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선교사 로드리게스의 <극동보고서>

Gijuzzang Dream 2010. 12. 31. 20:28

 

 

 

 

 

 

 

 

 선교사 로드리게스의 <극동보고서>

 

<하멜표류기>보다 앞선 로드리게스의 극동보고서

 

 

 

 

한국은 처음부터 日 조종국으로 소개됐다

 

이 자료는 포르투칼의 예수회 신부이자 역사가인 로드리게스가 지은 <일본교회사> 중 한국 관련 기록으로,

명지대 정성화교수가 미국에서 입수해 국내에 처음으로 공개하는 것이다.

1668년 조선을 서양에 처음 소개한 것으로 인정받는 하멜의 <하멜표류기>보다 시기적으로 앞서고,

서양인으로서는 최초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사료로 인정된다.

아쉬운 것은 일본어와 중국어에 능통한 로드리게스가 일본측 사료를 중심으로

임나일본부설 등 왜곡된 한국역사를 서양에 소개했다는 점이다.<편집자>

 

 

 

 

제1부: 로드리게스는 누구인가?

 

 

을씨년스러운 겨울 바람이 휘몰아치는 1630년 12월 어느날, 중국 산둥(山東)반도의 군사 요새지 덩저우(登州)에서는 자그마한, 그러나 역사적인 만남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무렵 명(明)나라에 대한 만주족의 공세가 가열되면서 연일 끊이지 않는 포성이 이곳까지 들려왔다.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신부 로드리게스는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지만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쁨에 지난 60여 년간 극동에서 보낸 파란만장했던 인생 행로가 주마등같이 눈앞을 스쳐갔다.

 

같은 시각 베이징(北京)에서 임무를 마치고 서울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조선의 진위사(鎭慰使) 정두원 일행이 덩저우에 도착했다. 정두원과 로드리게스의 짧은 만남, 이역만리 이국에서의 첫 대면은 두 사람 모두에게 감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16세기 대항해(大航海) 시대가 시작된 이후 한국인과 서양인들은 일본 중국 인도 유럽 등 세계 각처에서 만났다. 나가사키 마카오 말라카 고아 암스테르담 로마 등지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한국인들과 서양인들이 만났지만 바람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 역사의 무대 밖으로 사라졌다. 이들의 만남은 대부분 무의미했고 대상 인물도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못했다.

 

그러나 1630년 덩저우에서의 만남은 사정이 달랐다.

만난 당사자들의 이름은 물론 그 내용이 한국과 유럽의 문헌에 구체적으로 기록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정두원은 로드리게스를 만난 이후 조선 임금인 인조에게 이렇게 극찬했다.

“그는 도를 터득한 사람입니다.”

 

과연 로드리게스는 누구인가?

그는 동아시아가 격동을 겪던 16세기 말 예수회 신부 자격으로 일본과 중국에서 일생의 대부분을 보낸 ‘동양통’이다. 그는 임진왜란과 만주족의 명나라 침략을 모두 목격한 극소수 유럽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수도 도쿄(東京)와 중국의 수도 베이징을 방문한 최초의 서양인이기도 하다. 그는 조선의 서울도 방문하려고 시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와 같은 인생 경험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우리의 관심을 끌 만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로드리게스는 신부이면서 역사가였다.

중국과 일본측 원(原)사료들을 수집 · 정리 · 해석할 수 있는 사람으로는 동시대 유럽인 중 거의 유일했다.

그가 1620년대에 지은 <일본교회사>는 일본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이 책에서 임나일본부설과 기자조선설을 언급하는 등 한국과 중국의 역사를 비교 고찰해 역사가로서의 탁월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여하간 이 책은 유럽 최초의 극동문화사라 할 수 있다.

 

 

 


로드리게스의 인생항로

 

극동지역과 로드리게스의 인연은 그의 소년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로드리게스는 1561년경 포르투갈 북부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과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불우한 가정에서 성장한 듯하다.

 

1601년 예수회의 페드로 모레혼 신부가 작성한 그의 간단한 이력, 1619년에 작성된 예수회 서간문, 그리고 로드리게스 자신이 집필한 ‘일본교회사’ 등에서는 그가 일본에 도착한 시기를 1577년으로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적어도 13~14세라는 어린 나이에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을 출발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왜 로드리게스는 그토록 어린 나이에 힘들고 고통이 따르는 대양 항해를 거쳐 일본에 가려 했을까?

16세기 후반 포르투갈에서는 향료 무역이 번창했고, 리스본은 동양과 유럽을 연결하는 교역 중심지로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다. 자연히 동양은 동경과 희망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미지의 세계에는 항상 새로운 기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유럽의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포르투갈은 극동지역에서 가톨릭 포교와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다. 선교사와 상인들이 리스본을 출발, 고아를 거쳐 극동으로 물밀듯이 몰려오고 있었다. 1549년 자비에르 신부가 일본 포교를 시작한 이후 1570년대에는 이미 수십명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포르투갈과 로마 교황청의 적극적인 후원하에 규슈(九州)지역에서 포교에 전념하고 있었다.

또한 말라카 마카오 나가사키를 연결하는 동아시아의 거친 파도를 타고 포르투갈 상인들도 부를 축척하고 있었다. 리스본에서 출발해 2년에 걸친 고달프고 긴 항해의 종점에는 꿈과 희망의 나가사키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고아로 성장한 로드리게스도 일확천금의 꿈을 가지고 일본으로의 긴 여정을 택했을 것이다.

