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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조선시대 그림 속의 옛배

Gijuzzang Dream 2010. 9. 17. 14:48

 

 

 

 

 

 

 

 

목포 용해동 갓바위 문화의 거리에 위치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는

조선시대 배를 옛 그림을 통해 살펴보는 특별전 '조선시대 그림 속의 옛 배'를 개최한다.

 

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해양문화유산의 조사 · 연구와 보존 · 전시 · 교육을 주 임무로 하며,

매년 해양문화를 주제로 기획전시를 개최하고 있다.

 

이번 특별전은 보물로 지정된 단원풍속화첩의 나룻배를 비롯해

선유락의 채선, 평양감사 부임도의 누선, 통신사선 침몰도 등

조선시대 이름난 화원들의 작품 50여 점과 그림에 나타난 배 모형을 함께 선보인다.

 

 

 

각선도본 등 판옥선 관련 기본 도면이나

당포전양승첩도 등 조선시대 군사 관련 선박 그림도 다수 전시되고 있다.


조선 500년 동안 우리의 바다와 강을 누비던 다양한 배들의 모습과

왕실 · 관아 · 양반 ·서민들의 생활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청자운반선을 비롯한 고려시대 배는 여러 척이 발굴됐으나

조선시대 배는 아직 한 척도 발굴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올해 전시 주제를 ‘조선시대 배’로 기획했다"며

"왕실은 물론이고 관아와 양반, 서민들의 생활문화 속에 배가 어떤 의미로 녹아 들어 있는지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낙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장은

"많은 시민들이 관람을 통해 조선 500년 동안 우리의 바다와 강을 누비며 항해하던 다양한 배들의 모습도

감상하고 배를 타고 시가(詩歌)를 즐기는 선유락(船遊樂)의 즐거움과 항해의 낭만을 만끽하길 바란다”

고 말했다.

 

 

 

 

 

1.  ‘나룻배’

 

 단원풍속화첩(보물 제527호)

 

 

2. 사견선(使遣船)  : 일본 통신사 파견 때 쓰였던 배로 '통신사선(通信使船)'이라고도 부름.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의 관계가 정상을 되찾게 되자,

조선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약 200년동안 12차례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게 된다.

이때 통신사 일행과 역관들을 태우고 바다를 건너간 배를 사견선, 또는 통신사선이라 한다.

조선공학적 측면에서는 도해선(渡海船)또는 원양항해선이라고 할 수 있다.

6척의 선단이 함께 움직였으며, 겻집 위에 판옥 대신 객실을 꾸몄다.

또한 외국에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아름다운 깃발을 세우고 선체를 화려하게 꾸몄다.
 

 

 

  

 

   

 

 

 

- 사견선의 구조와 특징
<헌성유고(軒聖遺稿)> 라는 필사본에는 사견선의 설계도와 배를 축조하는 데 필요한 재료,

제작 일정이 나와 있다. 배밑, 삼판, 이물비우, 고물비우 등에 대한 나무의 치수와 필요 수량,

나무못의 종류와 필요 수량, 쇠못의 종류와 수량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또 배밑의 길이와 너비, 뱃몸의 길이와 너비 등도 기록되어 있다.

이 필사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옛날 배에 대한 전개식 설계도 및 평면 설계도는 아직 발견된 바가

없었으므로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발견된 설계도와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배밑은 너비가 한(一)자 반이 되는 네모진 통나무를 옆으로 열한 개를 잇고 가새를 박는다.

배밑 양쪽 가장자리에 일곱 쪽의 삼판(두께가 판마다 다르다)을 이어 붙인다.

이물 쪽에 귀삼(耳杉) 한 장을 더 올려서 이물을 솟아오르게 한다. 삼판에 박는 못은 섞어서 쓰는데,

바닷물에 잠기는 부분은 참나무 못을 쓰고, 반대로 마른 부분은 쇠못을 쓴다.
2. 이물비우는 세로 방향으로 대어 막는다. 한가운데에 곡목을 세우는데 아래는 배밑 사이에 꽂아 넣는다.

양 옆으로 각각 세 개의 곡목을 세운다. 가새를 옆으로 일곱 군데에다 박아 잇는다.

쇠못, 꺾쇠, 거밀못, 대갈못, 넓적쇠 등을 함께 쓴다.
3. 고물 비우는 가로 방향 널빤지 일곱 장을 대어 박는다. 배의 못은 참나무 못과 쇠못을 섞어 쓴다.

