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68) 후금관계 파탄의 시초 ,Ⅰ

Gijuzzang Dream 2008. 7. 20. 20:56

 

 

 

 

 (68) 후금관계 파탄의 시초, Ⅰ

 

‘야나가와 이켄’에서 비롯된 일본과의 긴장도 대충 해소되고 있던 1635년 12월,

인열왕후(仁烈王后·1594∼1635) 한씨가 세상을 떠났다.

출산으로 말미암은 후유증 때문이었다.

12월4일에 태어난 대군은 곧 사망했고, 한씨 또한 닷새 뒤에 숨을 거두었다.

42세, 아까운 나이의 죽음은 애처로웠지만

인열왕후는 정확히 1년 뒤 조선으로 밀어닥쳤던 전란의 소용돌이는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후금이 그녀의 상에 조문사(弔問使)를 보내 문상(問喪)하는 과정에서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끝내 파탄을 향해 치닫게 된다.

 

 

 

 

이상한 조문 사절단

 

국상(國喪) 때문에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1636년(인조 14), 연초부터 흉흉한 소식들이 보고되었다.

1월, 대구에서는 황새들이 서로 패를 갈라 진을 치고 싸웠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2월 초에는 안산에서 황당한 보고가 올라왔다.

바다 속에 있던 바위 세 개가 저절로 움직여 육지로 옮겨왔다는 내용이었다. 뿐만 아니라 바위들이 지나온 곳에 거의 40여 보(步)나 되는 길까지 만들어졌다고 했다.

 

2월8일과 10일, 대사헌 윤황(尹煌)은 연달아 인조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나라가 망하려면 요상한 변고(요변 · 妖變)가 있기 마련인데, 지금의 나라 상황은 망하기 직전’이라며 인조에게 자세를 낮추고 반성하라고 촉구했다.

 

‘요변’의 경고가 맞아들어가는 것이었을까?

2월16일, 후금 사신 용골대와 마부대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들어왔다. 조선의 국상에 조문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런데 과거와 달리 사절단의 구성이 이상했다.

후금의 여진족 말고도 서달(西 )이라 불리던 몽골인 지휘관들이 77인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의아해하는 의주부윤 이준(李浚)에게 용골대는 까닭을 설명했다.

‘우리나라가 이미 대원(大元)을 획득했고 또 옥새를 차지했다.

몽골의 여러 왕자들이 우리 한(汗)에게 대호(大號)를 올리기를 원하고 있으므로

조선과 의논하기 위해 그들을 데리고 온 것이다.’

대원을 획득했다는 것은 후금이 차하르(察哈爾) 몽골을 정복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고,

옥새는 바로 차하르 몽골의 마지막 수장이었던 릭단 한(林丹汗)의 옥새를 말하는 것이다.

대호를 올린다는 것은 홍타이지가 황제로 즉위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준의 보고를 들은 조정 신료들은 경악했다.

사간 조경(趙絅)은 몽골인들을 국문(國門)으로 들이지 말라고 촉구했다.

장령 홍익한(洪翼漢)은 상소를 통해 인조를 통박했다.

그는 ‘태어나서 지금껏 대명천자(大明天子)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인데,

정묘년에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여 명령을 따르는 바람에

지금 저들이 우리를 신첩(臣妾)으로 삼으려고 덤비고 있다.’며 비난했다.

그는 더 나아가 용골대 일행을 처단하여 그 목을 함에 담아 명나라로 보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홍문관 신료들도 서달을, 명을 배신하고 후금에 붙은 반역자라고 규정하고

그들을 속히 의주의 감옥에 가둬 상경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몽골을 복속시킨 후금의 자신감

 

후금이 용골대 일행을 조선에 조문사로 보내면서 몽골인들까지 대동시킨 것은 무슨 까닭일까?

거기에는 나름대로 사연이 있었다.

1634년 6월, 홍타이지는 대군을 이끌고 명을 공략하는 원정에 나섰다. 당시 공격 목표는 주로 선부(宣府)와 대동(大同) 지역이었다. 오늘날 허베이성(河北省)에 속하는 선부와, 산시성(山西省)에 속하는 대동은 모두 몽골로부터 북경을 방어하기 위한 전략 요충이자 중진(重鎭)이었다.

 

홍타이지는 당시 명을 공략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선부와 대동 주변의 차하르 몽골 부락들을 초무(招撫)했다.

후금이 일찍이 1632년 차하르 몽골을 공격했을 때, 릭단 한이 황하를 건너 서쪽으로 도주하면서 차하르 지역에 대한 완전한 정복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634년 5월, 원정 출발에 앞서 홍타이지는 명 변경에서 유목하고 있던 차하르 몽골 부락들에 유시문(諭示文)을 보내 자신에게 귀순하라고 촉구했다.