 

1577년 여름 소년 로드리게스는 포르투갈 상인의 손에 이끌려 일본에 도착했다. 그를 데리고온 상인들은 마카오로 돌아갔다. 일본에 홀로 남은 로드리게스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규슈에서 포교중인 예수회 선교사들뿐이었다. 도착 직후부터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규슈 붕고(豊後)의 다이묘(봉건 영주)인 오토모 요시시게의 후원으로 이 지역에서 포교중인 프란시스코 카브랄과 후안 토레스 신부 등과 함께 지낼 수 있었다.

 

로드리게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후원자인 토레스의 뜻을 따라 가톨릭에 귀의하고 신부가 되기 위한 기본적인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초등교육을 받지 못한 그는 1580년 12월 붕고 오이타(大分)에 있는 예수회 신학교에서 인문학을 접하고 1583년 10월부터는 스콜라 철학도 배웠다. 또한 일본인 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어도 배우게 되었다.

 

그는 다른 선교사들보다 어린 나이에 일본에 도착했기 때문에, 그리고 동년배의 일본인 학생들과 수시로 접촉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어떤 유럽인들보다도 쉽게 일본어를 배울 수 있었다. 로드리게스의 일본어 능력은 나날이 발전했다. 그는 수년 내에 선교사 중에서 일본어를 가장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고 통역관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로드리게스는 뛰어난 일본어 실력 때문에 당시 유럽인으로서는 드물게 극동의 정치는 물론 문화적 특징을 깊숙이 이해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의 주모자를 만나

 

그는 1590년 7월 예수회 교단의 동아시아 순찰관으로 일본을 방문중인 알렉산드로 발레그나노의 통역관으로 지명되었고, 1591년 3월3일에는 발레그나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접견할 때 일본어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특히 이 모임에서 로드리게스는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계획을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1596년 로드리게스는 마카오에서 페드로 마르틴 주교로부터 신부 서품을 받았다. 이후 주교를 수행해 일본으로 돌아온 로드리게스는 그해 11월에 통역관으로 다시 히데요시를 접견할 수 있었다. 1598년에도 두차례에 걸쳐 히데요시를 면담했다.

 

그는 임진왜란(1592~1597)이 전개되는 동안 한반도에서 끌려온 노예들을 수시로 만났고 나가사키를 방문하는 유럽인들에게 전쟁 상황을 알려주기도 했다. 특히 우리에게 ‘안토니오 코레아’의 이야기로 잘 알려진 피렌체 출신의 칼레티 부자가 나가사키에 체류하는 동안 이들의 교역을 중개하고 나아가 전황을 전하기도 했다.

또 로드리게스는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예수회 선교단의 재무관으로 봉직하는 동시에 일본을 방문하는 포르투갈 상인들의 통역을 담당하면서 수시로 일본 정계 유력자들을 접견했다.

 

그는 히데요시가 죽은 이후 실력자로 등장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매년 방문했다. 그리고 이에야스를 대신해 나가사키 교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로드리게스는 수시로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에게 예수회 선교사들을 소개하고 유럽의 정세를 알려줌으로써, 당시 일본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던 극소수 서양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1600년 이후 로드리게스가 이에야스를 대신해 포르투갈과 일본의 무역에 깊숙이 개입하자, 예수회 교단은 물론 일본의 다이묘 및 상인들도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기 시작했다. 일부 예수회 신부들은 로드리게스가 무역이나 행정과 같은 세속적인 일에 빠져 교단 재무관이라는 본직에 충실하지 못하며, 많은 적을 만들어 포교사업에 지장을 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세퀘이라 주교도 통역관과 협상자로 뛰어난 그의 능력을 인정했지만 세속사에 대한 지나친 개입을 우려했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로드리게스는 이에야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으며 이에야스가 죽기 2개월 전까지 그를 면담할 수 있었다.

 

1610년 1월 포르투갈 선박이 나가사키에서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 관리들은 이 사건을 빌미로 로드리게스를 제거하려 했다. 이들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로드리게스를 일본에서 추방한다면 포르투갈과 선린관계를 다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결국 희생양이 된 그는 1610년 초 일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33년에 걸친 인생의 황금기를 일본에서 보낸 로드리게스는 일본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예수회에 요청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로드리게스가 나가사키를 떠난 지 4년 후인 1614년 1월 이에야스는 가톨릭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법령을 선포하고 기독교를 불법화함으로써 로드리게스가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는 일말의 희망마저 꺾어버렸다.

 

49세 때 마카오에 도착한 로드리게스는 중국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포르투갈 상인들의 신부 자격으로 수차에 걸쳐 광둥(廣東)을 비롯한 중국 남부지방을 여행하고, 1613년 6월부터 1615년 7월까지 약 2년에 걸쳐 내륙 지방에서 포교중인 예수회 신부들을 찾아다니며 불교 및 토속종교 연구에 심취했다.

그는 중국 역사서를 수집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미 일본어에 능숙한 그는 커다란 어려움 없이 한문을 해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원사료를 쉽게 수집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로드리게스는 서양인으로는 처음으로 일본과 중국측 원사료를 비교 연구함으로써 극동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기본 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라고 할 수 있는 <일본교회사>는 이러한 어학적 토양 위에서 집필된 것이다.

