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느끼며(시,서,화)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Gijuzzang Dream 2010. 12. 12. 19:25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북송 말기(11세기 말-12세기 초)

종이에 묵과 엷은 채색, 폭 25.5㎝×가로 5.25m, 베이징 고궁박물원소장.

장택단이 최초에 그린(북경 고궁박물원 소장) <청명상하도> 원본그림에 컴퓨터로 채색하여

1000년 전의 그림 그대로 최초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그림으로 만든 것이다.

 

 

 

 

흔히 동양화를 논할 때

唐나라 왕유((王維, 701-761)가 원조인 남종화(南宗畵)에서는

원나라 황공망(黃公望)이 그린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를 최고로,

풍속화에서는 <청명상하도(淸明上下圖)>를 으뜸으로 친다고 한다.

 

宋代의 회화는 제재와 내용면에서 상당히 광범위했다.

인물화, 산수화, 화조화 이외에도

이전에는 묘사하지 않던 도시와 시골 생활을 그린 사회풍속화들이 출현하였다.

그중에서도 장택단(張擇端)의 <청명상하도>가 가장 우수하고 또한 유명하다.

 

北宋 말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던 장택단(張擇端)은

동무(東武, 지금의 산동성 제성諸城)사람으로 일찍이 수도인 변경(汴京)에서 회화를 공부하였고,

후에는 한림원화원에서 관직을 지냈다.

그는 계화(界畵: 起畵)에 능하여 배와 마차(舟車), 도시와 성곽(郭徑), 교량(市橋) 을 그리는데 뛰어났으며,

송대 사회풍속화를 대표하는 일파를 이루었다.

장택단의 그림은 대부분 모두 산실되었으며

북송의 도성인 변경(卞京=開封)의 청명절을 그린 두루마리 <청명상하도>만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지금 북경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다.

 

<청명상하도>는

북송의 수도 가이펑(開封)이 여진족 금나라에게 함락되자 항저우(杭州)로 수도를 옮기면서

쫓겨난 옛 수도를 추억하기 위해 열린 ‘항저우 도큐멘타’에서 장원으로 뽑힌,

순간을 영원으로 되살려냈다는 문인사대부 장택단의 그림이다.

 

웅대하고 장엄한 화면은 북송 선화(宣和) 연간의 변하(汴河)와

그 양쪽 강가의 청명절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변경성의 동문대가와 동문 바깥의 변하의 번화한 풍경을 아주 상세히 묘사하였다. 

 

그림은 크게 초, 중, 후반 등으로 나눠 살펴볼 수 있는데

초반부는 개봉 교외의 풍경이고

중간부는 무지개다리(虹橋)라고 불리는 다리를 중심으로 백성들의 삶의 현장들이 보이고 있으며

후반부에서는 점포들이 늘어서 있는 성(城)의 다운타운을 나타냈다.

 

북송의 수도 개봉의 활발한 경제 활동을 세밀하게 묘사하였고

그를 통하여 북송의 사회와 경제사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 변경(汴京),

북송(北宋, 907-1127) 때 도읍지로 ‘변량(汴梁)’이라고도 한다.

‘양(量)’은 ‘대량(大樑)=카이펑(開封)’의 옛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카이펑(開封)으로 변허강(汴河) 연변이었기 때문에 생긴 명칭이다.

변허강(汴河)

허난성의 잉양(榮陽) 부근에서 황허강으로부터 분류하여

카이펑을 지나 남동으로 흘러서 화이허강(淮河)으로 흘러들어갔다.

현재 이 하천로(河川路)는 매몰되어 없어졌지만

당송시대에는 강남의 미곡(米穀)을 도읍으로 수송하는데 크게 이용되었다.

이로 인하여 당의 중기 이후에는 이 운하 연변의 카이펑(開封)이 크게 번영하였고

이어 후당을 제외한 오대(吳代) 북송(北宋)의 국도가 되었다.

그러나 金나라의 공격으로 宋왕조가 항저우(杭州)로 수도가 옮겨간 뒤로는 점차 쇠퇴하여

금나라 말기에 일시적으로 국도가 되었으나

元나라 때 운하의 방향로가 바뀌어 지방도시에 불과하게 되었다.

 

*** 시대적 배경

<청명상하도>를 그려진 때는 북송(北宋) 제 8대 황제 휘종(徽宗, 1082~1135/ 재위 1100~1125) 시대이다.

