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70) 홍타이지, 황제가 되다

Gijuzzang Dream 2008. 7. 20. 20:57

 

 

 

 

 

 

 (70) 홍타이지, 황제가 되다

 

평소 여진족을 오랑캐라고 멸시했던 조선이

홍타이지를 황제로 추대하는 데 동참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후금의 힘이 이미 명마저 넘어선 상황에서

조선의 선택은 국가의 존망까지 걸어야 하는 모험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신중하고 주도면밀한 대응이 필요했다.

하지만 평안감사에게 보내는 인조의 유시문(諭示文)을

조선 영토 안에서 용골대 일행에게 빼앗긴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국가 운영 체계에 나사가 풀려 있다는 방증이었다.

반면 조선의 ‘본심’을 간파한 홍타이지는 느긋하게 조선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1636년 홍타이지, 帝位에 오르다

 

인조가 평안감사 홍명구(洪命耉)에게 보낸 유시문의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정묘년에 부득이 하여 강화를 맺은 것도 부끄러운데 지금 그들이 황제를 칭하려 하니

존망을 돌보지 않고 절교(絶交)할 수밖에 없다.

팔도의 관찰사들은 이 소식을 들으면 죽기를 맹서하고 싸워 원수를 갚을지어다.

각처의 백성들에게도 알려 용사들을 격려시키고 서로 도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

 

용골대가 가져온 인조의 유시문을 보았을 때

후금의 여러 버일러들은 당장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섬멸하자며 흥분했다. 홍타이지는 차분했다.

그는 버일러들을 만류하며 먼저 조선에 사람을 보내 속내를 떠보라고 지시했다.

 

이윽고 1636년 4월11일 여명, 홍타이지는 백관들을 이끌고 심양성의 천단(天壇)으로 나아갔다.

자신이 제위에 오른다는 사실을 천지에 고하기 위해서였다.

홍타이지는 대신들과 함께 제단에 삼궤구고두례(三九叩頭禮)를 행했다.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이었다.

홍타이지가 북쪽을 향해 꿇어 앉은 상태에서 제관이 축문을 읽었다.

 

‘유세차 병자년 4월11일,

만주국 황제 신(臣) 홍타이지는 황천후토신(皇天后土臣)에게 고하나이다….

제가 대위(大位)를 이은 지 10년, 하늘의 도움으로 조부의 기업(基業)을 어깨에 메고

조선을 정복하고 몽골을 통일하여 다시 옥새를 얻었습니다….

이제 내외 신민의 추대를 받아 천자(天子) 자리에 올라

나라 이름을 대청(大淸), 연호를 고쳐 숭덕(崇德) 원년으로 삼았음을 삼가 아뢰옵니다.’

 

연호를 천총(天聰)에서 숭덕으로 고치고 대청제국의 황제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은 이해가 되지만

‘조선을 정복’ 운운한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아직 병자호란은 일어나지도 않았고 조선은 명분상 분명 형제국이었다.

그럼에도 ‘조선을 정복’했다고 한 것은 당시 조선이 이미 자신들의 수중에 있다고 여기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또 자신들에게 도무지 고개를 숙이려 들지 않는 조선에 대해

그만큼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조선사신, 황제즉위식서 고개 숙이기를 거부하다

 

천지에 고하는 의식을 마친 뒤 천단 동편에 즉위 식장이 꾸려졌다.

홍타이지는 단상에 놓인 금 의자로 올라가 앉았고

여러 버일러들과 대신들은 좌우로 줄을 지어 늘어섰다.

이윽고 찬례관(贊禮官)의 외침에 따라 만몽한(滿蒙漢) 출신의 신료들은

일제히 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례를 행한 뒤 꿇어 앉았다.

 

곧이어 만주, 몽골, 한인들을 대표하는 신료들이 각각 만주어, 몽골어, 한문으로 된

표문(表文,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받들고 단(壇)의 동쪽에 섰다.

여러 무리들을 향해 표문의 내용이 낭독되었다.

‘우리 황상께서는 하늘의 뜻과 백성의 여망을 따르고,

덕을 닦아 조선을 복종시키고 몽골을 통일하여 다시 옥새를 얻으셨다….

큰 이름과 업적이 천하에 드날리니 한마음으로 추대하여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라는 존호를 올린다.’

낭독이 끝나자 신료들은 다시 삼궤구고두례를 행한 뒤 기립했다.

 

여기서도 ‘조선을 정복’했다는 내용이 반복되었다.

‘관대하고 따뜻하며 어질고 성스러운’ 황제의 조선 출병이 머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것이었을까?

