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병자호란 다시 읽기]

(34) 명과 후금의 정세,Ⅱ

Gijuzzang Dream 2008. 7. 20. 20:47

 

 

 

 

 

 (34) 명과 후금의 정세,Ⅱ

 

천계 연간 격렬한 당쟁이 빚어지고 결국 위충현을 비롯한 엄당이 국정을 장악하게 되자

그 불똥은 곧바로 산해관 바깥으로 튀었다.

요동, 요서(遼西)의 방어를 책임진 최고위 지휘관들 또한 당쟁의 여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어느 당파에 속하느냐가 경략(經略), 순무(巡撫) 등의 운명을 결정했다.

설사 뛰어난 전공이 있더라도 엄당의 눈밖에 나면, 비명횡사하는 경우가 나타났다.

동림당과 연결되어 있던 웅정필(熊廷弼)과 원숭환(袁崇煥)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오늘날 남아 있는 영원성과

문루의 모습.

 

당쟁에 희생된 웅정필과 원숭환

 

웅정필(1569∼1625)은 1619년 명의 대군이 사르후 전투에서 참패한 이후

요동경략으로 흐트러진 요동 지역의 방어태세를 수습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친히 무순 지역까지 순시하면서 요동의 형세와 후금의 동태를 파악한 뒤,

후금군의 서진(西進)을 막기 위해 이른바 삼방포치책(三方布置策)을 제시했다.

산해관 지역의 방어를 굳건히 하고, 천진(天津)과 등래(登萊) 등지의 수군을 활용하고,

조선의 도움을 받아 후금을 배후에서 견제한다는 복안이었다.

 

웅정필의 계책은 광녕순무(廣寧巡撫) 왕화정(王化貞)의 반대에 밀려 실현될 수 없었다.

왕화정은 병부상서 장학명(張鶴鳴)의 지원을 받았고 엄당 쪽에도 줄을 대고 있었다.

웅정필과 왕화정의 대립은 결국 동림당과 엄당의 대립이었던 셈이다.

두 사람의 불화 속에 1622년 광녕이 함락되었다.

패전의 책임을 지고 두 사람 모두 체포되었지만 1625년 웅정필만 사형이 집행되었다.

참수된 웅정필의 목은 변방으로 조리돌려졌다.

광녕이 함락된 데는 왕화정의 과오가 훨씬 컸음에도 정작 웅정필만 처형된 것은

엄당의 농간 때문이었다. 당쟁, 그리고 엄당의 전횡이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였다.

 

웅정필 이후 나타났던 영웅이 원숭환(1584∼1630)이다.

원숭환은 명과 후금 사이의 군사적 대결,

궁극에는 명청교체(明淸交替)라는 격동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천계 연간 명이 엄당의 전횡에 휘말려 안으로 휘청거리고 있을 때, 밖에서 후금의 군사적 위협을 막아냄으로써 국가안보를 책임졌던 동량(棟樑)이었다.

승승장구하던 누르하치도 원숭환이 버티고 있던 영원성(寧遠城·오늘날 요녕성 興城市 소재)을 넘지 못했고, 끝내는 패전의 후유증으로 죽었다.  

원숭환이 1626년 영원성에서 승리를 거두자 명의 조야는 감격했다.

1619년 사르후 전투 이후 연전연패했던 명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원숭환은 일약 ‘하찮은 여진 오랑캐’ 때문에 구겨진 중화(中華)의 자존심을 살린

민족의 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이 ‘중화의 영웅’ 또한 1630년 비명횡사했다.

전장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명 조정이 스스로 죽였다.

후금의 반간계(反間計)와 명 조정의 당쟁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나타난 결과였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사학자 옌충녠(閻崇年) 등이 중심이 되어

원숭환을 추모하고 그의 시대를 재조명하려는 분위기가 자못 활발하다.

일찍이 마오쩌둥(毛澤東)도 민족의 기절(氣節)과 애국주의를 선양하려는 차원에서

원숭환 관련 사적을 정비하라고 직접 지시했을 정도였다.

 

 

영원성에 방어의 거점을 마련하다

 

원숭환은 호(號)가 자여(自如), 자(字)가 원소(元素)로 광동성(廣東省) 출신이다.

그는 1597년(만력 25) 수재(秀才)가 되고,

1606년(만력 34)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되었다.

원숭환은 36세 때인 1619년(만력 47) 북경에서 과거에 최종 합격하여 벼슬에 진출했다.

그가 조정으로부터 처음 임명된 관직은 복건(福建) 소무현(邵武縣)의 지현(知縣)이라는 자리였다.

우리나라로 치면 지방의 군수급 관직이었다.

일개 지방관에 불과했던 원숭환의 운명이 바뀐 것은 1622년이었다.

 

지현 재직 시의 근무 성적에 대한 고과(考課)를 위해 북경에 왔는데, 그의 능력을 알아본 어사 후순(侯恂)이 원숭환을 천계제에게 추천했던 것이다.

후순은 동림당 계열이었다. 천계제는 원숭환을 병부 직방주사(職方主事)로 발탁했다. 지방관에서 일약 중앙관으로 변신시킨 파격적인 인사였다.