‘수(隋)’나라에 이어 ‘당(唐)’나라 말기에 화북지방에 ‘오(吳)’왕조가 서고,

화남지방에 여러 왕조가 교체되는 혼란스러운 ‘오대(吳代)’를 통일한 ‘송(宋)’나라는

다시 평화가 돌아와 사회가 안정되고 문화가 융성하여

唐나라 이후 다시금 중국 문화예술의 황금시대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요동지방에서는 거란이 ‘요(遼)’를 세웠고, 요는 다시 여진족의 ‘금(金)’에게 멸하게 된다.

거란을 정복한 金은 宋을 압박하게 되는데

宋은 점점 金의 무력에 의해 화남지방 항저우(杭州)로 내려가 나라를 세우게 되어

그 이전을 ‘北宋’, 그 이후를 ‘南宋’이라 부른다.

 

 

 

 

<청명상하도>의 긴 두루말이 그림은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화폭 앞부분에는 양시정의 글이 있고, 그리고 근대의 것으로 추정하는 건륭황제의 도서가 찍혀 있다.

10여 자(字)의 낙관글자와 6개의 도서로 가득차 있는 중국 고대의 최대규모 풍속그림이다.

 

 

 

 

첫째 부분은

새벽빛에 아침이슬이 빛나는 장면을 시작으로,

교외 강가의 길에는 무거운 짐을 실은 나귀 떼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성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적막한 농촌 마을 어귀에서는 약간의 한기가 감돌며,

집들은 듬성듬성 있고, 부드러운 버들가지는 봄바람에 늘어져 있으며,

가마와 기마행렬이 도성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이 점점 보인다.

 

 

拍拍船頭, 咱們就開船啦! (Tap the boat on its tip and we're ready to sail)

 

 

두 번째 부분에서는

변하강 위로 바삐 왕래하고 있는 번화한 정경을 묘사하고 있다.

당시 변하(汴河)는 중국교통의 중심지로서, 각지의 형형색색의 배들이 모두 이곳에 와서 정박하였다.

변하의 양쪽 육지를 연결해 주는 거대한 아치형 다리는 교각이 없으며,

나무로 만들어 길게 걸쳐 있는 이 다리는 견고하고 아름다워 마치 무지개가 걸려있는 것 같아서

무지개다리란 뜻으로 ‘홍교(虹橋)’라고 부른다.

 

 

홍교 위아래로 배와 마차들이 지나 다녀 교통의 요충지가 되고 있다.

사람들은 북적대며 희희낙락하며, 수레와 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왕래하는 갖가지 모습과 표정들이

생동감 있고 멋들어지게 지극히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

바로 이 바쁘게 움직이는 긴장된 장면이 <청명상하도>의 절정 부분이다.

 

拍拍馬兒屁股, 一起進城逛逛吧! (Pat the horse on its rump and let's head for town)

 

 

 

마지막 부분은

시가지의 정경을 묘사하고 있다.

성문으로 들어서면 거리는 가로 세로로 도로가 나있으며,

기루나 주점, 찻집과 점포, 여인숙과 약방들이 즐비하다.

관리, 서생, 농민, 병정, 승려, 도사, 의원, 마차꾼, 뱃사공, 노동자, 부녀자와 어린이 등 750여 명의 인물과

기타 동물 84마리, 각종 수레와 가마가 48개, 배 20여 척, 교량 20여 개 및 100여 채의 가옥, 점포 34채가

나무 190여 그루와 함께 이어져 있고, 거리의 행인들은 아주 바쁘고 빽빽하게 내왕이 끊이질 않는 모습이

‘조태승가(趙太丞家)’까지 이어지다가 끝이 난다.  

 

*** 제등겸(齊藤謙)의《拙堂文話, 卷八》의 통계에 의하면

<청명상하도>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1,643명이고 동물은 208마리라고 하는데

이는 중국 고전소설인《삼국연의》(1191명), 《홍루몽》(975명), 《수호전》(787명)보다도 많은 수라 한다.

 

 

拍拍皇宮大門, 去瞧瞧宮裡有什麽好玩的! (Knock on the gate and see what fun we're got in the palace)

 

 

 

모든 형태를 알 수 있는 일종의 완벽한 문서와 같다.

동양미학에서는 이러한 경지를 ‘능품(能品)’이라 한다.

