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75) 병자호란이 일어나다, Ⅱ

Gijuzzang Dream 2008. 7. 20. 20:58

 

 

 

 

 

 

 (75) 병자호란이 일어나다, Ⅱ

 

1636년 12월10일 압록강을 건넜다. 이렇다 할 저항이 없었다.

그들은 곽산(郭山)과 정주(定州)에 사실상 무혈 입성했다.

홍타이지는 투항해 온 곽산과 정주의 군민들을 해치지 말라고 유시하는 한편,

그들의 머리를 깎아 치발(髮)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버일러 두도(杜度)에게 정예병을 뽑아 철산(鐵山)과 가도, 운종도(雲從島) 일대를

공략하라고 지시했다.

15년 동안 목에 걸린 가시처럼 청을 배후에서 위협했던

가도의 동강진(東江鎭)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었다.

 

 

 

 

동요하는 조선 조정

 

청군이 이미 안주를 지났다는 사실을 알리는 김자점의 장계가 조정에 들어온 것은

12월13일이었다. 인조는 대신들을 불러모았다.

영의정 김류는 경기 일대의 군사를 빨리 불러모아 어가(御駕)를 호위하여 강화도로 들어가자고

촉구했다. 하지만 인조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청군이 깊이 들어올 리가 없다며 좀더 기다려 보자고 했다.

김류가 다시 재촉하자, 인조는 신하들 가운데 늙고 병든 사람들을 먼저 들여보내라고 지시했다.

 

청군의 철기(鐵騎)가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 오고 있는 상황에서 인조의 판단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무슨 근거로 적이 깊이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우선 청군의 침입 상황을 신속히 보고하지 않은 도원수 김자점의 책임이 컸다.

또 청군 침입 직전, 격렬하고 지루하게 이어졌던 척화 · 주화 논쟁을 거치면서

인조의 판단력이 흐려졌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튿날 청군 철기가 이미 개성을 지났다는 보고가 다시 날아들었다.

다급해진 인조는 원임 대신 윤방(尹昉)과 승지 한흥일(韓興一)을 시켜

종묘에 모셔진 역대 선왕들의 신주(神主)를 수습하고,

빈궁(嬪宮)과 왕자들을 호위하여 강화도로 들어가게 했다.

한성판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檢察使)로 삼아 강화도의 민정과 방어 문제를 책임지게 했다.

또 이민구(李敏求)를 부검찰사로 삼아 강화도로 들어가는 데 필요한 선박의 관리와

왕실 인척들의 배행(陪行)을 맡도록 조처했다.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려 했던 때는 날이 이미 어두워지고 있던 무렵이었다.

인조 일행이 숭례문(崇禮門)에 도착했을 때,

청군이 이미 양철평(良鐵坪)까지 왔다는 보고가 날아들었다.

양철평은 지금의 은평구 녹번동 부근이다.

인조 일행이 당황하고 있을 때 마부대(馬夫臺)가 이끄는 청군 선봉은

이미 홍제원(弘濟院)을 지나고 있었다. 인조는 숭례문 문루로 올라가고

훈련대장 신경진(申景진)을 시켜 모화관(慕華館)으로 나아가 적을 막으라고 지시했다.

청군이 코앞에 들이닥치자 도성은 그야말로 공황 상태로 빠져 들었다.

인조 이하 신료들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는 와중에

피난하려는 백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최명길의 용기

 

인조는 결국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했다.

청군 선봉이 시시각각 도성을 향해 옥죄어 오고 있는 데다

강화도로 이어지는 뱃길도 이미 차단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광해군 시절부터 유사시의 피난지로 점찍어 준비해 왔던 강화도였다.

상당한 양의 식량과 화약도 비축되어 있었다. 그

런데 인조는 정작 가장 절실했던 순간,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했다. 허망한 일이었다.

당시 강화도까지 가려면 대략 이틀 정도가 걸렸다.

인조가 김자점의 장계를 받자마자 강화도행을 시도했으면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면 전쟁의 양상은 또 달라졌을 것이다.

청은 병자호란을 도발하기 전부터 조선을 깊이 연구했다.

그들은 유사시 조선 조정이 강화도로 들어가려 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모문룡(毛文龍)이 바로 자신들의 코앞에서 약을 올리고 있었음에도,

수군과 전함이 없어서 발만 동동 굴렀던 그들이었다.

