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조선을 서양에 알린 2대 명저 - 하멜의 <하멜표류기>와 지볼트의 <한국>

Gijuzzang Dream 2011. 1. 3. 21:42

 

 

 

 

 

 

 

 

 하멜의 <하멜표류기>와 지볼트의 <한국>

 

 조선을 서양에 알린 2대 명저

 

 

 

[19세기 초 강진사람들]

 

하멜 - 189년 뒤 일본에 표류한 강진주민들 독일인 의사에 문자, 글 등 소개

 

 

 


 

 

핸드릭 하멜을 아는 사람은 있지만 폰 시볼트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한국을 서양에 소개했다는 것이다.

하멜은 한국을 서양에 최초로 소개한 인물이고,

시볼트는 그로부터 180년 후에 한국을 보다 체계적으로 서양에 알린 인물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또 있다. 강진과 인연이 깊다는 것이다.

하멜은 강진에서 7년 동안 억류생활을 했었고,

일본에 거주했던 시볼트는 한국에서 표류(漂流)해 온 강진사람들을 만나

여러가지 이야기를 듣고 한국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기록한 책을 썼다.

 

그러나 시볼트는 국내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강진과 특별한 인연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책 한국관련 내용을 두차례에 걸쳐 소개하고,

강진과 제주뱃길을 중심으로 발생했던 서남해안 사람들의 일본 표류실태를 소개한다. / 편집자 주. 

 


 

 

 


 1. 강진과 하멜과 시볼트

 
 
 

폰 시볼트(Fr. von Siebold)

 
 

우리나라가 서양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강진 병영에서 억류생활을 하던 핸드릭 하멜(H.Hamel) 일행이

1666년 9월 강진을 탈출해 저술한 ‘하멜표류기’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강진땅과 강진사람은 하멜일행이 한국에서 13년 억류생활을 하면서 마지막 7년간을 마주했던 대상이다.


하멜표류기에 강진에 대한 인상이 강하게 베어있는 것은 물론이고

이같은 감촉들이 서양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전달됐을 것으로 예상할 만하다.

서양에 최초로 전달된 한국의 이미지는

강진땅과 강진사람들의 영향이 많이 작용했을 가능성은 늘 존재한다.


시간과 공간을 조금 건너 뛰어보자.

하멜의 ‘하멜표류기’가 1668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처음 발표된 이후

서양에서 ‘미지의 나라’ 한국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은 여전히 베일속에 가려진 나라였다.


우리나라의 쇄국정책은 하멜표류기가 발간된 후에도 두세기에 걸친 1880년대 초까지 계속됐다.

서양인들은 여전히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한 발자욱도 들여 놓지 못했다.

한국을 연구하려는 사람들은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 전해듣는 ‘한 다리 걸쳐 듣는’ 정보가 전부였다.

 

하멜표류기는 한국에 대한 직접적 관찰에 토대를 두었다는 장점이 있는 가운데

한 선원이 작성한 견문기 수준을 넘지 못해

한국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는 여러 가지 부족함이 많았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였다.


그러다가 한국이 서양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반부터였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고영근 명예교수는

1989년 교수시절 발표한 그의 논문 ‘폰 시볼트(Fr. von Siebold)의 한국기록 연구’에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파견원 시볼트란 사람이 7년간의 일본활동을 하면서 저술한 <일본>이란 책에서

한국이 서양에 총체적으로 소개 됐으며, 시볼트는 전남 강진에서 일본으로 표류한 강진사람들의 말을 듣고

언어, 민속적인 판단자료를 얻었다”고 밝히고 있다.


바람에 떠밀려가 일본에 표착한 강진사람들이 독일 의학자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사실은 이렇게 역사앞에 등장했다.


시볼트는 독일의 의학자이자 자연과학자였으며,

네덜란드 국왕 시의(侍醫, 왕족의 진료를 맡은 의사)의 추천으로 네덜란드가 교역하고 있었던

일본의 나가사키현(長崎) 데지마(出島, 나가사키 남쪽에 있는 작은 인공섬)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시볼트가 만난 강진의 상인들과 어민들의 모습이다.

시볼트는 강진사람들을 만나며 빌레베뉴베 라는 네덜란드인 화공(畵工)을 대동해 그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게 했다. 시볼트는 김치윤이란 사람과 허사첨, 상인, 선장, 선원, 견습선원등 6명과 대화를 나누는데 그림속의 사람숫자가 정확히 여섯명이다. 다음호에 이들의 모습을 보다 자세하게 게재할 계획이다.

<출처: 고영근의 책 '한국어문운동과 근대화' 335 p. 참조>

 
 

 

부산과 가장 가까운 지역이었던 나가사키에는

일본의 서남부 각 지역으로 표류해 온 한국인들을 수용하는 시설이 있었는데,

시볼트는 평소에 “이들을 관찰할 수 있는” 정도의 기회를 갖고 있었다.