고물비우의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널빤지 이음새에 키 꽂는 구멍을 뚫는다.
4. 배밑의 길이는 66자, 이물 쪽 너비는 11.5자, 허리 쪽 너비는 16자, 고물 쪽 너비는 10.5자가 되고

뱃몸의 길이는 91자, 한 판의 너비는 22.5자가 된다.
5. 뱃몸이 완성된 다음에는 뱃전(삼판) 위에 멍에를 얹어 걸고,

 위에 귀틀을 짜고 겻집을 깔며, 겻집 위에 선실을 짓는다.
6. 뱃전(삼판) 위에는 15개의 멍에를 가로로 건다.

양쪽 삼판 바깥 쪽 멍에의 뺄목 위에 신방(기둥을 세우는 밑도리)을 걸고

그 위에 난간 기둥을 세운 후 난간대를 건다.
7. 겻집 위에는 모두 14칸의 방을 배의 중앙을 중심으로 좌우로 들인다.

이물 돛대와 한판 돛대를 세운다. 뒷간은 고물 맨 끝에 둔다.

- 그림에 나타난 사견선

 '조선 통신사선'이 풍랑을 만난 상황을 묘사한 <범사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855년 대마도에서 조선으로 귀국하던 통신사선이 풍랑을 만나 반쯤 잠겨있는 장면을 묘사한

1858년 작품이다. 그림 뒷쪽 돛대가 잘려 나간 상태이며, 

사람들이 주갑판이 잠기자 선상의 누각 위로 대피한 상태로 표현되었다. 

 

1811년(순조 11)에 통신사 김이교(金履喬) 일행이 타고 갔던 배가

오사카(大阪) 항구에 정박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린 그림이 있는데,

그림 제목이 <한선앙면도(韓船仰面圖)>다.

일본측 수행원이 그린 이 그림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문이 씌여 있다.

“길이는 23~24칸(한 칸=3자), 너비는 6칸이고, 멍에는 각목으로 크고 굵다. 양쪽의 난간에는 칠을 했다.

뱃전과 난간 사이에 노를 걸고 저었다. 이물과 고물이 조금씩 높다.

노는 소나무로 만들었는데 길이가 길어서 풍랑에 부딪히면 자주 부러진다.

전체적인 형태는 매우 거칠다. 배가 큰 것에 비해 견고하지는 않은 것 같이 보인다.”

그림을 살펴보면, 이물에는 나무 닻이 있고, 고물에는 키가 있는 것이 보인다.

앞서 설명한 <헌성유고(軒聖遺稿)>에 나오는 사견선 설계도와 구조가 꼭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통신사선(通信使船)

여수의 범선(帆船)축제에 참가한 세계의 범선들을 보면서

이제 우리나라도 한국적인 범선을 하나 내놓을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造船) 수주량에 있어서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자기 고유의 전통을 계승한 범선 하나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한국에서 내놓을 만한 범선은 바로 통신사선(通信使船)이다.

조선 통신사 일행을 태우고 부산을 출발하여 대마도를 경유하여,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통과하여 오사카까지 갔던 배이다.

12회에 걸쳐 현해탄을 건넜던 이 통신사선은 총 6척이었다.

대선(大船)이 2척, 중선이 2척,소선이 2척이었다. 6척에 나누어 탄 통신사 일행은 대략 500명.

이 배는 보통 배와는 달리 대단히 화려한 배였다. 선수와 선미에는 깃발이 나부끼고,

배의 난간에는 비단이 감싸고 있었고, 선체의 곳곳에는 단청(丹靑)이 채색되어 있었다.

통신사로 갔다 온 조경(趙絅 · 1586~ 1669)의 <동사록(東槎錄)>을 보면 

"배 안에는 사신이 머무는 방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벽에는 연꽃을 그렸으며,

사면 벽에 있는 문에는 붉은 칠, 흰 칠이 되어 있었다.

배 왼편에는 용을 그린 큰 깃발이 하나 세워져 있었고, 글자를 수놓은 깃발이 넷이었으며,

뱃머리에 큰 북틀을 놓고 그 위에 북을 놓았다”고 되어 있다.