 

1628년에 로드리게스의 아시아 여정에 이정표가 될 만한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중국 북방 만주족이 세력을 점차 확대함에 따라 명나라는 만주족을 물리치기 위해 10기의 대포를 마카오에 요청했다. 로드리게스는 이들을 운반하는 포르투갈 군사 사절단의 일원으로 1630년 2월14일 베이징에 도착, 무기를 무사히 전달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명의 군사지원 요청이 거듭됨에 따라 10월31일 360명의 용병과 함께 마카오를 출발했으나 이들의 대부분은 난창(南昌)에 억류돼 다시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로드리게스 자신은 북으로 여행을 계속해 덩저우에 도착했고, 바로 이곳에서 조선 관리인 정두원을 만났던 것이다.

 

 

 


한국에 관심 많은 예수회 선교사

 

사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일본과 중국에 이어 한국에도 매우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6세기 중엽 예수회가 극동지역에서 포교를 시작한 이후 한국은 이들의 끊임없는 포교 대상이었던 것이다.

예수회 신부들이 처음으로 한국 포교를 시도한 시기는 기록상 1566년이다. 이 해에 일본 교구장 코스메 토레스 신부는 포르투갈 출신 가스퍼 비레라 신부를 한국에 파견할 것을 결정했다. 실제로 비레라는 한국으로 향했지만 일본에서 벌어진 내란 때문에 포교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570년대에 들어오면서 예수회 신부들은 한국을 언급한 서간문을 수시로 리스본과 로마로 발송하고 한반도로 선교사들을 파견할 것을 교황청에 촉구했다. 1590년대에 들어와 프로이스와 발레그나노 등 일본에서 포교중인 선교사들은 임진왜란을 틈타 한국에 가톨릭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고, 포로로 일본에 붙잡혀온 한국인 중 일부는 가톨릭 교도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에 가톨릭을 포교하려는 일본 예수회 신부들의 계획은 1614년 이에야스가 선교사 추방을 결정함에 따라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중국에서 활동중인 예수회 신부들이 한국 포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의 계획은 1614년 일본에서 포교중인 예수회 신부들이 추방당해 대거 마카오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더구나 중국에서 발생한 내란은 예수회 신부들이 한국에 입국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다.

 

1619년 만주족이 흥기하면서 명은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조선에 군사를 요청하기로 했다. 당시 대표적인 가톨릭 고관이었던 쉬광치(徐光啓)는 자신이 청병(請兵) 사신으로 임명될 경우 삼비아시 신부를 대동하고 조선에 입국하려 했으나,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1630년에 들어와 만주족의 공세가 점차 가열됨에 따라 명의 세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숭명사상이 팽배하고 있던 조선에서는 대신들을 중심으로 위험에 빠진 명나라를 위로하기 위한 사절단을 파견하자는 의견이 점차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에 2월1일 인조는 부연사행을 파견할 것을 결정하고 정두원을 진위사로 임명했다. 당시 부연사행은 대부분 톈진(天津)을 경유해 베이징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7월2일 정두원은 해로를 수정해 곧바로 덩저우로 향하게 해달라고 청했고, 인조는 중국과 협상을 거쳐 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정두원이 덩저우를 채택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이쪽 해로가 톈진 쪽보다 휠씬 순탄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바로 이 길 때문에 정두원은 로드리게스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 것이다.

 

 

 


로드리게스와 정두원의 만남

 

로드리게스는 정두원이 중국으로 온다는 소식을 베이징에서 접했다. 1630년 2월14일 명을 지원하기 위한 구원 병력을 인솔하고 북경에 도착한 로드리게스는 한반도에서 부연사행이 온다는 소식을 접한 뒤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열렬한 가톨릭 선교사인 로드리게스는 조선 포교를 위한 절호의 기회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정두원 일행이 덩저우에 도착할 시점을 계산해 미리 도착해 있었다.

 

덩저우에서 만난 정두원과 로드리게스는 상대방에 대해 깊은 호감과 존경심을 지니게 됐다. 이들의 만남은 짧긴 했지만 상대방에 대한 무한한 지적 호기심으로 충만된 시간이었다. 로드리게스는 조선의 정치와 문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톨릭 포교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정두원은 서서히 조선에 스며들고 있는 서방의 신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끊임없는 질문을 계속했다.

 

<조선왕조실록>은 정두원이 1631년 6월24일 중국에서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로드리게스가 준 천리경 서포 자명종 염초화 자목화 등을 인조에게 바쳤다. 인조는 특히 천리경과 서포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으며 이를 가지고 온 정두원을 치하했다.

 

8월3일 인조는 정두원을 불러 중국의 전세, 성곽 구성, 덩저우의 병력 등을 자세히 물었다. 특히 국방에 관심이 많았던 인조는 ‘육약한(陸若漢)’으로 알려진 로드리게스가 어떤 인물인지도 물었다. 이에 정두원은 로드리게스를 “도를 터득한 인물’이라고 보고했다.

 

