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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최고의 이론천문학자 이순지(李純之)

Gijuzzang Dream 2010. 12. 10. 00:41

 

 

 

 

 

 

 조선 최고의 이론천문학자 이순지(李純之)

 

 

우리나라 천문학을 세계수준으로 끌어올려

 

 

 

 

 

모든 나라에서 국가 경영의 제1 순위로 삼는 것은 우수한 인재의 양성이다.

아무리 우수한 학자나 정치가, 경영인이라고 하더라도 나이가 들면 반드시 죽어야 하므로

그들을 대체할 수 있는 후배들을 길러 인적 공백을 메꾸는 동시에 보다 발전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함이다.

 

현대와 같은 기계문명 사회에서는 과학기술의 진보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과학기술이 계속적으로 진전되게 하기 위해서는 3박자가 맞아야 한다.

과학기술을 지속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터전,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우수 인력과 예산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우수 인력이다.

세종대왕의 업적은 15세기 즉 지금부터 거의 600년 전의 사람임에도

신하들의 특성을 절묘하게 조화시켜 소기의 성과를 얻도록 이끌었다는 점이다.

이천은 감독자로서, 장영실은 기술자로서,

이순지는 이론학자로서 각자 자신의 임무를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이들 세 분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론적인 뒷받침임은 말할 것도 없다.

아무리 거대하고 정교한 기계라 하더라도 이론적인 뒷받침이 없는 경우 비효율적이고 오류가 많게 된다.

세종의 과학기술 프로젝트는 이론학자인 이순지가 없었다면

결코 이룩되지 않거나 이름뿐인 졸작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전통사대부인 이순지를 이론학자로 발탁〉

  

이순지(李純之, 1406~1465)는 본관이 양성(陽城)이고 그의 아버지 이맹상은 공조와 호조의 참의를 지냈고 원주 목사와 강원도 관찰사, 중추원부사를 지낸 고위 관료였으므로 당대의 전형적인 사대부출신 관료이다. 그는 세종 9년(1427)에 문과에 급제하여

동궁행수(東宮行首), 승문원 교리, 봉상시 판관, 서운관 판사, 좌부승지 등을 거쳤고

문종 때에는 첨지중추원사, 호조참의 그리고 단종 때에는 예조참판, 호조참판을 지냈고

세조 때에는 한성부윤(현 서울특별시장), 판중추원사에 올랐다.

 

 

명예의 전당에 있는 이순지의 동판.

 

그가 누구인지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공식 공적은 다음과 같다.

 

'이순지는 전통시기 한국 천문학을 세계 수준으로 올려놓은 천문학자이다.

20대 후반에 세종에 의해 천문역법 사업의 책임자로 발탁되어 평생을 천문역법 연구에 바쳤다.

중국과 아라비아 천문학을 소화하여 편찬한 『칠정산』내편과 외편은 그의 대표적 업적이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역사상 처음으로 관측과 계산을 통한 독자적인 역법을 갖게 되었다.'

 

 

이순지가 어떻게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엉뚱하게 과학자가 되었는지는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체로 그가 천문학자가 된 것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25세인 1430년경에 세종이 선발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세종이 이순지를 신임한 이유의 하나로 『세조실록』 권 35(세조 12년 1465)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순지의 자는 성보(誠甫)이며 경기도 양성 사람이니,

처음에 동궁행수에 보직되었다가 정미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당시 세종은 역상이 정하지 못함을 염려하여 문신을 가려서 산법을 익히게 했는데,

이순지는 우리나라가 북극에 나온 땅이 38도 강이라고 하니 세종이 의심하였다.

마침내 중국에서 온 자가 역서를 바치고는 말하기를 "고려는 북극에 나온 땅이 38도 강입니다"하므로

세종이 기뻐하시고 마침내 명하여 이순지에게 의상(儀象)을 교정하게 했다.

 

이 말은 이순지는 서울의 북극고도(北極高度)가 38도 남짓이라고 계산했는데

세종은 그의 계산이 틀렸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중국에서 온 천문학 책에서 그 값이 맞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순지를 크게 신임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북극고도란 현재로 치면 북위(北緯)를 뜻하는데 현재의 서울은 38선 남쪽에 있다.

엄밀한 의미로 보면 이순지도 틀린 것처럼 보이지만

세종 때에는 도(度)의 뜻이 지금과는 약간 달랐다는 것을 이해하면 된다.

즉 원의 둘레가 당시에는 지금처럼 360도가 아니라 365.25도였다.

   

태양이 지구를 한 번 도는데 365.25일이 걸리니까 태양이 하루에 돌아간 정도의 각도가 당시 1도였던 셈이다.

그러니까 당시의 38도는 지금의 37도 40분과 딱 들어맞는 값이다.

천문학자들이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당시에 양반은 강도가 쫓아와도 갈 짓(之)자를 걸어야 한다고 했으며 상공업을 천대하던 때를 감안하면

양반신분으로 문과에 급제했던 이순지가 천문학에 대해 얼마나 조예가 깊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출범한지 몇 십 년 밖에 안된 조선왕조는 유교적 이념에 맞게 왕실의 권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천문역법의 정비가 절실했다. 정확한 역법(曆法) 즉 천체 현상의 법칙성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하늘의 뜻을 제대로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세종은 천문역법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삼국시대부터 주로 중국의 천문계산법 즉 역법을 빌려다가 쓰고 있었는데

고려 때에는 그것을 개성(開城) 기준으로 약간 수정해서 사용했고,

서울을 지금의 서울로 옮긴 다음에는 그것을 약간 더 수정하여 사용했지만

근본적으로 우리나라 기준의 천체 운동 계산은 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세종은 조선에 맞는 역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선이 독자적으로 천문역법을 세운다는 것이 만만한 일은 아니다.