통신사선은 장사를 하기 위한 상선(商船)도 아니고,

전쟁을 하기 위한 전선(戰船)도 아니었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문화를 전하는 문화선(文化船)이요, 한일 양국의 평화를 이루기 위한 평화선(平和船)이었던 것이다.

세계 역사에서 조선의‘통신사선’처럼 문화와 평화를 전하기 위한 배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신사선 가운데 대선의 길이는 약 30m, 너비는 약 6~7m, 높이는 3m정도였던 것 같다.

평생 우리 배를 연구한 김재근(金在瑾) 선생에 의하면

이는 전시에 사용하던 전선(戰船)보다 훨씬 큰 크기라고 한다(<우리 배의 역사>, 서울대출판부).

많은 사람을 태우고, 현해탄과 같은 거친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는 배가 앞뒤로 커야 했던 것이다.

조선 강국인 우리도 이제 ‘통신사선’과 같은 규모와 아름다움을 갖춘 전통 범선을 복원해 놓을 필요가 있다.

-  2007.05.07 ⓒ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

 

 

3. 수군조련도(이번 전시회에서는 전시하지 않은 판옥선 묘사그림)

 

 

 

 

4. 평양감사부임도 <평양감사향연도 월야선유> - 단원 김홍도 추정

 

◎조선시대 관선(官船)

관선(官船)은 관에서 필요로 하는 관수 물자를 조달하는 데 이용하기도 하고,

관원이 배를 타고 출장을 가거나 부임할 때 이용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관선의 모습은 김홍도의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

- 조선시대 관선의 구조
조선시대 관선은 영조 18년(1742) 홍계희(洪啓禧)가 평양감사가 되어 배를 타고 평양에 당도하는 모습을

그린 평양 대동강의 관선화(官船畵, 김홍도 작, 1770년)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배는 판옥 상장을 하지 않은 평선의 겻집 위에 정자를 세운 정자각선(亭子閣船)이다.

 

이 배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조선식 큰 노를 이물의 양쪽 뱃전에 걸고서, 노군(櫓軍) 2명이 함께 젓고 있는 모습이다.

이것은 거북선의 노젓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거북선과 같은 큰 전함에서는

한쪽 뱃전에 조선식 큰 노 8척씩을 걸고서 노 1척에 대장을 포함해서 5명이 한패가 되어 저었다.
삼판을 만들어 올릴 때 때려 박은 피새가 큼직하게 보인다.
돛의 모양과 그 부속들을 잘 나타내고 있다.
겻집은 가로 널로 깔았다.
정자각은 뜸으로 지붕을 이었다.

다른 한 폭의 그림에서 나타난 관선은 가운데 정자각을 세우고 뜸으로 지붕을 올렸다.

정자각 안에는 평양감사가 도장 넣는 함을 옆에 놓고 앉아 있다.

배의 앞(이물) 좌우 뱃전에서 조선식 큰 노를 사공 2명이 한패가 되어 젓고 있고,

배의 뒤(고물)에서는 사공 3명이 한패가 되어 조선식 큰 노를 젓고 있다.
관선 좌우에는 청사초롱을 밝힌 호위배가 있고, 수많은 다른 배들이 주위에 있다.

강물 위 여기저기에 불을 밝혔으며, 강가에는 아이들이 봉화를 들고 주위를 밝히고 있다.

관선의 이물 칸에는 호위하는 군관과 나졸이 있고 악사들이 풍악을 울리고 있다.

장자각 안에는 기생(관기)들이 대령하고 있다.

대동강에 떠다니는 다른 강배(江船)들의 모습도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이다.

 

우리의 옛 배는 크기를 말할 때 돛대가 몇 개인가를 따졌다. 외대박이, 두대박이, 세대박이.
돛대가 한 개 있는외대박이는 야거리, 두 개인 두대박이는 만장이,
같은 두대박이지만 쇠못을 쓰지 않고 만든 고깃배는 닷배.
바다로 다니는 큰 나무배, 곧 파도에 견디도록 만든 원양선을는 당도리라고 한다.
통나무를 파서 만든 작은 배는 마상이나 쪽배라고 하는데, 구유처럼 생겼다고 구유배라고도 한다.

거룻배는 돛을 달지 않은 작은 배, 돛을 달아 바람을 받아 다니는 돛단배,

큰 돛단배는 늘배라 하는데, 튼튼한 천으로 바람을 받게 한 장치가 '돛'이다.

