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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수중고고학

Gijuzzang Dream 2010. 9. 17. 16:31

 

 

 

 

 

 

 

 - 수중발굴 -

 

 

 수중고고학이란?
수중고고학 사진

과거에 물속에 잠겨버린 유물이나 유적을 발굴하여, 인류의 문화 생활방식, 역사 등을 밝혀내는 학문이다. 따라서 수중고고학은 모든 활동이 물밑으로 연장하여 행해지는 것으로서 조사환경과 방법적인 면에서 육상고고학과 구분된다.
외국의 경우 수중고고학은 오래전부터 학문의 영역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데, 조사가 수행된 장소나 방법, 대상 연구결과에 따라 underwater, maritime, marine,

deepwater, submarine, nautical, ship archaeology 등 용어가 통일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육상의 고고학과 구별한다는 포괄적인 의미에서 앞에서 열거된 용어들은 모두 수중고고학(underwater archaeology)이라는 용어가 점차 받아들여 지고 있다.

 
수중유물의 발견
수중유물발견사진

수중문화재가 물속에 있게 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의 경우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수상활동 등에서 우연히 물속으로 침몰하여 남아 있게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원래 육상이었다가 지질학적인 변동이나 기후의 변동으로 물에 잠기게 되는 것이다. 최근에 일어나는 댐 개발과 바다 간척사업 등도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대표적인 경우로 카리브해안 자메이카의 포트로얄 유적과 리비아의 아폴로니아를 들 수 있으며 대종을 이루는 것은 난파선 자료들이 이에 속한다.

다른 고고학이 시작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래 보물선을 찾는 작업에서 시작된 셈이다.

발견되는 고대선박들은 깊은 바닷속의 비산소 층에서 온전히 보존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난파선은 침몰당시 과거의 시간을 담아놓은 타임캡슐과도 같은 것이다. 깊은 바다나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해저에 존재할 경우에는 조사가 어려우나, 접근이 용이한 곳이나 귀중한 유적의 발굴은 현재도 그러한 작업은 계속 돼 오고 있다.

 

 

수중조사장비

수중조사 사진 1942년 수중 호흡기가 개발되면서 물밑의 유적은 대부분 다이버들에 의존하여 조사가 이루어지는데, 접근이 어려운 심해의 경우 소형잠수함이 이용되기도 한다. 수중발굴을 위해 탐사선 등 고가 장비를 확보해야 하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다.
 
기본 탐사 장비
Vessel(조사선박)
Side Scan Sonar(측면주사음파탐지기)
Magnetometer(지자기 탐사기)
Echosounder(단빔 측심기)
Multibeam Echosounder(다중 빔 음향측심기)
Subbottom Profiler(지층탐사기)
Metr Detector(금속탐지기)
DGPS(Differential Global Positioning System) (위치 측정기)
ROV(Remotely Operating Vehicle)(원격조정 무인 탐사기)
Stil, video, digital camera(카메라 장비)
Tow Vane : 모선에 의해 예인되는 일인승 수중탐사장비
 
발굴조사 장비
Air Lift : 제토장비
Photo Tower : 사진 촬영탑
Water Jet : 해저 굴착장비
Lifting Basket : 인양 케리어
Telephone Booth : 잠수자 휴식기
SDC(Submersible Decompressior) : 수중챔버
Winch : 인양로프
 

측면주사음파탐지기(side scan sonar)
측면주사음파탐지기는 해저면을 광학사진처럼 수평 촬영하여 음영상화를 만드는 시스템으로써 통상 저주파수인 25, 27, 50kHz를 사용하는 사이드스켄소나는 수중에서 멀리까지 진행하여 넓은 범위를 조사하기 적당하고, 반대로 300, 400, 1250kHz의 고주파수를 사용하는 사이드스켄소나는 적은 범위를 조사하지만 고해상도의 데이터를 얻어낼 수 있으며, 수십센티미터의 목표물까지도 구분해 낼 수 있다. 기본적인 시스템의 구조는 컨트롤러(PC), 데이터변환장치, 다) 토우피쉬(음파송수신기), 연결케이블로 이루어져 있다.
사이드스켄소나 본체
▲ 사이드스켄소나 본체
토우피쉬(음파송수신기)
▲ 토우피쉬(음파송수신기)
 
