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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특별전] 홍두선 기증유물 - 조선시대 베스트셀러

Gijuzzang Dream 2010. 9. 29. 15:54

 

 

 

 

 

 

2010 홍두선 기증유물 특별전

 

 조선시대 베스트셀러

 

 

 

 

 

   전 시  명

 ---  조선시대 베스트셀러

   전시기간

  ---  2010-09-30 ~ 10-31

   전시장소

  ---  기획전시실

 

 

 

□ 프롤로그

○ 세상에서 처음 만든 나무활자 책

 -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751년경)

○ 세상에서 처음 만든 금속활자 책

 -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일명 직지심체요절)' (1377년)

우리 조상들이 남긴 위대한 유산이다.

우리 선조들은 일찍이 책을 만들어 읽는 것을 좋아하여 많은 베스트 셀러를 양산하였다.

홍두선 선생님(82세)은 30여 년간 경찰직 공무원에 종사하면서

매달 월급을 쪼개어 우리의 인쇄문화를 보여 주는 책을 수집하셨다.

그리고 2008년 2월, 자신이 평생 모은 컬렉션을 모두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셨다.

(전적류(典籍類) 등 유물 총 470건, 967점)

 

이번 전시회는 2008년 홍두선씨가 기증한 전적류 기증유물 총 470건 967점 중에서 약 90점을 선별하여,

조선시대 책과 인쇄문화, 옛 사람의 독서문화, 한양의 책 이야기 등의 주제로 전시한다.

 

 

 

 

 

1. 우리의 옛날 책과 출판

전통시대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책을 만들어냈다.

금속으로 활자를 만들어 종이에 글자를 찍어서 책을 만드는 방법이 있었고,

나무로 활자를 만들어 책을 제작하기도 했으며, 나무판에 글자를 새겨서 찍어내기도 하였다.

반면 붓으로 글씨를 써서 책을 엮는 방법도 있었다.

 

인류가 가장 처음으로 쓴 출판방법은 나무판(목판)에 글자를 새겨서 책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이후에 나무나 금속(구리)으로 활자를 제작하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전통시대에 이와 같은 방법은 책의 성격이나 제작 수량 등에 따라서 혼용되었다.

 

고려 이래로 금속활자로 책을 찍는 문화가 조선에 와서 더욱 발전하였다.

다양한 용도나 쓰임새에 따라서 여러 가지 종류의 책이 만들어졌고,

이 책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당시의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전통시대의 유교문화, 불교문화, 그리고 대중문화 등은

각각의 목적을 위하여 제작된 다양한 장르의 책 속에서 구현되었다.

 

 


국가에서 찍은 금속활자(金屬活字) 책
조선시대에는 태종대에 계미자(癸未字)를 시작으로 경자자(庚子字),

그리고 세종 16년에는 갑인자(甲寅字)가 제작되었다.

이후로 갑인자 체의 활자는 정조대에 이르기까지 총 6차례 만들어졌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종류의 활자가 조성되었다.

금속활자는 국가적으로 필요한 책을 찍을 때 사용되었다.

금속활자는 처음 만들기는 어렵지만,

일단 제작이 되면 빠른 시일 안에 고품격의 책을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따라서 활자를 찍어 만들어진 책을 통해서 유교문화는 보다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 예전에는 활자를 만들면 그 해의 간지를 따서 활자 이름을 만들었다.

갑인년(甲寅年)에 만들면 '갑인자(甲寅字)', 경진년(庚辰年)에 만들면 '경진자'가 되는 식이었다.

 

 

<갑인자 계열>

갑인자(1434년) 이래로

경진자(庚辰字)→무오자(戊午字)→무신자(戊申字)→임진자(壬辰字)→정유자(丁酉字)가 만들어졌다.

이들 활자들은 갑인자가 닳아서 쓰기가 어려워지거나 소실되었을 때 이전 것을 본 따서 만든 글자들이다.

그래서 이 활자들은 외형상 잘 구분되지 않고, 세부적으로 정교함 등에서 약간의 차이가 날 뿐이다.

갑인자 계열의 활자는 세종대로부터 정조대에 이르기까지 국가를 대표하는 활자체로써

국가가 필요한 책을 출판하였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이나 『자치통감(資治通鑑)』 같은

유학 관련 서적이나 역사서 등의 책을 만드는 활자로 널리 이용되었다.

 

<일반활자 계열>

조선시대는 태종대에 계미자(1403)를 시작으로 세종 초기에 경자자가 있었다.

세조대의 을해자(乙亥字), 성종대의 갑진자(甲辰字)와 계축자(癸丑字), 중종대의 병자자(丙子字),

조선후기는 숙종대의 현종실록자(顯宗實錄字), 한구자(韓構字), 교서관인서체자(校書館印書體字),

정조대의 정리자(整理字), 순조대의 전사자(全史字)가 대표적이다.

 

을해자로는 불경을 많이 간행하였고, 갑진자는 실용성이 돋보이는 활자였다.