우선 천체 관측과 정확한 계산 기술이 따라야 했다. 당연히 수준급의 천체 관측 기기가 확보되어야 하며

고도로 훈련된 천문학자들이 확보되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세종의 거대한 프로젝트는 천문의기 제작을 총괄 지휘한 감독자로서

이천- 천문의기의 이론적 뒷받침으로, 이순지- 천문의기를 실무적으로, 제작하고 개발하는- 장영실을

투입하는 절묘한 용병술 덕분에 예상보다도 빨리 추진되었다.

 

1432년에 천문의기 제작 프로젝트를 발표한 후

다음해에 벌써 혼천의, 간의, 자격루가 만들어졌고 1434년에 간의대가 준공되었으며

앙부일구를 비롯한 천문의기 제작은 1437년에 끝나 전국 각지로 배포될 정도였다.

1438년에는 그 동안 만들어진 천문의기의 특징을 집약하여

한 눈에 계절의 변화와 하루의 시각을 알 수 있는 흠경각루(옥루)가

세종의 숙소(강녕전) 옆 흠경각에 세워짐으로써 세종의 프로젝트는 6년 만에 대미를 장식하고 종결되는데

학자들은 세종의 프로젝트가 예상보다 10년(일부학자는 20년 정도 빨랐다고 추정)정도 빨리 이뤄졌다고

추정한다.

 

 

 

〈우주를 한 눈에 본다, 혼천의〉

 

세종시대에 제작된 천문의기는 『조선왕조실록』에 거명이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순지가 모두 관여했다고 추정하는 것이 무리한 일은 아니다.

 

이순지가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이

모든 천문의기의 기본이라고 볼 수 있는 혼천의(渾天儀, 渾儀라고도 함)의 제작이다.

지구상에서 위치를 결정하는데는 위도와 경도를 사용하지만

천구상의 천체의 위치를 표시하는데는 적경과 적위를 사용한다.

적경과 적위는 천구상에서의 경도와 위도인 셈이다.

 

동양에서는 적도좌표계를 천체의 위치를 표시하는 기본으로 사용했다.

적경과 적위를 측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보다 정밀하고 편리하게 전체의 적경과 적위를 측정할 수 있는 천체 관측의기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를 위해 제작된 것이 바로 '혼천의'이다.

혼천의는 선기옥형(璇璣玉衡) 또는 기형(璣衡)이라고도 불리는 일종의 측각기이다.

천구의(天球儀)인 혼상(渾象, 하늘의 별을 둥근 구형에 표시한 의기))과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해서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되어 천체의 운행에 맞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으므로

'혼천시계(渾天時計)'라고도 불린다.

 

원래 고대 중국의 우주관인 혼천설(渾天設, 대지를 중심으로 천구가 그 주변을 회전하는 것으로 천동설에

속함)에 기초를 두어 기원전 2세기경에 처음으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졌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도 만들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세종 3년(1421)에 혼천의의 완성을 위해 장영실과 남양부사 윤사웅에게

"중국에 들어가 각종 천문기계의 모양을 모두 익혀 빨리 모방하여 만들라."라는 특명을 받고

중국 유학에서 돌아왔다고 적었다.

 

기형의 '기(璣)'는 하늘을 공처럼 둥글다고 생각하고 그 표면에 일월성신의 운행을 설명할 수 있는

천구의(天球儀)를 뜻하고 '형(衡)'은 천구의를 통해 천체를 관측할 수 있는 관(管)을 뜻하며

혼천의의 '혼(渾)'은 둥근 공을 말하는 것으로 동심다중구(同心多重球)를 뜻한다.

크기는 『서경』에 따르면 둘레 25척, 기경(璣徑)은 8척, 형장(衡長)은 8척에 그 구경이 한치였다.

 

구조는 세 겹의 동심구면으로 되어 있는데

제일 바깥층에서 중심으로 지평환(地平環), 자오환(子五環), 적도환(赤道環) 등 3개의 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3개의 환이 교착되어 천구를 알 수 있고 천구의 상하와 사방을 관찰할 수 있으므로

이 환들을 '육합의(六合儀)'라고도 한다.

가운데층은 황도환(黃道環)과 백도환(白道環)으로 구성되어 해와 달 그리고 별을 관측할 수 있으며

'삼진의(三振儀)'라고도 한다.

혼천의는 아침저녁 및 밤중의 남중성(南中星), 천체의 적도좌표 황도경도 및 지평좌표를 관측하고

일월성신의 운행을 추적하는데 쓰였는데 혼천의와 혼상을 연결하기도 했다.

혼천의와 혼상을 함께 보면 우주를 한눈 안에 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혼천의는 관측용과 실내용이 있는데

세종때 만들었던 것은 수격식 시계장치로 움직이는 실내용(demonstrational armillary clock)으로 보인다.

