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문방사우

Gijuzzang Dream 2010. 12. 15. 08:18

 

 

 

  

 

 

 

 

문방사우(文房四友)

 

 

종이, 붓, 벼루, 먹(紙筆墨硯), 이 네 가지를 일컫는다.

원래 중국에서 문방사보(文房四寶), 문방사후(文房四侯)라고 불렸던 것이

우리나라에 도입되면서 서로 떨어져 사용될 수 없는 벗이란 의미로 이런 명칭이 붙여졌다.

문방사우는 선비들이 애착을 가지고 소중히 다루는 필수품이었으며

뜻이 맞는 이들끼리 주고받는 좋은 선물이었다.

 

조선 전기 학자 박은(朴誾, 1479~1509)이 남긴 시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얼마나 문방사우를 소중히 여겼는지 알 수 있다.

친한 벗으로부터 종이와 먹을 선물 받은 박은은 두 보물을 얻었다고 고마워하면서 시를 남겼는데

그 내용 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마음 속에 한 물건도 걸림이 없네

금과 구슬이 앞에 있어도 흙처럼 보니

보아도 못 본 채 하물며 집어 던지리

그런데 먹과 종이만은 무엇이 좋길래

나로 하여금 손에서 줄곧 못 놓게 하는지

마음에 욕망이 있으면 다 청렴하지 못하나

이것들에 연연함은 버릇이라 어쩔 수 없네.

 

 

 

종이

조선시대 문방용 종이로는

조지서(造紙署)에서 만든 '자문지(咨文紙)', 평강의 '설화죽청지(雪花竹淸紙)',

전주와 남평 지역에서 만든 '선자지(扇子紙)', '간장지(簡莊紙)' 등이 주로 쓰였는데

이중 최상품으로 여긴 것은 설화죽청지 였다.

 

여러 가지 색으로 물들인 종이는 전라도 지역의 특산품으로 전하는데

전주산 문방용 종이를 '금강전(錦江箋)'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선비들의 음풍농월(吟風弄月)에는

청, 황, 홍, 백색의 '측리지(側理紙)'나 '취우지(翠羽紙)'를 길게 이어서 사용하였다.

 

 

붓은 가죽, 대나무, 버들가지, 짚, 갈대로 만든 것도 있었으나 대표적인 것은 모필(毛筆)이었다.

모필은 짐승 털로 만들며 이중 족제비 털로 된 황모필(黃毛筆)을 최상품으로 여겼다.

 

필관(筆管)은 대나무로 만든 것이 가장 쓰기에 편하여 조선시대에는 대부분 대나무로 만들었다.

털의 부드러운 정도에 따라, 또 용도와 크기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하는데

문방에서는 이러한 여러 종류의 붓을 고루 갖추고 용도에 맞게 사용하였다.

옛 사람들은 붓을 소중히 여겨 닳아 못쓰게 된 붓은 땅에 묻었다고 한다.

 

 

먹은 검은 먹과 붉은 먹이 있다.

검은 먹은 송연(松烟)이나 유연(油煙)에 아교를 섞어 굳힌 것이며,

붉은 먹은 그 아름다움을 먼 훗날까지 전할 수 있어 옛 선비들은 좋은 먹을 골라 사용하였다.

좋은 먹은 아궁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받은 맑은 그을음과 신선한 아교에

사향이나 부용화 즙을 섞어 만들어 맑고 은은한 향이 나며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벼루

벼루는 대부분 돌로 만들었으나 금속이나 도자 등 그 재료가 다양하였다.

벼루는 물이 마르지 않으며 먹을 갈 때 소리가 나지 않고 곱게 갈려 붓이 상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다.

 

벼루의 형태는 네모난 것, 풍(風)자형, 원형이 있으며

자연 그대로의 형태를 살려 만들기도 하였고 사용자의 취향에 따라 조각을 한 것도 있다.

중국 광동성 단계(端溪)에서 나온 돌로 만든 벼루는 곱고 윤기가 있고 물이 마르지 않아

벼루 중 보물이라고 하여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선비들이 갖고자 하였다.

 

 

문방제구

문방사우를 편리하게 보관하기 위해 여러 가지 문방용품이 만들어졌다.

종이와 관련된 것으로 문진(文鎭), 시전지판(詩箋紙板), 편지꽂이(고비, 考備), 지통(紙筒) 등이 있으며,

붓은 필통, 붓걸이, 붓받침, 필세(筆洗) 등과 함께 사용되었다.

먹은 먹집(묵갑, 墨匣), 묵받침(묵상, 墨牀) 등과 함께,

벼루는 연상(硯床), 벼룻집(연갑, 硯匣), 연적 등과 함께 사용되었다.

- 황지현, 국립중앙박물관 서화관 사랑방 학예사

- 2010년 12월8일 제221회 큐레이터와의 대화, 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