일본정부가 한국인들과의 접촉을 제한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시볼트는

1828년 3월 17일 ‘그들의 태도가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일련의 한국인들과 접촉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전남 강진에서 표류해 온 36명의 주민들 이었다.

시볼트는 일본관리의 도움으로 이들 중 네사람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된다.


시볼트는 강진사람들과 접촉한 후

“나는 강진사람들과 접촉 한 덕택에 조선의 문화, 학문 및 예술등에 관하여 한층 더 자세히 조사하고,

이 미지(未知)의 국가에 관해서 확실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고 그의 저서에 적었다.


시볼트는 강진사람들로부터 전해들은 말과 일본에서 취합한 자료를 근거로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산업, 사회, 문화의 각 방면에 걸친 내용을

그의 저서 <일본>에 삽입한 형태로 1932~1851년 사이에 발간했다.


당시 시볼트가 소개한 한국관련 자료는 서양에서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고영근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러시아에서는 1854년 번역본이 발간됐다.

프랑스에서는 시볼트의 저서를 근거로 1864년에 ‘한국어 문법’이 나오는 등

여러 분야의 연구에서 시볼트의 한국기술이 인용되고 참고됐다.


강진에서 탈출한 하멜이 <하멜표류기>를 발간한 지 180여 년 만에,

일본에 표류한 강진사람들이 한 독일인 학자에게 구술한 말들이 책으로 발간돼

한국을 서양에 알리는 본격적인 계기가 됐다는 것은 상당한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를 최초로 서양에 알린 하멜일행이 마지막 7년 동안 만났던 사람들이 강진사람들이었으며,

그 후 우리나라를 서양에 구체적이고 학문적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들도

강진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국문학자인 고영근 교수는

당시 강진사람들이 구술한 우리나라의 언어와 문자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시볼트의 저서에 대한 관심을 깊게 표명하고 있다. 

 

강진을 중심으로 한 옛날 남해안의 표류(漂流)관계 자료를 취재하면서 고영근 교수의 글을 접하게 됐다. 

이를 근거로 시볼트의 자료를 더 찾아보기 위해

최근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조선대학교도서관 등을 뒤져

고영근 교수의 논문과 그의 저서 <한국어문운동과 근대화>,

유상희 교수가 1987년에 번역한 <시볼트의 조선견문기>란 책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하나같이 1980년대에 발간된 것들이였으며 그 이후에 진행된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그만큼 시볼트에 대한 한국내 관심은 미미한 편이다.

고영근 교수는 “시볼트의 한국기록은 그것이 서양사회에 미친 영향에 비하면

언어학적 업적외에 거의 주목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나가사키의 표착민 수용소에서 생활하는 한국 표류민들의 생활상을 그린 것이다. 그림속의 사람들은 시볼트가 당시 대화를 나누었던 강진사람들은 아니다. 시볼트는 표류해 온 다른 지역 사람들과 종종 접촉할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 나가사키 화가 도이오스케란 사람이 그린 것이다.

<출처: 고영근의 책 '한국어문운동과 근대화' 335 p.참조,1998년.>

 

 

 

그 이유에 대해 고 교수는

“한국기록이 <일본>이라는 큰 책속의 마지막에 실려 있는데다

값비싼 귀중도서로 분류돼 있기 때문일 것”이라며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있는 1852발행본과 1931년 발행본은

일제시대부터 귀중본으로 분류돼 특수서고에 보관돼 있다”고 말했다.


고 교수의 논문속에 나타난 몇 가지 기술중에서 단연 기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시볼트란 독일학자가 강진사람을 만난 후 갖게 된 한국에 대한 호의적인 이미지였다.

이 이미지는 한국에 대한 전체적인 이미지로 서양에 소개됐다.


시볼트의 호의적 이미지가 중요한 것은

당시까지 한국에 대한 서양사회의 이미지가 좋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고 교수에 따르면 서양에서는 하멜일행의 고생담이 소개돼 있는 <하멜표류기>의 영향을 받아

한국인들이 반기독교적이고 야만성이 있는 민족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고 교수는 논문을 통해 “시볼트는 자신의 저서에서 한국인의 성격이 이전에 알려져 있던 것 보다

훨씬 우호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며

“이는 이전의 서양인들의 한국관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크다”고 했다.


전술(前述)한 것처럼, 시볼트는 1828년 3월 17일 일본관리의 도움으로

나가사키에서 표류해 귀국을 기다리고 있던 강진사람을 만난다.

나가사키는 일본 정부가 표류 외국인들이 거주하도록 허가한 구역이었다.

한국의 표류인들은 이곳에서 한반도로 부는 동남풍을 기다리며 때에 따라서는 몇 달을 기다리곤 했다.