세종 19년(1437) 4월 15일에

'규표의 서쪽에 작은 집을 세우고 혼의와 혼상을 놓았는데 혼의는 동쪽에 있고 혼상은 서쪽에 있다.

혼의는 물을 이용하여 기계가 움직이는 공교로움은 숨겨져서 보이지 않는다'라는 글이 적혀있다.

 

혼천의의 구조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지만 『증보문헌비고』에 현종 10년(1660) 이민철이 만든

혼천시계의 기계 장치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어 혼천의의 구조를 유추할 수 있다.

 

혼의를 움직이는 동력은, 큰 궤를 만들고 물항아리를 널판의 뚜껑 위에 설치하고

물이 구멍을 통해 흘러내려 통 안에 있는 작은 항아리에 흘러 들어가 번갈아 채워져

바퀴를 쳐서 돌리게 된다. 여러 날에 걸쳐 물을 채워서 법식에 따라 시험하여 보면

혼천의의 환이 함께 일제히 움직인다. 또 그 옆에 톱니바퀴를 설치하고,

겸하여 방울이 굴러내리는 길을 만들어서 아울러 시간을 알리고 종을 치는 기관이 된다.

또한 이 장치가 움직이면서 나무 인형이 종을 치게 하고

시각의 패를 든 또 다른 인형이 번갈아 나타나 그때의 시각을 알려준다.

  

 

세종시대의 과학자들이 문헌 자료의 연구만으로 1년 남짓한 기간 동안에

이토록 정밀한 천문의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은

세종 때의 과학 기술 수준이 세계 최정상급이었음을 말해준다.

 

혼천의의 문제는 혼천의를 구성하는 기둥(距)과 환(環)이 많아 구조가 복잡하여 관측에 불편하다는 점이다.

이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의기가 '간의(簡儀)'이다.

 

간의는 중국 원나라의 천문학자 곽수경이 만든 천문 의기다.

현대 천문학에서 적경에 해당하는 천체의 <적도수도(赤道宿度)>와

적위에 해당하는 <거극도(去極度)>를 측정하는 데 쓰인 관측기기로,

혼천의를 구성하는 부품 중 적도환, 백각환, 사유환만을 따로 떼어내 간략하게 만든 것이다.

혼천의가 천체의 위치뿐만 아니라 시각을 측정하고 태양이나 달의 운동을 측정할 수 있는 것에 반해,

간의는 주로 천체의 위치 측정에 쓰이도록 만든 것이다.

 

세종의 학자들은 혼천의를 간략하게 하는 간의를 만들기 위해 먼저 <목간의(木簡儀)>를 제작했다.

목간의란 관측의 기본이 되는 한양의 북극고도를 측정하여

청동으로 된 간의를 만들기 전에 미리 나무를 만든 것이다.

 

조선의 실정에 맞는 역법을 편찬하기 위해서는 한양에서 태양이 뜨고 지는 시각과

북극 고도를 중심으로 한 일월과 행성과 천체의 위치를 정확히 관측해야 했다.

관측한 자료는 행성의 위치표를 만든 후 역법이나 천문도 등의 편찬과 제작에 이용되는데,

간의는 단순하고 편리하여 이런 작업에 매우 유용한 기기였다.

 

대간의(大簡儀)는 중국 곽수경의 『원사』를 참고로 하여 만들어진 천체 관측을 위한 관측기기이다.

적도환은 주천(周天: 공전)을 365도 1/4로 나누어 동서로 운전하면서

칠정(일월과 5행성) 중 외관입수(外官入宿)의 도분(度分)을 쟀다.

백각환은 1일 중의 시각을 나타낼 수 있도록 눈금을 새긴 둥근 환으로

조선 초기에는 1일을 100각으로 했으나 시헌력 도입 이후에는 96각으로 했다.

사유환은 적도환과 직교하며 남북극을 축으로 하여 동서로 회전하게 되어 있고,

그 안에 규형이 있어 상하로 움직일 수 있다. 규형은 속이 비어 있는 통으로 이것을 통해 별을 관측한다.

소간의(小簡儀)는 이러한 대간의를 간단히 만들어 휴대용으로 한 것이다.

 

 

 

〈아랍 천문학보다 발전된 조선 천문학〉

 

이순지는 천문의기프로젝트가 끝나자 서운관원(천문대장)으로 근무했고

여기에서 유명한 『칠정산 내외편』이라는 책을 간행했다.

칠정산이란 '7개의 움직이는 별을 계산한다'란 뜻으로

해와 달, 5행성(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위치를 계산하여 미리 예보하는 것이다.

(七政을 七曜라고도 쓴다).

 

『칠정산』내편(좌), 『칠정산』외편(우)(규장각 소장).

 

세종은 1431년 우선 정흠지, 정초, 정인지 등에게 『七政算 內篇』을 만들게 했고

이순지와 김담에게는 『七政算 外篇』을 편찬케 했다.

편찬과정에서 이순지 등은 세종 13년(1431)에 명나라에 연수를 가기도 했다.

 

『칠정산』의 내편은 중국의 곽수경이 완성한 『수시력』을 서울 위도에 맞게 수정 보완한 것이다.

