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74) 병자호란이 시작되다, Ⅰ

Gijuzzang Dream 2008. 7. 20. 20:58

 

 

 

 

 

 

 (74) 병자호란이 시작되다,Ⅰ

 

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까지 조정에서는 청과의 관계를 복원할지,

그것과 관련하여 사신을 보낼지를 놓고 격심한 논란이 빚어졌다.

척화파는 명분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절교가 불가피하다고 했고,

주화파는 이렇다 할 준비 없이 전쟁을 벌이는 것의 위험성을 들어

끝까지 청을 기미(羈)해야 한다고 맞섰다.

사람들은 대체로 척화파의 논의가 높고 깨끗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높고 깨끗한 논의’만으로 전쟁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갈팡질팡하는 사이 전쟁은 결국 터지고 말았다.

 

 

 

준비 없이 갈림길에 서다

 

당시 ‘명분’과 ‘현실’의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던 조선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던 인물은

명 감군 황손무(黃孫茂)였다. 그가 귀국 길에 보낸 서한이 10월24일 조정에 도착했다.

그는 청천강과 압록강, 그리고 평안도의 험준한 지형은 하늘이 준 것이니

병사들을 조련하고 화약과 총포 등을 제대로 갖추면 적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 신료들이 현실을 모른다고 야유했다.

‘경학(經學)을 연구하는 것은 장차 이용(利用)하기 위한 것인데

나는 귀국의 학사와 대부들이 읽는 것이 무슨 책이며 경제(經濟)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소. 뜻도 모르고 웅얼거리고 의관(衣冠)이나 갖추고 영화를 누리고 있으니

국도(國都)를 건설하고 군현(郡縣)을 구획하며 군대를 강하게 만들고 세금을 경리하는 것은

과연 누가 담당한단 말이오?’ 황손무의 비판은 신랄했고 진단은 냉정했다.

 

‘귀국의 인심과 군비(軍備)를 볼 때, 저 강한 도적들을 감당하기란 결단코 어렵습니다.

일시적인 장유(奬諭)에 이끌려 그들과의 화친을 끊지 마십시오.’

조선을 찬양하고 청과의 싸움을 독려하는 내용을 담은 황제의 유시문을 들고 왔던 그였다.

조선을 다독여 청과 싸움을 붙이는 것이 자신의 임무였지만,

황손무가 본 조선은 전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오히려 청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말라고 충고했던 것이다.

 

청 역시 마지막까지 조선의 본심을 떠보려고 시도했다.

역관 박인범(朴仁範) 등이 들어갔을 때, 용골대는 새로운 제안을 내밀었다.

자신들에게 협력하여 명을 공격하는 데 동참하고,

화친을 배척한 신하를 넘겨주고 왕자를 볼모로 보내라는 요구였다. 박인범 등은 반발했다.

그러자 용골대 등은 왕자와 척화신만 보내주면 청군이 비록 압록강에 이르더라도

침략을 당장 중지하고 두 나라가 혼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다시 제의했다.

박인범 등이 ‘예의의 나라로서 차마 들을 수 없고, 또 전달할 수 없는 말’이라고 거듭 반발하자

용골대 등은 돌아갔다. 좀처럼 좁히기 어려운 서로의 입장 차이를 다시 확인했던 것이다.

 

 

남한산성의 수어장대.

 

 

홍타이지, 침략 결심을 하늘에 고하다

 

1636년 11월25일 홍타이지는 신료들을 이끌고 환구에서 제사를 지냈다.

황천(皇天)과 후토(后土)를 향해 자신이 조선 정벌에 나서게 된 까닭을 고하는 자리였다.

 

홍타이지는 축문을 통해

조선이 ‘저지른’ 잘못들을 열거했다.

1619년 명을 도와 자신들을 공격하는 데 동참한 것,

1621년 이후 자신들이 요동을 차지했을 때 도망하는 한인들을 받아들여 명에 넘긴 것,

정묘년에 맹약을 체결한 이후에도 누차 그것을 어긴 것,

후금으로 귀순하는 공유덕과 경중명 일행을 공격했던 것,

명에는 병선(兵船)을 제공했으면서도 그것을 빌려 달라는 자신들의 요구는 거부한 것,

인조가 평안감사 홍명구(洪命耉)에게 유시문을 보내 자신들과의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운운 한 것

등이었다. 조선에 대해 품었던 불만이 모두 나열되었다.

 

‘청의 힘과 역량이 명 못지않게 커졌는데 조선은 명만 편들고 자신들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만의 요점이었다. 공유덕 등의 귀순을 저지하려 시도하고,

명에만 병선을 제공한 것에 대한 불만이 특히 도드라져 보였다.

