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73) 최후의 주화 - 척화 논쟁

Gijuzzang Dream 2008. 7. 20. 20:58

 

 

 

 

 

 

 

 (73) 최후의 주화 - 척화 논쟁

 

최명길의 주장은,

척화(斥和)하여 청과 싸우겠다는 결심을 굳혔으면 ‘공세적’으로 하자는 내용이었다.

말로만 ‘척화’를 외치며 미적거릴 경우, 청군의 철기(鐵騎)를 조선 영토 깊숙이 불러들이게

되어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될 것을 우려한 계책이었다.

압록강 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적과 싸울 경우,

설사 패하더라도 피해의 범위를 줄일 수 있었다.

인조와 조정 또한 운신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인조는 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언관들이 들고일어나 최명길을 처벌하라고 외쳤다.

 

 

 

● 윤황(尹煌)과 정온(鄭蘊)의 결전론

 

최명길의 주장은

척화파의 거두 윤황(尹煌)이나 정온(鄭蘊)의 생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대사간 윤황은 1636년 8월에 올린 상소에서 인조에게 척화를 행동으로 보여달라고 촉구했다.

그는 백성과 장졸들을 분기(奮起)시키려면 강화도로 들어가려는 생각부터 버리라고 요구했다.

‘임금과 종사(宗社)를 안전한 곳에 모신 뒤에야 국사를 도모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인심이 흩어져 나라가 망할 위기로 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윤황은 강화도에 배치한 병력을 모두 평안도로 보내고,

강화도에 지어놓은 행궁(行宮)마저 태워버림으로써 결전의 의지를 보여달라고 했다.

 

정온은 윤황보다 더 확실한 자신감을 갖고 인조에게 결전을 벌이라고 촉구했다.

그는 도원수를 의주로 보내 압록강을 방어하고,

의주에서 효사수성과(效死守城科 : 죽기를 각오하고 성을 지키겠다는 용사를 선발하는 과거)를

실시하여 결사대를 뽑고, 인조도 개성에 진주하여 장졸들을 진두지휘하라고 촉구했다.

정온은 결전을 위한 구체적인 작전 계획까지 제시했다.

그는 조선의 사수(射手)와 화포병(火砲兵)을 ‘천하 무적’이라고 평가하고

그들을 활용하면 후금군 기병의 돌격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전투가 벌어질 곳에 먼저 진을 칠 장소를 정합니다.

포수 4000명을 4대로 나눠 2000명은 앞에 진을 치고, 2000명은 지형을 살펴 좌우에 진을 칩니다.

포수 뒤에는 사수를, 그 뒤에는 살수(殺手)를, 그 뒤에는 편곤군(鞭棍軍)과 기사병(騎射兵)을

각각 배치합니다. (중략)

적이 학익진(鶴翼陣) 형태로 공격해 오면 아군의 전대(前隊) 1000명이 먼저 조총을 쏩니다.

쏜 뒤에는 앉아 화약을 장전하고 후대 1000명이 다시 쏩니다.

적이 만약 장사진(長蛇陣)으로 공격해 오면 좌군(左軍)이 전대가 했던 방식처럼 먼저 쏘고,

적이 40∼50보 안에 들어오면 사수들이 포수가 쏘던 방식대로 화살을 발사합니다.

그러면 포성이 그치지 않고, 화살은 비 오듯이 쏟아질 것이니

비록 저들의 견갑철마(堅甲鐵馬)라 할지라도 어찌 궤멸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정온의 계책은 병자호란 무렵 제기된 결전론 가운데 가장 구체적이고 논리 정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청군에 지레 겁을 먹고

‘천하 무적’의 궁수와 포수들을 제대로 사용해 보지도 못했다는 점이었다.

 

최명길의 주장이 이들과 다른 점은

‘결전에 돌입하기 전에 한번 더 심양으로 사람을 보내 청의 속내를 파악해 보자.’는 것이었다.

실제 최명길의 주장이 나온 직후인 1636년 9월8일,

비변사는 심양으로 역관 권인록(權仁祿) 등을 보내 청의 내부 사정을 탐문하자고 주청했다.

‘오랑캐의 정세를 탐지하라.’는 명나라 감군 황손무(黃孫茂)의 충고도

비변사의 주청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갈팡질팡하는 인조

 

인조는 비변사의 주청을 받아들였다.

‘결전’ 운운하면서도 실제로는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그러자 수찬 오달제(吳達濟)와 헌납 이일상(李一相) 등이 들고일어났다.