즉 대상의 외형에 대한 정확한 재현의 단계를 이루어낼 때 그 품격을 가리키는 말이다.

 

*** 회화(繪畵)를 평가하는 기준 '삼품(三品)'

신품(神品)은 천성으로 타고 나는 것을 일컫고
묘품(妙品)은 필묵(筆墨)이 매우 뛰어나서 남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일컫고
능품(能品)은 베끼는데 법을 어김을 잃지 않는 것을  일컫는다.


*** 당(唐)나라 장회관(張懷瓘)의 <도회보감(圖繪寶鑑)>에서

신품(神品)은 기운생동(氣韻生動)하고 천성(天成)으로 나오는 것 
묘품(妙品)은 필묵초절(筆墨超絶)하고 전염(傳染)이 적절한 것 
능품(能品)은 실물(實物)과 비슷하고 규구(規矩)가 틀리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림 속의 장면은 거대하고, 단락은 분명하며, 구성이 엄밀하고 질서정연하다.

기법은 숙련되고 붓놀림이 섬세하며, 선은 힘이 넘치고 노련하여

고도의 정제된 회화 솜씨와 출중한 예술적 재능을 반영하고 있다.

동시에 당시의 사회 실상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송대의 도시 사회생활을 이해하고 연구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역사적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 <중국역사박물관> 제6권 56~57쪽에서 발췌 , 범우사, 강영매 번역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청명절(淸明節)에 변하(卞河)를 거슬러 오를 때 보이는 풍경을 그린 대작(大作)이다.

 

개봉(開封=汴京)의 상국사(上國寺)는 남북조시대인 천보 6년에 지어지기 시작했으며,

북송 태종시기에 상국사는 가장 번성하게 된다. 부지가 540무이고 승원이 64개,

전각은 웅장하며 꽃과 나무가 무성해서

‘금벽휘영, 운하실용(金碧輝玲 雲霞失容) : 황금색과 파란색이 서로 빛나고

구름과 노을이 빼어남을 잃을 정도였다’라 하였다.

 

방대한 상국사의 기둥그림에는 대량의 화가들이 필요했다.

전설에 의하면 당시 북송 동경의 상국사 안에는 사원회화를 그려 살아가는 민간화가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한 화가는 스스로 말하기를 동경성의 번화한 풍경을 그림 속에 옮겨올 수 있다고 하였는데

그가 바로 산동 제성에서 온 장택단(張澤端)이었다.

장택단은 상국사에 머물며 그림을 그렸는데

하루는 宋 휘종(徽宗) 조길(趙桔)이 황가의 시위대 호위하에 상국사에 향을 올리러 왔다가

상국사에 재주가 뛰어난 화가가 있다는 말을 듣고

재상 채경(蔡京)에게 명하여 장택단을 '한림도화원(翰林圖畵院)'으로 부르도록 하고

친히 명하여 장택단에게 북송 동경(東京)의 번화한 풍경을 그리도록 한다.

장택단은 황궁 안에서는 그림을 그릴 수 없으니 조용한 농가에서 그림을 그리겠다고 요청하여

휘종은 장택단의 요구를 받아들여 채경에게 명하여 동경성 교외의 농가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조치한다. 이때부터 밤낮으로 그림을 그려 완성한다.

 

이 <청명상하도>는 장택단이 그려 송나라 휘종에게 올렸는데

처음 소장한 휘종은 이 그림에 그의 독특한 수금체(瘦金體)로 <청명상하도>라는 제목을 써 넣고

쌍용(雙龍) 도장을 찍었다.

북송이 멸망하고 휘종 조길과 아들 흠종(欽宗) 조환(趙桓) 금나라에 포로가 되어 북방으로 끌려갈 때

북송 황실에 보관중이던 <청명상하도>와 6000여 건의 다른 보물들과 함께 금나라에게 빼앗긴다.

 

宋 휘종 조길의 11번째 아들 고종 조구(高宗 趙構)는 항주에서 황제에 오른다.

장택단은 송 고종 조구에게 국가의 원한을 잊지 않도록 하고 금나라에 항거하기 위해

문을 걸어 닫고 다시한번 <청명상하도>를 그려 바쳤는데

부친인 휘종과 달리 근본적으로 그림에 흥미가 없었으므로 그림을 돌려보낸다.

장택단은 홧김에 그림을 불살라버리는데 다행히 집안사람들에 의해 그 절반을 구해낸다.

