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33) 명과 후금의 정세,Ⅰ

Gijuzzang Dream 2008. 7. 20. 20:47

 

 

 

 

 

 

 (33) 명과 후금의 정세,Ⅰ

 

조선이 모문룡의 작폐에 시달리고 있던 정묘호란 무렵 대륙의 정세는 어떠했는가?

1621년 누르하치의 후금군은 요동 전체를 장악했다.

후금은 요동 벌의 중심인 심양(瀋陽)으로 천도하여 산해관까지 넘볼 기세였다.

명은 분명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명의 내정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당쟁은 격화되었고 환관들은 날뛰고 있었다.

 

 

동림서원 자리에 세워진 패루(牌樓).

 

 

격화되는 黨爭

 

1620년 7월 명의 만력제(神宗)가 죽었다. 제위에 오른 지 48년만이었다.

장남 주상락(朱常洛:1582∼1620)이 즉위하여 연호를 태창(泰昌)으로 고쳤다.

길고 긴 세월 동안 만력제의 암우(暗愚)와 태정(怠政)에 시달렸던 사람들은

태창제(光宗)에게 기대를 걸었다.

 

 

즉위 한달 만에 급사한

태창제.

태창제는 즉위 직후 내탕(內帑)에서 100만냥의 은을 풀어 누르하치를 방어하고 있는 요동의 장사들에게 지급하고, 악명 높았던 광세사(鑛稅使) 등의 파견도 중지하라고 지시했다.

조야는 감동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태창제는 즉위한 지 한달 만에 급사하고 말았다.  

다시 태창제의 아들 주유교(朱由校)가 즉위하니 그가 곧 천계제(天啓帝) 희종(熹宗)이다.

 

만력 중반부터 천계 연간까지 명 조정의 당쟁은 격렬했다.

비운의 황제였던 태창제의 존재와 급사는 당쟁을 더욱 격렬하게 만들었다.

 

만력제는 정비(正妃)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었고 후궁들에게서 얻은 5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 주상락은 왕(王)씨 성을 지닌 궁녀의 몸에서 태어났는데, 만력제는 왕씨와 주상락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만력제는 정귀비(鄭貴妃)와의 사이에서 난 삼남 주상순(朱常洵)을 총애했다.

그는 주상순을 황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신료들은 ‘장유(長幼)의 순서를 무시하는 것은 불가하다.’며 격렬히 반발했다.

 

이미 언급했지만 당시 명 예부가,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해 달라는 조선의 요청을

계속 거부한 것도 이 문제와 연관이 있었다. ‘차남’ 광해군을 승인할 경우,

만력제가 ‘삼남’ 주상순을 책립(冊立)하는 것에 반대할 명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주상락의 황태자 책립은 19년 동안이나 미루어졌고, 그는 1601년에야 비로소 황태자가 되었다.

황태자가 된 이후에도 그는 파란의 한 가운데 있었다.

1615년 장차(張差)라는 괴한이 주상락의 거처에 몽둥이를 들고 난입하여 그를 위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일이 벌어졌다.

황태자를 해치려 했던 엄청난 사건임에도 재상 방종철(方從哲) 등은 사건의 전말을 철저히

규명하려 들지 않았다. 사건의 배후에 정귀비가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동림당(東林黨) 계열의 신료들은 방종철 등을 탄핵했다.

이 사건을 ‘정격안(檄案)’이라고 한다. ‘안(案)’이란 사건을 가리킨다.

 

태창제의 급사 원인을 둘러싼 당론(黨論)도 치열했다.

태창제는 병석에 누운 뒤, 이가작(李可灼)이란 관인이 바친 붉은 환약(紅丸)을 복용했다.

홍환 복용 후 황제가 급사하자 다시 치열한 논란이 빚어졌다.

동림당 관인들은 시약(侍藥) 업무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고 방종철을 공격했고,

방종철을 옹호하는 관인들은 황제의 죽음이 홍환과는 관계가 없다고 맞섰다.

1625년(천계 5)까지 이어진 치열한 논란을 ‘홍환안(紅丸案)’이라 부른다.

 

태창제 사후, 그가 총애하던 후궁 선시(選侍) 이(李)씨는

황자 주유교를 자신의 거처인 건청궁에 감추었다. 주유교가 아직 어리다는 것을 빌미로

환관 위충현(魏忠賢)과 연결하여 조정을 좌지우지하려 했다.

동림당 계열은 그 같은 기도에 반발하여 주유교를 이씨에게서 떼어내고,

이씨를 별궁으로 옮기게 했다.

이 과정에서 또한 격렬한 정쟁이 빚어졌는데 그것이 ‘이궁안(移宮案)’이다.

 

 

東林黨과 奄黨

 

‘정격안’, ‘홍환안’, ‘이궁안’을 아울러 삼안(三案)이라고 한다.

‘삼안’을 놓고 명 조정의 관료들은 수많은 장주(章奏)를 올려 논쟁했고

그 과정에서 당쟁은 격화되었다.