정두원은 로드리게스로부터 염초를 굽는 법을 배워 이를 전국에 보급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당시까지 화약은 대부분 중국에서 구입했다. 정두원이 이를 전국에 파급시킴으로써 1633년 경상병사 박상은 “앞으로 화약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인조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한편 정두원이 중국을 떠난 후 덩저우의 군사 요새가 곧 만주족에게 함락되었다. 인조로부터 자신의 조선 방문에 대한 응답을 기다리다 지친 71세의 노신부 로드리게스는 야음을 틈타 가까스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덩저우의 손실은 로드리게스에겐 커다란 실망이었다. 조선 포교에 필수적인 중요한 거점을 잃어버린 것이다. 나아가 조선을 방문하려는 계획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베이징에 도착한 로드리게스는 명으로부터 포상을 받고 다시 1500 마일의 긴 여행 끝에 1633년 2월 마카오로 귀환했다. 마카오로 돌아온 직후 로드리게스는 로마로 보낸 서간문(1633년 2월5일자)에서 정두원과의 만남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조선이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진 ‘위대한 왕국’이라고 평하고 ▲성서, 마테오 리치 신부(1552~1610 ; 예수회 선교사로 중국에서 가톨릭 포교의 기초를 세운 인물)의 지도(곤여만국전도), 기타 과학적 자료들을 한반도에서 온 대사를 통해 인조에게 전달했으며 ▲대사들은 지금까지 몰랐던 세계에 대해 알게 돼 무척이나 기뻐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그는 대사로부터 매우 훌륭한 선물을 받았다고 기록했으나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인조에게 보낼 선물과 책들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로드리게스는 그 해 8월1일 마카오의 예수회 신학교에서 72세를 일기로 사망, 그의 조선 포교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그는 후대 선교사를 위해 조선인들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기록하는 치밀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조선의) 왕과 신하들은 우리에 대해 알고 있으며 그들은 매년 두 차례에 걸쳐 지정된 날짜에 중국을 방문한다”고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제2부: 로드리게스가 언급한 한국역사

 

 

로드리게스는 선교사로서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보내는 한편 저술활동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예수회 서간문과 극동 관련 책들을 집필했다. 1603년 그가 일본 나가사키에 있을 당시 포르투갈어로 씌어진 일본어 문법 서적을 최초로 출판했다.

총 240쪽으로 구성된 이 책은 일본어 문법, 구문론, 수사법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고 구어와 문어적 표현은 물론 시 · 역사 · 서체도 부분적으로 언급돼 있는 등 일본어에 관한 포괄적인 해설서로 유명하다. 로드리게스는 1620년 이 책의 교정본을 마카오에서 출판하면서, 일본어의 뿌리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1620년부터 3책으로 구성된 극동 지리서를 집필하기 시작해 1627년에 완성했다. 이 책은 한국에 관한 지리적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안타깝게도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여하간 로드리게스는 한국 문화를 연구한 최초의 서양인으로 기록될 만하다. 물론 로드리게스 이전에도 서양인들이 한국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16세기 대항해 시대에 한국을 유럽에 소개하는 데 첫발을 내디딘 사람은 일본에서 포교중이던 예수회 출신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였다. 프로이스는 일본에서 유럽으로 발송되는 예수회 연례 서간문 집필을 담당하면서 한반도 관련 내용을 이베리아와 이탈리아 반도 등 주로 가톨릭 세계에 전달했다.

 

또 영국의 리처드 해크루트는 프로이스의 서간문에 포함된 한국 관련 내용들을 발췌, 영역해 그의 대표적인 항해기 모음인 <중요여행기> 재판본에 소개함으로써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 이후 유럽 전역에 한국을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이들의 내용은 대부분 한반도에 대한 지리적 정보와 임진왜란 등 동 시대 사건에 국한돼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유럽에 전달하는 데는 미흡했다.

 

17세기에도 한국은 유럽에서 발행된 동양 관련 서적에 간헐적으로 소개되었다. 1654년에 출판되어 유럽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마르틴 마르티니의 <만주족의 중국 침략사>는 명말 청초의 정치적 혼란기에 한국의 어려운 정치적 입장을 유럽인들에게 상세히 알려주었다.

유럽인들에게 한국을 알리는 데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한 서적은 1668년에 출판된 <하멜 표류기>였다. 이 책을 통해 유럽인들은 한국의 실상을 한층 사실에 가깝게 접할 수 있었다. <하멜 표류기>는 이후에도 존 해리스, 토마스 아스트리, 진 베르나드 등이 편집한 항해기 모음에 포함돼 한국에 대한 유럽인들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었다.

 

18세기 중엽에는 유럽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 할드의 <중국사>에 한국 역사와 문화가 부분적으로 언급되었다. 그리고 19세기 말부터 라페루즈, 윌리암 부르통, 에드워드 벨처, 버질 홀 선장 등이 한반도 주위를 항해하면서 그들의 두려움과 호기심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한국은 20세기를 전후로 본격적으로 서양에 소개되었다. 남원군 묘 도굴로 유명한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 미국의 선교사 윌리엄 그리피스, 천문학자 퍼시발 로웰 등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제국주의 시대 서양인들에게 소개하는 일련의 서적을 집필했고, 이들 서적은 극히 최근까지도 서양인들이 한국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자료로 남아 있다.

 

이와 같이 16세기 대항해 시대가 시작된 이후 구한말까지 서양인들은 한국의 다양한 이미지를 만들어왔다. 이미지 제조자들을 직업별로 분류해 보면 종교인과 여행가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한국은 기독교의 포교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색의 결과로 유럽에 소개되었고, 따라서 이들이 집필한 서적도 종교적 내용과 지리적 호기심으로 충만되었을 뿐 한국을 문화적이나 역사적으로 조명한 서적은 19세기 말까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한국역사 언급한 ‘일본교회사’

 

로드리게스가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의 저서 <일본교회사>가 1620년대라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집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포함한 극동 지역의 문화적 가치를 통찰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일본교회사>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과는 달리 일본 교회의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극동의 역사와 문화로 가득 차 있다. 로드리게스는 당시 극동을 방문했던 어떠한 유럽인들보다 뛰어난 문화적 감성을 지니고 있어 동아시아 역사를 문화사적인 면에서 조명할 수 있는 최적의 인물이었다. 바로 이러한 점이 <일본교회사>가 지닌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로드리게스의 <일본교회사>가 탄생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1597년 예수회 선교사 프로이스가 죽은 후 로마에 본부를 둔 예수회 교단은 유럽인들에게 해외 포교활동을 광범위하게 선전하기 위해 새로운 일본 교회사를 출판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일본에서 포교중인 포르투갈 출신 쿠로스 신부에게 일본 교회사를 집필하도록 위임했다. 그러나 쿠로스의 건강이 악화돼 10여 년이 지나도록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자, 예수회는 마카오에 체류하고 있던 로드리게스에게 이 임무를 부여했다.