이곳에서 네덜란드 상관(商館)이 있는 데지마라는 곳으로부터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시볼트가 한국 사람을 만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시볼트는 원할한 대화를 위해 몇 사람을 골랐던 것으로 보인다. 총 36명의 강진사람 표류민중에

‘교양이 있고 명망이 높아 보이는 남자 4명(김치윤, 허사첨, 고응양, 곽성장)’과

복장의 차이를 살피기 위해 선원과 견습선원을 더 불러 모두 6명의 강진사람과 대화를 하게 된다.


시볼트는 강진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한국의 문자와 풍습등을 듣고 이를 기록하는 한편

함께 데리고 간 화가들에게 강진사람들의 얼굴과 모습,

이들이 구술하는 한국인들의 생활 모습 등을 그리게 해 이를 나중에 책을 발간할 때 첨부해 발행한다.

그야말로 한국을 소개하는 종합 안내서를 만들어 낸 것이다.


강진사람들은 만난 시볼트는

 

‘하늘과 물의 반사빛으로부터 눈을 보호하려는 듯이 눈썹이 쳐지고

상대방으로부터 눈을 피한 채 움직이지 않은 모습과

서민계급의 거친 골격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다’고 적고 있다.

   
 
 

시볼트의 화공이 그린 조선인 배.

강진사람들의 배인지는 확실치 않다. 시볼트는 배가 모두 가볍고 간소하고 길이는 9m부터 15m까지 이며, 철등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배를 만든 것이 주목할만 하다고 했다.

<고영근의 책 '한국어문운동과 근대화' 336p.1998>

 
 

시볼트는 강진사람들에게 염색된 배와 네덜란드 사람들이 즐겨마시는 게너버란 음료수를 선물로 주었다.

선물을 받은 강진사람들은 자신들이 난파당시 건져낸 소지품을 건네주었다.

그것은 몇 권의 필사본 책과 두루마리 그림 몇 폭, 작은 소반 한개, 몇 개의 항아리와 사발이었다.


강진사람을 만나고 그동안 일본에서 수집한 자료를 취합해 저술을 남긴 시볼트는

한국이 서양인들에게 배타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을 그의 저서에서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자국의 생산품과 기술, 나라안의 교역만으로 삶에 만족하고 있는 국민에 대해

정부가 평온, 무사한 나날을 확보해 주려면 외국인에 대한 엄격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민들이 유럽인들을 받아드리지 않고 있지만 고의든지 우연이든지

바닷가에 표착한 서양인들을 불행하게 만들기는 커녕 되도록 해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면서 시볼트는

한국인은 오랜 옛날부터 자신의 고유한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있고

지적 수준이 오히려 일본보다 앞서고 있다는 점도 중시하고 있다.

또 한국민과 교섭을 하려면 미개인나 유목민족을 대하듯이

무력을 행사하거나 호의를 베푸는 식으로 하지 말라고 권장한다.

대신 한국정부의 정신, 다시말해 왕권중심이라는 통치원리를 탐색하고

한국인들의 풍습과 관습, 언어등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결론짓고 있다.

한 나라와 주민을 인식하는 방법을 제대로 파악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시볼트가 이같은 인식을 하기까지 강진사람들과의 만남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게

조금은 자부심으로 다가온다.

 

 

 

 

2. 시볼트가 보았던 강진사람들


성격 쾌활, 품위 당당, 분명한 이목구비
한시적어 주고, 천자문도 선물

 

 

   
 시볼트의 책에 소개된 당시 큐슈지방에 표류한 조선사람들이 입고 있었던 옷가지들. 강진사람들이 입었던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1828년 3월 17일 일본 나가사키에서 독일인 의사 폰시볼트(Fr. von Siebold)가 만난 강진사람들은

난생 처음보는 푸른눈의 서양사람을 친절하게 맞아 대화를 나누었다. 

 이들은 서양학자에게 한국의 언어와 지리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였고,

한시를 지어주는가 하면,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시볼트는 이들이 3척의 배에 타고 조선의 남서해안인 강진을 출발해

일본의 규슈(九州)의 서쪽해안이나 로토렛토(五島列島)에 표류해 온 사람들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유상희 교수가 1987년에 번역한 ’시볼트의 조선견문기‘를 보면

시볼트는 강진사람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 불행한 사람들은 난파선에서 건져 낸 그들의 소지품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은

모조리 몸에 지니고 있는 듯이 보였다. 몇몇 사람은 저고리 몇벌을 두껍게 껴 입고 있었다”


망망대해를 표류해 온 사람들로서 차림새는 조금은 초라했지만

시볼트를 만난 강진사람들은 박식했고, 유쾌했으며,

그동안 시볼트가 풀지 못했던 숙제를 풀어 준 향도와도 같은 존재였다.


시볼트는 강진사람을 만나고 나서

“나는 전부터 교제해 온 일본인등으로부터 조선의 언어와 문자, 국토 및 풍속이나 습관등에 대해

약간의 지식을 얻고 있었으나 오늘 강진사람들과 만남을 통해 그동안 풀지 못했던 숙제를 풀수 있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다. 이들에게서 얻은 조선에 대한 언어와 문자에 관한 정보는

이 방면에 지식이 부족한 유럽인들에게 큰 자료가 될 것으로 믿는다”고 했다 

 


그 강진사람들을 만나 보자.