정리자는 당대에 의궤(儀軌)를 책으로 간행하기 위하여 제작되었다.

전사자는 개인이 만든 활자로서 서울에 사는 권세가들의 문집을 찍는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실용적인 나무활자(木活字) 책

나무활자(목활자)는 가장 실용적인 활자이다. 매우 경제적이면서도 빠른 기간에 책을 간행할 수 있었다.

목활자는 이러한 실용성 때문에 널리 이용되었으며,

금속활자로 책을 찍을 때 부족한 글자를 보충하는 활자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나무활자는 공신들을 대상으로 신속하게 제작해서 배포하는 『공신녹권』을 만들 때 주로 사용되었다.

조선 초기부터 '녹권(錄券)'의 발간에는 목활자를 사용하였는데,

임란 직후에『호성원종공신녹권』이나『선무원종공신녹권』을 찍는 데에도 이용하였다.

 

임진왜란 직후에는 전란으로 금속활자가 유실되어 책을 만들기 어려웠는데,

당시에는 유휴 인력인 군인들을 동원하여 목활자를 제작하여 많은 책자를 찍어냈다.

여기서 만든 활자는 군사기관의 이름을 따서 ‘훈련도감자(訓鍊都監字)’라고 하였다.

 

 

대중화된 나무판(木版) 책

나무판(목판)에 글자를 새겨서 인쇄하는 기술은 가장 오래된 출판 방법이다.

나무판은 제작공정과 기간이 오래 걸리지만,

한 번 제작하면 백여 년에 걸쳐 반복해서 책자를 찍어낼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사서삼경』과 같은 유교경전들은 목판으로 많이 찍어냈다.

때로는 중앙에서 모두 감당하기가 어려워

경상도와 전라도 등 각 지방에 할당하여 책을 찍어 올리도록 하여 충당하였다.

목판으로는 개인문집을 간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문집은 주로 학문적 업적을 남긴 인물을 대상으로 제자들과 후손들이 자금을 동원하여 간행하였다.

18~19세기에 이르면 도서출판에서 문집의 비중이 매우 높아졌다.

또한 19세기에 이르면 목판으로 제작된 상업용 도서(방각본)가 널리 유행하였다.

『천자문』『사서삼경』과 같은 교육용 도서와

부녀자들이 좋아하는 소설책 등이 이런 방법으로 제작, 유통되었다.

 

 

 

 

 

 

 

 

 

 

 

 

 

2. 옛 사람들이 애독했던 책들

전통시대에 지식문화를 선도하는 이는 사대부 남자들이었다.

사대부들은 조선시대 엘리트 계층으로 정치사회와 문화를 주도하였다.

집안의 여성들은 내조와 육아, 가사에 집중하였지만,

지적인 호기심을 소설책과 같은 대중문화를 통해 해소하였다.

 

 

예전에는 사회적으로 신분이나 성별, 장유(長幼)에 따른 구분이 엄격하였다.

그래서 계층에 따라서 선호하는 책이 대체로 구분되었다.

사대부 남자들은 정치사회 활동을 위하여 유학서를 필수적으로 탐독하였다.

또한 장래에 사회지도층으로 성장할 양반 자제들은 어릴 적부터 혹독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상대적으로 사회적 부담이 적은 부녀자와 평민들은 소설책을 좋아하였다.

부녀자들은 『삼강행실도』나 『내훈(內訓)』 같은 유교서적을 읽으면서도 한편으론 소설책을 탐독하였다.

평민들은 한자를 모르지만 한글을 통해서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하고, 아울러 대중문화도 접할 수 있었다.


 

 


유학서적을 독파한 사대부 남자들

사대부들의 필독서는 유학 서적이었다.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시경』, 『서경』, 『주역』 등의 유학서나

역사서인 『자치통감강목』 등을 즐겨 읽었다. 경전과 함께 역사서도 매우 중요하였다.

중국의 역사서인 『자치통감강목』이나 『사기』등은 매우 방대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내용을 마음속에 깊이 새겨야 했고,

나아가 그것을 매번 가슴속으로 확인하면서 정치나 사회생활의 지침으로 삼아야 했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훌륭한 학자가 되려면 이런 책들은 일천 번은 넘게 읽어야 되었던 것이다.

 

“여러 성현들이 남기신 경전과 이런저런 믿을 만한 역사책들 속에 푹 잠겨 헤엄치듯

그 책들을 읽어내어 오묘한 이치를 얻어내고야 말리라.”

- 이덕무(李德懋, 1741-1793) 「갑신제석기(甲申除夕記)」

 

“일찍이 선배들을 살펴보니 윤결(尹潔)은 『맹자』를 1천 번 읽었으며,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은 『논어』와 두시(杜詩)를 2천 번 읽었다.

차운로(車雲輅, 1559~?)는『주역』을 5천 번 읽었고,

정두경(鄭斗卿, 1597∼1673)은 『사기(史記)』를 수천 번 읽었고,

권유(權愈, 1633∼1704)는 『자치통감강목』 전체를 1천 번 읽었다.