로드리게스는 1619년부터 본격적으로 집필에 착수해 1620년에는 일본사에 관한 자료를 상당 부분 수집 정리해 기초적인 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1627년 로드리게스는 동아시아 예수회 포교사의 초기 40년, 즉 1549년부터 1590년까지의 포교사 집필을 완료했다고 로마로 보고할 수 있었다.

 

로드리게스의 <일본교회사>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제1부는 10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날에는 단지 2책만 남아 있는데, 여기에서는 일본을 중심으로 중국과 한국 등 극동 3국의 문화적 특징을 비교하고 있다. 제2부 역시 10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일본에서 포교한 예수회 수도원장들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이들 가운데 자비에르를 취급한 제1책만 현존한다. 제3부는 4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차례대로 중국 안남 한국 그리고 샴의 문화와 정치를 소개하기 위한 것이다.

 

로드리게스는 제3부 제3책에서 한국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3부는 모두 사라져 오늘날 그 내용을 알 길이 없다. 이와 같은 구성으로 볼 때 로드리게스의 <일본교회사>는 사실상 예수회의 일본 포교사는 물론 한국과 중국을 언급하고 있는 방대한 규모의 극동 문화사라 할 수 있다.

 

현존하는 <일본교회사> 중 최고(最古)의 필사본은 리스본 소재 아후다궁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이 필사본은 로드리게스가 직접 작성한 원본이 아니라 1740년대에 마카오에서 필사된 복사본이다. 이 복사본은 로드리게스가 1620년에 집필중이라는 내용을 수시로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대부분 1620년과 21년에 집필되었고 일부는 로드리게스가 베이징에서 돌아온 1633년 초에 다시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는 마카오로 돌아 온 수개월 뒤 사망함으로써 <일본교회사>는 미완의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만약 로드리게스가 좀더 오래 살았다면 한국에 관한 내용을 충실히 보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의 선생은 한국

 

남아 있는 기록 중 한국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일본교회사> 제1부의 1, 2책이다.

이 두 책은 집중적으로 일본과 중국 및 한국의 예술, 건축, 정부, 불교, 토속종교, 관습 등을 다루고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 그가 어떠한 자료들을 수집해 집필에 이용했는지 알 수 있다.

 

로드리게스는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 프톨레미, 마르코 폴로, 바로스 등을 인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로드리게스가 이 모든 자료들을 읽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로드리게스가 아시아에 관한 지리적 설명에서 지오바니 마니니의 지리학을 읽었고 그 내용 중 상당 부분을 집필에 인용했다는 점이다. 또한 그는 중국과 일본의 원사료를 비교 인용해 집필했으며, 특히 <일본서기>는 로드리게스의 중요 집필 출처이기도 했다.

 

로드리게스는 일관되게 한국을 동시대 국가명인 조선이라 하지 않고 고려에서 유래된 '고레(Core)'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도 조선이라는 명칭을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유럽인들이 보편적으로 칭하는 고레라는 명칭을 채택한 것이다. 그는 한국을 직접 방문하지는 못했지만, 한국의 문화가 대부분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었기 때문에 서로 유사한 점이 많다고 전제한 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을 조명했다.

 

제1책의 제2장은 ‘일본 섬들의 일반적인 설명, 위치, 그리고 다양한 이름들’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되고 있다. 그는 이 장에서 중국인들이 일본을 칭하는 여러 이름들을 제시하고, 어떻게 '왜국(倭國)'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게 되었는지 설명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중국 이외의 모든 나라들을 야만국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한국을 동쪽에 위치한 야만국이라는 의미의 '동이(東夷)'라고 칭한다고 언급했다.

 

로드리게스는 일본인들이 처음 어디에서 출현했는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본인들은 원래 중국과 한반도에서 건너왔으며 ▲일본은 중국과 접촉하기 전부터 이미 한국과 교류했고 ▲한국을 통해 한문 등 한층 발전된 중국 문화를 전수받을 수 있었다고 언급했다.

 

일본의 왕은 원래 중국의 저장(浙江)성에서 규슈로 온 초기 정착민에서 시작되었고, 이 당시 또는 이전에 이미 한반도에서 온 사람들이 일본의 주고쿠(中國) 지역에 정착했는데 당시 일본에는 왕이 없었다고 부언하고 있다. 한편 중국인들은 한국을 '가올리(Caoli)'라 칭하지만, 한국인들 자신은 '고레인'이라고 칭한다고 알려주고 있다.

 

로드리게스는 한반도에 대해 프로이스보다 더욱 정확한 지리적 지식을 제공하고 있다. 맑은 날에는 일본에서도 한국이 보이며 순풍만 분다면 한국은 일본에서 하루 내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고 적고 있다. 그는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이 한국을 조공국으로 만들었고, 야마구치가 위치한 주고쿠 지역의 일본 귀족들은 과거 백제의 후손이며, 1549년 자비에르가 일본에 도착했을 때 이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요시타카 오우치는 백제 후손의 7번째 계승자라고 언급하고 있다.

