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간도 오딧세이]

[간도 오딧세이] 57. 1909년을 기억하다

Gijuzzang Dream 2009. 5. 31. 01:43

 

 

 

 

[간도오딧세이] 1909년을 기억하다 

 

 

 

 

 

 

 

 

 

 

1909년 10월 하얼빈역에서 내리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 일행.

 

딱 100년 전인 1909년 우리나라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외교권조차 박탈당해 일본의 속국이 되다시피 한 지경에 이르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고, 다음해인 1910년 일본에 합병되었다.
바로 전해인 1909년을 기억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건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것이다.
 
 
당시 순종실록에는 이 사건이 이렇게 나타나 있다.
 
<순종 2년 10월 26일 기사>.

황태자가 직접 전보로 아뢰기를,
“이토(伊藤) 태사(太師)가 오늘 오전 9시에 하얼빈역에 도착하여
우리나라 사람의 흉악한 손에 의하여 피살되었으니 듣기에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세상을 떠났다는 보도는 아직 하지 않고 있는데 영구가 돌아온 뒤에 공포한다고 합니다.
일본 황실에서 시종무관과 시의(侍醫)를 파견하기 때문에 신도 김응선을 파견하려고 합니다.
황실에서 일본 황실에 직접 전보를 보내어 위문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범인 안중근은 진남포 사람이다.
뒤에 융희 4년 2월 14일에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하여 같은 해 3월 26일에 집행하였다.)

일본 천황 폐하에게 직접 전보하기를,
“바로 오늘 이토 공작이 하얼빈에서 흉악한 역도에게 화를 당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놀랍고 통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에 삼가 똑같은 마음으로 지극한 뜻을 표시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또 이토 공작과 공작 부인에게도 직접 전보를 보냈다.

안중근은 ‘흉악한 역도’로 묘사돼 있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이 실록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이 내용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임금이 죽은 후에 실록을 저술하는데, 고종과 순종의 사후는 일제가 강점하던 시기였다.
때문에 일제의 입맛에 맞게 실록이 저술됐다.

안중근 의사가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를 암살하기 바로 한 달하고도 22일전
북경에서는 간도협약이 체결됐다. 1909년 9월 4일의 일이다.
 
 

간도에 관한 일청협약 체결

 

 

순종실록(순종 2년 9월 4일 기사)에 이 사실이 기록돼 있다.


간도(間島)에 관하여 일청 협약이 체결되었다.
<간도에 관한 협약>
대일본국(大日本國) 정부와 대청국(大淸國) 정부는 선린(善隣) 관계와 상호우의에 비추어
도문강(圖們江)이 청국과 한국 양국의 국경으로 된 것을 서로 확인하고
아울러 타협의 정신으로, 일체 처리법을 상정(商定)하여
청국과 한국의 변방 백성들에게 영원히 치안의 행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의 조관(條款)을 정립(訂立)한다.

제1조
일 청 양국 정부는 도문강을 청국과 한국의 국경으로 하고
강 원천지에 있는 정계비(定界碑)를 기점으로 하여 석을수(石乙水)를 두 나라의 경계로 함을 성명한다.

 
순종실록에는 일청조약이 체결됐다는 단 한 줄의 내용과 함께 조약이 나열돼 있다.
이 조약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한국과 청의 국경을 왜 일본과 청이 정했는지는 물론 언급될 리 없다.

남 탓할 필요 없다.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대한민국 정부는 간도협약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밝힌 적이 없다.
간도협약은 지금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을 이루는 밑바탕이 됐다.
지금도 간도협약은 유효한 협약으로 사실상 인정되고 있는 셈이다.
- 윤호우 기자
hou@kyunghyang.com
- 2009 06/16   위클리경향 82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