당시 시볼트를 만난 사람들은 김치윤(金致潤)과 허사첨(許士瞻)등이며,

나머지는 상인, 선장, 선원, 견습선원등이었다.

두사람은 실명을 적었고 나머지는 상인, 선장등 그들의 직업을 적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몇가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것이 있다.

1800년대 강진군은 강진현이란 행정구역으로 있었으며 강진현에는 현재의 강진군 지역을 비롯해

지금의 완도군 고금도와 신지도, 약산도, 청산도가 포함돼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볼트가 만난 ‘조선국 전라도 강진출신’ 사람들은

행정구역상으로 지금의 강진군 지역 사람일 수도 있고,

완도소속의 인근 섬지역 사람들 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강진사람이란 의미는 오늘날 강진주민들에게 축소되지 않는다.

과거의 지역명칭은 오늘날 호칭되는 지역과 일치해 사용하는게 관례다.

이를테면 완도의 청해진이 9세기에는 전남서남해안 지역을 총칭하는 이름이었으나

오늘날 완도군으로 국한돼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후술하겠지만 시볼트가 만난 사람들의 대화내용이나

즉석에서 지어 부른 한시(漢詩), 구술한 민요등에서도 섬지역의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옷차림이나, 말씨, 시볼트가 느낀점등을 분석할 때

이들은 지금의 강진사람들이었을 것이라는 것에 무게가 실린다.

 그러므로 추가적 사료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이들을 강진사람들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 싶다.


   

 ▲ 표류한 강진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소지품들.

항아리, 도지기, 불상 등이 눈에 띈다.

   

일본측 공식자료에도 당시 일본의 큐슈나 오도열도로 표류한 강진사람들의 기록이 있는지도

확인해 볼 일이다. 기자는 한일간 표류취재를 위해 구입해 놓았던 자료중에서

지난 2000년 8월 발간된 ‘조선시대 한일표류민 연구(한일관계사 학회편, 225페이지 참조. 국학자료원)’라는 책속의 학국측 표류자료에서 강진사람들의 표류 기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자료는 일본인 지내민(池內敏)씨의 저서

‘(근세조선인(近世朝鮮人)의 일본표착년표(日本漂着年表)’를 정리한 것이다.


자료에 따르면 1827년 9월 초 강진을 출발해 충청도 은진향이라는 곳으로 물건을 팔러가던

주민 11명과 아이 1명이 항해길에 표류해 일본 오도 열도에 9월 12일에 표착했다.

당시 기록에는 1827~1828년 사이에 강진사람들이 일본으로 표착한 기록이 딱 이 한가지 사례이고,

표착지역도 오도열도인 점을 감안하면

1827년 9월 12일 오도에 표착한 사람들이 이로부터 6개월 후 시볼트를 만난 사람들로 추정되고 있다.

 

시볼트도 그의 저서에 적었듯이 일본에 무사히 표착한 조선인들은

봄철에 한반도로 부는 동남풍을 기다리기 위해

많게는 몇 개월씩 나가사키의 지정된 장소에서 기다려야 했다.


배의 숫자와 표류주민의 숫자등이 시볼트의 기록과 다소 상이하지만,

역시 시볼트의 기록대로 당시 나가사키에는 조선에서 표류해온 많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참고해 이해됐으면 한다. 

     
1408년부터 1888년까지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표류한 건수가

기록에 나타난 것만 해도 1천109건에 달한다. 이들은 그나마 행운이 많은 사람들에 속한다.

표류라는게 돌풍을 만나 이뤄지는게 일반적인 일이였고,

돌풍에 휩싸여 망망대해로 밀려간 돛배는 상당수 중간에 파손돼 탑승자들은 죽음을 당해야 했다.

 


다시 시볼트의 기록으로 돌아와 이제 강진사람들을 만나보자.

 

 

■김치윤
시볼트는 김치윤이 학자이면서 진정한 한국민족의 골상(骨相)을 지닌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김치윤은 시볼트가 일행 중에서 누가 가장 서민적인 모습이냐고 묻자

스스로를 꼽으면서도 자신이 신분이 높은 계급의 전형이라고 뽐내는 자신감을 잃지 않는다.

시볼트는 김치윤이 학자이면서 선생(훈장)이여서 꽤 꼼꼼하게 보인다고 했다.
김치윤은 시볼트에게 천자문을 선물하고 한시를 적어주었다.

