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 계승 조선시대 불화
얼마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막을 내린 고려불화전 - 700년만의 해후의 설레임과 아쉬움의 여운이 아직 많은 분들에게 남아있으리라 생각되는데요, 오늘은 고려불화의 전통이 이어진 조선시대 불화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지금 삶도 모르겠는데 죽음 뒤 세계를 어찌 알겠냐?>던 공자님 말씀에 따라 사후 세계에 대한 소망과 고려에 대한 연민을 없애고자 실시되던 강력한 억불숭유정책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의 마음과 믿음 속에서 꿋꿋하게 명맥을 유지해 온 조선시대의 불화의 세계로 떠나보겠습니다.
1. 유교 국가였던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불교의 의미
성리학적 사고관은 왕조를 바꾸는데 성공하였고, 조선(1392-1897)의 건국과 함께 통치와 정치 체제, 대외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왕조의 모습을 바꾸는데 크게 기여한 성리학적 이념, 논리와는 달리, 내적으로 믿고 의지했던 불교신앙은 위정자들의 억불정책과 신앙의 전통 사이에서 자구책을 모색하고 있었다. 14세기를 지나 15세기, 16세기를 거치는 동안, 과거 화려했던 위축되어가는 듯 했으나, 왕실의 여인들, 종친의 후원을 중심으로 민간 사회 저변으로 확산되는 모습을 부여주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불교는 고려시대만큼의 위세를 떨치지는 못했지만, 민중종교로 자리매김하면서 그 명맥을 분명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약사삼존도
조선1565년 비단에 금, 일본 도쿠가와 미술관 소장
2. 고려시대의 불교와 조선시대 불화의 차이점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조선 전기(1392-1592)의 불화 약 120여 점 중 15세기 작품은 약 20여점, 16세기 작품은 약 90여점으로 16세기에 불화가 월등히 많이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16세기에는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였던 문정왕후(1501-1565)를 중심으로 하는 호불 정책으로 많은 불사가 이루어졌다. 조선전기 왕실발원 불화는 후원자층이 왕실이라는 탄탄한 배경 아래 몇가지 주요한 특징을 갖는다. 흔히 불화 조성을 담당하는 계층은 승려화가인 화승이었다고 생각되지만, 조선 전기 왕실발원 불화는 도화서의 화원이 그 역할을 주도하였다. 도화서의 화원은 당시 화단에 유행하였던 산수화풍인 안견화풍을 불화의 배경 요소에 과감히 적용하는 한편, 중국 명대 궁정회화인 사녀화의 인물표현법 가운데 하나인 콧잔등과 눈썹 등 일부 부위에 흰색을 칠하여 명앙을 강조하는 표현기법을 불화에 적용하였다. 이처럼 인물표현에 있어 고려불화에 비해 얼굴이 세장해지고 신체의 균형도 이상적인 비율로 길어지는 양상을 보여주며 얼굴 표현은 눈썹이 눈에서 위족으로 멀어지면서 활처럼 휘고, 눈과 코, 입이 가운데로 몰리며 입이 아주 작게 표현 된다.
점차적으로 조선시대의 불교문화는 민간신앙 차원의 종교로 재탄생하게 되고 신자들 역시 민중들과 여성들이 중심이 된 만큼, 민중적이고 민간적이면서도 토속적인 색채가 강해졌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불교문화는 체계적이고 합리적이라기보다는 산발적이고 신비적인 주술적 행위가 강조되어 무속적이고 다신교적인 색채를 띠며 발전하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조선시대에 제작된 불교 그림, 불화들에도 그러한 변화를 찾아볼 수 있다. 먼저 고려시대에 비해 조선 시대 불화의 후원은 보다 다양한 계층으로 확산되었다. 조선시대 불화에서 부처와 보살 사이의 엄격한 이단 구도가 해체되는 것은 그 신호탄이라 볼 수 있다. 부처의 무릎 아래로 배치되었던 보살들의 위치는 점차 위쪽으로 올라와 부처를 중심으로 둥글게 에워싸고 있다. 16세기 불화는 고려시대 불화의 전통을 이은 이단 구도(위)와 조선시대에 들어 새롭게 변화한 부처 중심의 원형 구도(아래)를 함께 보여준다.