동방에서 대가의 문장을 논할 때면 이분들을 지목한다.”

- 황덕길(黃德吉, 1750-1827) 「김득신의 독수기 뒤에 쓰다(書金柏谷得臣讀數記後)」



 

 

소설책을 좋아한 부녀자들

조선후기에는 한글로 된 소설들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부녀자들이 특히 좋아하였다.

이런 풍조에 대해 채제공이나 정약용 같은 인사들은 소설책에 대한 지나친 사랑을 경계한 바 있다.

그렇지만 여성들의 책 읽기는 조선시대 대중문화를 생산하고 발전시킨 모태였다고 할 수 있다.

 

“책 대여점(儈家)에서는 책을 정밀하게 베껴 써서 빌려주고 그 값을 쳐서 이익으로 삼는다.

부녀들은 식견이 없어, 혹 비녀나 팔찌를 팔고, 혹은 동전을 빚내어,

서로 다투어 빌려다가 긴 날을 소일하면서, 음식이나 술을 도모하는 일,

그리고 자신의 베 짜는 임무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자가 왕왕 있었다.”

- 채제공(蔡濟恭, 1720-1799) 「여사서서(女四書序)」

 

정조대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이 여성들이 독서에만 몰입하는 것을 경계한 말이다.

아마도 채제공은 여성들의 독서문화를 다소 과장하면서, 편향된 시각을 보인 듯하다.

그의 우려와는 달리 여성들의 책 읽기는 조선시대 대중문화를 생산하고 발전시킨 모태였다고 할 수 있다.

 

“패관잡서(稗官雜書)는 인재 가운데 큰 재앙입니다.

탕하고 추한 어조가 사람의 심령을 허무 방탕하게 하고,

사특하고 요사스러운 내용이 사람의 지혜를 미혹에 빠뜨리며,

황당하고 괴이한 이야기가 사람의 교만한 기질을 고취시키고,

시들고 느른하며 조각조각 부스러지듯 조잡한 문장이 사람의 씩씩한 기운을 녹여냅니다.

-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정약용의 관점으로는 소설 중에서도 신선, 귀신 등이 출몰하는 기이한 소설,

즉 전기(傳奇)나 패설잡기(稗說雜記)라고 지칭되는 비현실적인 작품들이 요주의 대상이었다.

이런 것들은 유교적인 관점에 비춰보면 좋은 도서가 아니었던 듯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성향의 소설들은 오늘날에는 환타지 소설로 분류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열심히 공부한 아동들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미래의 자산이다. 그래서 양반집 자제들은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종아리를 맞아가면서 배우는 것이 기본이었으며,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충분히 읽고 또 읽어서 본문 전체를 외워야만 하였다.

 

집안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처음 『천자문(千字文)』을 배우고,

이어서 『동몽선습(童蒙先習)』, 『명심보감(明心寶鑑)』, 『격몽요결(擊蒙要訣)』,

그리고 『소학(小學)』 등을 탐독했다. 아동서적을 다 읽으면

그 다음에는 성인들이 배우는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순으로 공부해나갔다.

 

天地之間 萬物之衆 惟人最貴 所貴乎人者 以其有五倫也

천지 사이에 있는 만물의 무리 가운데에서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하니,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오륜(五倫)이 있기 때문이다.

-『동몽선습(童蒙先習)』

 

君子之所不可及者 其惟人之所不見

(보통 사람이) 군자에게 미칠 수 없는 것은 오직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中庸』

 

 

백성들도 책을 읽고

"내가 보니 여항의 무식한 사람들이 한글을 익혀 노인들이 서로 전하는 말을 베껴 밤낮으로 이야기한다."

(余觀 閭巷無識之人 習傳諺字 謄書古老相傳之語 日夜談論)

- 1531년 낙서거사(洛西居士, 서울 서쪽에 사는 거사) 『오륜전전(五倫全傳)』서문

 

이미 16세기 초반 서울에서는 하층의 무식한 사람들까지 소설책을 읽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이란 말이 있다. 글자그대로 낮엔 밭 갈고 밤엔 공부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주경야독을 한 경우는 찾아보기가 힘들고,

농사일에 골몰하다 보면, 서책을 가지고 공부할 겨를을 얻기가 어렵다.”

- 이식(李植, 1584-1647), 『택당선생별집(澤堂先生別集)』

 

결국 ‘주경야독’이란 말은

농사짓는 사람이나 평민들도 문자를 익혀 기본적인 문자 해독이 가능하도록 노력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3. 한양의 책 이야기

조선시대 한양은 정치의 중심지이자 문화의 구심처였다.

중앙관청들이 늘어서 있던 육조 앞거리에는 책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책을 둘러싼 한양의 문화는 매우 다양하였다.

 

1800년대에 이르면 책을 출판, 판매, 대여하는 곳들이 늘어났으며,

한양의 사대문 안팎으로 책을 찍는 곳들이 즐비하여

문화의 중심지로서 수도(首都)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한양에서는 책의 유통이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직접 책을 살 수도 있지만, 중개상을 이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필요한 책을 유료 또는 무료로 빌려 읽을 수 있었으며,

꼭 갖고 싶지만 구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붓으로 옮겨 써서 구비해두었다.

