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용산 이전개관 5주년 기념 신라 테마전
ㅇ전시명칭 : 계림로 14호 무덤-황금보검을 해부하다 ㅇ전시기간 : 2010. 9. 28~11. 21
ㅇ전시장소 : 국립중앙박물관 선사 · 고대관 신라실
ㅇ전시작품 : 황금보검(보물 645호), 금귀걸이, 화살통장식, 말안장꾸미개 등 120여 점
국립중앙박물관은 9월 28일부터 11월 21일까지 “계림로 14호 무덤-황금보검을 해부하다”를 개최한다.
황금보검(보물 635호)은 1973년 대릉원(大陵苑) 동쪽에 계림로(鷄林路)를 새로 내는 공사 중에
노출된 많은 신라 무덤들 가운데 14호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이 무덤에서는 황금보검을 비롯한 금은으로 용무늬를 입사(入絲)한 말안장꾸미개[鞍橋],
유리로 장식한 금동 말띠드리개[杏葉], 비단벌레 날개로 장식한 화살통[盛矢具] 등
유물 270여 점이 출토되어 무덤 주인공이 누구인지에 대해 많은 추측을 불러왔다.
이번 전시는 국립경주박물관의 특별전 ‘황금보검을 해부하다-계림로 14호묘 발굴조사보고서’의
서울 전시로 보존처리와 과학적 분석으로 새롭게 밝혀진 황금보검에 대한 자세한 내용뿐만 아니라
계림로 14호 무덤에서 출토된 120여 점의 유물을 함께 전시하여
‘황금보검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궁금증에 대한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그 동안 황금보검 등 계림로 14호묘의 출토품 일부는 5년 동안의 보존처리 및 정리 작업을 거쳐
이 신라 무덤에 대한 발굴조사보고서를 37년 만에 내놓으며 전모를 공개했다.
자세히 관찰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내어
황금보검의 실체에 대해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계림로 14호 무덤은 국립경주박물관의 발굴조사보고서(학술조사보고 제22책)에서
무덤 구조와 치아 그리고 부장품의 배치와 내용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통해
남자 두 사람이 함께 묻혔던 무덤으로 보고되었다.
특히 황금보검의 검집 속에 숨어 있던 철검이 확인되어 황금보검의 내부구조가 밝혀졌고,
보검을 장식하고 있던 ‘마노(瑪瑙)’로 알려져 있던 보석도 ‘석류석(石榴石)’으로 확인되었다.
<경주 계림로 출토 / 카자흐 공화국 보로웨 출토 / 키질동굴벽화에 나타난 보검>
계림로 14호분에서 출토된 황금보검과 비슷한 종류의 서역 황금보검 복원도.
황금보검은 외래품(外來品)으로서 제작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흑해 연안에서 중앙아시아에 걸치는 어느 지역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용산 이전개관 5주년 기념으로 개최되는 이번 전시는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 문화 교류의 대표적인 상징물이었던 황금보검을 통해
6세기 초 신라의 왕성했던 대외 교류의 모습과
화려한 부장품과 피장자를 둘러싼 여러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보는 전시이다.
신라 귀족사회에 서역풍 문물이 크게 유행하였다는 증거는
신라 귀족이 차고 다니던 보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경주 미추왕릉지구의 천마총, 황남대총이 발굴되었는데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금관총과 금령총이 있다.
이 길은 후대에 도시계획을 잘못하여 왕릉지구를 훼손한 것으로
신라시대에는 월성의 북쪽에 위치한 하나의 묘역이었다. 이 곳을 '미추왕릉지구'라고 부른다.
이곳의 신라 고분들은 대소 크기와 부부합장묘(표주박형)와 개인묘(단분, 單墳)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의 공통점을 가진다.
이 고분지구를 보수, 정비하여 대릉원(大陵苑)이라는 공원을 조성하는
작업을 하던 중 보검 하나가 발굴되었다.
경주 계림로 14호분에서 출토된 단검은 길이 36㎝로,
칼과 칼집 모두 금테로 장식하고 홍마노(최근 석류석으로 밝혀짐)로
감입(嵌入)하였다.
이 보검의 모양은 그리스, 로마, 이집트, 서아시아에서 유행하던 형식이며,
특히 5세기 훈족의 아틸라왕 때 성행하였다고 한다.
5세기 신라사회는 왕의 칭호가
'이사금(尼師今)'에서 '마립간(麻立干)'으로 바뀌는 때이고,
바로 이 기간에 금관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연계해보면,
칭호가 바뀌는 것은 새로운 사상의 도입을 의미하고,
새로운 관(冠)을 사용한 것은
새로운 사회제도와 통치 분위기가 생겨났음을 의미한다.
신라 왕족들이 중앙아시아 기마민족들의 문화를 사랑한 증거이기도 하다.
이처럼 신라 사회에 새로운 변화가 생긴 것은
문화적 배경은 적석묘로 대표되는 스키타이,
백마사상(白馬思想)의 고향인 카자흐스탄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겠다.