한시 옆에는 한글을 적어 시볼트가 한국문자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허사첨(許士瞻)
상인(商人)이다. 시볼트는 허사첨이 오늘의 불행을 깡그리 잊어버린 듯

쾌활하면서 진지한 태도를 보여주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허사첨은 자신이 상인이지만

지체가 낮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시볼트에게 보여주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

허사첨도 시볼트에게 한시와 함께 옆에 한글을 적어 선물했다. 외국인에게 한시를 적어 선물할 정도였다면 허사첨의 주장대로 그는 상인이였지만 지체가 낮은 사람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의 한시 끝에는 ‘됴션국 젼나도 강진현 허사담 씀’이란 글귀가 선명하다.

 

 

 

■의기잃은 상인
허사첨과 함께 두명의 상인중의 한명이다. 이름은 나와있지 않다.

시볼트에 따르면 이 상인은 정신이 나갔다고 할 정도로 시무룩해 있었다.

그는 표류중에 자기의 소지품을 모두 잃어버렸으며 배가 난파당했을 때 부상까지 입었다고 털어놓았다.

 

 

 

■선장(船將)

나이가 60세로 소개된 강진사람이다.

시볼트는 선장을 통해 한국인의 머리, 이마, 턱, 뺨의 전형을 보려고 했다.

 

 

 

■선원(船員)
시볼트는 이 선원이 한국인의 대표적인 얼굴모습을 가진 것으로 보고 있다.

나이는 23세이고 앉은키는 5피트7인치로 기록돼 있다. 백인종과 몽고족의 중간형으로 관찰하고 있다.

 

 

 

■견습선원(見習船員)
나이는 나와있지 않다. 시볼트는 이 견습선원이 전형적인 몽고족의 모습을 지닌 것으로 파악했다.
 

 

시볼트를 만난 강진사람들은 나중에 귀국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당시 표류민 귀환은  조선과 일본 사이에 매우 긴밀하게 이뤄졌던 만큼,

관례에 따르면 일본인 안내원이 그해 4~5월께 남동풍을 등에 업고 일련의 표류민들을 인솔해

부산으로 건너와 조선당국에 이들을 인계하면,

이들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그동안 있었던 일을 심문받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78년전의 일이다.

이들의 후손들 중에 아직 강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없으라는 법이 없다.

서울대 고영근 명예교수도 시볼트를 만났던 강진사람들의 후손들을 찾아보라고 기자에게 권했다.

그들이 보고 싶다.

- 2006년 11월 23/ 12월 7일 ⓒ 강진신문(http://www.gjon.com) 

 

 

 

 

 

3. 머나먼 표류길

'표류인은 문명전파의 외교관이었다'
나가사키표류 강진주민들 서양의 한국인식 바꿔놔

   
  나가사키항의 모습이다. 일본의 서남부에 위치한 이유로 조선에서 주변 크고 작은 섬으로 표류해 온 표류인들이 모두 이곳에서 집단 수용됐다. 또 일본에서 서양과 무역을 하는 유일한 상관인 데지마가 있던 곳으로 서양문물이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이기도 하다.  
 

일본의 남쪽 도시 나가사키(長崎)현 나가사키시 데지마마치 6-1 시내 거리.

우리의 광주은행격인 나가사키의 지방은행 주하치은행의 본사 건물이 9층의 위용을 자랑한다.

주변에는 바닷물이 좁게 운하처럼 흐르고 있어 근처가 나가사키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이 바로 조선시대때 일본으로 표류해 온 조선 사람들의 임시 수용소가 있었던 자리다.

1627년부터 1888년까지의 기록으로만 1017건이나 보고되는 조선사람들의 일본 표류 사건.

과연 여기를 거쳐간 사람들은 얼마나 많을까.

기자는 지난 13일 관광가이드와 함께 나가사키의 조선표류인 수용소 자리를 찾기 위해

현지를 찾았으나 이곳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전 약속을 해놓고 찾아간 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 관계자도 마찬가지 였다.
역사문화박물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나가사키시 관광부 관광추진과 소속 타테이시구미(여)씨는

"나가사키가 일본으로 표류한 사람들의 총 집결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 구체적인 장소가 어디인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 나가사키 역사박물관측이 소장중인 표류 관련 기록들이다.  
 

대신 나가사카 역사박물관측은 소장중인 표류관련 기록들을 공개해 주었다.

한꺼번에 사진을 찍돼 낱권씩 촬영은 금지라는 전제 조건을 달았다.

표류인들을 심문했던 일종의 진술자료였다.
일본에 표류한 조선인들은 이곳 나가사키로 보내져 당국의 심문을 받았다.

어디에서 온 누구이며, 언제, 어떻게 몇 명이 표류했느냐고 질문해서 기록하는 것이다.
초서로 내려 쓴 한자를 해독하기 어려웠으나 조선이란 글자는 곳곳에서 보였다.

 

심문을 마친 표류인들은 단체수용소로 옮겨 고향으로 가는 북서풍이 불기를 기다렸다.

기록에 따르면 많게는 3개월에서 6개월까지 대기한 사람들도 있었다.

