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불화 '감로도'
400년만의 귀환 , 日 주지 스님 자발적 기증
일본에서 돌아온 16세기의 감로도.
테두리의 장황은 일본으로 유출된 뒤 덧붙여진 것이다.
임진왜란 무렵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이는 보물급 조선 전기(16세기) 대형 불화 1점이
일본인의 기증으로 돌아왔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일본 교토의 사찰 류간지(龍岸寺) 주지 에지마 고도(江島孝導ㆍ63)씨가
겐로쿠(元祿ㆍ1688~1703) 시대부터 이 절에 소장되어 왔던
조선 전기의 감로도(甘露圖)를 최근 기증해왔다고 밝히고 공개했다. 감로도의 전체 크기는 322×281cm, 화면 크기는 240×245cm이다. '감로도'는 부처의 수제자인 목련존자가 죽어서 아귀도에서 먹지 못하는 고통에 빠진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의식을 베푸는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동아시아의 불화 중 국이나 일본에는 없으며 효(孝)가 중시된 조선에서 16세기 무렵부터 제작된 불화다. 대형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일곱 화폭을 이었는데, 그림에 화폭을 이은 세로선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일본으로 건너간 뒤. 테두리의 장황(裝潢, 비단이나 종이로 화첩 등을 꾸미는 것)을 새로 했는데, 윗부분에 17세기 일본 천황과 쇼군들의 불교식이름인 '계명(戒名)'이 쓰여 있어 이들이 장황을 할 때 시주를 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감로도의 상태는 화면 일부에 긁힘과 일부 결손부가 있는 것을 제외하면 대체로 양호한 편이다. 화면 중앙 하단의 아귀(왼쪽) / 화면 우측 하단의 호랑이 (오른쪽)
반대편에는 의식을 진행하는 승려들이 다수 눈에 띈다.
그림의 진짜 주인공은 화면 하단에 있다.
탐욕의 대가로 아귀가 되는 벌을 받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뚜렷하다. 목련존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 아래 구석에는 호환을 맞아 죽음에 이르는 영혼의 모습이 보이는데,
이 감로도는 일본 교토에 있는 류간사(龍岸寺)에 전래되어 오던 것으로,
일본의 겐로쿠(元祿, 1688~1703) 시대부터 소장되어 온 것으로 전한다.
일본에서 이 감로도를 인수해온 박방룡 국립중앙박물관 유물관리부장에 의하면,
이 감로도는 원래 존재 자체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지난 8월 말경 경주박물관과 일본 나라박물관의 학술교류로 일본을 방문한
경주박물관 김승희 학예실장에 의해 존재가 확인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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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 학예실장은 평소 친분이 있던 관서학원대학 문학부 니시야마 마사루 교수와 함께 일본 교토에 위치한 류간사(龍岸寺)를 방문해 감로도를 발견했다.
감로도가 귀중한 유물인지 잘 모르고 있던 주지스님 에지마 고도(江島孝導, 63세)는 "지난 8월말 에지마씨가 류간지를 방문한 한국인 연구자에게 '한국에서 아주 귀하게 여기는 불화이니 한국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아무런 조건 없이 기증의사를 밝혀 이후 절차를 밟아 국내로 모셔왔다"고 말했다.
아무런 조건도 내걸지 않은 `아름다운 기증`이자 자발적인 문화재 반환 사례다.
한 달 뒤인 9월 3일 스님은 정식으로 박물관에 기증희망 서류를 제출했고
또 한 달 뒤인 10월 2일 이 불화가 고국 땅을 밟게 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번 기증이 일본으로 유출된 우리 문화재가
일본인 소장자의 자발적 의사로 우리나라에 되돌아온 모범사례로 보고,
기증받은 감로도에 대한 응급 보존처리와 수입 등록(증7551)을 마쳤으며
본격적인 보존처리가 완료되는 내년 봄쯤 특별공개회를 통해 일반에게 공개할 예정이다.
향후 조선시대 불교회화사 연구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개관 이래 23명의 일본인으로부터 1,444점의 우리 문화재를 기증받았다.
이 중 최대 기증자는 1987년 기와 1,082점을 기증한 이우치 이사오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불화를 기증받은 것은 이번이 두번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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