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정묘호란 일어나다,Ⅰ (36) 정묘호란 일어나다,Ⅰ 후금군 파죽지세… 인조 강화로 피난갈 궁리만 2007-09-12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홍타이지는 1627년 1월8일 대패륵(大貝勒) 아민(阿敏)에게 조선을 정벌하라고 명령했다. 홍타이지는 “조선이 오랫동안 후금에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이..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08.07.20
(35) 명과 후금의 정세, Ⅲ (35) 명과 후금의 정세, Ⅲ 2007-09-05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1626년(인조4, 천계6) 1월23일 누르하치는 영원성으로 들이닥쳤다. 그가 이끄는 병력은 20만이라는 설도 있고, 13만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누르하치의 대병력이 나타나자 영원성의 전면에 머물던 명의 관민..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08.07.20
(34) 명과 후금의 정세,Ⅱ (34) 명과 후금의 정세,Ⅱ 2007-08-29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천계 연간 격렬한 당쟁이 빚어지고 결국 위충현을 비롯한 엄당이 국정을 장악하게 되자 그 불똥은 곧바로 산해관 바깥으로 튀었다. 요동, 요서(遼西)의 방어를 책임진 최고위 지휘관들 또한 당쟁의 여파에..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08.07.20
(33) 명과 후금의 정세,Ⅰ (33) 명과 후금의 정세,Ⅰ 2007-08-22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조선이 모문룡의 작폐에 시달리고 있던 정묘호란 무렵 대륙의 정세는 어떠했는가? 1621년 누르하치의 후금군은 요동 전체를 장악했다. 후금은 요동 벌의 중심인 심양(瀋陽)으로 천도하여 산해관까지 넘볼 ..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08.07.20
(32) 모문룡의 작폐, Ⅱ (32) 모문룡의 작폐, Ⅱ 인조반정 이후 조선 조정이 모문룡을 ‘은인’으로 여겨 송덕비까지 세우게 되자 모문룡은 기고만장했다. 그는 조선에 군량을 비롯하여 전마(戰馬), 조총, 병선 등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더 큰 문제는 그 휘하의 장졸(모병: 毛兵)과 요민들이 끼치는 민폐..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08.07.20
(31) 모문룡의 작폐,Ⅰ (31) 모문룡의 작폐,Ⅰ 2007-08-08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인조반정 성공 이후 조선이 표방했던 대외정책의 성격은 ‘친명배금(親明排金)’이었다. 그런데 ‘친명’은 분명 실천했지만 ‘배금’은 쉽사리 실천할 수 없었다. ‘배금’을 실천하려 할 경우 필연적으로 ..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08.07.20
(30) 이괄(李适)의 난(亂)이 끼친 영향, Ⅳ (30) 이괄(李适)의 난(亂)이 끼친 영향, Ⅳ 2007-08-01 24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이괄의 난을 계기로 인조정권의 취약점과 한계는 여지없이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인조정권이 구상하고 있던 계획들을 흐트러뜨렸다. 인조반정 성공 직후 ‘후금을 정벌하여 명의 은혜에 ..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08.07.20
(29)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다, Ⅲ (29)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다, Ⅲ 2007-07-25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1624년 2월10일 이괄이 서울로 입성한 직후, 도원수 장만은 관군을 이끌고 서울을 향해 달렸다. 장만은 초조했다. 반란군에게 도성을 내주고 국왕으로 하여금 파천 길에 오르게 만든 일차적 책..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08.07.20
(28) 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다, Ⅱ (28) 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다, Ⅱ 2007-07-18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인조반정을 일으키던 당일, 대장 김류는 미적거렸다. 성공 여부를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2경에 모이기로 했던 약속을 어겼고, 그가 나타나지 않자 반정군 진영은 동요했다. 바로 ..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08.07.20
(27) 이괄의 난이 일어나다,Ⅰ (27) 이괄의 난이 일어나다,Ⅰ 2007-07-11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반정 직후 인조정권이 명에 대해 충성을 다짐했던 것과 맞물려 후금에 대한 적개심도 높아져 갔다. 인조와 신료들은 후금과 전쟁이 일어나는 상황을 가상하고 작전과 승패 향방을 자주 논의하곤 했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08.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