순풍이 불면 대마도를 거쳐 부산에 도착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취재를 마치고 이동할 때 였다. 박물관측에서 가이드에게 전화가 왔다.

 자료를 찾아 본 결과 집단수용시설이 있었던 곳은 항구 남쪽으로 추정된다는 전갈이었다.

반가움에 사로잡혀 남쪽항으로 향하고 있는데 잠시 후 또 전화가 왔다.
항구 남쪽의 고대지명에 대마번(對馬藩: 일종의 대마도 출장소)이라는 곳이 있는데

현지 사학가에게 확인한 결과 대마번에 수용시설이 있었고

정확한 위치는 지금의 주하치은행 본사건물 자리라는 것이었다. 바로 수긍이 갔다.

몇몇 기록에서 한국과 일본의 정치 및 교역을 맡고 있는 쓰시마(대마도) 영주가 비용을 대서

집단 수용소 관리를 담당하고 있었다는 기록을 몇 차례 접했기 때문이다.

기자가 일본쪽 표류역사를 취재하면서 나가사키 표류민 집단 거주지에 크게 집착한 것은

지볼트(Siebold)라는 독일출신의 네덜란드 의사가 1828년 3월 17일 이곳에서

한국의 강진에서 표류해 온 36명의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강진사람들은 나가사키의 남쪽에 위치한 오도열도란 섬지역으로 표류해서

이곳 나가사키 집단거주지로 옮겨온 사람들이었다.

지볼트는 당시 일본의 유일한 해외 교역장소였던 나가사키 데지마(出島)에서

의사생활을 하면서 일본을 연구한 역사학자였다.

그는 강진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근거로 한국의 언어와 풍습은 물론 이들의 인물화까지 그려

그의 저서 '일본'의 마지막 부분에 삽입했다.

그의 책 '일본'은 일본을 서양에 체계적으로 소개한 최초의 저술이다.

이보다 앞서 발간된 하멜의 '하멜표류기' 보다

한국을 서양에 구체적이고 전문적으로 알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그가 강진사람들의 말과 글 속에서 솎아낸 한글에 대한 평가와 분석은

서양인들이 한글을 연구하는데 결정적인 자료로 활용됐다.

데지마섬은 일본이 1636년 대외교역을 위해 인공적으로 막은 1만5천㎡ 규모의 섬이다.

서양인들이 일본인에게 기독교를 포교하는 것을 막기위해 인공섬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은 처음에 포루투칼 상선의 기항지였으나

1641년 네덜란드의 상관(商館)이 218년이나 주재하던 곳이다.
강진을 유명하게 만들고 있는 핸드릭 하멜도 1653년 7월 30일 대만을 떠나

이곳 나가사키의 데지마로 향하다가 제주로 표류했던 사람이다.

1666년 9월 4일 밤 여수를 탈출한 하멜일행은 오도 열도의 섬을 거쳐

14일에야 이곳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1653년 대만에서 이곳을 향해 항해를 한지 13년만의 일이다.

데지마는 십팔은행 본사의 지척에 있었다. 인공섬이라고 해서 바다 한가운데 있는,

요즘 텔레비전에서 보는 두바이의 인공섬 정도로 생각했으나 육지와 20m 정도 떨어져 있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육지와 섬 중간에는 바닷물이 흐르고 있었다.

지볼트가 표류인들의 집단거류지와 데지마가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해서

한국인들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곳으로 보인다.

나가사키시와 인접한 오오무라(大村)시의 관광진흥과장인 이나도미씨는

"표류인들은 나가사키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한 반면에

서양인들은 데지마에서 행동이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다"며

"서양인들은 '나가사키도로'라는 특정구간에 대해서만 통행이 가능했으나

조선인 표류인들을 자연스럽게 만나는 곳은 아니였다"고 말했다.

이나도미씨는 한국에 가지고가서 참고하라며 '장기가도(長崎街道)'라는 책을 건네 주었다.

'나가사키도로'는 일본이 쇄국정책을 감행하던 당시

외국 문화가 들어오던 정보도로로 평가되고 있었다.  

지볼트는 강진사람들을 만난 후 다음과 같은 느낌들을 적었다.

"약간 어리둥절한 눈빛이 서서히 빛나기 시작했다"

"일본인 보다 더 아시아적이다" "쾌할하고 명랑하다" "한국인은 지적수준이 일본인 보다 낫다"

대단히 긍정적인 느낌들을 적은 것이다.

지볼트의 이같은 기록이 1852년 발행된 이후 서양의 한국인식이 크게 바뀌었다는게

고영근 서울대 명예교수등을 비롯한 일부 학자들의 주장이다.

사실 하멜표류기가 1668년 암스테르담에서 최초로 발행된 이후

한국은 서양에 비기독교적인 야만국가로 알려져 있었다.