 

원정은 성공적이었다. 명군은 후금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들이 몇몇 성을 방어하는 데 급급했던 사이 후금군은 주변 지역을 자유자재로 유린, 약탈했다.

당시 홍타이지의 원정에는 후금에 우호적인 코르친(科爾沁), 나이만(柰曼) 몽골 등이 동참했다.

선부와 대동 주변 차하르 몽골의 잔당들도 원정 기간 동안 속속 투항해 왔다.

더욱이 1634년 윤 8월, 도주했던 릭단 한이 사망했고

이후 그 아들들과 대신들이 나머지 국인(國人)들을 이끌고 홍타이지에게 투항해 왔다.

홍타이지는 원정을 통해 사실상 몽골을 평정했다.

 

1634년 12월, 원정군이 개선했던 직후

홍타이지는 태조 누르하치의 사당을 찾아 자신의 승첩 사실을 고했다.

그는 직접 읽은 축문에서 ‘누르하치의 신령(神靈)에 힘입어 자신이 차하르를 비롯한

몽골 부락들을 모두 복속시켰다.’고 보고했다.

또 ‘조선도 과거에는 성의를 보이지 않다가 이제 아우를 칭하며 납공(納貢)하고 있다.’며

자신에게 남은 적은 이제 명나라뿐이라고 했다.

 

13세기 이래 자신들보다 훨씬 강한 존재였던 몽골을 정복하게 되면서

후금의 자신감은 결정적으로 높아졌다. 더욱이 1635년에는 ‘칭기즈칸의 정통 후계자’였던

릭단 한의 옥새를 손에 넣었고, 요양(遼陽)의 옛 절터에서 출토된 금불상까지 획득했다.

불상은 쿠빌라이 칸 시절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릭단 한에게 돌아갔고,

다시 홍타이지의 손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홍타이지는 이제 천명(天命)이 자신에게 돌아왔다고 여길 법도 했다.

실제 금불상을 얻은 직후, 홍타이지는 조선에 사람을 보내 안료(顔料)를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사찰을 새로 지어 불상을 봉안하는 데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홍타이지의 오판

 

후금의 넘치는 자신감은 조선에 대한 태도의 변화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1635년 11월, 홍타이지는 릭단 한의 옥새를 조선 사신에게 보여주면서

은근히 위세를 과시하려고 했다. 청 측 기록에는 조선 사신 박로가 옥새를 보고

‘진정 하늘이 내린 보물’이라고 감탄했다고 되어 있다.

1636년 1월, 조선에 보낸 국서에서 ‘하늘의 돌보심으로 우리 대군이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고,

공경(孔耿)이 귀순했으며, 차하르 몽골이 복속하여 주변이 모두 우리 소유가 되었다.’고 과시했다.

홍타이지는 그런데도 조선은 자신들을 공경할 줄 모른다고 비난했다.

 

이윽고 1636년 2월, 후금의 여러 패륵(貝勒)들은 홍타이지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르라고

상주(上奏)하기로 의결했다. 그들은 ‘차하르 한의 아들이 투항해 오고,

대대로 전해오던 몽골의 국새를 얻은 것은 하늘의 뜻이 정해진 것’이라며

속히 황제가 되어 신민들의 여망에 부응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홍타이지는 신료들의 요청을 거부했다. 그는 아직 대업(大業)을 완수하지 못했다고

강조하고, 그런 상황에서 먼저 황제가 되는 것은 하늘의 뜻에 순응하지 않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홍타이지가 고사하자 여러 패륵들을 비롯하여 만몽한(滿蒙漢) 출신의 신료들이 모두 나서서

속히 대호(大號)를 정하여 하늘의 뜻을 따르라고 촉구했다.

신료들의 강청은 이틀 동안 계속 이어졌고,

마지막에는 홍타이지의 친형인 대패륵(大貝勒) 다이샨(代善)까지 나섰다.

그는 여러 패륵들을 이끌고, 죽을 때까지 홍타이지에게 충성을 다 바치겠다고 맹서했다.

고사와 강청이 거듭되는 와중에 홍타이지는 조선을 거론했다.

‘만몽한 출신 신료들이 한목소리로 권하니 거부하기 어렵다.

조선도 형제의 나라이니 마땅히 같이 의논해야 한다.’

조선의 뻣뻣한 태도가 마음에 걸렸던 것일까?

홍타이지는 황제 즉위에 앞서 조선의 동의를 받고 싶어했고,

그 때문에 용골대 일행에게 몽골인들을 동행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오판이었다.

조선은 후금과 화친하고 형제관계를 맺었지만 그것은 본심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홍타이지는 조선의 추대를 원하고 있었다.

홍타이지가 순진했던 것일까? 조선이 무모했던 것일까?

양국 관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파탄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8-04-23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