 

책을 사 볼 수 없는 사람들도 책 속에 담긴 이야기가 궁금하였다.

이들은 종루, 대사동(현 인사동) 입구, 배오개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면,

 읽어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이 강독사의 활약도 돋보였다.
이 강독사(講讀師)들은 오늘날의 예능인들처럼 한껏 흥미를 더하여 책 속의 이야기를 전달하였다.

 

 


육조 앞거리에서 책을 사다
예나 지금이나 광화문은 정치의 중심이면서 문화의 터전이기도 하였다.

이곳에는 서점이 있었고, 광통교로 나가면 서화를 팔기도 하였다.

 

“책사(冊肆), 즉 서점은 정릉동 병문(屛門: 마을 어귀, 또는 골목 어귀의 길가)과 육조 앞에 있었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19C 발행)

  

아마도 지금의 정동 입구와 광화문 네거리에 있었던 듯하다.

또한 “서화사가 대광통교(大廣通橋) 서남쪽 개울가에 있는데, 여러 가지 글씨와 그림을 판다”고도 했으니,

광화문과 청계천 초입은 서책과 서화를 구할 수 있는 문화 루트였다고 할 수 있다.

 

이미 18세기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상업적 유통을 목적으로 하는 도서가 발간되고,

책을 빌려주는 세책점(貰冊店)이 유행하였다.

아울러 그 이전부터 유행하던 책 중개인(書儈), 필사쟁이 등과 더불어 서울은 다양한 책의 유통공간이었다.

 

무교, 유동, 미동, 광통방 등에서는 상업적 목적으로 책을 만드는 출판사가 있었다.

‘무교(武橋)’는 군기교, 군기시교라고도 하는데, 서울시청 뒤 효덕빌딩 앞 사거리에 있었던 다리이다.

‘미동(美洞)’은 곤담골 혹은 고은담골이라고도 하는데, 을지로1가와 남대문로1가 중간쯤에 있었다.

‘유동(油洞, 由洞)’은 기름전골인데, 기름전이 있었던 마을이라서 유래된 명칭으로 을지로 1가에 있었다.

‘광통방(廣通坊)’은 지금의 다동, 무교동 일대이다.

 



서적중개상
조선시대 중기까지는 서적의 유통이나 판매가 지식인층에 한정되었다.

18세기가 되면 지식의 유통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 한양에서는 서적 중개상이 유행하였다.

이들은 책의 발간자와 독자, 혹은 소장가와 독자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일을 하였는데,

상점의 형태도 있고 단순 행상인도 있었다.

또한 이들 중개상에 의탁해서 책을 필사해주고 돈을 받는 필사쟁이도 있었다.

상점에서는 도서의 판매를 하면서, 대여업을 겸하기도 하였다.

한양에는 서적 중개상이 있어서 책의 유통을 담당하였는데,

당시 장안에는 조생(曹生)이라고만 알려진 개인 중개상이 유명하였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 책을 공급해주면서 중간에서 이윤을 남긴 상인이었다.

그가 활동한 시기는 18C후반~19C초반으로 40여 년에 걸쳐 장안을 누볐다.

그렇지만 그는 조씨(曺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

어디에 사는지 가족은 있는지 조차도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 장안의 40여년 책장수 조(曺)선생은?

“조(曺)선생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책을 팔면서 세상에 뛰어다닌 지 오래되어서,

보는 이들은 귀하고 천하고 어질고 어리석음 떠나서 모두 그를 알아본다.

조생은 해가 뜨면 나와서 시장, 골목, 서당, 관청으로 뛰어 다녔다.

벼슬하는 대부로부터 소학 동자에 이르기까지 그를 만나지 않은 이가 없었으며, 달리기를 나는 듯이 하였다.

소매 속에 책을 품고 다녔는데, 책 팔기를 다하면 돈을 가지고 술집으로 달려갔다.

술을 취하도록 마시고 해가 저물면 돌아갔다.

사람들은 일찍이 그의 집을 알지 못했으며 음식을 먹는 것도 보지 못했다.”

- 조수삼(趙秀三, 1762~1849) 『추재집(秋齋集)』 「죽서조선생(鬻書曺生傳)」

 

조(曺)선생은 책을 팔면 바로 술을 취하도록 먹고,

누가 나이를 물어보아도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으면서 자족하는 생활을 살았다고 한다.

또한 책을 팔면서 양반가문의 성쇠를 책의 수집을 통해서 보기도 하면서 인생을 달관하였다고 한다.

그는 상인으로서의 기질과 철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속을 초탈하여 노자와 장자에게도 듣지 못한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청계천의 이야기꾼(전기수)
책을 사서 읽기 어렵거나 글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야기꾼을 통해서 책을 만날 수 있었다.