장택단은 오래지 않아 우울함에 물에 빠져 죽는데

장택단이 두 번에 걸쳐 <청명상하도>를 그려 바친 이야기는 고증할 방법이 없다.

 

 

오늘날, 장택단이 그렸다는 원작은 전하지 않고 구영(仇英) 등 후대 화가들의 모방작만 전한다.

 

 

 

 

- <청명상하도>의 전래 과정

북송이 금나라에 멸망한 뒤 <청명상하도>는 금나라에 빼앗기고,

그림을 그렸던 장택단이 죽은 이후 명나라에 들어서 <청명상하도>는 육완(陸完)의 수중에 들어간다.

육완이 죽은 후에는 그의 부인이 그림을 베게에 넣고 꿰매어 버리고 자신의 목숨처럼 아꼈으며

친아들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육부인의 조카 중 그림을 잘 그린 왕씨라는 사람은 유명한 인물들의 서화를 좋아했다.

육부인이 <청명상하도>를 수장하고 있는 것을 알고 여러 번 부탁해

결국 육부인이 그림을 보여주게 되는데 다만 다른 사람에게 절대 말을 하지말라고 한다.

왕씨는 10여 번 본 후에 그림을 모방하여 한 폭을 그리게 된다.

 

명나라 때 유명한 간신이었던 엄숭(嚴嵩)은 사방으로 <청명상하도>를 손에 넣기 위해 찾았는데,

마침 왕도어사라는 사람이 800냥을 들여 왕씨로부터 모방한 <청명상하도>를 입수하고 엄숭에게 바친다.

엄숭이 그림을 표구하도록 맡기자, 표구하는 사람은 모방품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왕도어사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는 대가로 돈을 요구하다 거절당한다.

표구상은 일부러 가짜임을 드러내도록 표구하여 엄숭이 손님들 앞에서 그림을 보여주다 망신을 당한다.

이후 엄숭은 왕도어사를 모함하여 죽일 때 모방그림을 그린 왕씨도 연루되어 감옥에서 굶어죽는다.

이 이야기는 널리 퍼져 후세 사람들에 의해 <일봉설 전기(一捧雪 傳記)>라는 극본으로 정리된다.

 

그러나 사실은 육완이 죽은 후 육완의 아들이 돈이 필요해 그림을 팔아버리는데,

곤산의 고정신(顧鼎臣)이 이를 매입하였다가

이후 엄숭과 그의 아들 엄세번(嚴世蕃)에게 빼앗긴 것이라고 한다.

 

엄숭 부자가 탄핵을 받아 가산이 몰수될 때 다시 명 황실로 압수하게 되고,

명을 이은 청나라에서 제일 먼저 수장하게 된 육비서(陸費犀)

안휘 상향 사람으로 건륭제 때 진사를 지낸 사람이며 <청명상하도>에 발문(跋文)을 쓰고 도장을 찍어둔다.

오래지 않아 그림은 필원(畢沅)의 손에 들어간다.

필원은 강소 태창 사람으로 역시 건륭제때의 진사였으며, 금석과 서화를 좋아하여 많은 서화를 소장하였다.

그는 <청명상하도>를 매입한 후 동생인 필룡(畢龍)과 함께 낙관을 찍어둔다.

필원이 사망한 후 淸 황실은 필원이 호광총독을 지낼 때 직무유기와 군비남용을 하였음을 들어

가산을 몰수하는데 이때 그림은 청나라 황실로 들어간다.

청나라 황실에서는 이 그림을 자금성의 영춘각에 걸어두었는데,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침입과 1900년 의화단의 난리 때에도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되었다고 한다.

 

1911년 청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부의(溥義)

만주로 갈 때 문화재들을 같이 가져갔는데 이때 함께 포함되었다.

부의의 퇴위 이후 그림은 부의가 동생 부걸에게 상으로 내리고,

그림은 천진(天津)의 외국조계(租界)에 있는 장원(張園)에 걸었다.

1932년 만주국을 세우면서 그림은 다시 장춘(長春)으로 가져가 동원 도서루(황궁도서관)에 걸렸다.

1945년 8월 부의가 장춘에서 도망치면서 만주국 황실의 많은 서화와 보물들이 민간에 흩어지게 된다.

