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71) 높아지는 명분론, 어정쩡한 방어대책

Gijuzzang Dream 2008. 7. 20. 20:57

 

 

 

 

 

 

 (71) 높아지는 명분론, 어정쩡한 방어대책

 

홍타이지의 ‘조선 비난’ 국서에 조정신료 決戰論 들끓어

 

몽골 버일러들을 이끌고 왔던 용골대 일행이 도주하고,

청과 관계를 끊겠다는 인조의 유시문마저 용골대 일행에게 빼앗긴 뒤

조선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나덕헌과 이확이 홍타이지에게 배례(拜禮)를 거부하여 청을 자극했다는 소식까지

날아들면서 전쟁에 대한 공포심은 더욱 커졌다. 빨리 방어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묘 이후 우여곡절 속에서도 이어져온 ‘10년의 평화’에 익숙했던 조정이었다.

급작스럽게 내놓은 방어 대책의 실효성을 둘러싸고 또 다른 논란이 빚어졌다.

 

 

“나덕헌과 이확의 목을 쳐라”

 

홍타이지의 즉위식장에서 나덕헌과 이확이 보였던 행동은 어쨌든 대단한 것이었다.

나만갑(羅萬甲)의 ‘병자록(丙子錄)’에 따르면,

나덕헌 등이 무릎을 꿇지 않고 버티자 격분한 청나라 관원들은 두 사람을 마구 구타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머리 숙이기를 끝내 거부하자

식장에 있던 한인(漢人) 신료들 가운데는 부끄러워 눈물을 보이는 자까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청실록’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나덕헌과 이확의 행동이 안팎으로 충격을 주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나덕헌과 이확은 심양을 떠나 서울로 향할 때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오랑캐‘ 홍타이지의 즉위식장에서 목숨을 걸고 고개를 숙이지 않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과연 조선 조정의 신료들이 자신들이 보였던 ‘기상’과 ‘절개’를 곧이곧대로 믿어 줄지 의문이었다.

그들은 더욱이 홍타이지에게서 받은 국서까지 휴대하고 있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홍타이지의 국서는 조선을 맹렬히 비난하고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협박, 조롱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국서를 그대로 가져갈 경우, 조정의 명분론자들로부터 어떤 비판이 날아올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나덕헌과 이확은 결국 귀국 길에 만주 통원보(通遠堡)란 곳에 이르러

홍타이지가 준 국서를 버리고 말았다.

그것을 보자기에 싸서 머물던 숙소에 몰래 던져 놓고, 대신 내용을 등사하여 조정에 올렸다.

이들이 의주에 도착하자 당장 평안감사 홍명구(洪命耉)가 상소했다.

그는 홍타이지의 국서 내용을 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통곡을 금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나덕헌 등이, 참람하고 말도 되지 않는 오랑캐의 서신을 받은 즉시 던져 버렸어야 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빨리 나덕헌과 이확의 목을 베어 그것을 홍타이지에게 보여 주라고 촉구했다.

추상(秋霜) 같은 일갈(一喝)이었다.

 

 

명분론이 높아지고,決戰論이 대두하다

 

홍명구의 상소를 통해 홍타이지가 보낸 국서의 내용이 알려지자 조정은 다시 들끓었다.

비변사 신료들도 나덕헌과 이확이 자결하지 않은 것을 문제삼았다.

그들이 통원보에 이르러서야 국서를 몰래 버리는 바람에

홍타이지에게 ‘조선 사신이 국서를 기꺼이 받아갔다.’는 인상을 주고 말았다고 통박했다.

조정의 분위기를 보면 두 사람은 이제 자결해야만 할 것 같았다.

나덕헌과 이확을 성토하는 조정 신료들의 명분론은 극에 이르렀다.

‘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의 국서를 받고서도 멀쩡하게 가지고 돌아온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덕헌과 이확은 결국 평안도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비변사는 통원보의 청나라 관리에게 나덕헌 등의 명의로 서신을 보내자고 주장했다.

나덕헌 등이 홍타이지가 보낸 국서를 중도에서 뜯어보고 버리고 왔다는 사실을

알려 주자는 것이었다. 대사성(大司成) 이식(李植)이 붓을 들었다.

 

이식이 쓴 국서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우리들은 귀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졸지에 갖은 곤욕을 다 당했다.

우리가 귀국하려 할 때 굳게 봉함된 국서를 받았다.

우리는 전례에 따라 뜯어 보려 했지만, 용골대와 마부대가 방해하여 그럴 수 없었다.

