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67) 유화적인 대일정책,Ⅱ

Gijuzzang Dream 2008. 7. 20. 20:56

 

 

 

 

 

 

 

 (67) 유화적인 대일정책,Ⅱ

 

‘야나가와 이켄(柳川一件)’에 대한 최종 판결은 1635년(인조 13) 3월15일에 내려졌다.

도쿠가와 쇼군은 소오 요시나리(宗義成)의 손을 들어 주었다.

하지만 요시나리에게 그것은 ‘찜찜한 승리’였다.

주군인 자신을 배신하고 사지(死地)로 몰아 넣으려 했던 야나가와 시게오키에게

가벼운 처벌이 내려졌고, 자신의 심복이었던 외교승 겐포(玄方)를

곁에서 떠나 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또한 ‘조건부 승리’이기도 했다.

바쿠후(幕府)는 요시나리를 선택하면서 그의 역량을 시험하고,

동시에 조선을 떠보는 조건을 달았다.

조선은 쓰시마의 소오를 다독거리며

바쿠후와의 관계도 안정시킬 수 있는 묘책을 찾아야 했다.

 

 

조선통신사가 쓰시마에 배를 정박시켰던

‘오후나에’ 유적.

 

 

바쿠후의 의도

 

‘조선과 주고받은 국서를 멋대로 고쳤다.’는 혐의에도 불구하고

바쿠후가 요시나리를 처벌하지 않은 데는 까닭이 있었다.

당시 바쿠후는 점차 쇄국(鎖國)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기독교의 유입을 막기 위해 외국과의 무역을 나가사키(長崎)로 집중시키고,

동남아 등지로 가는 무역선(朱印船)의 출항과 일본인의 도항(渡航)을 금지시키는 조처를

구상했다. 바쿠후는 그 같은 흐름 속에서 조선과의 관계도 다시 정비하려고 했다.

무역을 유지하면서도 유럽 국가들을 통한 기독교 유입을 차단하려 했던 바쿠후에게

조선과의 관계는 중요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이 유일하게 대등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였다.

중국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조선과 국교를 유지하는 것은

국내적으로 쇼군과 바쿠후의 권위를 높이는데 필수적이었고, 조선과의 교역 또한 매우 중요했다.

 

 

쓰시마에 세워진 조선통신사기념비.

 

바쿠후가 요시나리를 ‘선택’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 가까스로 재개시켜 놓은 조선과의 관계를

다시 원점으로 돌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래 일본에 대해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의식을 가진 데다,

왜란을 겪으면서 일본을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원수(萬世不共之讐)’로 여기고 있는 조선을

상대해 왔던 소오 가문의 경험도 무시할 수 없었다.

 

바쿠후는 요시나리의 손을 들어 주면서

‘1636년까지 조선으로부터 통신사(通信使)를 초치(招致)하라.’고 명한 것은

요시나리의 조선에 대한 교섭 역량과 조선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조건이었다.

1635년 8월, 바쿠후는 향후 겐포를 대신하여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할 승려들을 직접 선택했다.

교토(京都) 동복사(東福寺)의 승려 인서당(璘西堂)과 소장로(召長老),

천룡사(天龍寺)의 승려 선장로(仙長老)가 그들이었다.

이제 이들 세 사람이 번갈아 쓰시마로 들어가 머물면서

조선으로 보내는 외교문서 작성을 맡게 되었다.

교토에서 온 외교승들이 바쿠후의 지휘 아래 쓰시마의 대조선 외교를 직접 관장하고,

동시에 감시하는 체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야나가와 이켄’이 종료된 뒤 인서당이 맨 먼저 쓰시마로 건너왔다.

 

 

‘일본위협론’이 다시 제기되다

 

이미 언급했듯이 ‘야나가와 이켄’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은 바짝 긴장했다.

후금의 위협과 명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과의 관계마저 악화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또한 소오 요시나리를 매개로 유지되어 왔던 조일(朝日)관계에

변동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야나가와 이켄’을 계기로

일각에서는 일본이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는 위기론이 퍼지고 있었다.

특히 1635년 연말에 재이(災異)가 거듭되면서 ‘일본위협론’은 더욱 힘을 얻었다.

창덕궁 정전(正殿)에 벼락이 내리치고, 한성부 연못의 물빛이 붉게 변하는 변고가 나타났다.

 

11월6일에 열린 경연 자리에서 사간 민응형(閔應亨)은

“옛날부터 나라가 망하려면 괴상한 변고가 이어지는 법”이라며

“선조의 능침(陵寢)이 무너지고, 큰바람 때문에 나무가 뽑힌 것은 장차 전쟁이 일어날 징조”

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구체적으로 임진왜란 무렵을 예로 들었다.

