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29)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다, Ⅲ

Gijuzzang Dream 2008. 7. 20. 20:46

 

 

 

 

 

 (29)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다, Ⅲ

 

1624년 2월10일 이괄이 서울로 입성한 직후,

도원수 장만은 관군을 이끌고 서울을 향해 달렸다. 장만은 초조했다.

반란군에게 도성을 내주고 국왕으로 하여금 파천 길에 오르게 만든 일차적 책임이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장만은 파주 혜음령(惠陰嶺)에 이르러 부원수 이수일(李守一)과 남이흥, 정충신 등

장수들을 불러모아 작전 회의를 열었다. 장만은 두 가지 계책을 제시했다.

서울로 달려가 결전을 벌이든가,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남쪽에서 원군이 오기를 기다려

세력을 키운 뒤 공격하자는 안이었다. 그는 사실 지구전을 생각하고 있었다.

 

 

관군 승기 잡자 관망하던 민심 돌아서

 

정충신은 지구전에 반대했다.

그는 즉시 서울로 달려가 안현(鞍峴)을 장악하자고 주장했다. 높은 고개를 차지하여 진을 친다면 도성을 내리누르게 될 것이고, 관망하고 있는 도성 백성들도 관군 편으로 붙을 것이라고 했다.

또 반란군이 공격해와도 지형의 이점 때문에 승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장만은 정충신의 계책을 받아들였다. 관군은 안현을 향해 내달렸다.

 

정충신이 제일 먼저 연서역(延曙驛, 지금의 은평구 역촌동)을 통과하여 안현에 도착했다.

그는 정상으로 달려 올라가 봉수대를 지키는 병사를 생포했다. 정충신은 평상시의 봉화(烽火)를 올리도록 하여 이괄의 진영에서 안현이 탈취된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했다.

이윽고 관군의 병력이 속속 안현으로 집결했다.

때마침 동풍이 크게 불어 이괄 진영은 관군이 안현으로 모여드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에야 이괄은 관군이 안현을 접수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는 느긋했다.

이미 승승장구해온 터라 관군을 가볍게 보는 마음이 생겼던 것이다.

이괄은 항왜들을 이끌고 연서역으로 나아가 장만을 생포하려는 계책을 세웠다.

한명련(韓明璉)은 도성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안현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민심을 얻어내자고 건의했다. 이괄의 반란군은 부대를 둘로 나눠 안현을 향해 진격했다.

한명련이 항왜 수십 명과 정예 포수를 이끌고 선봉에 서고, 이괄은 중군이 되어 싸움을 독려했다.

아침 6시쯤부터 격전이 벌어졌다.

도성의 백성들은 성이나 높은 곳에 올라가 두 진영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전황은 밑에서 위쪽으로 공격하는 반란군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화살과 총탄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더욱이 장만 등은 도성을 내준 것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도 분전했다.

오전 11시쯤까지 이어지던 싸움의 중간에 바람의 방향마저 바뀌었다.

반란군 쪽으로 서북풍이 불었다. 관군은 승기를 잡았다. 반란군 진영에서 사상자가 속출했다.

많은 수가 안현을 향해 기어오르다가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다.

한명련도 화살에 맞은 뒤 퇴각했다.

 

전투 장면을 구경하던 도성 백성들은 반란군이 수세에 몰리자

돈의문(敦義門)과 서소문(西小門)을 닫아 버렸다. 관망하던 민심의 향배가 정해진 것이다.

퇴로가 막힌 반란군은 숭례문 쪽으로 향하거나 마포 서강(西江) 방면으로 도주했다.

여염으로 숨어 들어간 자들도 있었다.

 

기익헌 등이 반란군 지휘부 9명 죽여

 

2월11일 밤 아홉시 무렵, 이괄과 한명련은 패잔병을 이끌고 수구문(水口門)을 통해

서울을 탈출했다. 다음날 새벽 삼전포(三田浦)를 경유하여 광주(廣州)까지 달아났다.

이괄은 광주목사 임회(林檜)를 살해하고 경안교(慶安橋)라는 곳에서 병력을 수습하려 했다.

 

12일 아침, 정충신 등이 병력을 이끌고 추격해 왔다.

안현에서 패한 이후 반란군은 이미 기세가 꺾였다.

얼마 되지 않는 관군의 공격에 변변하게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괄은 고작 60여 명 정도의 기병만 거느리고 다시 이천(利川) 쪽으로 달아났다.

이괄을 따라가던 흥안군은 광주 소천(昭川) 쪽으로 도주했다.

관군 또한 지쳐서 추격을 멈추고 있을 때, 이괄의 진영에서 포수 한 사람이 도망쳐 왔다.