다중빔 음파탐지기(Multibeam Echo Sounder)
현재는 주로 해저지형조사를 위하여 다중빔 음파탐지기를 사용한다. 해저지형을 조사하는데 측면주사음파탐지기와 달리 3차원의 영상을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다중빔음파탐지기의 특징은 장비의 특성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한번의 음파를 발사하여 횡 방향으로 수심의 7배가 되는 지역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음파를 발생하는 음원발생장치의 구경이 작아 보다 정확한 해저지형자료를 취득한다.
다중빔 음파탐지기(Multibeam Echo Sounder) 다중빔 음파탐지기(Multibeam Echo Sounder)
 
지층탐사기
해저 심부 지질구조를 알고자 할 때 사용하며 3.5 kHz의 주파수를 이용하는 지층탐사기(Sub-Bottom Profiler)는 천부 지질구조를 연구할 때 사용한다. 이러한 장비를 이용하여 취득된 자료는 음원에서 수신기까지의 거리 차이 및 다양한 잡음에 의해 왜곡된 이미지를 보여주게 되며 이에 대한 보정은 필수적이다.
지층탐사기 지층탐사기
 
조류계, 탁도계
조류계, 탁도계 밀물과 썰물 때문에 일어나는 바닷물의 흐름의 방향과 그 속도를 재는 기계로써 잠수사의 조사에 필요한 기초적인 자료를 취득하는 장비이다.
 
위성위치측정기(D,G,P,S Differential Global Positioning System)
일반적으로 육상에서 사용되는 네비게이션(G.P.S)을 생각하시면 된다. 그러나 수중발굴조사에 사용되는 위성위치시스템은 위성에서 좌표를 받아 그 좌표를 육상기지국에서의 수신을 통하여 오차가 최소 수십센티미터 안 까지도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비이다.
이러한 장비를 이용하여 해양탐사를 실시하는데 사이드스켄소나, 멀티빔에코사운더 등과 같은 해양탐사장비와 같이 운영되는 장비로 조사 후 이상체의 확인 지점할 수 있다.
 
음향측심기
바다의 깊이는 음파를 이용해 수심을 측정하는 장비인 음향측심기라는 장비를 이용하여 측정한다. 음파를 해저에 발사하면 음파는 약 1,500m/초의 속도로 수중을 통과하여 해저에 이르고 해저면에서 반사된 음파는 다시 동일한 경로로 수신기에 되돌아 오는 그 사이의 소요시간을 측정한 후 이를 이용하여 수심을 측정한다.
음향측심기
 
수중촬영장비
일반적으로 육상에서 사용되는 캠코더, 카메라에 수중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우징을 사용하여 수중 영상 및 사진을 얻는다. 수중발굴에서의 촬영은 육상발굴에서의 촬영과는 환경적 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매우 힘든 작업여건에서 이루질 수밖에 없다.
 
수중교신장비
육상 조사자는 수중의 상황과 잠수사는 외부의 상황을 알 수 없다.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음성으로써 외부의 조사자와 잠수사가 교신을 할 수 있는 장비이다. 이 장치를 통하여 외부의 상황을 잠수사에게 알려줄 수 있으며, 수중의 상황을 육상 조사자와 교신할 수 있는 장비이다.
 
에어리프트
에어리프트(air lift)의 원리는 고압의 공기를 에어호스를 통하여 해저면으로 공급하면 그 공기가 상승관에 주입되면서 수면으로 상승하려는 공기의 힘을 이용하여 해저면의 갯벌, 모래 등과 함께 올라오는 원리의 장비이다.
 
조사선박(Vessel)
조사선박 수중발굴 및 조사를 할 수 있도록 제작된 선박으로 수중조사 장비등을 장착하고 있는 선박이다.
 