이 책은 1년의 길이를 365.2425일, 1달의 길이를 29.530593일로 정하는 등 매우 정확한 수치에 입각한 것으로

'세차(歲差)'의 값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수치들이 유효숫자 6자리까지 현재의 값과 일치한다.

 

내편의 중요성은 서울에서 관측한 자료를 기초로 해서 계산했다는 점이다.

그 전까지는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의 위도를 기준으로 계산하였으나

이를 서울을 기준으로 하여 바로 잡은 것이다.

이로서 세종 이후의 우리나라 천문학은 해와 달은 물론 모든 행성의 위치를 정확히 계산할 수 있게 되는데

가장 알기 쉽게 말하여 서울에서 일식과 월식이 언제 일어나는지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한편 『칠정산 외편』은 원나라를 거쳐 명나라로 넘어온 아랍 천문학(프톨레마이오스가 만든 알마게스트를

기본으로 하여 편찬한 것) 보다 발전된 이론을 다루고 있다.

칠정산 외편은 태양, 태음, 교식, 오성, 태음오성능범의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태양에서는 태양의 운행, 태음에서는 달의 운행, 교식에서는 일식과 월식,

오성에서는 토성, 목성, 화성, 금성, 수성 등 5개 행성의 운행,

태음오성능범에서는 달과 오행성이 별을 가리는 현상에 대해 다루고 있다.

 

칠정산 외편의 가장 큰 특징은

그 당시까지 중국적 전통에 따라 원주를 365.25도, 1도를 100분, 1분을 100초로 잡았던 것을

그리스 전통에 따라 원주를 360도, 1도를 60분, 1분을 60초로 변경하여 계산했다는 점이다.

 

이 외 칠정산 외편의 몇 가지 특징을 추려보면,

평년의 1년은 365일로 하되 128년에 31일의 윤달을 두었다는 것,

1태음력의 길이를 354일로 하고 30년에 윤일을 11일 더 넣었다는 것,

1년의 기점을 춘분점에 두었다(중국에서는 동지점을 그 기점으로 하였다)는 것,

황도를 30도씩 12등분하였다는 것,

태양은 7월 초에 원지점에, 1월초에 근지점에 있고

속도는 원지점 부근에서 더디고 근지점 부근에서 빠르다는 것 등이다.

 

『칠정산 내외편』은 세종 24년(1442)에 완성되었는데

동 시대에 세계에서 가장 앞선 천문 계산술로 평가한다.

원나라 이후 명나라가 들어선 중국의 천문학은 오히려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고

아랍 천문학은 더욱 퇴조의 기미를 보였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칠정산』에 해당하는 『정향력(貞享曆, 일본인이 만들어 일본에 맞는 역법)』은

조선보다 240년 후인 1682년에 등장한다.

이 역법을 만든 시부카와 하루미는 1643년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왔던 나산(螺山) 박안기(朴安期)가

수학적 해법을 알려주어 이를 바탕으로 『정향력』을 만들었다는 글이 있다.

 

1643년 조선의 손님 나산(螺山)이란 인물이 에도에 와서

역학에 관해 오카노이 겐테이와 토론했다는 말이 『춘해선생실기』에 보인다.

하루미는 바로 이 겐테이로부터 역학을 공부했던 것이다.

나산이 어떤 내용을 전해 준 것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조선에는 15세기 천문학의 최성기에 『七政算 內篇』을 낸 바 있는데

이는 수시력(授時曆) 연구의 뛰어난 텍스트로 꼽히고 있다.

명나라 말에는 중국의 역산학 전통이 어느 정도 쇠퇴한 다음이었으므로

당시 조선에서 역산학을 배우려던 태도는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보인다.

 

이 글을 보아서도 『칠정산』이 얼마나 돋보이는 작품인지 알 수 있다.

 

 

 

〈평생을 천문역법 연구에 바친 조선 최고의 천문학자〉

 

이순지는 각자의 업무에 충실하게 봉사하면서 세종의 천문의기 프로젝트 등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후

천문대인 간의대에서 천문연구를 계속하면서 『칠정산 내외편』를 비롯하여 여러 권의 책을 정리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칠정산(七政山)』,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천문유초(天文類抄)』,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 등이 있다.

 

『제가역상집』 4권 3책은 세종 27년(1445) 그의 나이 40세 때 완성되었는데

임금의 명을 받아 천문, 역법, 의상(儀象), 구루(晷漏) 등 세종 때 만든 여러 천문기구들에 대한

이론적 연구를 모아 정리한 것으로 『세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의상(儀象)에 있어서는

이른바 대소간의(大小簡儀) ·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 혼의(渾儀) 및 혼상(渾象)이요,

구루(晷漏)에 있어서는

이른바 천평일구(天平日晷) · 현주일구(懸珠日晷) · 정남일구(定南日晷) · 앙부일구(仰釜日晷) ·

대소 규표(大小圭表) 및 흠경각루(欽敬閣漏) · 보루각루(報漏閣漏)와 행루(行漏)들인데,

천문에는 칠정(七政)에 법받아 중외(中外)의 관아에 별의 자리를 배열하여,

들어가는 별의 북극에 대한 몇 도(度) 몇 분(分)을 다 측정하게 하고,

또 고금(古今)의 천문도(天文圖)를 가지고 같고 다름을 참고하여서 측정하여 바른 것을 취하게 하고,

그 28수(宿)의 돗수(度數)․분수(分數)와 12차서의 별의 도수를

일체로 『수시력(授時曆)』에 따라 수정해 고쳐서 석판(石版)으로 간행하고,

역법에는 『대명력(大明曆)』 · 『수시력(授時曆)』 · 『회회력(回回曆)』과 『통궤(通軌)』 ·

『통경(通徑)』 여러 책에 본받아 모두 비교하여 교정하고,

또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編)』을 편찬하였는데, 그래도 오히려 미진해서 또 신에게 명하시어,