석가설법도
조선 16세기/ 비단에 금
독일 쾰른 동아시아 박물관 소장
사불회도
조선 1562년/ 비단에 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1326호
3. 조선불화의 구도 변화
불화 구도의 변화는 몇가지 요소를 수반한다. 그림의 바탕 재료도 비단 뿐 아니라 삼베가 사용되기도 하고, 바탕 위의 설채는 붉은 색과 녹색 뿐만 아니라 흰색이 중간색으로 사용되어 연두색, 홍색이 설채된다. 또한 부처에서 보살에 이르기까지 주로 아미타불과 같은 정토계의 주존이 등장하던 고려불화에 비해 석가모니불, 비로자나불 등으로 주제가 다양회돠고, 감로도 삼장보살도 와 같은 의식용 불화도 등장하였다. 이러한 면모는 조선시대 전기 불화의 시대양식이자 자생성이라 볼 수 있다.
관경십육관변상도
조선 1465년/ 비단에 색,
일본 이온인 소장
감로를 베풀어 아귀를 구해냄
조선 18세기 중엽/ 삼베에 색
감로도
조선 전기 16세기
' 감로도'는 부처의 수제자인 목련존자가 아귀도에서 먹지 못하는 고통에 빠진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의식을 베푸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화면 중앙에는 거대한 성반이 차려져 있으며,
역대 제왕, 왕후 군신과 더불어 비참한 죽음을 맞은 각종 영혼들이 의식에 참가하여
부처의 가르침인 감로를 받아 구제받는 과정이 한 화면에 도해되어 있는 그림이다.
이 감로도는 일본 교토에 있는 류간사에 전래되어 오던 것으로,
일본의 겐로쿠 시대부터 소장되어 오던 것이었는데,
기증자인 사찰 주지 에지마 고도씨는
이 불화가 한국의 문화재라는 사실을 관련 학자들로부터 전해 듣고 한국의 문화재는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가장 잘 알아 줄 한국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취지로
기증을 결심하여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4. 조선시대 불화의 여러 형태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여러 형태로 불화가 제작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괘불>과 <탱화>가 조선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불화 형식으로 손꼽힌다. 괘불은 1980년대, 민중미술 작가들에 의해 현대적으로 재창조되어 걸개그림이란 명칭으로도 불리게 되는데, 괘불은 원래 절에서 경축법회 같은 야외법회가 벌어질 때 큰 마당에 걸리던 경배용 그림으로 그 크기가 무려 15m에 달하는 것들도 있다. 반면에 탱화는 신자들의 발원으로 제작되어 사찰 내부 벽면에 봉안되던 제단화, 다시 말해 사찰 예배와 의례용으로 제작, 사용되던 그림을 말한다. 현재, <고려불화대전>에 출품되었던 <아미타극락회상도>도 원래는 사찰에 봉안되어 있던 탱화였다.
사불회도 (걸개그림본)
조선 1562/ 보물 1326호
야외 의식용 불화
조선 1684년/비단에 색
부석사
5. 탱화에 묘사되고 있는 지옥 장면의 의미
조선시대의 탱화 중에서도 사후 저승세계에서 생전의 선한 업적과 죄상을 심판받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는 시왕탱화와 죽은 사람의 극락왕생을 축원하는 의례용 그림으로 제작되어 주로 불전의 오른쪽 벽면에 봉안되던 감로탱화에는 지옥의 광경을 연상시키는 도상들이 많이 담겨져 있어 <지옥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특히 시왕탱화에는 시왕이 심판하는 죄목과 관장하는 지옥 및 형벌 등의 도상이 참혹하고 적나라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는 나쁜 짓을 하면 나중에 이런 천벌을 받게 된다는, 이승에서 지은 업보는 저승에서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는 불교의 가르침과 설법에 맞춰 당시의 세태를 풍자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불화에는 고려시대의 불화들과는 달리, 민간신앙적인 요소들인 옥황상제나 염라대왕, 날짐승의 모습과 인격화된 신의 모습을 한 귀신들도 자주 등장하게 된다.
또한 중국이나 일본의 시왕도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지옥의 모든 중생들을 모두 구제한 뒤에 비로소 성불하겠다던 지장보살의 이미지가 우리나라 시왕탱화에서는 염라대왕 옆에 작게 그려져 등장하는데, 이는 부처, 중생, 아귀는 둘이 아니라 하나인 고로, 중생들의 어리석음 역시 자비로 감싸고 보듬어 줄 수밖에 없다는 불교의 중생사랑을 토대로 조성되던 조선시대 특유의 불교신앙과 민중들의 내세관을 살펴볼 수 있는 아주 좋은 자료라 할 것이다.
지장 보살과 무리
조선 1725/ 비단에 색
북지장사
지옥의 네번째 왕
조선 19세기 후반/ 비단에 색
* 본 블로그는 박물관 웹진 및 박물관 뉴스 그리고 고려불화 전시 도록을
참고로 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작성자 = 사업기획과 이 용 현
조선시대 불화
- 사불회도, 조선 1562년, 보물 1326호, 비단에 색
‘불화(佛畵)’하면 모두들 고려시대의 불화들만 떠올리는데 조선시대에도 불화가 제작되었을까?
