만의 명의로 답하되, 무고하게 침략하여 군민들을 도륙한 허물을 따지고

‘위협적인 맹약은 죽어도 따를 수 없으며 침략 사실을 명에 알리겠다.’는 내용을 집어넣자고 했다.

명을 이용하여 후금군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담긴 의견이었다.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후금 측의 화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지만

반대론도 만만치 않았다. 대사헌 박동선(朴東善), 사간 윤황(尹煌) 등 삼사 신료들은

인조가 강화도로 떠나기 전부터 반정공신들을 맹렬히 비난했다.

윤황 등은 ‘전하께서 총애하는 김류 이귀 이서 신경진 김자점 등 반정공신들은

해도(海島)로 들어가거나 산성으로 올라가고,

혹은 호위(扈衛)를 칭하거나 검찰(檢察) 직책을 맡아 안전하고 편안한 자리를 차지하고

오로지 힘없고 배경이 없는 장만만을 맨손으로 적진에 보냈다.’고 성토했다.  

그들은, 맨 처음 도성을 떠나자고 주장한 자의 목을 베고

인조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친정(親征)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여하튼 강숙 등은 조정의 답서를 가지고 1월27일 후금군 진영에 도착했다.

후금군은 이미 중화(中和)까지 남하해 있었다. 답서의 핵심은 이러했다.

‘조선은 명을 200년 이상 섬겨왔고 임진왜란 때 명에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입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민은 조선의 답서 내용에 반발했다.

그는 ‘조선은 명의 은혜만 강조하는데 과거 후금도 조선에 커다란 은혜를 베푼 적이 있다.’고

맞받았다. 바야흐로 ‘은혜’를 둘러싼 설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교수

- 2007-09-19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