천문 · 역법 · 의상 · 구루에 관한 글이 여러 전기(傳記)에 섞여 나온 것들을 찾아내어서,

중복된 것은 깎고 긴요한 것을 취하여 부문을 나누어 한데 모아서 1질 되게 만들어서

열람하기에 편하게 하였으니,

진실로 이 책에 의하여 이치를 연구하여 보면 생각보다 얻음이 많을 것이다.

 

 

『천문유초』는 중국의 천문학 이론을 소개한 책으로 상 하 두 권으로 각각 구성되었는데

동양 기본 별자리 28수에 대한 설명이 상세하게 나오고 은하수도 설명되어 있다.

하권에는 천지, 해와 달, 5행성, 상서로운 별, 별똥별, 요성, 혜성, 객성 등의 순서로 설명이 나온다.

지금 천문학과는 달리 이상한 천문 현상에 대해서는 점성술적인 설명이 따른다.

특히 바람, 비, 눈, 이슬, 서리, 안개, 우박, 천둥, 번개 등 현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천문학으로 분류할 수 없는 기상 현상 등도 상세하게 풀이했다.

 

    

세조 3년(1457)에는 김석재와 함께 『교식추보법』 2권 1책을 완성했다.

이 책은 세종 때에 정리되었던 일월식(日月蝕) 계산법을 알기 쉽게 편찬하라는 세조의 왕명을 받고

그 법칙을 외우기 쉽게 산법가시(算法歌詩)를 짓고 사용법 등을 덧붙인 것이다.

시와 노래는 원래 세종이 만들었고, 이순지와 김석재는 가사와 시구에 포함된 뜻을 좀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이 책은 뒤에 천문 분야 관리채용의 1차 시험인 음양과 초시의 시험 교재로 쓰일 만큼 일반화되었다.

 

그 외에도 『대통력일통궤』, 『태양통궤』, 『태음통궤』 등 명나라에서 전해진 『대통력법통궤』를

김담과 함께 교정했으며 특이한 것은 국가 중요행사를 위해 택일이나 길흉을 판별하는 방법을 모은

『선택요략』 3권을 편집했다. 상권에는 간지에 따른 길흉의 판별법을 적었고,

중권에는 길흉을 관장하는 신장(神將)에 대해,

하권에서는 결혼, 학업, 출행, 풍수, 장례 등 일상생활에서 살펴야 할 길흉의 판단법에 대해 다루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천문학자가 음양학과 풍수학에 관여한 것은

조선 전기에는 이들이 천문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순지는 풍수지리학 분야에서 대가로 알려져 그는 세종과 세조 시대에 왕실의 장지를 결정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는데 세조는 음양, 지리 따위의 일은 반드시 이순지와 논의하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세종이 그를 얼마나 아꼈는지는 1436년(세종 18) 이순지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를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어머니가 죽자 이순지는 당시의 관습대로 자신의 후임으로 김담(金淡. 1416~1464)을 추천하고,

시묘살이를 위하여 관직을 물러났다.

김담은 당시 20여세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후 천문학자로서 이순지에 버금가는 많은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하지만 세종은 20살의 김담으로는 안심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상중인 이순지를 종5품에서 정4품의 자리로 승급시키면서 1년 만에 억지로 다시 불러들여 근무하게 했다.

당시 이순지는 어머니의 시묘를 하며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두 차례나 눈물로서 상소를 올리며 벼슬을 사양했지만, 세종은 이를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3년상을 치르지 않고 1년만에 다시 출사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이순지의 무덤과 신도비.

경기도 남양주군 화도면 차산리(경기도 지방문화제 54호) 소재.

 

조선시대의 가장 위대한 천문학자였던 이순지는 세조 11년(1465)에 세상을 떠났다.

말년에 그의 과부 딸이 여장(女裝) 노비 사방지(舍方知)와의 추문에 휘말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지만 비교적 행복한 삶을 산 과학자였다. 그는 아들 6명을 두었고 후에 정평군(靖平君)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그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군 화도면 차산리(경기도 지방문화제 54호)에 있다.

세종시대의 과학자 이순지(李純之, 1406-1465) 묘비에는 “判中樞端平公李純之之墓”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 2004년 10월2일 이종호 과학저술가

 

 

 

 

 

 

 

 

 

 

 

조선 최고의 천문학자 이순지(李純之)

 

 

 

  

 

 

순지(1406-1465) 선생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천문학자로

중추원부사를 지낸 맹상의 아들로

본관은 양성(陽城), 자는 성보(誠甫), 시호는 정평(靖平)이다.

 

5세 때까지 말도 잘 하지 못하고 병약하였으나

어머니 유씨 부인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천품이 치밀하고 공손했으며 기사에 있어서 매사에 절제가 있었다.