그들은 정묘호란 당시에도 비슷한 체험을 했다.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는 바람에 맥이 빠져 버렸다. 이번에는 달랐다.

아예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을 막아버렸던 것이다.

길이 막혔다는 소식에 인조와 조정 신료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댔다.

 

바로 그때 최명길이 나섰다. 자신이 청군 진영으로 나아가 담판을 벌이겠으니

그 틈을 타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라고 건의했다.

인조는 최명길에게 강화(講和)를 청하면서 시간을 벌어 보라고 지시했다.

절박한 위기의 순간, 인조는 다시 주화론 쪽으로 돌아섰다.

적장을 만나 시간을 벌겠다고 자청했던 최명길의 용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당시는 분명 전시(戰時) 상황이었다.

막 무악재를 넘어서려 하고 있던 마부대 일행에게 최명길의 출현은

‘시간 끌기’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았다. 가자마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최명길은 적진으로 나아갔고,

그가 마부대와 담판을 벌이는 사이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화친으로 나라를 망친 자’라고 매도당했던 최명길이지만,

위기의 순간 신하로서 그가 보인 용기와 충성심은 참으로 대단했다.

 

최명길은 마부대에게 청군이 깊숙이 침입한 까닭을 물었다.

마부대는 ‘조선이 까닭 없이 맹약을 어겼으므로 새로 화약을 맺기 위해 왔다.’고 둘러댔다.

조선을 안심시키고, 자신의 배후에서 홍타이지가 대군을 이끌고 내려오고 있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포석인지도 몰랐다.

 

한편 인조가 도성을 빠져나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처연했다.

도성을 버리고 피난하는 것이 이괄의 난, 정묘호란의 뒤를 이어 벌써 세 번째였다.

구리재(銅峴)를 넘어 수구문(水口門)으로 이어지는 파천 길에는

어가 행렬과 백성들의 피난 행렬이 서로 뒤엉켰다.

인조를 호위하던 군사들부터 갈팡질팡하여 대오가 흩어졌다.

혼란의 와중에 가족과 떨어져버린 백성들의 통곡 소리가 넘쳐났다.

빨리 적을 피해야만 하는 황망한 상황에서 말이 제대로 준비될 리 없었다.

신료들 가운데는 말이 없어서 도보로 수행하는 자들이 있었다.

날은 어두워지고, 기온은 더 떨어지고 남한산성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강화도로 가자는 논의가 다시 등장하다

 

인조 일행은 저녁 9시가 다 되어서야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산성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논란이 벌어졌다.

영의정 김류는 인조에게 강화도로 가자고 다시 강청했다.

홍서봉(洪瑞鳳)과 이성구(李聖求)도 김류의 의견에 동조했고,

이홍주(李弘胄) 등은 위험하다고 반대했다. 김류는 강화도로 가자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산성은 고립되어 양식과 말먹이가 부족하다.

강화도는 우리에게는 편리한 곳이나 저들에게는 침범하기 어려운 곳이다.

또 청의 본래 의도는 명을 치는 데 있으니 우리를 상대로 지구전(持久戰)을 벌이지 않을 것이다.’

 

강화도로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김류는 청군이 공유덕(孔有德) 등의 귀순을 통해 수군과 함선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청군이 함선을 갖고 있고, 수군을 지휘했던 경험이 있던 공유덕 등이

이 전쟁에 동참하고 있는 상황에서 강화도는 더 이상 안전한 곳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인조는 김류의 제안에 귀가 솔깃했다.

인조는 귓속말로 김류에게 어느 길로 갈 것인지를 물었다.

김류는 수행인원을 단촐하게 줄여 과천과 금천(衿川·시흥)을 경유하면 강화도로 갈 수 있다 했다.

대제학 이식(李植)은 일단 인천까지 가서 배를 타자고 했다.

병력과 군량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은 남한산성의 상황이 불안했던 것일까?

인조는 김류 등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밀실에서 파천론이 다시 논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삼사의 언관들이 격렬히 반대했다.

 

1636년 12월15일 새벽,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을 나와 강화도로 향했다.

하지만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치고 비탈진 산길은 얼어붙었다.

말들이 미끄러지면서 어가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인조는 말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길이 국왕을 알아 볼 리 없었다. 인조도 수없이 넘어지고 자빠졌다.

신료들은 놀라 어가를 다시 돌렸다. 날씨마저 철저히 인조를 외면하고 있었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8-06-11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