일본학계에서 표류연구의 대가로 꼽히는 일본 나고야 대학의 이케우찌 교수는

"지볼트가 강진사람들을 만나 기록한 내용들이 서양인들의 한국인식을 크게 바꿔 놓아

1880년대 들어 서양선박들의 조선근해 출몰이 잦아졌고,

이때부터 조선의 근대화가 본격화됐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 일본이 1836년 서양과 교역하기 위해 건설한 인공섬 데지마이다. 지금도 당시 축조했던 인공섬의 축대가 남아있다.  
 

조선의 근대화 출발점을 사실상 지볼트와 강진사람들의 만남부터 보는 시각이다.

우리나라의 개화시기와 원인에 대해 다양한 입장차이가 있겠지만,

표류인들이 보이지 않은 문화와 문명의 외교관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인류역사에 부인하지 못할 진리인 것은 명백하다. 

이렇듯 역사적인 강진 표류인들과 지볼트의 만남이 있었던 곳이 바로 나가사키항 근처이다.

나가사키 역사박물관측의 판단이 맞다면 주하치은행 본사건물 자리에 집단주거지가 있었고,

우리의 조상들은 이곳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을 것이다.

강진의 조상들뿐이 아니다.

우리나라 서남해안 지역이라면 일본으로 표류한 조상을 가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나가사키 주하치은행 주변에 그들을 위한 기념비라도 하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 했다.

우리 조상들을 기리는 일도 되고, 한국과 일본의 우호관계도 긴밀히 하는 계기가 될 법하다.  

주하치은행 건너편에 있는 데지마 상관자리는 일본의 사적지로 지정돼 보호를 받고 있었다.

인공섬의 터가 그대로 남아 있고, 당시의 건물들이 복원되고 있는 중이었다.

주하치은행앞에서 조선 표류인들이 바다를 보며 고향을 그리워 했을 곳을 찾아 보았으나

새로 들어선 건물들이 꽉 막고 있었다.
가이드에게 나가사키에서 항구가 보이는 가장 높은 지점으로 가자고 했다.

그리 높지 않은 산으로 올라가 바다를 내려다 보았다.

서북쪽을 향하여 한국으로 오가는 뱃길이 아스라이 열려 있었다.

- 2007년 11월 16일 ⓒ 강진신문(http://www.gjon.com)

 

 

 

 

 

조선을 서양에 알린 2대 명저 하멜의 '하멜표류기'와 지볼트의 '한국'

 

1668년 강진억류 핸드릭 하멜 - 조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많이 서술
1850년 강진사람 만난 시볼트 - "조선은 일본보다 훌륭한 문명 가졌다"

 

<하멜표류기>는 우리나라를 서양에 최초로 알린 명저이나

이를 통해 묘사된 조선은 그리 긍정적인 나라가 아니였다.
하멜표류기에 그려진 조선은 외국 사람들을 억류한 야만국이자 하나님을 모르는 비문명의 나라였다. 
그런 이미지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조선은 태풍에 표류해 온 하멜일행을 관례에 따라 즉시 원하는 곳으로 보내지 않았고,

이후 하멜일행을 특별한 이유없이 12년 동안이나 억류시켰던 것이다.
 
<하멜표류기>를 보면 하멜일행은 억류 기간 동안 모두 다섯 차례의 탈출을 시도하는데

관원들에게 잡혀 심문을 받을 때마다 '조선에서 이렇게 비참하게 사느니 탈출을 하다 죽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조선생활에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
 
하멜일행은 억류장소를 한양에서 강진 병영으로 옮겨 7년 동안 살며

'조선의 풍습대로 집과 가재도구를 장만하면서'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지만

기회가 되자 미련없이 조선을 떠났던 것이다.
기록에는 보이지 않지만 강진에서 7년 동안 살면서 가정도 꾸렸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멜은 일행 7명과 함께 1666년 9월 4일 꿈에도 그리던 탈출에 성공한데 이어,

일본에 설치돼 있던 네덜란드 상관이 동인도회사를 통해 일본 당국을 움직여

조선에 남아 있는 나머지 선원 7명을 일본으로 송환 받은데 성공했다.
 
하멜은 당시 상황을 "야만인의 나라에 남아 있던 동료와 함께 귀국하게 되어 자랑스럽다"고

<하멜표류기>에 적고 있다.
<하멜표류기>는 하멜이 조선을 탈출한지 2년후인 1668년에 최초로 출간해

유럽에서 미지의 나라 조선에 대한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 나가사키의 표착민 수용소에서 생활하는 한국 표류민들의 생활상을 그린 것이다.

그림속의 사람들은 시볼트가 당시 대화를 나누었던 강진사람들은 아니다.

시볼트는 표류해 온 다른 지역 사람들과 종종 접촉할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

나가사키 화가 도이오스케란 사람이 그린 것이다.