 

 

 


조선의 풍수지리

 

로드리게스는 기원전 1130년 중국이 ‘기자’라고 불리는 왕을 한반도로 보내 통치했다고 하는 ‘기자조선설’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때부터 한반도 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로드리게스는 이러한 설명의 출처를 제공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는 중국측 사료를 이용해 이러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제4장은 ‘유럽인들이 고대에 이 섬들을 알고 있었을까? 그리고 언제 이 섬들이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발견되었을까’라는 긴 제목으로 시작되고 있다. 일본의 동식물을 설명하면서, 로드리게스는 일본에는 원래 노새가 없었는데 최근 한국과의 전쟁(임진왜란)을 통해서 이들이 일본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귀중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외에도 한국은 일본에 나무껍질을 이용해 종이를 제조하는 방법을 전수해 주는 등 일본 문화 발전에서 중요한 전달자였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 한반도는 전체가 8도로 나뉘어 있는데, 일본인들이 외국인을 친절히 대해주고 이들을 수용하는 데 반해 한국인들은 서양인들을 경멸하며 외국인들이 자신의 왕국에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로드리게스가 한국 중국 일본의 문화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지는 제12장 ‘건축양식’에 잘 나타나 있다. 로드리게스는 일본의 궁궐과 집들이 조성되고 건축되는 과정을 한국 및 중국과 함께 비교 설명하고 있다.

 

“집 · 궁궐 · 도시를 조성하는 방법은 동양 3국이 서로 유사하며, 동양인들은 건축술은 물론 각종 의식에서 방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극동 3국의 건축물에는 남쪽이 항상 건물의 정면을 차지하고 있으며, 후면은 북쪽을 향하고 동쪽은 좌측에, 그리고 서쪽은 우측에 놓여 있다. 따라서 집·궁궐·도시는 항상 남쪽을 바라보고 건축되며 왕과 고관들은 공식적인 행사나 비공식적인 만남에서 항상 남쪽을 향해 앉는다. 그리고 좌측이 우측보다 명예로운 자리이고 지위가 낮은 인물은 북쪽을 향해 앉는 것이 관습이다.”

 

로드리게스는 한국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당시 서양인으로는 드물게 동양의 풍수지리를 이해하고 있었고, 극동 3국의 문화가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한국인들도 이러한 원칙에 따라 집 · 궁궐 · 도시 등을 건축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왕궁은 일반적으로 4대문을 가지고 있으며, 가장 중요한 문은 남대문이고 동서로 가로지르는 도로보다 남과 북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더욱 중요하게 간주된다. 그리고 만약 외문(外門)이 남쪽을 향하는 것이 지역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내문(內門)은 남쪽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 개인이 집을 건축할 때에도 방향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데 집의 방향은 항상 남쪽을 향해 있으며, 그 이유는 의례적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실용성 때문이다.”

 

로드리게스는 남향집이 여름에는 남풍의 영향으로 시원하고 겨울에는 북풍의 영향으로 따뜻하기 때문에 이러한 식으로 집을 건축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집 · 궁궐 · 사원 등의 지붕은 항상 정문을 향해 그리고 그 집에서 가장 고귀한 장소를 향하도록 건축돼 있고, 집안의 내실은 여자들만 왕래할 수 있고 남녀의 접근은 엄격히 금지돼 있다고 밝혔다.

또 중국 · 일본을 비롯해 한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절대로 손으로 음식을 먹지 않으며 젓가락을 사용한다고 언급했다. 이처럼 로드리게스는 정치보다는 일반 생활과 문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문 예찬론자

 

동양문화에 대한 심오한 성찰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드리게스는 동양의 종교를 미신으로 간주하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일반적인 매너리즘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일본인들의 일반적인 매너와 관습’이라는 제목(제15장)에서 로드리게스는 극동 3국이 설을 지내기 위해 엄청난 준비를 하고 차례를 치르며 손님과 가족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새 옷으로 설을 맞이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로드리게스는 불교의 영향을 받은 극동 3국이 제례와 관례 등에서 지나치게 종교적 위선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인생의 대부분을 미신 숭배에 바치고 있다고 혹평하고 있다.

 

제20장에서 로드리게스는 한국 중국 일본에서는 경조사 때 상대방을 방문해 축하와 위로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언급한다. 방문객들은 주로 선물을 가지고 가는데, 문상할 때는 조의의 표시로 백색 옷을 입으며 특히 염색하지 않은 백색 모자를 쓰는 것이 관례라고 알려주고 있다.

 

제28장에서는 동양 3국의 술 소비량이 엄청나다고 평가하고 술은 주로 쌀로 만들어진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많은 가금류를 섭취하는데 이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수입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로드리게스는 한문 예찬론자다. 그리고 그의 한문 예찬론은 제1부 제2책의 ‘일본의 문자와 예술, 그리고 시에 대한 설명’을 통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제4장에서 그는 한문이 유럽의 문자와 같이 알파벳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표의문자이기 때문에 사물의 수만큼이나 많은 단어를 가지고 있어 배우기가 무척 어려우며, 한문은 중국에서 발명되었으나 285년 혹은 290년 한국을 통해 일본으로 소개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극동 3국은 각기 다른 자신들의 말로 소통하지만 문자가 동일하기 때문에 상호간에 책을 공유할 뿐 아니라 문자를 통해 의사도 교환할 수 있다고 했다. 특히 한국에서 중국으로 파견한 대사들은 문자를 통해 어려움 없이 의사 소통이 가능하고, 중국에서 한문으로 인쇄된 성서는 한국에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토착 언어로 번역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글씨를 쓰는 방법이 유럽인들과는 달리 위에서부터 아래로 그리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 이어 서로 상이한 한문 서체를 소개하기도 했다.