신묘년(1591년)에 풍재(風災)가 극심하더니 이듬해 왜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재이가 거듭되는 것은 전쟁이 일어날 징조’라는 민응형의 발언에 조정은 술렁였다.

누가 쳐들어 온다는 것인가?

민응형을 비롯한 삼사(三司) 신료들은 일본의 침략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목했다.

 

11월7일, 인조는 비변사 당상과 대신들을 불러 모았다.

인조는 대신들에게 일본이 과연 위험하냐고 물었다.

오윤겸(吳允謙)은, 뚜렷하게 쳐들어올 기미가 보이지는 않지만

일본인들의 성정(性情)이 남에게 지기 싫어한다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만일 야나가와 시게오키가 ‘조선이 일본보다 후금을 우대하고 있다.’고

쇼군에게 참소할 경우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경계했다.

또 시게오키가 비록 패했지만 쇼군 주변에 시게오키를 두둔하는 자가 많다는 사실을 우려했다.

이홍주(李弘胄)와 신경진(申景 )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별로 없지만

수군을 잘 정비하여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자.’고 했다.

 

11일에는 김상헌(金尙憲)이 차자(箚子)를 올려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더욱 강하게 거론했다.

그는 조정이 오로지 서변(西邊)을 막는 데만 급급하여 남변(南邊)의 방어는 거의 팽개쳐 버렸다고

비판했다. 남쪽의 군병은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데다 무기도 엉성하고,

백성들은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시달려 조정을 원망하고 있다고 실상을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정에 대한 원망이 가득한 백성들을 유사시에 전장으로 내모는 것이 가능하겠냐?’고 반문했다.

 

김상헌은 남변의 방어 태세를 점검하기 위해 통제사영(統制使營), 경상 좌수영(左水營)과 우수영(右水營)에 감군어사(監軍御史)를 파견해야 한다고 대책을 제시했다.

사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재침 가능성을 별로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일본의 위협을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조정은 후금의 동향이 불온하다고 느낄 때마다

주로 강화도의 방어 태세를 강화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삼남에서 수군과 전선(戰船)을 차출해 강화도 방어에 투입하기도 했다.

심지어 명사(明使) 노유녕(盧維寧)을 접대하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전라도 수군의 입방(立防)을 면제해 주고 대신 포(布)를 받기도 했었다.

일본의 위협을 고려한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위험천만한 방책이었다.

 

 

신료들과 달리 인조는 日에 대해 낙관론

 

신료들과는 달리 인조는 일본에 대해 대체로 낙관론을 폈다.

그는 ‘관백(關伯)이 전쟁에 싫증을 내서 백성들에게 총포를 쏘지 못하게 하는 데다,

반란을 걱정하여 장수들의 처자를 인질로 삼고 있으니 다른 나라를 넘볼 근심은 없다.’며

‘일본위협론’을 일축했다.

이렇게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한 예측이 서로 엇갈리는 상황에서

조정은 수군을 점검하고 방어 태세를 정비하자는 선에서 논의를 마무리지었다.

거의 모든 신경이 서북변 쪽으로 가 있는 상황에서 비롯된 고식책(姑息策)이었던 셈이다.

 

이제 일본에 대한 대책은 유화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알아 차렸는지 일본은 조선에 대해 공세적으로 나왔다.

겐포를 대신하여 쓰시마에 부임한 인서당은 1635년 12월, 조선에 보낸 문서에서

명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명분은 ‘일본은 명의 신하가 아니므로 그 연호를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과거 쓰시마가 조선의 예조를 ‘합하(閤下)’라고 부르던 것도 ‘족하(足下)’로 바꾸겠다고 했다.

‘조선과 일본은 대등한 나라이고 쓰시마 역시 예조와 동등하니 합하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인조는 관례를 어겼다는 이유로 인서당이 기초한 문서를 받지 않으려 했다.

쓰시마는 ‘합하’문제를 거론하여 조선이 자신들을 ‘족하’라 부르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비변사 신료들은 일본과 사단이 생길까 우려하여 그냥 넘어가자고 했다.

 

조선은 결국 이후부터 쓰시마 도주를 ‘족하’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선은 통신사의 파견도 수락하고,

바쿠후가 요청한 마상재(馬上才·말 위에서 곡예를 펼치는 유희)를 벌일 인원도 파견하기로 했다.

일본측의 요구를 거의 다 들어 준 것이었다.

모두 소오 요시나리의 낯을 세워 주어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병자호란 직전, 조선은 이렇게 후금의 위협을 의식하여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키려고 부심하고 있었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2008-04-16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