그들은 황손무의 충고를 따르는 것은 의롭지 못한 행동이라며

인조가 ‘우리는 이미 오랑캐와 절교하여 사자(使者)가 통하지 않으니 간첩을 쓰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황손무에게 명확히 이야기하지 않은 것을 비판했다.

이일상 등은 더 나아가 청에 사자를 다시 보내는 것은

위로는 명을 배반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기만하는 행위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대부분의 삼사 소속 언관(言官)들이 비변사를 비난하는 와중에

사간 정태화(鄭太和)는 소신을 내세웠다.

‘옛날부터 교전(交戰) 중이라도 사자를 왕래시키고 국서를 교환했다.’며

비변사의 주청은 일리가 있다고 반기를 들었다.

인조는 정태화의 주장에 힘을 얻은 듯 비변사의 반간책(反間策)을 받아들였다.

역관 박인범(朴仁範)과 권인록을 심양으로 들여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삼사(三司)의 언관들이 격렬하게 반발하자 인조와 비변사는 다시 동요했다.

박인범 등에게 압록강을 건너지 말고 일단 의주에 대기하라고 지시했다.

언관들과의 논의가 아직 결말을 맺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최명길이 보다못해 다시 나섰다.

그는 먼저 연소한 언관들이 군사 기밀의 중요성을 모른다고 개탄한 뒤,

정묘호란 때 일부 언관들이 ‘야간에 적을 습격하는 것은 의롭지 못하다.’고 비판했던 것을

예로 들었다. 그러면서 ‘상황이 상황인 만큼 앞으로는 국가를 위한 대사를

대신과 밀의(密議)하여 결정하되 승지와 내관들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촉구했다.

인조가 비변사 중심의 주화론과 언관 중심의 척화론 사이에서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 안쓰러웠던 것이다.

 

공격의 화살은 최명길에게로 날아들었다.

오달제는 최명길이 기필코 중론(衆論)을 배척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조빈은 더 강경했다.

그는 ‘우리의 국시(國是)는 중국을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하는 것인데

광해군이 오랑캐와 화친했기 때문에 쫓겨났다.’며 인조반정의 명분까지 거론했다.

그러면서 ‘청에 다시 사자를 보내면 반란을 생각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구실을 줄 수 있다.’

고까지 했다. 그것은 사실상 인조에 대한 협박이었다.

‘광해군이 오랑캐와 화친했기 때문에 쫓아낸다.’고 했던 인조반정 당시의 명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인조의 입장을 자극하는 주장이었다.

 

 

‘진회(秦檜)보다 나쁜 최명길’

 

1636년 9월27일 사간원의 언관들은,

최명길이 중론을 무시하고 국가 정책을 밀실에서 추진하려 했다며 파직하라고 요구했다.

인조는 언관들을 비난하고 최명길을 두둔했지만

11월6일, 최명길은 판윤(判尹) 자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11월8일, 부교리 윤집(尹集)이 최명길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임진년에 나라가 망할 뻔했는데 신종(神宗) 황제의 구원 덕분에

조선이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며 예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오랑캐와의 화의를 내세워 재조지은을 배신하고 나라를 망치려 하는’ 최명길은

진회(秦檜,1090∼1155)보다도 나쁜 자라고 매도했다.

 

진회는 남송(南宋)의 재상으로 있으면서 금(金)과의 화의를 주도하여 세폐를 바치고

명장 악비(岳飛)를 제거하는 데 앞장 선 인물이었다.

이후 성리학자들 사이에서 ‘간신의 전형’이자 ‘매국노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던 인물이었다.

청에 사자를 다시 보내자고 주장했던 최명길은

이제 관인으로서 최악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말았던 것이다.

 

인조와 비변사는 논란 끝에 역관들을 심양으로 보냈다. 홍타이지는 조선 역관들을 퇴짜 놓았다. 심양을 정탐하고 돌아온 역관 일행은 청의 분위기를 보고했다.

‘군대를 일으키려는 기미도 보이지만 우리와 꼭 절교하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헷갈리는 내용이었다. 비변사는 사신을 보내 다시 화친을 도모하자고 했다.

삼사의 언관들은 저들의 본심이 드러났다며 다시 반대했다.

 

1636년 12월 초, 인조는 다시 사신을 출발시켰다.

사신이 심양으로 가고 있던 도중에도 귀환시킬 것을 요구하는 언관들의 항의는 빗발쳤다.

그러나 이미 모두 소용없는 일이었다.

홍타이지는 11월 25일, 신료들을 모아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조선을 공격하겠다는 결심을 고하는 제사였다.

바야흐로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8-05-28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