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오딧세이] 북간도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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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북간도>의 저자 안수길은 1911년생이다.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태어나 1922년 간도로 이주했다.
간도중앙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와세대 대학을 중퇴했고,
1936년 다시 만주로 돌아가 간도일보의 기자로 일했다.
1945년 광복 때까지 머물렀고, 광복 후 서울에 와서 경향신문 기자로 활동했다.
1959년 <사상계>를 통해 <북간도>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이한복-이장손-이창윤-이정수로 이어지는 4대가 간도를 무대로 살아가는 것을 그렸다. 시대적으로 보았을 때 19세기 후반의 간도 이주에서 시작해 광복으로 끝이 난다.
안수길 자신이 젊은 시절 간도에서 살았던 만큼 소설 속 간도 이주민의 생활사는 생생하게 그려졌다. 소설에서 1909년의 간도협약은
조선사람의 입을 빌려 ‘분개했다’라고 표현돼 있다.
물론 1911생인 안수길이 간도협약 당시를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20년 가까이 간도에 머문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간도협약이 간도 이주민들에게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는 간도에서 10여 년을 기자로 활동한 만큼 간도의 역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타국에 버려진 조선인들의 심정 소설에는 두 번에 걸쳐 간도협약을 묘사하고 있다.
“간도는 조선의 영토다.” 통감부 파출소 소장은 성명까지 했고 일본 정부는 그 성명을 뒷받침해 단호하게 청국에 대해 행동하려고 했다.
간도 조선 사람의 처지를 곤란케 만들었던 통감부 파출소였건만
이때 일본이 그 주장을 굽히지 않았더라면 간도는 조선 땅이 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안중에는 조선의 영토 귀속 문제가 큰 것이 아니었다.
(중략)
그리고 마침내 9월 4일(1909년) 간도에 관한 일곱 항으로 된 <간도협약>이 체결되었다.
(중략)
이렇게 해 일본은 두만강 이북의 간도, 그 영토와 조선 주민을 송두리째 청국에 넘겨주고만 것이었다.
원한의 통감부 파출소는 물러갔다. 그러나 그것은 원한을 걷어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큰 원한의 씨를 심어놓고 간 것이다. 그 뒤엔 무엇이 올 것인가? 이젠 여기가 우리 땅이라고 영 입밖에 낼 수 없게 되었다.
북간도의 조선 농민들은 완전히 남의 나라에 온 ‘이미그런트’ 유랑의 이주민이 되고 말았다.
간도협약으로 조선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 땅에서 졸지에 남의 나라 땅에 살게 된, 그래서 정착민이 아닌 유랑의 이주민이 됐다.
간도협약 당사자는 일본과 청이었다. 대한제국은 어디에도 끼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그 협약에서 조선 사람들의 권리는 찾아볼 수 없다.
남(청)의 나라 땅에서, 남(청)의 법률로 재판받아야 하며,
남(일본) 영사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수십만 명에 이르는 조선 사람이 타국에 내팽개쳐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살아남아야 했다. 땅을 잃어 버린 결과다.
<북간도>에서는 이런 심정이 절절하게 표현돼 있다.
1909년 9월 4일에 북경에서 청일 두 대표가 조인한 간도협약은 나흘 뒤인 9월 8일 그 전문이 공포되었다. 그 조항에 따라 두 달 안에 통감부 파출소를 철수하고 영사과를 설치하도록 되어 있었다.
(중략)
정유7조약에 따른 군대 해산의 뒤를 잇는 이번 처사로 비탄에 잠긴 것은
현지의 조선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국내의 뜻있는 사람들도 의분에 몸 둘 곳을 몰랐다.
그나마도 지금까지 조선 정부가 간도 귀속 문제로 싸워 내려온 내력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더욱 분개했다.
“목이 달아나도 국토는 촌토도 양보할 수 없다.” 일찍이 감계사였던 안변부사 이중하가 청국 대표에게 던졌던 말을 되생각해 내면서 한숨을 쉬는 사람도 있었다.
작가 안수길은 1977년 작고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북간도>는 간도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남겨놓았다.
이 소설은 아픔을 건드리기 때문에 더욱 더 감동적이다.
- 윤호우 기자 hou@kyunghyang.com
- 2009 07/14 위클리경향 8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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