처음에는 음보로 관직에 나가 동궁 행수가 되었다가

1427년(세종 9) 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현재 국가에서 우리나라 50인 위인 중 과학 분야 제1인자로 선정한 인물이다.

 

과학기술인 명예의전당에 헌액된 공식 공적은 아래와 같다.

 

"이순지는 전통시기 한국 천문학을 세계수준으로 올려놓은 천문학자이다.

20대 후반에 세종에 의해 천문역법 사업의 책임자로 발탁되어 평생을 천문역법 연구에 바쳤다.

중국과 아라비아 천문학을 소화하여 편찬한 칠정산 내편과 외편은 그의 대표적 업적이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역사상 처음으로 관측과 계산을 통한 독자적인 역법을 갖게 되었다."

 

이순지는 25세 전후에 세종에 의해 발탁되어 천문, 역산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는데

세종이 이순지를 신임한 이유는 세조실록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순지의 자는 성보이며 경기도 양성 사람이니,

처음에 동궁행수로 보직되었다가 정미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당시 세종은 역상이 정하지 못함을 염려하여 문신을 가려서 산법을 익히게 했는데,

이순지는 우리나라가 북극에 나온 땅이 38도 강이라고 하니 세종이 의심하였다.

마침내 중국에서 온 자가 역법을 바치고 말하기를 '고려는 북극에 나온 땅이 38도 강입니다'

하므로 세종이 기뻐하시고 마침내 명하여 이순지에게 의상(儀象)을 교정하게 하였다.

 

이것의 의미는 이순지는 서울의 북극고도가 38도 남짓이라고 계산했는데

세종은 이순지의 계산이 틀렸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온 천문학 책에서 그 값이 맞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이순지를 신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북극고도란 현재로 말하면 북위(北緯)를 뜻하는 것으로 현재의 서울은 38도 남쪽에 있다.

 

왕조를 개창한지 얼마되지 않은 조선왕조는

유교적 이념에 맞게 왕실의 권위를 확고히 하기위해 천문역법의 정비가 절실했다.

천체 현상의 법칙을 정확하게 파악한다는 것은 하늘의 듯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기에

매우 중요한 일로 세종은 이에 천문역법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열정을 쏟았다.

 

그러나 조선 나름의 천문역법을 세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에

세종은 이 일을 위해 천문의기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할 책임자로 이순지를 발탁한 것이다.

이때 천문의기 제작 총괄 감독 이천, 실무적으로 제작 개발한 장영실이 함께 발탁되었다.

 

이런 연유로 이순지는 1431년(세종 14)부터 경회루 서북 편에 설치된 간의대의 관측 책임을 맡아

그 서쪽에 12m가 넘는 동표를 세워 해의 그림자를 관측했고, 서략에 혼의와 혼상도 세웠다.

또 경회루 남쪽에 장영실이 설치한 자격루,

옥루(한눈에 계절의 변화와 하루의 시각을 알리는 천문기기)에 대하여

김담, 김조, 이천, 장영실 등과 협력하여 의상(儀象)을 바로잡고

간의, 규표, 대평현주, 양부일구, 자격루 등을 제작 설치하였다.

주로 의상과 규표를 이용하여 천문관측에 전념하던 중

1436년 모친상을 당해 3년간 거상하려 했으나

왕의 특명으로 이듬해 벼슬을 호군으로 높여 천문관측과 역산연구에 전념케 되었다.

 

이순지는 천문의기 제작 프로젝트마무리되자 서운관원이 되어 『칠정산내외편』을 편찬하였다.

칠정산이란 ‘7개의 움직이는 별을 계산한다’는 뜻으로

해와 달, 5행성(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위치를 계산하여 미리 예보하는 것이다.

1431년 세종은 정인지, 정초, 정흠지에게 명하여『칠정산내편』을 만들게 하고,

이순지와 김담에게는 『칠정산외편』을 만들게 하였다.
이순지는 이를 위해 1431년 명나라에 연수를 가기도 하였다.

 

이중  『칠정산내편』은 세종의 명에 의해 원나라 『수시력』과 명나라 『통궤역법』을 참작,

서울 위도에 맞게 저술한 역법이며, 『칠정산외편』은 내편을 편찬한 후

원나라를 거쳐 명나라로 넘어온 아랍 천문학보다 발전된 이론을 다루고 있는데,

『회회력경통경』과 『가령역서』를 개정 증보하여 만든 책으로

5백여 년 전에 나온 이 역서의 내용이 현대 천문학자들도 놀라울 만큼 정밀하고 정확하였다.

 

예를 들면  ‘교식추보가령’ 교식표에 실린 한양의 위도가

오늘날의 위도와 거의 일치하고 있음만 보아도 그 학문의 깊이를 알게 한다.

이로 인해 조선의 역법은 완전히 정비되었는데

이는 한국 역사상 최초로 서울을 기준한 역법체계를 갖추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듬해 김담 등과 함께 경기도 지방의 양전을 지휘 감독하였다.

당시 세종은 “최근의 양전 사업에 만약 이순지와 김담과 같은 인재가 없었더라면

어찌 해낼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1445년(세종 27) 그때까지 조사 정리된 모든 천문관계 문헌과 이론을 체계화하여

일종의 천문학 개론서인 『제가역상법』4권을 편찬하였으니

천문, 역법, 상의, 구루 등 네 부분으로 나누어 서술했고 이 책의 발문을 썼다.