1946년 중국인민해방군이 장춘을 점령한 후, 해방군 간부인 장커웨이(장극위, 張克威)

지방간부들을 통하여 만주국황실에서 흘러나온 유물 수십점을 수집하는데

거기에 <청명상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1947년에 장커웨이가 동북행정위원회로 전근가면서 <청명상하도>를 비롯한 서화들을

당시 동북지방의 주요한 지도자중의 한 명인 린펑(林楓)에게 넘겨준다.

린펑은 <청명상하도>를 동북박물관에 보냈는데,

북경점령 후 다시 북경의 고궁박물원으로 보내져 오늘날까지 소장하게 된 것이다.

 

 

 

 

 

 

 

- <청명상하도> 발문(跋文) / 박지원의 '연암집'

 

 

  연암집 제7권 별집(燕巖集卷之七 別集)/  박지원(朴趾源 著)  

 


 종북소선(鍾北小選) 題跋

都邑富盛。莫如汴宋時節。繁華莫如淸明。畵品之最纖竗者。莫如仇英。

爲此軸當費十年工夫。除此軸。計吾所觀已七本。

十洲自十五丁年始此。當壽九十五。雙眸能不眊昏翳花。爲秋豪爭纖否。

街行術敞。依依如夢。豆人芥馬。渺渺可喚。最是驅鵝生動有意。

 

도읍으로서 융성하기는 송(宋) 나라 도읍인 변경(汴京) 같은 데가 없고,

절기로서 화려하기는 청명(淸明) 같은 때가 없고,

화품(畵品)으로서 가장 섬세하기는 구영(仇英) 같은 사람이 없다.

이 두루마리 그림을 그리자면 10년 세월은 걸렸을 터이다.

이 두루마리 그림을 제외하고도 내가 본 것을 세어 보면 이미 일곱 종이나 된다.
십주(十洲)가 15세의 정년(丁年=장정,壯丁으로 간주되는 나이를 말한다) 때부터 그리기 시작했다면

이것은 95세 때의 작품에 해당할 터인데,

그때까지도 두 눈이 어둡거나 백태가 끼지 않고 털끝만큼이나 섬세하게 그릴 수 있었단 말인가.
그림 속의 거리와 점포들은 어슴푸레하여 꿈결 같고,

콩알만 한 사람과 겨자씨 같은 말들은 소리쳐 불러야 할 만큼 가물가물하다.

그중 특히 거위를 몰고 가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세심하게 그렸다.

 

***구영(仇英)은 明나라 때의 화가로서 자는 실보(實父), 호는 십주(十洲)이다.

산수화와 화조화를 주로 그렸으며 특히 인물화를 잘 그렸다.

심주(沈周), 문징명(文徵明), 당인(唐寅) 등과 함께 명대 4대가로 불린다.

 

 

 관재(觀齋)가 소장한 청명상하도 발문(淸明上河圖 跋文)

此軸。乃尙古金氏所藏。以爲仇十洲眞蹟。誓以殉。

他日斧堂金氏旣病。復爲觀齋徐氏所蓄。當屬妙品。

雖使細心人十廻玩繹。每復開軸。輒得所遺。切勿久玩。頗懼眼眚。

金氏精賞鑑古董書畵。遇所妙絶。輒竭家資。賣田宅以繼之。以故域中寶玩盡歸金氏。家日益貧。

旣老則曰。吾已眼暗矣。平生供眼者。可以供口已。然所售値不過十之二三。

齒已豁。所謂供口者。皆膏汁磨屑。可恨可恨

 

이 두루마리 그림은 상고당 김씨(尙古堂 金氏=김광수金光遂 의 호) 의 소장으로서

구십주(仇十洲)의 진품이라 여기어 훗날 자신이 죽으면 무덤에 같이 묻히기로 다짐했던 것이다.

그런데 김씨가 병이 들자 다시 관재(觀齋 서상수(徐常修)) 서씨(徐氏)의 소장품이 되었다.
당연히 묘품(妙品)에 속한다.

아무리 세심한 사람이 열 번 이상 완상했더라도 매양 다시 그림을 펼쳐 보면

문득 빠뜨린 것을 다시 보게 된다. 절대로 오래 완상해서는 안 된다. 자못 눈을 버릴까 두려워서다.
김씨는 골동품이나 서화의 감상에 정밀하여, 절묘한 작품을 만나면

보는 대로 집안에 있는 자금을 다 털고, 전택(田宅)까지도 다 팔아서 보태었다.

