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가객 박효관

Gijuzzang Dream 2008. 3. 17. 20:16

 

 

 (15) 가객 박효관의 활약

 
‘공산에 우는 접동 너는 어이 우짓는다. 너도 나와 같이 무슨 이별 하였느냐.
아무리 피나게 운들 대답이나 하더냐.’
 
한양 인왕산 필운대의 마지막 주인은
문화관광부에서 지난 2002년 8월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한
가객(歌客) 박효관(朴孝寬·1800∼1880?)이다. 호는 운애(雲崖)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이 일대에서 몇십년 풍류를 즐기다 세상을 떠난 뒤
그가 활동하던 운애산방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운애산방은 배화학당이 들어섰던 자리이다.
 
 

 

대원군이 후원한 당대 가객

 

박효관의 인적사항을 설명할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그가 과연 중인 출신인지도 확실치 않다.

 

유봉학 교수가 ‘공사기고(公私記攷)’를 소개한 글에 의하면, 박영원 대감의 겸인으로 일했던 서리 이윤선이 1863년에 재종매를 혼인시키면서 박효관을 동원했는데 수군(守軍)이라는 직함으로 불렀다. 그렇다면 그가 오군영(五軍營)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장악원의 악공들은 노비 출신이지만, 오군영의 세악수(細樂手)들은 노비가 아니다. 오랫동안 연주를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했고, 최소한의 한문도 쓸 수 있어야 했다.

 

그가 가곡(歌曲)의 정통성에 대해 자부심이 높았던 것을 보면, 최소한 중간계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군영 세악수들은 18세기 이래 민간의 가곡 연행(연회연)에 점점 더 깊이 개입해, 군인 봉급에 의존하지 않고 민간 잔치에 불려나가 연주하고 받는 돈으로 살게 되었다. 그러나 장악원 악공들은 고유업무가 있기 때문에, 두가지 일을 하는 것이 자유롭지 않았다.

 

‘만기요람’을 찾아보면 오군영에 배속된 군사들의 급료미는 매삭 9두이고, 세악수는 6두로 되어 있다.

국가에서는 낮은 보수를 주는 대신, 군악 연주 외에 민간 행사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준 듯하다.

용호영의 군악대와 이패두가 거지들의 풍류잔치에 억지로 불려나갔다가 행하(출연대가)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이야기를 4회에서 소개했다.

 

 

구포동인(안민영)은 춤을 추고 운애옹(박효관)은 소리한다.

벽강은 고금(鼓琴)하고 천흥손은 피리한다.

정약대 · 박용근 해금 적(笛) 소리에 화기융농하더라.

 

 

박효관의 연행에 참여한 기악연주자들은 대부분 오군영 세악수였다.

 

신경숙 교수가 ‘고취수군안(鼓吹手軍案)’ 등을 분석해 세악수 명단을 분석한 연구에 의하면,

‘금옥총부’ 92번 시조에 활동모습이 담긴 천흥손 · 정약대 · 박용근 등은

오군영 소속의 세악수임이 밝혀졌다.

 

군안(軍案)에는 세악수의 인적사항에 부(父)를 밝혔는데,

친아버지뿐만 아니라 보호자나 스승 역할을 하는 사람 이름도 썼다.

피리를 전공했던 용호영의 군악수 천흥손이

대금 이귀성 · 윤의성, 피리 김득완의 부(父)로 올라 있었다.

정형의 세악편성에서 세피리는 두명이 필요했으니,

천흥손은 하나의 악반을 주도하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구포동인은 대원군이 안민영에게 내린 호인데,

여든이 된 스승은 노래하고 환갑이 지난 제자는 춤을 추었으며, 후배들은 반주했다.

안민영이 사십년 배웠다고 했으니, 제자의 제자들까지 박효관을 찾아 모인 셈이다.

 

 

인왕산하 필운대는 운애선생 은거지라.

풍류재사와 야유 사내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날마다 풍악이요 때마다 술이로다.(‘금옥총부’ 165번)

 

 

운애산방서 승평계와 노인계 주도

 

그가 필운대에 풍류방을 만들어 제자들을 가르치며 스스로 즐기자,

대원군이 그에게 운애(雲崖)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안민영은 그를 운애선생이라 불렀으며,

풍류재사와 야유 사내들은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박선생’이라 불렀다.

위항시인들이 시사(詩社)를 형성한 것 같이, 풍류 예인들은 계( )를 만들어 모였다.

 

안민영은 ‘금옥총부’ 서문에서 그 모임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때 우대(友臺)에 아무개 아무개 같은 여러 노인들이 있었는데,

모두 당시에 이름 있는 호걸지사들이라, 계를 맺어 노인계(老人 )라 하였다.

또 호화부귀자와 유일풍소인(遺逸風騷人)들이 있어 계를 맺고는 승평계(昇平 )라 했는데,

오직 잔치를 베풀고 술을 마시며 즐기는 게 일이었으니 선생이 바로 그 맹주(盟主)였다.”

 

 

안민영은 ‘금옥총부’ 68번에서

“우대의 노인들이 필운대와 삼청동 사이에서 계를 맺었다.”고 분명한 장소까지 밝혔다.

