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오딧세이] 62. 기억하자! '간도협약 100주년' [간도오딧세이] 기억하자 ! '간도협약 100주년' 2006년 9.4일 간도의 날 선포 1주년 기념식이 열리고 있다. 사람들에게는 기억하고 싶은 것이 있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 기억하고 싶은 것은 기억하고, 기억하기 싫은 것은 잊어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기억하기 싫더라도 꼭 기억해야만 하는 것.. [간도 오딧세이] 2009.06.26
[간도 오딧세이] 61. 북간도는 알고 있다 [간도오딧세이] 북간도는 알고 있다 <북간도>의 작가인 고 안수길. 소설 <북간도>의 저자 안수길은 1911년생이다.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태어나 1922년 간도로 이주했다. 간도중앙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와세대 대학을 중퇴했고, 1936년 다시 만주로 돌아가 간도일보의 기자로 일했다. 1945년 광복 .. [간도 오딧세이] 2009.06.26
[간도 오딧세이] 60. <여지고(輿地考)>에 언급한 영토인식의 중요성 [간도오딧세이] '여지고(輿地考)'에 언급한 영토인식 중요성 <여지고>에 실린 ‘북간도강계’ 내용. 북간도는 바로 두만강 북쪽인데 무산 · 회령 · 종성 · 온성의 맞은 편 땅이다. …우리 세종조에 김종서가 야인을 소탕하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육진을 개척하였으나 다만 북쪽 극변(極邊)은 거.. [간도 오딧세이] 2009.06.26
[간도 오딧세이] 59. 1세대 간도연구가 김득황박사, 아쉬운 은퇴 [간도오딧세이] 1세대 간도연구가 김득황박사, 아쉬운 은퇴 김득황 박사 만주어를 한국어로 풀이한 만한(滿韓)사전이 있다. 만주어는 중국에서도 거의 사라졌다. 그 만주어를 알기 쉽게 사전을 만든 이가 있다. 그는 또 만주어를 공부할 수 있도록 <만주족의 언어>라는 책을 펴냈다. 1995년에 두 번, .. [간도 오딧세이] 2009.05.31
[간도 오딧세이] 58. 중국의 영토 논리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간도 오딧세이] 중국의 영토논리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연변대학의 한 교수가 몇 년 전 한국의 간도연구가에 이메일을 보냈다. 자신의 제자가 간도와 관련된 영토 문제를 다루는 박사논문을 쓰려고 하니 한국 책을 보내달라는 부탁이었다. 백두산 정계와 관련한 우리나라의 기록은 중국의 기록을 훨.. [간도 오딧세이] 2009.05.31
[간도 오딧세이] 57. 1909년을 기억하다 [간도오딧세이] 1909년을 기억하다 1909년 10월 하얼빈역에서 내리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 일행. 딱 100년 전인 1909년 우리나라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외교권조차 박탈당해 일본의 속국이 되다시피 한 지경에 이르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고, 다음해인 1910년 일본에 .. [간도 오딧세이] 2009.05.31
[간도 오딧세이] 56. 청의 심기를 살핀 국경 획정 [간도오딧세이] 청의 심기를 살핀 국경 획정 1636년 병자호란에 패배한 후 청의 요청으로 세운 삼전도비. 조선은 청에 어떤 나라였을까? 청의 역사책 <청사고>의 1876년(고종 13년)의 기록에는 일본의 외교 관리가 북경에 가서 청의 관리와 나눈 대화가 나온다. 일본의 외교 관리는 조선과 통상 조약을.. [간도 오딧세이] 2009.05.22
[간도의 한국인] 간도의 첫 한인공동체 명동촌 [간도의 한국인] 김재홍씨 수집자료 단독 공개 ‘독립운동 씨앗’ 뿌리던 산천…그 숨결 아직도 들리는 듯 겨레의 꿈 키우던 광야…그때처럼 윤동주의 별도 뜬다네 명동촌 설립자인 김약연 선생의 증손자 김재홍씨 “지금도 용정의 규암(김약연) 선생 댁 마당에서 뛰어놀던 기억이 선하다.” 북한학 .. [간도 오딧세이] 2009.05.17
[간도 오딧세이] 55. 북방 경계 개척 주장 펼친 남구만 [간도오딧세이] 북방 경계 개척 주장 펼친, 남구만사형 청구도 본조팔도 성경합도. 성경이 심양이며, 오라성과 영고탑이 보인다. 현대지도로는 오랄성과 영고탑은 두만강 · 압록강과 거리가 더 멀다. <규장각 소장> 공포는 엉뚱한 생각을 낳는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혼쭐이 난 조선은 .. [간도 오딧세이] 2009.05.08
[간도 오딧세이] 54. 청나라 강희제의 백두산 야욕 [간도오딧세이] 청나라 강희제의 백두산 야욕 백두산 정계비 부근. <초석 제공> 1677년 강희제는 내대신 우무누에게 명하여 백두산(중국명 장백산)을 답사한 후 제사를 드리고 돌아오라고 명했다. 8살의 나이에 황제 자리에 오른 강희제가 재위 16년째를 맞이하던 해였다. 이때 나이 24세였다. 청의 4.. [간도 오딧세이] 2009.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