천계 연간(1621∼1627) 명 조정에는 절당(浙黨), 초당(楚黨), 선당(宣黨), 제당(齊黨), 곤당(昆黨) 등 여러 당파가 있었지만 당쟁의 중심은 동림당과 엄당이었다.

 

동림당은 만력 초기 재상이었던 장거정(張居正)의 전횡에 반대, 도전했던

청의파(淸議派) 관료인 고헌성(顧憲成), 추원표(鄒元標), 조남성(趙南星) 등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들은 장거정이 죽은 뒤에도 내각과 환관들의 비정을 비판했다.

동림당은 강소성(江蘇省) 무석(無錫)에 있는 동림서원(東林書院)을 거점으로 삼았다.

주자학 강학(講學)을 통해 자파 세력을 결집하는 한편,

조정의 정치적 현안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개진했다.

그들이 황태자 책립, 인사, 요동 방어 등 다양한 문제를 놓고

내각이나 환관들과 대립하게 되면서 당쟁은 격화될 수밖에 없었다.

 

엄당은 환관들의 무리를 가리킨다.

일본의 동양사학자 미타무라 다이스케(三田村泰助)는

환관을 가리켜 ‘만들어진 제3의 성(性)’이라고 표현했다.

환관 가운데는 종이를 발명한 후한(後漢)의 채륜(蔡倫)이나

명 초기 아프리카까지 이르는 대원정(大遠征)을 주도했던 정화(鄭和)처럼 기념비적인 족적을

남긴 인물도 있었다. 하지만 환관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는 그다지 좋지 않다.

환관이 맡은 일은 천한 것이었지만

때로 천자나 후궁과의 연결을 통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기도 했다.

궁극에는 국가의 명운마저 좌우할 정도로 막강한 권세를 휘두른 자들도 나타났다.

명대에 특히 환관의 폐해가 심했다. 왕진(王振), 유근(劉瑾), 위충현 등이 대표적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삼안’처럼 궁정의 문제가 정쟁의 현안이 될 경우,

환관들이 그 과정에 개입하고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높았다.

천계 연간 위충현이 엄당을 이끌며 조야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것은 유명하다.

 

 

끔찍한 魏忠賢의 시대

 

위충현(?∼1627)은 하북성(河北省) 숙녕현(肅寧縣) 출신이었다.

젊은 시절 무뢰배였던 그는 도박에 모든 것을 탕진한 뒤, 스스로 환관이 되었다.

본래 이진충(李進忠)이었던 이름도 위충현으로 바꾸었다.

천계제가 즉위하면서 위충현의 권세는 날로 높아졌다.

1621년 사례감(司禮監)의 병필태감(秉筆太監)이 되었다. 환관들의 수장 격이었다.

그는 황제 직속의 비밀 경찰인 동창(東廠)의 책임자도 겸했다.

 

1624년, 동림당원 양련(楊漣)은 위충현을 탄핵했다. 그에게 스물 네 가지의 잘못이 있다고 했다.

위충현은 동창의 책임을 사임하는 등 일단 몸을 낮춰 위기를 벗어났다.

이윽고 천계제의 신임이 회복되자 보복이 시작되었다.

위충현은 1625년 동림당의 핵심 인물인

양련, 좌광두(左光斗), 원화중(袁化中), 위대중(魏大中), 주조서(周朝瑞), 고대장(顧大章) 등 6인을 ‘수뢰’ 혐의로 탄핵했고, 곧 이들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다.

위충현의 심복 허현순(許顯純)은 이들에게 상상을 초월한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고문을 못 이겨 고대장은 자살했다. 차라리 그가 행복했다.

나머지 5명의 시신은 전부 문드러졌다. 

 

 

고헌성과 고반룡(홀을 들고 있는 사람)

 

위충현은 1626년에도 옥사를 일으켰다.

고반룡(高攀龍), 주순창(周順昌), 황존소(黃尊素) 등 7명에게 체포령이 떨어졌다.

고반룡은 물에 몸을 던져 자살했고, 나머지 6명은 예의 혹형을 받았다.

환관들이 금의위(錦衣衛)에서 행한 고문은 잔혹했다.

끌려온 자들에게 5가지의 도구를 이용하여 혹형을 가한 후 가죽을 벗기기도 했다고 한다.

주순창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위충현을 비판하다가 이를 모두 뽑혔다.

 

동림당을 탄압하면서 위충현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다.

그 배경에는 천계제의 방임이 자리잡고 있었다.

동림서원을 비롯한 동림당의 근거지는 파괴되었고,

각 지역에는 위충현을 모시는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모문룡도 가도에 위충현을 기리는 생사당을 세웠다.

위충현의 전횡에 절망한 관료들은 사직했고, 변방의 지휘관들 상당수는 누르하치에게 귀순했다.

누르하치의 철기(鐵騎)는 달려오고 있는데 명은 안으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 한명기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7-08-22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