물 가운데서 배를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해 물 밑바닥에 꽂히게 한 갈고리는 '닻[정,碇]'이다.

 

나룻배는 사람과 짐을 싣고 나루를 건너 다니는 배,

너벅선은 너비가 넓은 배, 뗏목으로 곁고 안전을 위해 난간을 두른 조그만 배는 떼배,

강 상류에서 재목을 엮어 띄워 내려보내는 떼(뗏목),
물 윗배는 강에서 다니는 몸이 낮고 바닥이 평평한 배를 말한다.
배를 움직이는 데 필요한 기관이나 돛, 노 같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멍텅구리 배도 있다.

 

배의 앞쪽은 이물, 뒤쪽은 고물이라고 하는데,
이물은 밑 앞, 고물은 밑 뒤나 꽁지부리 라고도 한다.
이물의 맨 앞에 바깥으로 뾰족하게 나온 부분은 묘시 또는 칼치 라고 불린다.
또 노를 기준으로 해서 오른쪽 뱃전을 노 앞, 왼쪽 뱃전을 노 뒤 라고 한다.
뱃전은 배의 양옆 가장자리 부분이고, 뱃삼은 뱃바닥의 가를 빙 둘러싸서 붙여 올린 배의 벽을 가리킨다.
배의 겉을 두른 널을 삼(杉)이라고 한다.
돛단배의 이물과 고물에 배에 오르내릴 때 디디도록 깐 널은 덕판이라고 하고,
덕판과 뱃바닥 사이의 공간은 구세안이라고 한다.
잡은 물고기를 산 채로 넣어 두는 칸은 물갓이나 물칸,
뱃사람들이 잠을 자는 칸은 맏간이나 한장 이라고 하는데,

맏간은 배의 고물의 첫째 칸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배의 돛을 달아 올리고 내리는 줄은 마룻줄이나 용총줄 이고,
배가 정박할 때 떠내려가지 않도록 묶어두는 줄은 버릿줄,
밀물이나 썰물에 밀리지 않게 고물에 달아 두는 돌은 몽깃돌,
배를 댈 때 배와 부두의 벽이 직접 부딪치지 않도록 다는 통나무(요즘은 타이어)는 밴두리라고 한다.
물이 새지 않게 배의 널빤지에 난 틈을 메우는 데 쓰는 물건을 박이나 뱃밥 이라고 하는데,

주로 대를 훑어 나온 부스러기인 대깔이 박으로 쓰였다고 한다.

배에서 물을 퍼내는 바가지는 파개나 파래박 으로 불린다.
얼음을 깨어 뱃길을 만들면서 배를 젓는 일을 골배질이라고 하는데,
장대에 도끼의 날을 달아서 골배질에 쓰는 도구는 싸리라고 부른다.
배가 좌우로 흔들리는 것은 옆질, 앞뒤로 흔들리는 것은 뒷질이라고 한다.

 

 

- 고려시대 관선의 구조
고려 때 송나라의 서긍(徐兢)이라는 사신이 1123년 고려에 와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고려 관선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이를 통해 보면 조선의 관선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뱃집 위에는 뜸으로 지붕(덮개)을 덮었고 아래 문짝과 창문을 달았다.
2. 둘레에는 난간이 있고, 가로 방향 나무로 양쪽 삼판을 서로 꿰뚫어 빼어 냈다.
3. 배밑은 평평하고 넓다.
4. 이물의 배 위에는 닻줄을 감는 닻줄물레(호롱)가 있고, 큰 돛대를 함께 세웠다.
5. 베(布)로 만든 돛은 20여 폭이 된다.
 

 

평양감사부임도에 보이는 누선(누각이 있는 배)

 

 

5. 혜원 신윤복, <주유청강(舟遊淸江)>   

1805년 <혜원전신첩(惠園傳神帖 · 국보 135호)>

 

 

6. 선유락의 채선(彩船) 

 

 

7. 심사정, <선유도>, 간송미술관

 

 

8. 한강주교환어도 = 화성원행도

 

  

 

 

9. <기성도(箕城圖)>병풍-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176호(서울역사박물관소장)

 

 

8폭 병풍에 평양성(平壤城)과 대동강의 전경을 담은 산수와

평양감사(監司)의 대동강에서의 뱃놀이 광경을 담은 풍속화의 요소가 결합된 평양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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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전시유물 살펴보기(완도선/ 신안군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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