 

로드리게스는 1231년 몽고의 쿠빌라이 칸이 한국을 점령한 이후 1279년과 80년 약 20만명의 군사와 4000척의 함대로 일본을 공격했지만, 폭풍으로 실패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한국이 한때 쓰시마(대마도)를 소유했으나 지금은 일본이 소유하고 있으며 이 섬을 중심으로 한국과 일본의 교역이 이뤄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한일 사학계의 논쟁, 임나일본부설

 

로드리게스는 한일간의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임나일본부설’을 유럽어로 언급한 최초의 서양인이었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이 한반도 남부의 가야지역을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이곳을 경영했다는 내용인데, 일본측 학자들이 주장하는 학설이다. 로드리게스가 일본에 체류할 당시에도 고전을 연구하던 일본 국학자들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주장해왔다.

 

여하간 로드리게스는 로마로 보낸 한 서간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본 제16대 왕인 오진 텐노의 아버지가 한국의 침략자들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죽었다. 그리고 오진 텐노를 임신한 상태로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 대신 전쟁을 계속해 한국을 물리친 뒤 한국을 조공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일본으로 돌아온 후 아이를 낳았다. 많은 다양한 재능을 지니고 있던 이 왕이 283년 일본으로 중국의 한자를 소개했으며….”

 

로드리게스가 한일 양국의 고대사를 어느 정도 이해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인용문으로 파악할 때 단순히 피상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판단된다. 로드리게스는 인용문의 출처를 제시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일본서기>를 읽고 임나일본부설을 이해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로드리게스는 한국측 자료를 조사할 기회도, 여건도 갖지 못했다. 따라서 일본측 사료에 익숙했던 그가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 것은 아마도 불가피했을 것이다.

 

아무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임나일본부설의 진위 여부가 아니라, 유럽인들이 이미 17세기 초에 한국측 사료를 배제한 채 일본측 사료에 의존해 한국을 이해했고 이를 기록으로 유럽에 알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임나일본부설은 일본 제국주의 역사관의 하나로 비난받아왔지만, 한편으로는 서양 일부지역에서 타당한 학설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로드리게스의 경우에서와 같이 일본측 역사 해석에 대한 서양의 무비판적인 수용 때문일 것이다.

 

<일본교회사>는 일본과 중국의 자료들을 토대로 집필되었기 때문에 한국에 대해 상당히 왜곡된 내용을 담을 수밖에 없다. 후에 한국을 연구한 서양인들도 로드리게스가 직면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일본과 중국측 자료를 토대로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갔다. 따라서 로드리게스식의 서술 패턴이야말로 근대 서양인들이 한국을 조명하는 전형적인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교회사>는 불완전하고 극히 제한적이긴 하지만 한국 문화와 역사를 언급한 유럽 최초의 저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멜표류기>가 발행되기 이전까지 한국의 문화를 가장 많이 취급한 서적이다.

로드리게스는 <일본교회사>가 후학들에게 하나의 역사적 사료로 제공되길 원했다. 그는 후학들이 그의 책을 정리, 편집해 재출판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필사본은 20세기 중엽까지 사장돼 있었고, 어느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일본교회사>는 예수회 서간문을 연구하던 쉐르하머 신부에 의해 1932년 발굴되었고, 극히 최근에 와서야 영국의 복서 교수에 의해 폭넓게 소개되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이번에 신동아를 통해 처음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왜곡된 한국 이미지

 

이미지는 인류가 서로의 문화를 효율적으로 이해하게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오해하게도 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대외관계를 전제로 하는 국가 이미지는 그 내용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며, 그 과정에 자연적으로, 혹은 인위적으로 사실과는 다른 이미지가 나타나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전파매체나 수출상품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해 한 국가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형성되거나 인위적으로 조작되기도 하지만, 20세기 직전까지만 해도 국가 이미지를 창출하는 수단은 대부분 필사본이나 서적이었다.

정보의 유통 수단이 전근대적이었던 시대에 서적이야말로 서양인들이 동양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가장 효율적인 도구였고, 그것을 집필한 인물들이야말로 이질적인 문화의 전달자이자 미지 세계에 대한 이미지의 창조자라 할 수 있다.

 

로드리게스는 16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었던 극동 문화에 대한 심오한 감상자이자 이미지 창조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로드리게스에게는 본국에 보내는 예수회 서간문을 작성할 기회가 많지 않았고, 동시대 사건들을 언급할 기회도 거의 없었다.

또한 프로이스나 마테오 리치와 같이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다. 문장력도 프로이스의 문체만큼 조직적이거나 화려하지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로드리게스는 동시대 예수회 선교사들이 이해하지 못한, 동아시아 문화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본질을 파악해내는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안타까운 점은 그가 지닌 한국 이미지는 항상 일본과 중국측 자료를 통해 굴절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굴절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 정성화 명지대 인문대교수·역사학

- 신동아, 1999년 6월호

 

 

 

 

 

 조선왕국과 아담 샬  

 

 

 

 

숙종대왕의 천문도 시(詩)

 

숙종 34년(1708) 관상감에서는 17세기 중국에서 활동하였던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이 제작한

「적도남북양총성도(赤道南北兩總星圖)」를 6폭 병풍에 모사하여 진상하였다.

 

이를 받아 본 숙종은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즉석에서 읊었다.  