지자기 탐사기(Magnetometer)
 
일인승 수중 이동탐사장비
수중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원통 속에 축전지를 내장하고, 그 밧데리(12v)를 동력원으로 원통 끝에 있는 프로펠러를 회전시킨는 힘으로 수중에서 이동할 수가 있다. 수중에서 광범위한 범위를 조사하기 위한 장비이다.
 
원격조정 무인 탐사기(ROV, Remotely Operating Vehicle)
수중 작업이나 촬영 등을 위해 선상이나 육상에서 원격 조작하는 장비로서 잠수사가 입수하지 못하는 지역(심해)등을 조사하는 장비이다.

 

수중발굴조사와 방법

 

수중발굴조사 사진

수중발굴의 과정은 경험이 풍부한 발굴단의 구성으로부터 시작된다. 총 지휘하는 조사단장과 그 밑에 기술 분야, 해양학 분야, 고고학 분야 등을 둔다.
기술 분야에서는 실제수중 작업을 담당하는데, 잠수시간의 감독, 잠수장비ㆍ보트ㆍ기계류 등을 관리한다. 해양학 분야에서는 탐사선을 운용하면서 탐사장비를 관리하게 되는데, 탐사결과를 분석ㆍ정리한다.
고고학 분야에서는 유물발굴, 도면작성, 사진촬영, 유물의 등록 및 보존처리, 분석 등을 담당한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효율적인 발굴과 시간 비용 등의 절감을 위해 긴밀하게 협조하며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수중 고고학은 유물을 발굴조사 하는데 사용되는 장비와 수중이라는 환경이 다르다는 점만 제외하고는 육상 유적지에서 하는 것과 같은 기준을 따른다. 고고학자들은 그들의 기술을 수중 환경에 적용함으로써, 수중 환경에서 하는 발굴 작업의 어려움에 대처해야 한다.

 
수중발굴조사 사진

또한 발굴 작업이 진행되면서 발굴의 결과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해 대략적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전략에는 모든 유물을 인양할 것인지, 또는 특별한 의문 사항에 대한 해답만을 얻을 것인지 등 뚜렷한 발굴 목적이 포함된다. 그렇기 때문에 수중고고학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일반 고고학의 지식ㆍ방법론뿐만 아니라 해양학, 측량학, 보존과학 등의 분야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예비조사가 이루어지고 발굴이 결정되면, 조사를 통해 얻은 정보를 활용해야 하며 자신의 기술과 어떠한 장비가 필요한지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본격적인 발굴단계에서는 많은 인원과 장비가 투입되기 때문에 관련 전문가로부터 치밀한 감독을 받아야 한다. 발굴은 유적에 대한 일종의 파괴를 의미하기 때문에 발굴 작업을 하지 말도록 결정을 내릴 수 도 있어야 한다.

수중고고학이 발달된 유럽에 비해 우리나라는 이제 시작단계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신안과 완도에 이어 최근에 군산 비인도와 십이동파도에서 적지 않은 유물이 인양되고 있음은 앞으로 많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드 설치
그리드 설치 사진 수중발굴에 있어서 폭넓게 사용되는 방법이 그리드법이다. 유적에 따라 엷은 로프를 이용하여 그리드를 설치하기도 하지만, 정밀한 측량과 도면을 얻기 위해서는 철재파이프를 이용하여 그리드를 설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퇴적층 제거
퇴적층 제거 사진 유적에 쌓여 있는 퇴적물들은 에어리프트와 물분사기를 이용하여 걷어내야 한다. 고압 물분사기는 퇴적층을 걷어내고의 에어리프트를 통해 퇴적물들을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길 수 있다. 수중에서 가장 좋은 도구는 잠수사의 손이다. 유물이 약하거나 정밀한 유적의 발굴을 요구한다면 해저위의 바닷물을 가만히 부채질하면 약한 해류가 생겨 뻘이나 모래에 파묻혀 있는 유물을 손상시키지 않고, 덮고 있는 엷은 퇴적층을 제거할 수 있다.
이외에도 대나무칼, 꽃삽, 호미 등과 같은 다양한 도구들을 사용하기도하며, 공기부양 펌프와 수중준설기를 이용하여 퇴적물을 걷어 내기도 한다.
 