책을 읽어주는 사람을 '강독사(講讀師)'라고 하는데, '전기수(傳奇)'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전기수는 기이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노인이란 의미이다.

전기수는 동대문에서 보신각에 이르는 길을 따라서 종로 일대를 누비면서 서민들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그러면서 즉석에서 대가를 받는 재주를 지닌 인물이다.

재주가 뛰어나 돈을 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고 한다.

 

아녀자들 마음 아파 눈물 흘리고                  (兒女傷心涕自雰)

검으로 분간하기 어려운 영웅의 승패 이야기 (英雄勝敗劒難分)

말 많다가 침묵하는 것이 돈 버는 법인가?     (言多默少邀錢法)

묘한 것이 인정이라 빨리 듣고 싶네.             (妙在人情最急聞)

- 조수삼(趙秀三) 『추재집(秋齋集)』 「전기수(傳奇叟)」

 

전기수가 동문 밖에 살면서 언과패설(諺課稗說)을 말하는데

『숙향전』,『소대성전』, 『심청전』,『설인귀전』 등으로

월초 1일은 제1교(初橋, 종로6가) 아래에서, 2일은 제2교(二橋, 종로 5가) 아래에 앉아서

3일은 이현(梨峴, 배오개)에서, 4일은 교동(낙원동) 입구에서,

5일은 대사동(인사동) 입구에서, 6일은 종루(보신각) 앞에서 자리 잡는다.

거슬러 올라가기를 다하면, 7일째부터는 거슬러 내려가고, 내려갔다 올라갔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 달을 보냈다. 달이 바뀌면 전과 같이 하였다.

읽기를 잘해서 곁에 둘러서서 보는데

무릇 아주 긴요하고 들을만한 대목에 이르면 홀연히 침묵하고 소리 내지 않았다.

사람들이 다음 내용이 궁금하여 듣고자 다투어 돈을 던졌는데

이를 '요전법(邀錢法, 돈을 맞이하는 법)'이라고 하였다. 

 

 

 

 

 

□ 보물급 기증유물

홍두선 기증유물에는 기정문화재급 유물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홍두선 기증유물 중 보물급 2점과 서울역사박물관 기존 소장본 보물 중에서 전적류 3점을 전시하였다.

 

 

『진실주집(眞實珠集)』, 1472년, 목판본, 갑인자 

- 1472년(성종 3) 간경도감에서 간행하였다.

본래 이 도서는 처음 1462년(세조 8) 간행한 책으로

내용은 송나라의 예묘행(倪妙行)이 여러 선사(禪師)들의

명(銘) · 가(歌) · 심요(心要) · 법어(法語) · 시(詩) · 문(文) 등을 모은 것이다.

이 도서는 1462년에 만든 판본을 10년 뒤에 다시 찍은 것인데,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맨 뒷부분에 인출경위가 갑인자로 첨부돼 있어 글자체의 혼용으로 귀한 책이다.

당시 진실주집에 대한 간행부수와 경위 등이 적혀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영각진각대사증도가(永嘉眞覺大師證道歌)』, 15세기(세조), 을해자

  

- 15세기에 을해자(乙亥字)로 발행된 불경이다.

본래 '증도가(證道歌)'는 15세기에 당나라의 영가진각(永嘉眞覺, 647-713)대사가

선종(禪宗)의 제5조 혜능(慧能, 638-713)대사를 배알하고 하룻밤에 크게 깨달은

'일숙각(一宿覺)'의 진리를 247자 814자의 고시체로 읊은 수행지침서 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089년(고려 선종 6) 보제사(普濟寺)에서 처음 간행되었으며,

사찰에서 가장 많이 유행한 선가(禪家)의 수행지침서가 되었다.

이 도서는 원문에 대한 언기주(彦琪註) · 굉덕주(宏德註) · 조정주(祖庭註) 등을 모아 한 책으로 구성했으며,

을해자(乙亥字) 소자(小字)를 사용하여 도서의 고급성을 추구하였다는데 커다란 의의가 있다.

이 유물은 조선 세조 때 금속활자인 ‘을해자(乙亥字)’로 주조하자마자 찍어 글자가 선명하고 정교하다.

첫 장부터 마지막장까지 보존 상태가 아주 양호하다.

 

  

 

 

                     

 

□ 서화류 기증유물

 

 

 

<합작잡화병(合作雜畵屛)>은

근대기 대표적 화가 안중식 등 4명이 그린 12폭 합작그림이다.

영모(翎毛), 화훼(花卉), 산수(山水), 죽석(竹石), 화조(花鳥), 노안(蘆雁) 등

장승업 화풍의 영향을 받은 그림으로 이루어진 잡화병으로

4폭 부분 전시하고 있다.

 

 

홍두선 기증유물에는

전적류뿐만 아니라 서화류 유물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옥동 이서, 표암 강세황, 추사 김정희 등

한국 서예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작가들의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기증자 홍두선씨의 12대조인 홍가신(洪可臣, 1541-1615)의 작품도 있다.