 

題西儒湯若望 天文圖屛
(서양 유생 아담 샬이 만든 천문도 병풍에 붙임)

 

지대함은 오직 하늘인데
사람이 붓을 잡아 모사했도다.
일찍이 대 위에는 오르지 않았으나
눈앞에 펴놓은 천문도로 다 볼 수 있구나
선악과 재앙과 상서로움을 다 내리고
고금사가 부절(符節)같이 꼭 들어 맞는도다
이를 어찌 소홀히 할 수 있으랴
하늘을 떠받듦은 요(堯)임금을 본 받음이로다.

 

 

제목에서 보듯 서유탕약망(西儒湯若望)이란 서양에서 온 유생,

즉, 예수회 신부이면서 유생의 복장을 하였던 아담 샬을 가리킨다.

아담 샬(Joannes Adam Schall von Bell(1591-1666))은 독일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이자 과학자로서

1622년 중국으로 파견된 이후 선교 및 숭정 역서의 편찬 등 과학 활동에 힘쓴 인물인데,

'탕약망(湯若望)'이란 중세 서양 천문학과 역법 보급에 대한 큰공을 세웠던 그의 중국식 이름이었던 것.

 

그렇다면 '천문도병(天文圖屛)'이란 무엇인가?

천문도병이란 바로 한해 전에 관상감 일관(日官)으로 북경에 파견되었던 허원(許遠)이 북경에서 구입한

아담 샬의 「적도남북양총성도」를 관상감에서 모사한 병풍식 천문도를 뜻한다.

조선 후기의 서양식 천문도에 대한 관심이 이 시를 통해 잘 나타나있는데

이 외에도 숙종의 어제시문 가운데는

외래 문물인 천문도, 자명종, 물시계, 선기옥형(혼천의) 등을 두고 지은 시가 여러 편 있다.

이는 임금의 관상수시 임무와 천도정치 실현의 의지를 천명한 것으로 평가된다.  

 

 

소현세자와 저명한 과학자 아담 샬의 만남

 

그렇다면 조선은 중국에서 활동하였던 선교사 아담 샬과 어떠한 인연이 있었을까?  

마테오 리치의 사망 이후 예수회는

중국의 선교활동에 서양의 과학 지식이 크게 활용된다는 것을 인식하여

중국에 당대의 일류 과학자들을 파견하였다.

판토하(龐迪我, 서양윤리책 「칠극(七克)」지음)를 비롯하여

우르시스(熊三拔, 수리(水利)와 수력법을 설명한 「태서수법(泰西水法)」지음),

디아스(陽瑪諾, 프톨레마이오스의 천체관을 설명한 「천문략(天文略)」지음),

알레니(艾儒略, 서양교육제도를 설명한 「서학범(西學凡)」,

세계지리에 관한 「직방외기(職方外紀)」지음),

페르비스트(南懷仁, 「영대의상지(靈臺儀象志)」지음),

쾨글러(戴進賢, 「역상고성(曆象考成)」지음) 등은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다양한 서양의 천문 역산서를 한역(漢譯)하거나 저술하여

중국은 물론 조선의 천문 역법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아담 샬도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

 

한편 병자호란의 인질로 심양에서 대청 교섭창구의 일을 해오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뒷날 효종)은

청군의 장수 예친왕의 북경 입성시에 1644년 11월에 청군을 따라 북경에 들어가

자금성의 문연각에 머물게 되었다. 그들은 그 곳에서 1645년 정월에 귀국하기까지 70여일 간을 보냈는데

바로 이때 북경의 선무문 안 천주교 남당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아담 샬과 친분을 맺었다.

당시 아담 샬은 서광계(徐光啓)와 이천경(李天經), 쟈코모 로 등과 1634년에 편찬되었던

「崇禎曆書(숭정역서)」를 손질하여 「西洋新法曆書(서양신법역서)」를 편수하고

새로운 역서인 시헌력(時憲曆)을 제작하고 있었다.

당시 아담 샬은 소현세자가 장차 조선의 임금이 될 신분이라는 것을 알고

천주상, 천구의, 천문서 및 기타 서양 과학서적을 선사하였으며

소현세자는 이들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아 귀국하여 그들을 활용하리라 다짐하였다.

특히 천주교 또한 정신수양과 덕성함양에 관한 뜻이 심오한 교리로 평가하여

예수회 선교사를 데리고 귀국할 뜻을 비치기도 하였다.

 

1645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명조의 환관, 몇 명의 천주교인을 대동,

아담 샬이 선물한 천주교 서적과 샬이 저술한 상당량의 천문 역법서,

신법지평일귀를 비롯한 천문의기를 갖고 귀국하였다.

이들이 가지고 온 천문서 가운데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천동설)보다 진일보한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Tycho Brahe, 1546-1601, 중국에서는 第谷이라 불렀다)의 관측성과를 도입한 내용이 들어 있었는데 이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지동설)에 근접한 최신의 이론들이었다.

 

그러나 서양 문물 도입에 대한 소현세자의 웅대한 꿈은

귀국한지 2개월만에 그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다만 현재 몇 권의 천문 역법서와 샬과 로가 제작한 신법지평일귀가 오늘까지 남아 있을 뿐이다.

(보물 839호로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에 소장)

이렇듯 당대 최고의 과학자와 서양문물을 도입하여 개명한 국가를 이룩해보려던 왕세자의 만남은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

 

만일 소현세자가 그때 죽지 않았다면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담 샬의 뛰어난 과학 업적이 곧 재조명되었다고 해도 말이다.

- 남문현(건국대박물관장, 한국산업기술사학회장)

- 전자통신연구원, 2001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