이 때문에 국내의 진귀한 물건들은 모두 다 김씨에게로 돌아갔다.

그렇게 하자니 집안은 날로 더욱 가난해졌다.

노경에 이르러서는 하는 말이,

“나는 이제 눈이 어두워졌으니 평생 눈에 갖다 바쳤던 것을 입에 갖다 바칠 수밖에 없다.” 하면서

물건들을 내놓았으나, 팔리는 값은 산 값의 10분의 2, 3도 되지 않았으며,

이도 이미 다 빠져 버린 상태라 이른바 ‘입에 갖다 바치는’ 것이라곤 모두 국물이나 가루음식뿐이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상고당 김씨(尙古堂 金氏) : 김광수(金光遂 : 1696~?)의 호이다.

이조판서 김동필(金東弼)의 아들로, 서화에 뛰어났으며 골동품 수집과 감정으로 명성이 높았다.

《연암집》 권3 필세설(筆洗說)에도 그에 관한 언급이 있다.

 

 

 

 일수재(日修齋)가 소장한 청명상하도 발문(淸明上河圖跋文)

汴京盛時。爲四十萬戶。崇禎末。周王守汴。闖將羅汝才。號曹操者。三次來圍。

而貨寶山積。士女海沸。資糧器械。無不取諸城中而用之。故汴最久陷。

方其受圍久。糧盡人相食。麥升可直銀千百。

人蔘白朮茯苓諸藥物旣食盡。則水中紅虫。糞窖蠐螬。皆貨以寶玉。而不可得。

及河决城沒。一夜之間。遂成澤國。而周府八面閣黃金胡盧。纔見其頭。

吾每玩此圖。想當日之繁華。而其複殿周廊層臺疊榭。未甞不撫心於周府之金胡盧。

 

변경(汴京)이 전성기에는 40만 호가 되었는데 숭정(崇禎) 말기에 주왕이 변경을 지켰다.

틈장(闖將)으로 조조(曹操)라는 별호를 가진 나여재(羅汝才)가 세 차례나 쳐들어와 포위했으나,

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남녀들이 들끓어 식량과 병기를 어느 것 하나

성안에서 가져다 쓰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변경이 가장 오래 버티다 함락되었다.

바야흐로 포위된 지가 오래되다 보니, 양식이 다 떨어져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 되어

보리쌀 한 되의 값이 은(銀)으로 수천 수백 냥이나 되었고,

인삼(人蔘), 백출(白朮), 복령(茯苓) 등 모든 약재들도 다 먹어 없어지자,

수중의 물벼룩이나 뒷간의 지충(地蟲)까지도 다 보옥(寶玉)을 주고 사자 해도 살 수가 없었다.

급기야 황하가 터지고 성이 잠기게 되자 하룻밤 사이에 마침내 모든 곳이 늪지대가 되고 말았으며,

주왕부(周王府)에 있는 팔면 누각의 황금호로가 겨우 그 꼭지만 보일 정도였다.

나는 매양 이 그림을 볼 때마다 당시의 번화한 모습을 상상하였는데,

그림 속의 복전(複殿 복층의 궁전)과 주랑(周廊)과 층대(層臺)와 첩사(疊榭)를 보면,

주왕부의 황금호로 생각에 마음이 아프지 않은 적이 없었다.

 

***주왕(周王) : 숭정 14년(1641) 주공효(朱恭枵)가 개봉(開封)의 왕, 즉 주왕으로 봉해졌다.

 

***틈장(闖將) : 맹장(猛將)이라는 뜻으로, 이자성(李自成)· 장헌충(張獻忠)· 나여재(羅汝才) 등을 부르는

칭호로 쓰였다. 나여재는 장헌충을 좇아 도적이 되었다가 이자성에게 귀의하였다.

 

***지충(地蟲) : 농작물을 해치는 땅속의 해충인 지충은 풍뎅이의 애벌레로(물벼룩) 물고기 사료로 쓰인다.

 

***황금호로(黃金胡盧) : 호로(胡盧)는 곧 호리병박(葫蘆)으로,

누각 지붕의 중앙 정점(頂點)에 설치한 호리병박 모양의 장식물을 가리킨다.

