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안평대군의 비해당과 무계정사 (7) 안평대군의 집과 별장 ● 세종이 당호를 지어준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安平大君 · 1418∼1453)이 혼인하면서 경복궁에서 살림을 내어 나간 뒤에, 인왕산에 저택을 짓기 시작했다. 1442년 6월 어느날 경복궁에 들어가자 세종이 물었다. “네 당호(堂號)가 무엇이냐?” 안평대군이 대답을 못하자, 세.. 지켜(연재자료) 2008.03.17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필운대의 중인들 (8) 중인들 필운대 · 육각현서 노닐다 인왕산의 네 구역 가운데 안평대군의 무계정사가 인왕산의 왼쪽 기슭이라면, 필운대와 육각현은 오른쪽 기슭이다. 필운대는 현재 배화여자고등학교 안에 있다. 필운대 정자에서는 대원군 당시 핵심측근이었던 중인들이 시를 지으며 풍류를 즐겼다. 정선이 그린 .. 지켜(연재자료) 2008.03.17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필운대의 풍월 (9) 필운대 풍월과 꽃구경 ● ‘장안의 명승´에 사람들 모이다 조선시대의 체제와 제도를 명문화 한 ‘경국대전(經國大典)’ 한품서용조(限品敍用條)에 의하면 “문무관 2품이상 관원의 양첩 자손은, 정3품까지의 관직에 허용한다.”고 하였으며 “7품 이하의 관원과 관직이 없는 자의 양첩 자손은, .. 지켜(연재자료) 2008.03.17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임준원 - 빈자 도와준 호걸 (10) 빈자 도와준 호걸 임준원 중인들은 서울의 북쪽 인왕산 일대와 남쪽 청계천 일대에 주로 모여 살았다. 지역에 따라 직업과 재산, 관심사가 달랐다. 서당 훈장으로 많은 제자를 길러낸 위항시인 정내교(鄭來僑·1681∼1757)는 스승 홍세태의 친구 임준원(林俊元)의 전기를 지으면서, 이 두 지역의 민속.. 지켜(연재자료) 2008.03.17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국수(國手) 유찬홍 (11) 신분의 벽 못 넘은 國手 유찬홍 인왕산에 살면서 위항시인과 가난한 이웃들을 도와주던 임준원의 집에서 가장 오래 얹혀 살았던 시인은 홍세태(洪世泰)와 유찬홍(庾纘洪)이다. 홍세태의 제자 정내교는 스승이 임준원의 집에 얹혀 살았던 이야기를 ‘임준원전’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유공(유찬홍).. 지켜(연재자료) 2008.03.17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역관 홍세태 (12) 日 · 淸도 인정한 역관시인 홍세태 인왕산 호걸 임준원의 집에 가장 오래 얹혀 살았던 위항시인은 홍세태(洪世泰 · 1653∼1725)이다. 중인들은 대대로 같은 직업을 물려받았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우들까지 무인으로 활동하던 집안에 태어나 역관이 되었다. 23세에 역과에 합격하고 30세에 .. 지켜(연재자료) 2008.03.17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홍세태의 활약 (13) 홍세태의 활약상 북악산 아래 장동 김씨들이 모여 살았다. 영의정 김수항의 셋째아들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이 1682년에 낙송루(洛誦樓)라는 만남의 공간을 꾸리자 노론 계열의 시인들이 자주 모여 시를 지었다. 한 동네에 살았던 홍세태도 이곳에 드나들며 동갑내기 김창흡 · 이규명과 신분을.. 지켜(연재자료) 2008.03.17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서예가 마성린 (14) 서예가 마성린의 일생 임준원과 홍세태, 유찬홍 등의 낙사(洛社) 동인들 이후에도 인왕산과 필운대는 여전히 중인문화의 중심지였다. 위항시인들이 대개 한양성의 서쪽 인왕산에 많이 모여 서사(西社)라는 이름을 썼지만,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막연한 지칭이다. 최윤창이 ‘이른 봄 서사에서 두보 .. 지켜(연재자료) 2008.03.17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가객 박효관 (15) 가객 박효관의 활약 ‘공산에 우는 접동 너는 어이 우짓는다. 너도 나와 같이 무슨 이별 하였느냐. 아무리 피나게 운들 대답이나 하더냐.’ 한양 인왕산 필운대의 마지막 주인은 문화관광부에서 지난 2002년 8월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한 가객(歌客) 박효관(朴孝寬·1800∼1880?)이다. 호는 운애(雲崖).. 지켜(연재자료) 2008.03.17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안동 장씨 - 역관의 명문 (16) 역관 명문 인동 장씨 지금까지 확인된 조선시대 잡과(雜科) 합격자는 모두 6122명이다. 이 가운데 역과가 2976명, 의과가 1548명, 음양과가 865명, 율과가 733명 순이었다. 산학(算學)은 정조 즉위년(1756)부터 주학(籌學)이라고 했는데, 잡과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취재(取才)를 통해 1627명 이상 선발했다... 지켜(연재자료) 2008.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