 

 

 

 

 

 

안중· · · 서병오 '합작12폭병풍(合作雜畵屛)', 1903-4, 지본수묵담

12폭의 그림들은 4명에 의하여 작성되었는데,

서울화단에서 활동한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의 그림 4폭, 이도영(李道榮, 1885-1933) 2폭,

그리고 대구화단에서 활동한 서병오(徐丙五, 1862-1935)의 그림 3폭,

곽석규(郭錫圭, ?-1935) 3폭으로 이루어져 있다.

12폭 중에서 3폭에는 연대가 기재되어 있으니,

각각 기유년(1909년, 이도영), 계묘년(1903년, 곽석규), 갑진년(1904년, 안중식)이다.

적어도 1903~1909년에 걸쳐서 수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증자 홍두선님의 증언에 의하면

본래 이 그림은 위암 장지연(韋庵 張志淵, 1864-1921)이

아버지의 환갑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하여 병풍으로 만들었던 합작도였다고 한다.

 

 

 

 

 

 

□ 유물기증자 홍두선(洪斗善, 82세) : 호 송암(松菴)

 

1929  충남 아산에서 남양홍씨 참의공파 만전공 홍가신(晩全堂 洪可臣, 1541-1615)의 12대손으로 출생

1943  예산농고 재학 중 단군영정을 처음 접하며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됨

1946  한양공고 재학 중 육당 최남선에게 개인적으로 우리 역사공부 시작

1948  육군사관학교 7기 입학

1961  육군 중령으로 전역

1962  경찰 총경으로 진해경찰서장 부임

1964  진주경찰서장 부임, 고미술품 및 고서 수집 시작

         처음에는 그림이나 도자기 같은 골동품을 수집하였는데,

         진위여부가 애매하고 일부 비양심적인 상인에게 속는 경우도 있어,

         가짜가 거의 없다고 판단되는 전적류,

         그 중에서도 활자본 위주로 수집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는 미술품이나 고서적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드물었다.

1966~ 치안국 정보과, 서울 마포경찰서장, 경남경찰국, 치안국 작전과, 서울북부경찰서장

1971  경북 안동경찰서장, 안동댐 수몰지구에서 다수 유물발견

1972  정년퇴임

2008  서울역사박물관에 수집유물 기증(전적류 기증유물 총 470건 967점)

 

본인이 유물을 수집한 컬렉터이면서, 수집한 전적에 대해서는

박물관 유물카드와 유사한 정리용 카드를 사용하여 꼼꼼하게 정리한 서지학자이기도 하다.


 

 

 

 

□ 유물수집에 얽힌 일화

 

홍두선씨는 매달 봉급을 쪼개서 문화재를 수집하였다.

 

『곽장양문록』이라는 장편 필사본 소설은

중국 당나라 대종(代宗)-덕종(德宗) 시대를 배경으로

곽씨와 장씨 두 가문 인물들이 펼쳐가는 삶을 다룬 가문소설 일종으로

『몽옥쌍봉연록』, 그리고 『차천기합』이라는 소설과 연작 3부작을 이룬다.

홍두선씨는 이 소설을 부산의 경남경찰국에 근무하던 1968-69년 무렵에 입수했다.

 

“당시 나는 도청 앞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퇴근해서 어떤 분이 저녁이나 먹자 해서 나가다 보니 리어카에 고서를 가득 싣고 누가 지나가요.

그래서 ‘좀 구경하면 안 되겠소’라고 하니, (리어카 주인이) 그걸 표구점에 갖고 가서 전부 뜯어

병풍을 만든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깝다는 생각이 들고 해서 돈을 좀 넉넉히 주고 통째로 샀지요.”

이렇게 해서 입수한 『곽장양문록』은 3책부터 10책까지 분량이었다. 1-2권은 낙질(落帙)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입수한 소설을 조사하던 중 찍힌 인장을 보고 홍두선씨는 깜짝 놀랐다.

인장에는 ‘일사(一蓑)’라고 적혀있었다. 서울대 문리과대학장을 역임한 저명한 국어학자

방종현(方鍾鉉.1905-1952)의 호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곽장양문록』은 방종현이 소장했던 책임이 분명했다.

이 소설이 아마도 본래는 규장각 소장이었다가 서울대로 들어가고

그러다가 6.25 동란 중에 부산으로 흘러오지 않았나 추정했었다고 한다.

 

전형적인 조선시대 궁체로 필사한 이 소설『곽장양문록』을 학계에 정식으로 보고한 이는

지연숙씨였다.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지씨는 1997년 제출한 석사학위 논문에서

홍두선씨가 소장한 이 소설을 분석했다.

도대체 어떤 인연으로 지씨가 이 소설을 접하게 되고 논문까지 쓰게 되었는지를 기자가 물었더니,

홍두선씨는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홍종선 교수가 내 사촌동생”이라고 대답했다.

 

이『곽장양문록』은 최소 6명 이상의 조선 궁중여인이 필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 중 한 명이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宜嬪成氏, 1753-1786)로 밝혀졌다.