당시 식장에는 조선에서 온 춘신사(春信使) 나덕헌(羅德憲)과 이확(李廓)도 있었다.

두 사람은 즉위식이 진행되는 내내 홍타이지에게 절을 하지 않았다.

조선은 아직 형제국이지 청에 신속(臣屬)하는 나라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주와 몽골인들은 물론, 조선이 상국으로 섬기는 명 출신 신료들까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던 식장의 분위기를 고려할 때 두 사람의 행동은 결코 쉽지 않은 것이었다.

 

 

●홍타이지 “째째하게 사신을 죽이지 않겠다”

 

같이 도열해 있던 청의 신료들이 발끈했을 것임은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두 사람을 죽이라는 목소리까지 나왔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홍타이지는 만류했다.

그는 ‘이 일은 조선 국왕이 양국 사이에 틈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꾸민 것이다.

내가 만일 사신들을 죽이면 조선 국왕은 내가 맹약을 어겼다고 할 것이다.

나는 한 때의 하찮은 분노 때문에 사신을 죽이지 않겠다.’고 신료들을 다독였다.

 

끝까지 고개를 숙이지 않은 나덕헌과 이확의 용기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조선에 먼저 절교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지 않으려 했던 홍타이지의 외교적 안목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두 사신이 귀국할 때

인조에게 선사하는 초피(貂皮)를 비롯하여 은과 인삼 등을 들려 보냈다. 의외였다.

군사를 일으키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예의를 차리려는 수순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확과 나덕헌에게 들려준 국서는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선 용골대 일행이 서울에 갔을 때, 조선이 몽골 출신 버일러들을 만나 주지 않은 것에

불만을 토로했다. 자신에게 허락을 받고 들어갔던 사람들을 만나 주지 않은 것은

두 나라 사이에 틈을 만드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어 두 나라 사이에는 본래 원한이 없었는데

1619년 조선이 명을 도와 후금을 공격하는 군대를 파견했던 것,

이후 명나라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식량을 준 것 때문에

정묘호란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또 정묘호란 당시 가짜 왕제(王弟)를 진짜인 것처럼 속여 볼모로 보낸 것,

자신이 강홍립과 함께 돌려 보낸 한인들을 명으로 압송해 버린 것,

맹약을 맺은 이후에는 명나라 사람들을 조선 영토로 들이지 않겠다고 약속해 놓고

그것을 어긴 것 등등. 홍타이지의 불만은 이어졌다.

 

 

●“인조 자제 볼모로 안 보내면 공격하겠다”

 

홍타이지가 특히 맹렬히 비난한 것은 공유덕, 경중명과 관련된 사안이었다.

그들이 귀순해 올 때 조선이 명을 도와 그들을 차단하려고 시도했던 것은

전쟁의 단초를 여는 행위였다고 규정했다.

흥미로운 것은 조선 신료들을 비난하고 조롱한 점이었다.

그는 인조의 신료들을 가리켜 ‘책을 읽었지만 백성과 나라를 위해 경륜을 발휘할 줄은 모르면서

한갓 허언(虛言)만 일삼는 소인배들’이라고 매도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그들 서생(書生)들이 10년 간 이어져온 화의를 폐기하고

전쟁의 단서를 열었다고 비난했다. 작심한 듯한 홍타이지의 발언은 이어졌다.

 

‘왕은 지금 덕과 의리를 닦지 않고 해도(海島)의 험준함만 믿고 있으며

서생들의 말을 듣고 형제의 화호를 깨뜨리고 있다.’ 홍타이지는 훈계를 늘어 놓았다.

‘몽골의 차하르(察哈爾) 한도 덕을 닦지 않고 간신들의 말에 따라 내게 전쟁을 걸었다가

쫓기는 몸이 되고, 끝내는 신료들에게 배신당했다.’고.

 

이어 조선이 ‘후금을 원수’라고 한 이상 자신은 전쟁을 통해 강약과 승부를 겨룰 뿐

사신들을 죽이는 쩨쩨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인조에게, 스스로 죄를 깨우쳤다면 자제를 볼모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 가겠다고 협박했다.

홍타이지는 자신이 군대를 움직이는 날짜까지 명시했다.

사실상의 최후 통첩이었다.

 

조선이 홍타이지의 요구대로 볼모를 보내지 않는 이상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전쟁이 터지면 강화도로 들어가는 것말고는 이렇다 할 대책이 없었던 조선,

그나마 그 계획조차 이미 청에 읽혀 버린 조선의 대책은 과연 무엇일까.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8-05-07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