1457년(세조 3)에는 세종 대에 정리되었던 일월식 계산법을 알기 쉽게 편찬하라는 왕명을 받고

김석제와 함께 그 법칙을 외우기 쉽게 산법가시를 짓고 사용법 등을 덧붙여

『교식추보법』완성하였다. 이『교식추보법(2권 1책) 』은

뒤에 천문분야 관리채용의 1차 시험인 음양과 초시의 시험교재로 쓰일 만큼 일반화 되었다.

 

1444년(세종 26) 동부승지에 올랐고 문종이 즉위하던 1451년 지중추원사가 되었으며

호조참의를 거쳐 관압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단종이 즉위하던 1452년 예조참판, 1454년 호조참판을 거쳐 1456년(세조 2) 1월 한성부윤,

이듬해 다시 예조참판이 되었다가 1458년 공조참판으로 사은사가 되어 재차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9년(세조 5) 10월 판한성부사에 임명되어 1년반 가까이 재직하다가 1461년 1월 사임하였다.

이후 서운관제조를 거쳐 1465년(세조 11) 벼슬이 판원중추사에 올라 행상호군으로 있다가

60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시호는 정평이다.

이순지는 풍수지리분야에도 대가로 알려져 있는데

세종과 세조가 왕실의 장지(葬地)를 결정하는데 자문을 구하자 이에 응하였으며,

왕명에 따라 풍수지리서인 『기정도보』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특히 세조는 음양, 지리에 대해서는 반드시 이순지와 논의하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조선시대 최고의 천문학자였으며 성격이 치밀하고 자연과학에 대한 연구에 부지런하여

산학, 천문, 음양, 풍수 등 네 분야에 대한 조예가 깊어

수학자, 풍수지리학자로서의 이름과 업적을 남겼다.

 

저술로는 『천문류초』1권 1책,『의식추보가령』2권 1책,『선택요약』3책,

『칠정산외편』5권 5책, 『제가역상법』4권 4책,『기정도서속편』3편,『경오원역』,『대양통궤』

『대통역일통궤』,『사여전도통궤』,『선덕시비년오월성능범』,『중수대명역』등을 남겼다.

이들 저서를 보면 선생의 그칠 줄 모르는 학문에 대한 탐구와 그 열정에

머리 숙이지 않을 수 없으니 사서삼경과 문학에 주력하던 당시의 풍토에서

위대한 천문학자이며 수학자이며 선구적인 과학자가 나왔음은 우리의 자랑이라 할만하다.


조선 최고의 천문학자 이순지는 1465년(세조 11) 세상을 떠났다.

말년에 과부가 된 그의 딸이 여장 노비 사방지(舍方知)와의 추문에

휘말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그의 생애는 왕의 총애를 받는 등

학자로서의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묘소와 신도비가 남양주시 화도읍 차산리 산5의 1번지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 이순지의 신도비는

1984년 10월에야 양성이씨대종회에서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 당시에는 세워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조선시대에는 종1품의 관직에 있었으면

신도비를 세우는 원칙이었으나

이순지의 재종이 되는 이휘가 사육신과 같이 단종복위에 연류된 관계로

이순지의 신도비가 세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 윤종일, 서일대학 민족문화과교수

- 남양주타임즈윤종일 교수의 '남양주 역사기행(8)'

 

 

 

 

 

- 참고 -

 

 

이순지의 딸과 사방지(舍方知)

 

‘어지자지’란 두 발을 번갈아가며 제기를 차는 것을 뜻하는 순우리말임과 동시에

남녀 양성(兩性)人間을 뜻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어지자지로 세조 때의 사방지(舍方知)를 꼽는다.

그러나 실록을 자세히 보면 사방지는 엄밀한 의미에서 ‘암수동체’를 뜻하는 어지자지는 아니었고,

그저 여장(女裝)한 남성이었을 뿐이었다.

 

사방지(舍方知)에 관한 실록의 첫 기록은 세조 8년(1462) 4월27일자에 나온다.

사헌부에서 올린 보고에 ‘고(故) 김구석의 처 이씨의 가인(家人) 사방지가 여복(女服)을 하고 다니며

종적이 괴이하여 잡아다가 직접 보았더니 여복을 하였으나 음경과 음낭은 곧 남자였습니다.’

더 이상의 언급은 없었다. 명백한 여장 남자였다.

 

과부인 이씨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하여 이웃집 여승(女僧)과 통간(通姦)하던 사방지를 알게 되어

아예 자기집 안방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문제는 이씨가 당시 권세가 막강했던 이순지(李純之)의 딸이라는데 있었다.

이순지는 문신이면서도 천문분야에 이천, 장영실 등과 함께 세종이 천문기기를 만드는데 큰 공을 세워

세조 때에는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부윤까지 올라 있었다.

 

명백한 남성인 사방지가 ‘양성인간(兩性人間)’으로 바뀌게 되는 것은 세조의 뜻이었다.

세조는 사헌부의 보고가 올라오자마자,

자신이 사위인 정현조(鄭顯祖)로 하여금 승지들을 데리고 가서 다시 조사해 오라고 하였다.