- 『금관의 비밀』134-135쪽, 김병모, 푸른역사
“계림로 14호 무덤-황금보검을 해부하다” 전시와 “황남대총” 특별전을 통해
신라 문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 황금보검의 구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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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경주박물관특별전 “황금보검을 해부하다”
1.
1973년 대릉원 동쪽의 계림로(鷄林路)를 새로 내는 공사 중에 많은 신라 무덤들이 노출되었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墓), 독무덤(甕棺墓) 등 모두 55기의 무덤을 조사하였다.
이 가운데 ‘계림로 14호묘’라고 명명된 무덤에서는 황금보검(黃金寶劍)이 출토되어 큰 주목을 받았다.
그 동안 5년 동안의 정리 작업 끝에
이 계림로 14호묘 발굴조사보고서를 37년만에 내놓게 된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냈다.
꼼꼼히 관찰하고 분석하고 해부하여 황금보검의 실체에 대해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황금보검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있다.
1,500여 년 전 이곳에 묻혔던 사람, 황금보검을 지녔던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 계림로 14호 무덤의 위치
2. 황금보검의 주인은 누구인가
(1) 왜 죽었을까
황금보검의 주인이 묻힌 계림로 14호묘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墓)이다.
크기는 동서 3.5m, 남북 1.3m. 널을 안치한 덧널 안에는 부장곽을 따로 만들었고,
함께 묻은 유물들이 모두 270여 점이나 된다.
주검과 널이 썩어버린 바닥에는 금 귀걸이 두 쌍이 있었다.
귀에 달았던 것처럼 놓였고 귀걸이 사이에서 치아들이 각각 발견되었다.
두 사람을 나란히 묻었던 것. 묻은 때는 1,500여 년 전인 6세기 초로 여겨진다.
황금보검은 왼쪽에 묻힌 사람이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은제 허리띠도 차고 있었다.
오른쪽 사람도 긴 칼(大刀)을 찼다. 둘 다 높은 지위의 사람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두 명이 한꺼번에 묻혔을까?
지위가 비슷하고 나란히 묻힌 것으로 보아 순장(殉葬)은 아니다. 뒤에 살펴보듯이 부부도 아니다.
여러 가지 경우를 추측해볼 수 있다. 혹시 전염병이 돌았거나 전쟁에서 함께 죽은 것일까?
- 계림로 14호 무덤의 평면도 : 세환이식과 치아, 대도의 출토상태로 보아
남자 두 명이 묻힌 것으로 판단됨
(2) 남성일까 여성일까
일반적으로 가는고리 귀걸이(細鐶耳飾)를 달고 긴 칼을 찬 사람은 남성이며,
굵은고리 귀걸이(太鐶耳飾)를 달고 목걸이를 한 사람은 여성이다.
여기 묻힌 두 사람은 가는고리 귀걸이를 달았고 황금보검 또는 긴 칼을 찼다.
따라서 모두 남자로 생각된다.
- 금제귀걸이 출토
몇 살에 죽었을까?
치아가 남아 있었지만 오래되어 정확한 나이를 알기 어렵다.
다만 귀걸이와 치아 그리고 허리띠의 위치를 보아 키를 어림잡을 수 있다.
150cm~160cm의 키로 추정되며 어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3) 어떤 신분이었을까
황금보검은 저 서쪽 먼 나라에서 제작되어 들어온 것으로
이러한 ‘수입품’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매우 귀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황금보검의 주인은 신분이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함께 출토된 부장품에서도 추측할 수 있다.
금 귀걸이와 은제 허리띠를 비롯하여 여러 금은 제품을 함께 묻었다.
특히 금실과 은실로 입사(入絲)한 말갖춤(馬具)과
비단벌레 날개로 장식한 화살통은 그 화려함이 보검에 못지않다.
상감 유리구슬들은 황남대총과 천마총 등 금관(金冠)이 나오는 경주의 능묘(陵墓)에서 주로 출토되었다.
- 성시구(화살통)에 있는 비단벌레 날개 장식
- 유리장식 말띠꾸미개
그의 신분은 입고 있었던 옷에서도 추정할 수 있다.
보검의 아래쪽 면에 붙어 있는 직물이 그 옷의 흔적으로 보인다.
분석 결과 이 직물은 무늬 있는 비단인 ‘능(綾)’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834년)에 따르면 신라에서는 신분에 따라 입는 옷이 달랐다.
겉옷으로 ‘능’을 입을 수 있는 계층은 진골(眞骨) 이상의 계층뿐이었다.
이 기록은 계림로 14호묘와는 300년 정도 차이가 있지만
그는 신라 최고의 귀족계급에 속한 사람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4) 서쪽 먼 나라에서 온 사람인가
황금보검은 신라의 왕성했던 대외 교류를 보여주는 ‘보물’이다.