소설 필사에 정1품 임금의 후궁이 관여했다는 획기적인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홍두선씨 기증품 중에는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유명한

위암 장지연(韋庵 張志淵, 1864~1921)의 아버지 회갑연을 기념해 제작한 12폭짜리 병풍그림

그 제작에 참여한 화가는 4명인데, 이들은 각각 2폭씩 그렸다.

 

이를 홍두선씨가 입수하게 된 과정에서 알게된 사실,

“나중에 장지연 씨 집이 그의 묘지를 찾지도 못할 정도로 아주 몰락했어요.

(장지연의 집은) 마산 부근인데... 후손들이 풍비박산나서,

(위암의) 손자 되는 사람이 이 12폭 그림을 칼로 오려서 팔았는데, 그것이 관에 압류되었지요.

그랬다가 다시 (물건이) 풀려났는데 그걸 마산 상인이 샀던 것 같아요.

그렇게해서 표구점으로 들어갔는데 아는 사람한테서 내게 연락이 왔습니다.

무리를 해서라도 사야한다고 권하기에 비싼 값을 치르고 샀습니다.”

이렇게 건진 그림 중에는 얼룩 강아지가 달을 보고 짓는 모습을 형상화한 한 폭이 포함돼 있다.

 

홍두선씨는 “이 그림을 당시 진주농림학교 교장이 갖고 싶어해서 자신이 갖고 있던 유물 중

태종 이방원이 정도전파를 숙청하는 일종의 밀지와 같은 유물과 교환하자고 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한편 홍두선씨가 고서 수집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것은

1964년 진주경찰서장으로 일하면서였다.

“당시 진주에는 유서 깊은 종가가 많았습니다. 이런 종가 창고에는 고서적이 잔뜩 있었는데,

이걸 (종가에서) 장사꾼과 짜고는 다 팔아먹는 거예요.

며칠 뒤에 우리 식구가 전부 서울 가니까, 문을 열어놓을 테니 다 가져가라,

뭐 이런 식으로 팔아먹더라 이겁니다. 이렇게 해서 귀중한 고서들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것이 안타까워 제가 수집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찍은 금속활자, 실용적인 목활자, 대중적인 목판 등 다양한 인쇄문화가 발달했다.

금속활자 중에서는 조선시대 가장 기본적인 활자체였던 ‘갑인자’ 인쇄본을

세종대 ‘초주갑인자(甲寅字)’로부터 정조대 육주갑인자인 ‘정유자(丁酉字)’까지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그 밖에 조선시대에 유행한 금속활자본 10종을 전시하였다.

금속활자 뿐 아니라 목활자본의 공신녹권, 목판본의 개인문집 등을 함께 전시하여

조선시대 인쇄문화를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홍두선씨가 기증한 유물 중에는

특히『진실주집(眞實珠集)』,『영가진각대사증도가(永嘉眞覺大師證道歌)』등

15세기 금속활자 인쇄문화를 보여주는 보물급 귀중본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초기 한글본으로는 가장 선본으로 꼽히는『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보물 1463호,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초조본 대장경중에서도 원형의 보존상태가 매우 우수한

『초조본현양성교론(初雕本顯揚聖敎論, 보물 제1356호,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도 함께 전시된다.

 

이 외, 고려말 목판본『인천안목(人天眼目)』, 세종 때 초조갑인자로 찍은『자치통감(自治通鑑)』,

우리나라 대표적 서예가로 손꼽히는 추사 김정희(秋史, 1765-1856),

18세기 문인화가 표암 강세황(豹庵, 1712-1791) 등 조선후기 명필가의 친필유묵 30여 점도 있다.

      

 

◇ 옛날 사람들은 어떤 책을 좋아했을까?

 

이번 전시에서는 옛사람들이 어떤 책을 즐겨 읽었는지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사대부들은 사서삼경을 비롯한 유학경전을 주로 읽었는데, 단순히 읽은 것을 지나 모조리 외울 정도였다.

뛰어난 학자들은 적어도 한 종류의 책자를 일천 번 이상 읽었다고 한다.

 

여성들은 소설책을 좋아하여 남편의 내조와 가사, 육아의 와중에도 소설책을 틈틈이 읽어

대중문화를 이끌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정조대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은 기록은 조선후기 여인들의 책 읽기 열풍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책 대여점에서는 책을 정밀하게 베껴 써서 빌려주고 그 값을 쳐서 이익으로 삼는다.

혹 비녀나 팔찌를 팔고, 혹은 동전을 빚내어, 서로 다투어 빌려다가 긴 날을 소일하면서,

자신의 베 짜는 임무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자가 왕왕 있었다”

- 채제공(1720-1799) 『여사서서(女四書序)』

 

 

◇ 한양의 책 문화 이야기

 

19C 한양의 육조 앞거리(광화문 네거리)에는 책을 파는 서점이 있었고,

광통교에는 서화점이 있어서 이 일대는 문화의 거리였다.

무교동, 남대문로, 을지로1가, 무교, 미동, 유동, 광통교 등에는 책을 만드는 곳이 밀집해 있었다.