이에 정현조는 “형상과 음경, 음낭은 다 남자인데 정도(精道)가 정면이 아니라 아래를 향하고 있어

다른 사람과 조금 다를 뿐”이라고 했고, 승지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것은 이의(二儀=양성)의 인간인데 남자의 형상이 많습니다.”라고 보고한다.

 

그런데도 세조는 이런 보고를 근거로

“간통을 한 것을 잡은 것도 아닌데 재상 집안의 일을 경솔하게 의논했다.”며

오히려 최초 보고를 올린 사헌부 장령 신송주를 즉석에서 파직시켜 버렸다.

이후에도 세조는 사방지를 국문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요청을 묵살하고,

오히려 사방지를 이순지에게 넘겨 알아서 처리하도록 명한다.

그 후에도 세조는 사방지에 대한 국문을 청한 사헌부, 사간원의 관리들을 처벌토록 명하면서

마침내 그 본심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이씨는 중추(中樞) 이순지의 딸이고, 그 아들 김유악이 하동부원군 정인지(鄭麟祉)의 사위이다.”

1등공신 정인지의 사돈인 이씨의 간통사건을 한사코 감싸려던 과정에서

단순한 '여장남성'에 불과하던 사방지가 ‘어지자지’로 둔갑했던 것이다.

 

앞서 세조의 명을 받아 사방지의 ‘그 부분’을 조사하였던 정현조가 정인지의 아들이므로,

정현조로서는 ‘매부의 어머니의 정부(情夫)’를 조사한 셈이었다.

 

한편 이순지는 사방지를 일단 시골집에 가 있도록 조치하였는데,

세조 11년(1465) 이순지가 세상을 떠나자

이씨는 다시 사방지를 자기집으로 불러들여 노골적인 애정행각이 계속되자

세조로서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결국 사방지는 먼 곳의 관노(官奴)로 쫒겨난다.

이 일로 인하여 연산군 6년 이씨의 아들 김유악은 자신의 아들이 부마(駙馬) 선발에서 탈락되기도 한다.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

 

흔히 세종시대의 과학기술의 대표적인 성과를 꼽으라고 하면,

일반인들은 장영실(蔣英實)의 자격루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과학사 전공자들은 주저 없이 이순지와 김담(金淡, 1416~1464)에 의해 1442(세종 24)에 편찬된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수위로 꼽을 것이다.

여기서 ‘칠정(七政)’이란 해와 달과 다섯 개의 행성을 합친 ‘일곱 개의 천체’를 의미하고,

‘칠정산’이란 이들 ‘일곱 개의 천체’의 운행궤도를 계산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칠정산내외편>은 오늘날의 천체물리학에 해당하는 내용을 다루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칠정산내외편>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책일까?

세종시대에 이르면 조선의 정부는 중국으로부터 역서를 수입하여 사용하는 문제를 인식하고

독자적인 천체운동 계산능력을 길러서 조선 나름의 역서를 간행하려는 노력을 강화한다.

이를 위해 세종과 과학자들은 중국으로부터 여러 천문학 서적들을 수입하여 연구하고,

관련된 천문관측 기구들인 혼천의(渾天儀)와 간의(簡儀) 등을 제작하여 천체를 관측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마침내 독자적인 역법(曆法)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으니 <칠정산내외편>이 바로 그것이다.

 

<칠정산내외편>의 편찬은 단지 역법의 독립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로 전문적인 수준의 과학기술 연구능력을 보유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후 20세기 초까지 조선은 독자적인 역법계산과 역서의 발행을 계속하였으니,

이는 <칠정산내외편>으로 상징되는 ‘천문학 독립’과 그 중심에 이순지가 서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세종시대의 과학과 관련된 문헌들이 수십 책 이상 소장되어 있는데,

이들 중에는 1434년에 주조된 초주 갑인자(初鑄 甲寅字)로 인쇄된 천문학과 관련된 서적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어 현재 규장각에서도 이들을 귀중본으로 지정하여 별도로 관리하고 있다.

그런데 그 목록을 살펴보면

세종시대에 간행된 귀중본 과학기술 서적들은 대부분 이순지라는 과학자 단독 저작이거나

아니면 그가 포함된 공저의 형식으로 편찬된 것이다.

<교식통궤>, <중수대명력>, <오성통궤>, <위도태양통경>, <수시력첩법입성> 등이 그것으로

이들 귀중본 서적들은 <칠정산내외편>의 성립과정에서 수입되거나 편찬된 서적이다.

뿐만 아니라, 혼천의(渾天儀)와 간의(簡儀), 혼상(渾象),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와 같은 천문관측기구와

더불어 장영실이 만든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도

천체 관측에 필요한 정확한 시각을 계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순지는 그가 남긴 업적에 비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고액권 화폐의 인물을 선정할 때 장영실이 10인의 인물후보군에 포함되었다.

또한 자격루 유물(엄밀히 말하면 물시계 유물이다)은 구 1만원권 화폐의 뒷면을 장식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장영실은 조선시대 과학기술자들을 대표하는 인물처럼 취급되고 있으며,

일반인들에 의해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다.

이에 비해, 이순지는 그 업적을 생각해보건대 거의 찬밥신세와 같은 대접을 받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대접의 불공평성’은

사실 일반인들의 세종시대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의 부정확성’이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겠다.

- 이순지와 세종시대의 과학

- 박권수(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