 
대부분이 고생담으로 일관된 <하멜표류기>를 보며 서양인들이 조선에 대한 이미지를 좋게 가질리 없다.
더욱이 <하멜표류기>가 발행된 후에도 조선은 1880년대 초까지  쇄국정책을 계속했기 때문에

실제 <하멜표류기>가 조선의 변화에 미친영향은 미미했다고 할 수 있다.
서양인들은 여전히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한 발자욱도 들여 놓지 못했고

한국을 연구하려는 사람들은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 전해듣는 '한 다리 걸쳐 듣는' 정보가 전부였다.
 
그러다가 1850년 조선을 알리는 <한국>이란 새로운 저서가 서양에서 발간돼 화제가 됐다.  
 
지볼트라는 독일의 의학자이자 자연과학자가

일본의 나가사키현(長崎) 데지마(出島:나가사키 남쪽에 있는 작은 인공섬)에서 활동하며

일본에 서양의술을 보급하고 있던 중 조선의 강진현에서 표류한 사람들을 만나

이를 자료로 해서 책을 발간한 것이다. 
 
지볼트는 강진사람들로부터 전해들은 말과 일본에서 취합한 자료를 근거로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산업, 사회, 문화의 각 방면에 걸친 내용을

그의 저서 <일본>의 마지막 장에 삽입한 형태로 내용을 넣었다.
 
지볼트는 1828년 3월 17일 일본관리의 도움으로

나가사키에서 표류해 귀국을 기다리고 있던 강진사람을 만난다.
부산과 가장 가까운 나가사키는 일본 정부가 표류 외국인들이 거주하도록 허가한 구역이었다. 

지볼트는 원할한 대화를 위해 몇 사람을 골랐던 것으로 보인다.

   

▲ 지볼트가 만난 강진의 상인들과 어민들의 모습이다.

시볼트는 강진사람들을 만나며 빌레베뉴베 라는 네덜란드인 화공(畵工)을 대동해

그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게 했다. 시볼트는 김치윤, 허사첨, 상인, 선장, 선원, 견습선원 등

6명과 대화를 나누는데 그림속의 사람숫자가 정확히 여섯명이다.


총 36명의 강진사람 표류민중에

'교양이 있고 명망이 높아 보이는 남자 4명'(김치윤, 허사첨, 고응양, 곽성장)과

복장의 차이를 살피기 위해 선원과 견습선원을 더 불러 모두 6명의 강진사람과 대화를 하게 된다. 
강진사람들은 난생 처음보는 푸른눈의 서양사람을 친절하게 맞아 대화를 나누었다.
이들은 서양학자에게 한국의 언어와 지리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였고,

한시를 지어주는가 하면,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강진사람들을 만난 지볼트는 '하늘과 물의 반사빛으로부터 눈을 보호하려는 듯이 눈썹이 쳐지고

상대방으로부터 눈을 피한 날 움직이지 않은 모습과

서민계급의 거친 골격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다'고 적고 있다.
 

 

지볼트 '자력으로 살아가는 조선이 외국인에 엄격한 태도 취하는 것은 당연'
'한국민들은 바닷가에 표착한 서양인들을 해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강진사람을 만나고 그동안 일본에서 수집한 자료를 취합해 저술을 남긴 지볼트는

한국이 서양인들에게 배타적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을 그의 저서에서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자국의 생산품과 기술, 나라안의 교역만으로 삶에 만족하고 있는 국민에 대해

정부가 평온. 무사한 나날을 확보해 주려면 외국인에 대한 엄격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민들이 유럽인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지만 고의든지 우연이든지 바닷가에 표착한 서양인들을

불행하게 만들기는 커녕 되도록 해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면서 지볼트는 한국인은 오랜 옛날부터 자신의 고유한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있고

지적 수준이 오히려 일본보다 앞서고 있다는 점도 중시하고 있다. 또 한국민과 교섭을 하려면

미개인나 유목민족을 대하듯이 무력을 행사하거나 호의를 베푸는 식으로 하지 말라고 권장한다.
대신 한국정부의 정신, 다시말해 왕권중심이라는 통치원리를 탐색하고

한국인들의 풍습과 관습, 언어등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결론짓고 있다.
 
지볼트는 강진사람들과 접촉한 후 한국에 관한 서술을 종합하는 자리에서

한국인의 성격이 이전에 알려진 것 보다 훨씬 우호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는 지볼트가 강진사람들을 직접 관찰한데에 얻어진 결론으로

서양인들의 한국관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지볼트가 소개한 한국관련 자료는 서양에서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러시아에서는 1854년 번역본이 발간됐다.
프랑스에서는 지볼트의 저서를 근거로 1864년에 '한국어 문법'이 나오는 등

여러 분야의 연구에서 지볼트의 한국기술이 인용되고 참고됐다.
 
고영근 전 서울대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19세기 중엽이후 서양선박들의 한반도 연안 출몰이 잦아지고

1880년대 들어와서 서양과 수교가 가능해진 것도

지볼트의 한국기술이 큰 디딤돌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 2010년 12월 06일ⓒ 강진신문(http://www.gj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