“지금 삶도 모르겠는데 죽음 뒤 세계를 어찌 알겠나?”던 공자님 말씀에 따라
사후세계에 대한 소망과 고려에 대한 연민을 척결하고자 실시되던
강력한 억불숭유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민중들의 마음과 믿음 속에서
꿋꿋하게 명맥을 유지해 온 조선시대의 불화에 대해 알아보자.
1. 유교국가였던 조선시대 사람들도 불교를 믿었나요?
성리학에 기반을 둔 유교가 국가적 통치이념으로 강력하게 자리하던 조선시대에도
불교문화가 있었냐 하며 조선시대의 불교와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되면 많이들 놀라워하시는데요.
지난 2003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된 <영혼의 여정- 조선시대 불교회화와의 만남> 특별전은
물론 <고려불화대전>에도 조선시대 전기의 불화 5점이 출품 전시되었듯이,
유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여기던 조선시대에 불교는
반국가적인 차원에서 강력하게 실시되던 억불숭유정책으로 인해,
비록 고려시대만큼의 위세를 떨치지는 못했지만,
민중종교로 자리매김하며 그 명맥을 분명하게 유지해 왔습니다.
2. 그럼 고려시대의 불교랑 조선시대 사람들이 믿던 불교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고려시대의 불교가 왕실과 귀족들의 후원 속에서 배양된 귀족적인 불교였다면,
조선시대의 불교문화는 억불숭유정책으로 인해 통치자의 종교에서 민간신앙 차원의 종교로
재탄생하게 되고 신자들 역시 민중들과 여성들이 중심이 된 만큼,
민중적이고 민간적이면서도 토속적인 색채가 강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불교문화는 체계적이고 합리적이라기보다는
산발적이고 신비적인 주술적 행위가 강조되어 무속적이고 다신교적인 색채를 띠며 발전하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조선시대에 제작된 불교그림, 불화들에서는 고려시대의 불화들과는 달리,
민간신앙적인 요소들, 예를들면 옥황상제나 염라대왕, 날짐승 모습과 인격화된 신의 모습을 한
귀신들도 자주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 감로도(감로를 베풀어 아귀를 구해냄), 조선 18세기 중엽, 삼베에 색
3. 조선시대 사찰에는 어떤 그림들이 있었나요?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여러 형태로 불화가 제작되었습니다만,
그 중에서 <괘불>과 <탱화>를 조선시대의 가장 대표적 불화 형식으로 손꼽아 볼 수 있겠습니다.
괘불은 1980년대 민중미술 작가들에 의해 현대적으로 재창조되어 '걸개그림'이란 명칭으로도
불리게 되는데, 괘불은 원래 절에서 경축법회 같은 야외법회가 벌어질 때 큰 마당에 걸리던
경배용 그림으로 그 크기가 무려 15m에 달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반면에 탱화는 신자들의 발원으로 제작되어 사찰 내부 벽면에 봉안되던 제단화,
다시 말해 사찰 예배와 의례용으로 제작, 사용되던 그림을 말합니다.
4. 탱화에는 지옥장면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그것은 왜 그런 건가요?
조선시대의 탱화 중에서도
사후 저승세계에서 생전의 선한 업적과 죄상을 심판받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는 ‘시왕탱화’와
죽은 사람의 극락왕생을 축원하는 의례용 그림으로 제작되어
주로 불전의 오른쪽 벽면에 봉안되던 ‘감로탱화’에는 지옥의 광경을 연상시키는 도상들이
많이 담겨져 있어 <지옥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특히 시왕탱화에는 시왕이 심판하는 죄목과 관장하는 지옥 및 형벌 등의 도상이
참혹하고 적나라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는 나쁜 짓을 하면 나중에 이런 천벌을 받게 된다는, 이승에서 지은 업보는
저승에서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는 불교의 가르침과 설법에 맞춰
당시의 세태를 풍자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이나 일본의 시왕도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지옥의 모든 중생들을 모두 구제한 뒤에 비로소 성불하겠다던 지장보살의 이미지가
우리나라 시왕탱화에서는 염라대왕 옆에 작게 그려져 등장하는데,
이는 부처, 중생, 아귀는 둘이 아니라 하나인 까닭에
중생들의 어리석음 역시 자비로 감싸고 보듬어 줄 수밖에 없다는 불교의 중생사랑을 토대로
조성되던 조선시대 특유의 불교신앙과 민중들의 내세관을 살펴볼 수 있는
아주 좋은 자료라 하겠습니다.
- 국립중앙박물관 웹진 MUZIN Vol.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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