또 한양에는 책의 유통을 담당하는 전문 서적 중개인도 있었으니,

18∼19C에는 조생(曺生)과 같은 사람이 유명하였다.

 

책이 없거나 글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야기꾼을 통해서 책 속의 내용을 알 수 있었다.

보신각∼종로 6가를 오가며 활동하던 이야기꾼들을 일러 '전기수'라고 하였는데,

그의 책 읽어주는 솜씨가 일품이어서 청중들이 돈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기수와 서적중개인들의 활동무대, 육조 앞거리와 광통교 일대 도서문화 지역 등을

대형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에 구현하여 당시 한양의 독서문화를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하였다.

 

 

◇ 다양한 인쇄문화 체험코너 마련

 

또한 이번 전시에서는 철저한 고증으로 복원한 1434년(세종 16) 갑인자 1판(청주고인쇄박물관 후원),

금속활자 제작·주물 과정을 보여주는 재료와 도구(중요무형문화재 101호 금속활자장 임인호씨 제공) 등을

공개하여 교육적인 효과를 높였다.

 

또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刻字匠) 오옥진(吳玉鎭)씨가 각자한 '오륜행실도'를

직접 인출해 볼 수 있으며, 이 인출본으로 ‘오침안정법’에 의한 옛 책 만들기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구운몽』,『춘향전』등과 더불어 전기수들의 대표적인 이야기 중 하나였던

고전소설『소대성전』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선보인다.

   

 

 

 

『인천안목(人天眼目)』, 고려말, 목판본

홍두선씨의 기증유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로,

고려 말 목판본 불경서『인천안목(人天眼目)』은 불교 경전의 진수를 뽑아 모은 책이다.

 

 

『곽장양문록』, 장편소설 제3권 첫 장, 궁체필사

중국 당나라 대종(代宗)-덕종(德宗) 시대를 배경으로

곽씨와 장씨 두 가문 인물들이 펼쳐가는 삶을 다룬 가문소설인 『곽장양문록』

기증자는 이 서적을 부산의 경남경찰국에 근무하던 1968-69년 무렵에

하숙집 앞을 지나가는 고물상 리어카에서 입수했다고 말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15세기, 초조갑인자본

세종 때 초조 갑인자로 찍었으며, 서울시 유형문화재급으로 평가되고 있다.

 

 

 

『초조본현양성교론(初雕本顯揚聖敎論)』권3, 보물 1356호,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북인도 무착(無着)보살이 저술하고 당나라 승려 현장(玄奘)이 한역한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20권 가운데 제3권 1축이다.

성교[聖敎: 석가(釋迦)의 교법, 또는 그밖의 성자의 불교 전적(典籍)]

현양(顯揚: 세상에 높이 드러냄)하기 위한 논서(論書)라는 뜻으로

법상종의 가장 중요한 책인『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을 널리 펼치기 위해 저술한 것인데,

모든 존재는 의식에 의하여 생긴 것이고 이 이치를 바로 알고 닦아야 부처가 된다는 의미이다.

이 판본은 해인사(海印寺)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판(版)과 보면 우선 판식(板式)이 동일하다.

그러나 초조본은 판수제(板首題)이고 장차(張次) 표시는 '장(丈)'으로 되어 있는데,

해인사본에는 판미제(板尾題)로 되어있고 장차 표시가 '장(張)'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책 끝에 있는 간행기록이 초조본에는 없는데 해인사본에는 있다.

또한 초조본에는 누락된 것과 오자도 몇 곳에 보이고 있으며,

한 획이 탈락되어 있는 글자가 보이고 있는데, 해인사 본은 바로 잡아놓았다.

이 판본은 고려 현종 때 부처님의 힘으로 거란의 침입을 극복하고자 만든 초조대장경 판본 가운데 하나로,

보존 및 인쇄상태가 뛰어나 서지학ㆍ불교사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1434년(세종 16)에 설순(偰循)이 지은『삼강행실도』와

1518년(중종 13)에 김안국(金安國)이 지은『이륜행실도』를 합해

정조의 왕명으로 1797년(정조 21)에 간행한 유교윤리를 담은 책.

   

 

 

허목, 『권자시자설(權子時字說), 1674

 

 

 

김정희 간찰(簡札), 19세기

 

 

 

 

 

에필로그 [Epilogue]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책을 엄청나게 읽었고, 읽는 것을 넘어 심지어 통째로 외우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한양에서는 이미 1500년대에 평민들이 한글을 익혀 책을 읽었다고 한다.

1800년대가 되면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책이 많아지고, 책을 빌려서 읽는 문화도 성행하였다.

또한 책을 가지기 어려운 사람들은 남에게 이야기를 들어서라도 책 속의 궁금증을 해소하였다.

을 좋아하는 우리 선조들의 모습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이 수많은 책을 제작해서 읽고 공부하였던 풍토는,

현재에 이르러 우리들에게 왕성한 지적 성장을 추구하는 동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