결국 한참 말을 달려 중도에 이르러 뜯어 보니

서면(書面)의 칭호와 말미에 찍힌 인문(印文)이 과거와는 크게 달랐다.

또 우리나라를 ‘이국(爾國)’ 운운하며 공경하기는커녕 노예처럼 여기고 있었다.

조선의 신하된 도리 상 차마 볼 수 없어 통원보에 이르러 숙소의 잡물 속에 던져 놓고 왔다.

원컨대 그 것을 가져다가 홍타이지 한에게 전해 주기 바란다.’

 

요컨대 조선은 이식이 쓴 국서를 통해

홍타이지가 칭제건원(稱帝建元)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강조했던 셈이다.

‘황제’ 홍타이지와 ‘제국’ 청을 인정할 수 없다고 거듭 못을 박은 이상 이제 전쟁을 준비해야 했다.

이미 용골대 일행이 도주했던 직후부터 청의 침략에 대비한 대책들은 쏟아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대책을 제시했던 사람은 단연 부제학 정온(鄭蘊)이었다.

그는 용골대 등이 도주한 직후 올린 상소에서,

원수(元帥)를 선발해 보내고 빨리 압록강을 방어할 대책을 강구하라고 촉구했다.

또 인조에게 개성까지 나아가 신료들을 독려하고 군율(軍律)을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압록강을 방어하고 개성으로 진주(進駐)하라?

여차하면 조정을 강화도로 옮기는 것만 생각하고 있던 다른 신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주장이었다. 정온은 그러면서 인조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진정으로 적과 싸워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반정공신들이 거느린 정예병들을 원수에게 배속시키라고 요구했다.

그는 온 나라의 정예병과 무사가 전부 반정공신들 휘하에 배속되어,

평소에는 그들의 농장(農莊)을 관리하다가 유사시에는 호위(扈衛)를 핑계로 편안함을 취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정묘호란 당시에도 멀쩡한 정예병들이 적과 싸움은 포기한 채

강화도에 머물면서 ‘내란이 있을까 걱정스럽다.’는 말만 되뇌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사헌부 관원들도 정온과 비슷한 견해를 내놓았다.

정예병이란 정예병은 모두 반정공신 휘하 군관들에게 사병(私兵)처럼 편제되어 있는 것을

뜯어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정쩡한 인조의 태도

 

정온과 사헌부 신료들의 주장은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

그들은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음에도,

훈신(勳臣)들이 ‘호위’를 핑계로 정예병을 사병처럼 틀어 쥐고 있는 현실을 비판했다.

실제 당시 평안병사 유림(柳琳)이 금군(禁軍) 가운데 10명을 데려가 군관으로 삼으려 했는데

호위청(扈衛廳)에서 거부하여 문제가 되었다.

사간원 신료들은 “변방 방어가 충실하면 서울이 편안해지고 서울이 편안하면 굳이 호위하는

무사가 많을 필요가 없다.”며

호위청 군관 가운데 500∼600인을 뽑아 변방으로 내려 보내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인조는 이 같은 주장에 대해 마뜩찮다는 반응을 보였다.

자신을 호위하는데 중요한 훈련도감이나 어영청 병력을 덜어 내자는 주장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개성으로 전진하고 정예병을 과감하게 내어 주라.’는 정온의 요청에 대해

“그대의 차자(箚子) 내용이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 같다.”고 답변했다.

또 사간원 신료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연소한 대간들이 사체도 모르면서

군사와 군량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당시가 엄청난 위기 상황이며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각론으로 들어가면 인조는 여전히 안이했다.

강화도로 들어가, 수많은 정예병들을 시켜 자신의 주변을 호위하기만 하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병자호란 직전 인조는 분명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1636년 4월25일, 스스로를 통렬히 비판하는 하교를 내렸다.

‘내가 용렬하여 시비(是非)를 분별하지 못했고, 게으른 데다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고집 때문에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고 자책했다. 그러면서 이제 노력하겠으니

모든 신료들도 난국을 타개하는 데 동참하라고 촉구했다. 눈물겨운 호소였다.

하지만 근본 대책은 나오지 않았다.

인조는 병자호란 직전 ‘오랑캐와 일전을 불사하자.’는 명분론자들의 손을 들어 주었지만,

실제로 ‘일전을 불사하기 위해’ 근본적인 대책을 제시했던 정온 같은 신하들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인조의 책임은 컸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8-05-14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