유일풍소인은 세상사를 잊고 시와 노래를 벗삼은 사람이다.

벼슬한 관원은 유일(遺逸)이 될 수 없고, 풍류를 모르면 풍소인(風騷人)이 될 수 없다.

경제적인 여유를 지닌 중간층이 풍류를 즐겼던 모임이 바로 승평계이고,

평생 연주를 즐겼던 원로 음악인들의 모임이 바로 노인계이다.

 

성무경 선생은 “박효관의 운애산방은 19세기 중후반 가곡 예술의 마지막 보루”라고 표현했다.

가곡은 운애산방을 중심으로

세련된 성악장르로 거듭나기 위해 치열한 자기연마의 길에 들어섰던 것이다.

그러한 결과를 스승 박효관과 제자 안민영이 ‘가곡원류’로 편찬하였다.

 

 

안민영과 편찬한 ‘가곡원류’

 

음악에 여러 갈래가 있지만, 박효관과 안민영의 관심은 가곡에 있었다.

문학작품인 시조를 노래하는 방식은

시조창(時調唱)과 가곡창(歌曲唱)이 있다.

시조창은 대개 장고 반주 하나로 부를 수 있고, 장고마저 없으면

무릎 장단만으로도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가곡창은 거문고 · 가야금 · 피리 · 대금 · 해금 · 장고 등으로

편성되는 관현반주를 갖춰야 하는 전문가 수준의 음악이다.

오랫동안 연습해야 하고, 연창자와 반주자가 호흡도 맞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객을 전문적인 음악가라고 할 수 있다.

 

전문적인 가객을 키우려면

우선 가곡의 텍스트를 모은 가보(歌譜)가 정리되고,

스승이 있어야 하며, 가곡을 즐길 줄 아는 후원자가 있어야 했다.

 

박효관과 안민영은 사십년 넘게 사제지간이었으며,

대원군같이 막강한 후원자를 만나 가곡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이 10년 섭정을 마치고 2선으로 물러서자

이들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언젠가는 천박한 후원자들에 의해 가곡이 잡스러워질 것을 염려한 것이다.

 

 

전통음악 가곡 보전

 

박효관이 1876년 안민영과 함께 ‘가곡원류(歌曲源流)’를 편찬하면서

덧붙인 발문에 그 사연이 실렸다.

 

“근래 세속의 녹록한 모리배들이 날마다 서로 어울려 더럽고 천한 습속에 동화되고,

한가로운 틈을 타 즐기는 자는 뿌리없이 잡된 노래로

농짓거리와 해괴한 장난질을 해대는데, 귀한 자고 천한 자고 다투어 행하를 던져 준다.

... (줄임) ...

내가 정음(正音)이 없어져 가는 것을 보며 저절로 탄식이 나와,

노래들을 대략 뽑아서 가보(歌譜) 한권을 만들었다.”

 

 

그는 이론으로만 정음(正音) 정가(正歌)의식을 밝힌 것이 아니라, 창작으로도 실천했다.

 

안민영은 사설시조도 많이 지었는데, 박효관이 ‘가곡원류’에

자신의 작품으로 평시조 15수만 실은 것은 정음지향적 시가관과 관련이 있다.

 

 

님 그린 상사몽(相思夢)이 실솔(귀뚜라미)의 넋이 되어

추야장 깊은 밤에 님의 방에 들었다가날 잊고 깊이 든 잠을 깨워볼까 하노라.

 

사설시조는 듣기 좋아도 외우기는 힘든데, 훌륭한 평시조는 저절로 외워진다.

박효관의 시조는 당시에 널리 외워졌다.

 

위 시조는 고교 교과서에 실려 지금도 널리 외워지고 있다.

님 그리다 죽으면 귀뚜라미라도 되어

기나긴 가을 밤 님의 방에 들어가 못다 한 사랑노래를 부르겠다고

구구절절이 사랑을 고백할 정도로, 그의 시조는 양반 사대부의 시조에 비해 직설적이다.

 

고종의 등극과 장수를 노래한 송축류, 효와 충의 윤리가 무너지는 세태에 대한 경계,

애정과 풍류, 인생무상, 별리의 슬픔 등으로 주제가 다양하다.

 

삼대 가집으로는 ‘청구영언’과 ‘해동가요’ ‘가곡원류’를 든다.

가곡원류는 다른 가집들과 달리,

구절의 고저와 장단의 점수를 매화점으로 하나하나 기록해 실제로 부르기 쉽도록 했다.

 

남창 665수, 여창 191수, 합계 856수를 실었는데, 곡조에 따라 30항목으로 나눠 편찬하였다.

몇 곡조는 존쟈즌한닙, 듕허리드는쟈즌한닙 등의 우리말로 곡조를 풀어써,

가객들이 찾아보기도 편했다. 그

랬기에 가장 후대에 나왔으면서도 10여종의 이본이 있을 정도로 널리 사용되었다.

이어 신문학과 신음악이 들어오면서 이 책은 전통음악의 총결산 보고서가 되었다.

-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서울신문, 2007-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