 

 

 

 湛軒 소장 - 淸明上河圖跋  

吾爲跋此圖。亦已多矣。皆稱仇英十洲孰爲眞蹟。孰爲贋本。

吳兒狡獪。東俗眯眊。宜乎其此軸之多東渡鴨水也。

書何必鍾王顔柳。畵何必顧陸閻吳。鼎彛何必宣德五金。求其眞蹟。

故詐僞百出。愈似而愈假。隆福之寺。玉河之橋。有自賣其手筆書畵。當略辨雅俗。收而有之。

爐則雖乾隆年製。卽取型範古恠敦厚者。庶不爲燕市之一笑。

 

나는 이 그림에 발문을 지은 것이 이미 여러 번이었다.

모두 다 십주(十洲) 구영(仇英)의 그림이라 일컫고 있으니, 어느 것이 진품이고 어느 것이 위조품인가?

중국의 강남(江南) 사람들은 교활하기 짝이 없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정에 어두우니,

이 두루마리 그림이 동쪽으로 압록강을 건너온 것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글씨는 왜 꼭 종요(鍾繇), 왕희지(王羲之), 안진경(顔眞卿), 유공권(柳公權)이라야 하며,

그림은 어찌 꼭 고개지(顧愷之), 육탐미(陸探微), 염입본(閻立本), 오도자(吳道子)라야 하며,

고정(古鼎)과 이기(彝器)는 어찌 꼭 오금(五金)으로 만든 선덕(宣德) 연간의 제품이라야만 하는가?

진품만 찾기 때문에 위조품이 수백 가지로 나오는 것이니, 비슷할수록 가짜가 많다.

융복사(隆福寺)나 옥하교(玉河橋)에 가면 손수 글씨나 그림을 그려 가지고 나와 파는 사람들이 있으니,

우아한지 속된지를 대충 가려서 사두면 된다.

향로(香爐)로 말하면 건륭(乾隆) 연간의 제품이라도 모양이 고괴(古怪)하고 돈후(敦厚)한 것만 취한다면

북경 시장에서 웃음거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금(五金)으로 만든 선덕(宣德) 연간의 제품 :

明나라 선종, 선덕 연간에 강서 경덕진(景德鎭)의 관요(官窯)에서 만든 제품으로,

금 · 은 · 구리 · 철 · 납을 사용한다. 특히 선덕로(宣德爐)라 하여 선덕 연간에 만든 향로를 일품으로 친다. 《宣德鼎彛譜 卷1》

 

***융복사(隆福寺)나 옥하교(玉河橋) :

《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권1 성북내외(城北內外)에 의하면

융복사는 명 나라 경종(景宗) 때 창건한 큰 절이었으나 현재는 없어지고

북경 동성구(東城區)에 융복사가(隆福寺街)라는 지명으로만 남아 있다.

옥하교는 어하교(御河橋)라고 하며,

정양문(正陽門) 안 한림원(翰林院)과 조선관(朝鮮館 : 옥하관, 玉河館) 부근에 있었다.

연암의《열하일기》앙엽기(盎葉記) 및 알성퇴술(謁聖退述)에 이 두 곳에 관한 언급이 있다.

 

- 이상, 한국고전번역원

 

 

 

 

 

 테마공원 <청명상하원(淸明上河園)>

중국 8대고도(古都)의 하나인 하남성 개봉(開封, 가이펑)에

1998년 장택단의 <청명상하도>를 현실에 옮겨 베이징에 1998년 11월에 완공한

테마공원 <청명상하원(淸明上河園)>은 부지 약 10만㎡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한다.

 

관광지는 성밖(外城), 성안(里城), 황궁(宮城)으로 성안에 ‘비엔허(卞河)’가 있어

‘성 밖에 성이 있고, 강 안에 강이 있는 듯’한 독특한 구조를 형성한다.

성 안에는 건물과 성점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고, 정교한 수문, 유명한 기생 리사사(李師師)의 유혹,

간신 승상 채경(蔡京), 동관(童貫)의 저택 등 송나라 귀족들의 사치함과

송나라 백성의 서민적인 시장거리까지 마치 1000년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한 번에 들게 하는 곳이다.

 

또한 <비천무(飛天舞)>, <소리비도(小李飛刀)>, <양씨가문의 여장들(楊門女將)>,

<절세의 두 미녀(絶代双娇)>, <소년 황비홍(少年黃飛鴻)> 등

120여 개의 드라마 및 영화를 촬영한 촬영지이다.

- 출처: 상해관광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