이 때문에 황금보검과 함께 묻힌 이는 혹시 서아시아나 중앙아시아에서 온 사람이 아닐까라는 추측이
있어 왔다. 그러나 문물의 이동이 곧 사람의 이동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계림로 14호묘의 부장품 가운데 황금보검 이외에는 외국에서 수입한 것은 없다.
일부 유리로 장식한 부장품들을 수입품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 형태가
신라 스타일이고 감색 유리 역시 신라에서 활발히 만들어진 유리구슬들과 통하는 것이다.
무덤 구조 역시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신라의 전통적 무덤이며,
머리를 동쪽으로 둔 것도 신라의 오랜 전통이다. 따라서 황금보검의 주인은 신라인일 가능성이 크다.
3. 황금보검의 구조
검은 쇠를 두드려서 아주 강하게 만들었다. 양쪽에 날이 있다.
날의 길이는 18cm로 단검(短劍)이며, 검집은 나무로 만들었고
윗면과 옆면, 아랫면에 황금판을 붙여서 장식했다. 황금판에는 보석과 유리를 박았다.
또한 검집 아래쪽 일부는 은판으로 감쌌다.
4. 부장품
(1) 말갖춤(馬具)
계림로 14호묘에서는 27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시신 머리 위 공간에 많은 물건을 놓았다.
이들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각종 말갖춤이다.
말갖춤은
안장(鞍裝), 재갈(비, 轡), 발걸이(등자, 鐙子), 말띠꾸미개(운주, 雲珠), 말띠드리개(행엽, 杏葉) 등이다.
이 중 안장과 발걸이는 세 벌이 조사되었다.
묻힌 사람은 두 명인데 세 벌의 안장과 발걸이가 출토된 것이 특이하다.
세벌 중 한 벌은 실용성이 떨어지는데 아마 장례를 위해 특별하게 제작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발걸이는 두 벌은 쇠로 만들었고
나머지 한 벌은 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철판으로 겉을 감싼 형태이며, 표면에는 무수히 많은 못을 박았다.
재갈은 두 벌로 말 입에 들어가는 부분에 돌기를 만든 특이한 형태이다.
하나는 쇠에 은을 씌운 재갈멈치가 있고, 또 다른 하나는 나무막대기로 재갈멈치를 한 것이다.
말띠꾸미개는 청자고둥(Conidae)이나 유리를 씌우기도 했다.
말띠드리개는 유리와 금동투조판으로 장식한 것이 확인된다.
(2) 말안장(saddle)
말안장(鞍裝)은 총 세 벌이 출토되었는데 모두 시신 머리 위쪽의 부장공간에 넣었다.
세 벌 중 두 벌은 쇠판으로 된 안장가리개(鞍橋)가 있고,
한 벌은 안장가리개는 남아 있지 않고 쇠로 만든 테두리(覆輪)만 있다.
쇠로 만든 테두리만 남아 있는 안장은 아마도 유기물로 안장가리개를 만들었을 것이다.
말안장가리개에는 세 벌 모두 용무늬를 입사하였다.
가리개 한판에 적은 것은 2마리, 많은 것은 8마리까지 있다.
용은 조금 입체적인 것과 평면적인 것으로 나뉜다. 여의주, 얼굴, 눈, 다리, 지느러미 등이 잘 보인다.
- 말안장 가리개의 금은입사(용무늬), 세 벌(전륜, 후륜)의 안장 출토.
금은으로 용무늬를 전면에 입사, 삼국시대 입사는 대도의 손잡이 등에 입사한 예가 대부분임.
(3) 입사(入絲)
X선 사진을 촬영하여 말안장가리개(鞍橋)와 띠고리(鉸具)에서
화려하고 정교했던 신라의 금은 입사(入絲)기법을 확인하였다.
쇠로 만든 말안장가리개는 표면에 가는 홈을 파고 그 안에 금실과 은실을 넣어서
용무늬(龍文)와 톱날무늬를 나타내었다. 테두리에도 무늬가 있다.
안장가리개 전체에 용무늬를 입사한 것은 동아시아에서도 드문 것이다.
용무늬는 조금 입체적인 것과 평면적인 것으로 나뉜다.
이 보다 더 이른 시기의 안장가리개는
금동판을 뚫어내는 투조(透彫)기법으로 용무늬를 나타낸 것이 많다.
투조 기법에서 입사 기법으로 발전한 것을 알 수 있다.
띠고리는 투조 기법과 입사 기법으로 무늬를 나타냈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두 마리의 새나 용(龍)이 마주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띠고리꾸미개의 금은 입사기법
지금까지 알려진 신라의 금은 입사 자료는 주로 칼에 새겨진 물고기나 용 거북등[龜甲] 무늬와 글씨였다.
그 예도 많지 않은데 이러한 사정은 백제나 가야도 비슷하다.
이번에 확인된 자료는 삼국시대 입사 연구의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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