조사와 인양
조사와 인양 사진

구획된 그리드 밑의 유적은 철저한 기록-도면작업-사진촬영을 남길 필요가 있다. 정밀 실측이 요구되는 구간은 조밀한 그리드를 설치하고 조사한다.

사진 촬영 탑은 그리드와 같은 폭으로 제작하여 사진을 촬영할 수 있다. 촬영된 사진을 통해 정밀 도면을 제작할 수 도 있다.

기록과 촬영에 앞서 유물에 일련번호를 붙여 위치를 정확하게 해두어야 한다. 유물 인양은 작업선에 탑재된 크레인이나 감속 윈치를 이용하여 인양하는 방법과 에어백을 이용하여 인양하는 방법 그리고 다이버가 유물울 직접 들고 상승하는 방법이 있다.

 

유물의 보존처리

 

유물의 보존처리 사진

도자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수침 유물들은 부식이 심하거나 목재유물인 경우 함수율이 과포화상태로 인양된다. 재질이 약화된 상태의 유물들은 건조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철재유물은 알칼리 수용액에 유물을 보관하여 산소와의 접촉을 차단시켜 줌으로서 더 이상의 새로운 부식을 일으키게 하지 않는다.


목재유물들은 솜이나 부직포에 물을 적셔 수분이 증발하지 않도록 포장해여 운송한다. 바다에서 인양된 유물은 탈염처리를 해야 하며 예비 실험을 통해 유물의 성격에 따라 보존처리 방법을 찾아야 한다. 유물은 보존처리 전의 상태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하고 처리방법의 구체적 기록은 물론 사용한 재료에 관해서도 기록을 남긴다.

 

 

 

<수중발굴조사>

 

우리 민족은 고대부터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훌륭한 해양 문화 전통을 쌓아왔다.
특히, 배 만드는 기술이 뛰어나 바다를 이용한 물자운송과 해양 교통이 발달하였으며,

경제 · 문화적 교류를 통한 동북아 해상경영을 가능케도 하였다.
조상들의 활발한 해양활동 흔적들은 바다 곳곳에 산재해 있으며,

이를 뒷받침하듯 현재 우리 나라 해역에 해상유물 신고지점은 220여 곳이 넘는다.

 

 

수중발굴조사 현황

연번 발굴연도 발 굴 유 적 발굴 기관 발굴문화재 성격
1 1976~1984 신안 방축리 수중발굴
(전남 신안군 증도면 방축리)
문화재청,
해군 합동
14세기 중국 무역선 1척,
동전 28톤, 도자기 등
22,000여점
2 1980,1983, 1996 제주 신창리 수중발굴
(제주도 북제주군 한경면 신창리)
문화재청,
제주대학교박물관
12~13세기 금제장신구류,
중국 도자기 등 인양
3 1981~1987 태안반도 수중발굴
(충남 보령군 태안반도 근해)
문화재청,
해군 합동
고려청자 40여 점,
조선백자 등 14~17세기
유물 인양
4 1983~1984 완도 어두리 수중발굴
(전남 완도군 약산면 어두리)
문화재청 12세기 고려 선박 1척,
도자기 3만여점,
선원생활용품 등
5 1991~1992 진도 벽파리 통나무배 발굴
(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중국 13~14세기
통나무배 1척 출토
6 1995~1996 무안 도리포 수중발굴
(전남 무안군 해제면 송석리)
국립해양유물전시관,
해군합동
14세기 고려상감청자 638점
7 1995 목포 달리도배 발굴
(전남 목포시 충무동 달리도)
국립해양유물전시관 13~14세기 고려 선박 1척
8 2002~2003 군산 비안도 수중발굴
(전북 군산시 옥도면 비안도)
국립해양유물전시관,
해군합동
12~13세기 고려청자 등 2,939점 인양
9 2003~2004