 

1627년까지 승진을 거듭한 원숭환은 이후 요서 지방의 방어 대책을 마련하여 북경과 산해관의 안전을 지키는 최일선에서 활약하게 된다.

산해관 방어를 위해 고심하던 원숭환은 영원을 주목했다. 영원은 산해관에서 200리 정도 떨어져 있는 ‘산해관의 현관’이었다.

요동, 요서 지역에서 육로로 산해관이나 북경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만 했던 전략 요충이었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동쪽으로는 발해만에 접해 있어 방어에 용이했다.

더욱이 해안에서 15리 정도 떨어진 바다에 각화도(覺華島)라는 섬이 자리잡고 있어서

배후의 지원 기지로 활용할 수 있었다.

 

원숭환은 산해관을 지키려면 영원에 제대로 된 중진(重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명 조정의 관인들 가운데는 산해관 바깥의 방어를 포기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618년 이래 거듭되었던 요동에서의 패전 때문에 병력이 격감하고 성지(城池) 등

방어 시설이 퇴락한 데다, 주민들이 이산했기 때문이었다.

영원을 방어해야 한다는 원숭환의 주장은 왕재진(王在晉) 등의 반대에 밀려 채택될 가능성이

별로 없었다.

반대를 무릅쓰고 황제를 설득하여 원숭환의 손을 들어준 사람은 대학사 손승종(孫承宗)이었다.

 

손승종의 지원을 얻어낸 원숭환은 1623년 영원성 수축에 감독관으로 직접 참여했다.

그는 조대수(祖大壽)와 만계(滿桂) 등을 지휘하여 담장을 높이고, 포대(砲臺)를 개수하는 등

성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1624년 9월, 영원성의 수축 공사는 완료되었다.

원숭환은 이후 성 외곽의 유민들을 불러모아 농경지를 개간토록 하고,

산해관과 해로를 통해 상인들도 끌어들여 성에 대한 물자 공급도 원활하도록 조처했다.

버려졌던 영원성은, 사람들이 돌아오고 물자가 활발하게 유통되면서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살상력 뛰어난 홍이포(紅夷砲)를 거치하다

 

영원성을 정비한 이후 원숭환이 가장 신경을 썼던 것은 명군의 화력을 증강시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주목한 것이 바로 홍이포였다.

명 조정에는 일찍부터 서양의 새로운 화포인 불랑기(佛狼機)나 홍이포 등을 활용하여

후금군을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관료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선구자는 유명한 서광계(徐光啓·1562∼1633)였다.

일찍이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를 통해 천주교에 입교하고,

서양의 과학기술에 눈을 떴던 그는 서기(西器),

그 가운데서도 서양식 화포의 활용을 열렬히 주장했다.

천계제는 서광계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포르투갈 상인들의 근거지였던 마카오(澳門)로부터

30문의 홍이포를 구입하여 북경의 도성과 산해관 등지에 배치했다.

홍이포는 기존의 중국식 화포에 비해 사정 거리가 길었을 뿐 아니라 살상력이 월등했다.

영원성 전투 이전에 요동에서 벌어진 후금군과의 전투에서도 명군은 화포를 사용했지만

그 위력은 신통치 않았다. 처음 사격 후, 두 번째 포탄을 발사하기 전에

후금군의 날쌘 기마대는 이미 명군 진영을 덮쳤다.

그런 전철을 뒤풀이하지 않으려면 훨씬 강력한 위력을 지닌 화포가 필요했다.

 

원숭환은 손승종과 상의하여 산해관에 배치되어 있던 홍이포 11문을 영원성으로 옮겼다.

그러고는 그것들을 성밖이 아닌 성루(城樓) 위로 옮겨 배치했다.

원숭환은 병사들에게 홍이포를 조작하는 기술을 숙달시키기 위해 손원화(孫元化) 등을

불러들였다. 훗날 등래순무(登萊巡撫)로 활약했던 손원화는 당시 손꼽히는 화기 전문가였다.

그는 일찍부터 포르투갈 기술자들에게 홍이포를 다루는 기술을 배웠다.

손원화는 영원성의 포병들을 훈련시켰다.

원숭환의 혜안과 손원화 등의 노력을 통해 영원성의 방어 태세는 일신되었다.

 

1626년 1월, 누르하치는 팔기군을 이끌고 요하(遼河)를 건너 영원성을 향해 진군했다.

1618년 이후 거침없이 승전을 구가해 왔던 누르하치였다.

하지만 곧 그의 머리 위로 홍이포의 불벼락이 날아든다.

누르하치의 운명이 종착역에 이르렀던 것이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7-08-29  서울신문

 

 

 

 

 

 

'[병자호란 다시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36) 정묘호란 일어나다,Ⅰ  (0) 2008.07.20
(35) 명과 후금의 정세, Ⅲ  (0) 2008.07.20
(33) 명과 후금의 정세,Ⅰ   (0) 2008.07.20
(32) 모문룡의 작폐, Ⅱ   (0) 2008.07.20
(31) 모문룡의 작폐,Ⅰ   (0) 2008.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