그는 반란군 내부에 이괄과 한명련의 목을 베려고 시도하는 자가 있다고 알려 주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자중지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튿날 새벽 정충신이 관군을 이끌고 이천 묵방리(墨坊里)에 당도했을 때

상황은 이미 종료되었다.

반란군 가운데 기익헌(奇益獻) 등이 이미 이괄과 한명련 등 지휘부 아홉 명을 살해한 상태였다.

한명련의 아들과 조카만 간신히 달아나고 반란군은 궤멸되었다.

흥안군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여염으로 숨어들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서울로 압송되어 돈화문 앞에서 살해되었다.

한남원수(漢南元帥) 심기원(沈器遠)과 훈련대장 신경진(申景 )이

‘흥안군이 선조의 아들이고 인조의 숙부지만 참역(僭逆)에 가담했으니 아무나 죽일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죽였던 것이다. 흥안군은 이괄에 의해 추대된 지 불과 4일 만에 몰락하고 말았다.

 

인조 일행은 안현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천안에서 들었다.

하지만 13일 새벽, 도주하던 적이 달려들 것을 우려하여 공주로 들어갔다.

2월15일, 참수된 이괄의 머리가 공주에 도착했다.

인조와 신료들은 군용(軍容)을 벌여놓고 이괄의 수급(首級)을 받는 의식을 거행했다.

반정을 일으켜 어렵사리 잡은 권력을 1년이 채 못 되어 내놓을 뻔하다가 다시 잡는 순간이었다.

 

 

난의 후유증

 

인조는 2월18일 공주를 출발하여 22일에 서울로 귀환했다.

난민들이 불을 질러 창경궁이 불탔기 때문에 인조는 경덕궁(慶德宮)으로 들어갔다.

도성은 엉망이었다.“모든 재물이 바닥나서 열흘 먹을 저축도 없는 상황”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민심이 흉흉한 것이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였다.

며칠 사이에 궁궐의 주인이 바뀌었다가, 다시 바뀌면서 처참한 살육전이 벌어졌다.

이미 파천하기 직전인 2월7일, 인조 정권은 옥에 갇혀 있던 정치범들을 즉결 처분했다.

광해군때 정승을 지냈던 기자헌(奇自獻)을 비롯 역모 가담 혐의를 받았던 37명의 목을 베었다.

이들은 의심은 받았지만, 혐의를 부인하고 있었던 데다 심문도 채 마치지 않은 상태였다.

 

이원익이 “기자헌은 반역에 가담한 죄상이 없는 데다 폐모론에도 반대했다.”고 애써 변호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정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반정공신들의 여유를 빼앗아 갔다.

격변의 와중에서 무고하게 목숨을 잃은 백성들도 적지 않았다.

안현 싸움에서 패한 이괄군이 도주하기 전에 80여 명을 학살했고,

관군이 서울을 접수하면서 다시 처참한 학살이 빚어졌다.

좌의정 윤방(尹昉)은 인조에게 ‘적에게 붙었던 백성 가운데 자신이 처단한 사람만 200명’

이라고 보고했다. 백성들 가운데는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여

‘반란군의 머리’라면서 수급을 가져다 바치는 자들이 있었다.

 

비록 잠깐이었지만 이괄이 도성을 점령했던 동안 서울의 민심은 인조정권에 몹시 적대적이었다.

백성들은 이괄군을 맞이하고, 창경궁에 불을 지르고, 내탕(內帑)을 훔치고,

반정공신들의 저택을 점거했다. 인조반정 성공 직후 자살한 박승종(朴承宗) 집안의 노비들은,

대가가 서울을 나가자마자 반정공신 김류의 집을 접수했다.

박승종의 며느리는, 역시 공신 가운데 실세였던 이귀의 집에 들이닥쳐 문을 봉해버렸다.

반정 직후 김류가 박승종의 저택을,

이귀가 박승종의 아들 박자흥(朴自興)의 저택을 차지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

 

인조가 환도한 뒤 또 다른 보복이 자행되었다.

서울을 비운 사이에 피해를 당한 관인이나 사대부들은

환도하자마자 심나는 대상자들을 포도청에 고발했다.

그 때문에 ‘포도청의 감옥이 가득 찼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아예 직접 대상자들의 집으로 쳐들어가 재물을 약탈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괄의 난은 진압되었지만 인조정권은 여러 면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논공행상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이괄로 하여금 거병하게 만든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였다.

후금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와중에 내란을 치르면서

조선의 군사적 역량은 심하게 훼손되고 말았다.

 

인조정권은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민심을 수습하고 국방력을 재건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7-07-25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