홍타이지는 곧이어 누르하치의 신주를 모신 태묘(太廟)에도 나아가 자신의 결심을 고했다.

 

홍타이지는 11월29일 여러 장수들을 모아놓고 유시문을 내렸다.

조선을 정벌해야 하는 까닭을 다시 강조했다.

위에서 언급한 ‘허물’에 더하여 조선이 청에서 보낸 국서를 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도 추가했다.

조선 조정이 몽골 버일러들이 내민 편지를 퇴짜놓았던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평안감사 홍명구에게도 ‘유시문’을 보냈다.

‘조선이 패만하고 무례하므로 어쩔 수 없이 의병(義兵)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의병’들에게 조선에서의 행동 지침을 하달했다.

‘인명을 함부로 살상하지 말 것, 대군이 통과하는 지역의 사묘(寺廟)를 파괴하지 말 것,

저항하지 않는 자를 죽이지 말 것, 항복한 자를 죽이지 말고 치발(髮)할 것,

망명해 오는 자를 받아들여 보호할 것, 사로잡은 백성들의 가족을 서로 이산시키지 말 것,

부녀를 폭행하지 말 것’ 등이 그것이었다.

 

12월1일 조선 원정에 동참할 몽골 버일러들이 병력을 이끌고 심양에 집합했다.

홍타이지는 이날, 정친왕(鄭親王) 지르가랑(濟爾哈朗)에게 심양에 남아 도성을 방어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아지게(阿濟格)를 우장(牛莊)에 배치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했다.

조선을 공격하는 와중에 혹시라도 명군이 배후에서 역습해 오는 상황을 우려한 조처였다.

우장은 압록강과 발해만으로 연결되는 전략 요충이었다.

당시 청은 명이 수군을 이용하여 발해만으로 들어와 내지에 상륙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조선 침략에 나서면서도 여전히 명의 위협을 염려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2월2일 오전 홍타이지는 대군을 출발시키기에 앞서

당자(堂子)에 나아가 삼배구궤두례(三拜九頭禮)를 행했다.

당자는 까치를 신성시하는 만주족 샤머니즘 신앙의 상징물이었다.

이어 팔기의 깃발들을 도열해 놓고 주악을 울리며 다시 배천례(拜天禮)를 행했다.

홍타이지는 이어 도도(多鐸)와 마부대 등에게 병력 1300명을 따로 주었다.

그들 가운데 300명은 상인으로 변장시켰다.

그들을 신속히 서울로 진격시켜 궁궐을 포위하려는 깜냥이었다.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는 것이 홍타이지의 생각이었다.

 

 

무너진 통신체계

 

조선 침략에는 만주와 몽골군뿐 아니라 명에서 귀순한 한족 출신 장졸(=漢軍)들도 대거 동참했다. 공유덕, 경중명, 상가희(尙嘉喜)를 비롯하여

석정주(石廷柱), 마광원(馬光遠) 등 한군 지휘관들이 그들을 이끌었다.

청은 조선을 공략하기 위해 만몽한(滿蒙漢)의 모든 역량을 사실상 총동원했던 것이다.

한군들은 특히 홍이포(紅夷砲), 대장군포(大將軍砲)를 비롯한 중화기의 운용과 운반을 맡았다.

 

12월9일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은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몰려오는 상황을 인지했다.

‘병자록’에 따르면 이미 12월6일부터 청군과 관련된 이상 징후를 알리는 봉화(烽火)가

여러 차례 올랐지만,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은 그 상황을 서울에 제때 알리지 않았다.

그는 적이 겨울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또 봉화가 알려질 경우, 서울에서 소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9일 적군이 이미 순안(順安)을 통과하여 안주를 향해 내달리는 상황에서야

김자점은 장계를 올렸다. 청군은 질풍같이 내달렸다.

 

조선은 청군의 철기(鐵騎)와 야전에서 맞서서는 승산이 없다고 여겨

주로 산성에 들어가 방어하는 전술을 구상했다.

하지만 청군은 조선군이 대비하고 있는 산성을 공격하여 시간을 허비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서울로 돌격하는 전술을 택했다.

사실 의주 부근의 백마산성도, 평양 부근의 자모산성도 서울로 이어지는 대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대로에서 적 기병을 차단하려 들지 않았던 것은 치명적이었다.

그나마 봉화마저 제때 올리지 않았고,

평안도 각지에서 올린 변보(邊報)는 청군 기마대에 의해 차단되었다.

그 같은 상황에서 인조와 조정은 강화도는커녕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시간적 여유조차 가질 수 없었다.

전쟁은 이렇게 시작부터 음울했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8-06-04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