군산 십이동파도 수중발굴
(전북 군산시 옥도면 십이동 파도)

국립해양유물전시관 12세기 고려 선박 1척,
고려청자 등 8,122점
10 2004~2005 보령 원산도 수중발굴
(충남 보령시 오천면 원산도)
국립해양유물전시관 13세기초 청자향로편 등
11 2005 신안 안좌도 고선박 발굴
(전남 신안군 안좌도 금산리)
국립해양유물전시관 14세기 고려시대 선박 1척,
고려상감청자 등 4점
12 2006~2007 군산시 야미도 수중발굴
(전북군산시옥도면 야미도리)
국립해양유물전시관 12세기 고려청자1,806점
13 2006 안산시 대부도 수중발굴
(경기도 안산시 대부도 서쪽해안)
국립해양유물전시관 12~13세기 선체편 일괄 수습
14 2007~2008 태안군 근흥 대섬 수중발굴
(충남 태안군 근흥면 대섬 인근)
국립해양유물전시관 12세기 중 고려선박 1척,
고려청자 등 23,640점
15 2008 태안군 근흥 마도 수중발굴
(충남 태안군 근흥면 마도 인근)
국립해양유물전시관 13세기 고려청자 515점
16 2008 군산시 야미도 수중발굴
(전북군산시옥도면 야미도리)
국립해양유물전시관 12세기 고려청자1,558점

 

 

 

신안해저발굴





 

 

제주 신창리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발굴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발굴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발굴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발굴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발굴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발굴
 
태안 보령 죽도 수중발굴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발굴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발굴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발굴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발굴
완도 해저발굴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발굴

완도 어두리 해저유물 발굴조사는 1983년 12월 19일부터 12월 30일까지 1차조사, 1984년 3우러 15일부터 5월 23일까지 실시한 2차조사로 이루어졌다.
고려청자를 비롯한 도자기류를 주로 한 3만여점의 유물과 선체를 인양하였다.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발굴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발굴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발굴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발굴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발굴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발굴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발굴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발굴

 

 

무안 도리포 해저발굴
무안 도리포 해저발굴

무안 도리포 해저유적 발굴조사는 1995년 10월 바다속에서 조개를 채취하던 잠수기 어부들에 의해 청자대접 등 120여점의 유물이 인양 신고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문화재관리국과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은 현지에 긴급조사단을 파견하여 유물의 발견 경위와 성격을 조사하였으며, 그 결과 상당량의 유물이 해저에 매장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1, 2차에 걸쳐 수행된 조사에서는 해군의 지원을 받았으며, 어민들이 제보한 위치를 위성위치측정기(DGPS)로 위치를 확보하고 측정지역에 첨단장비를 이용하여 해저면에 대한 장비탐사를 실시하였다.

탐사 결과 어민 제보 지점 인근 해저면에서 이상 물체 3곳이 확인되었다. 이를 근거로 조사단은 해저면에 대해 2인 1조의 잠수팀을 동원하여 30m 원형 탐색조사를 실시하였다.

1차조사에서 유물의 매장위치와 분포범위, 선체잔존 여부등을 확인하기 위한 지층탐사를 함께 실시하였다. 인양된 유물은 청자대접 등 620점이며, 대부분 조개껍질 등의 유기물이 붙어 있었지만 양호한 상태로 인양되었다.

 

 

 

군산 비안도 해저발굴

군산 비안도 해저발굴

군산 비안도 해저유적의 발견은 변산반도에서 군산까지 연결하는 대규모 새만금 간척공사로 인하여 조류의 흐름이 바뀌고 물막이 공사에서 발생되는 강한 조류 때문에 묻혀 있던 청자들이 노출되었다.

노출된 청자가 조개 잡이 잠수사에 의해 발견 신고되면서 제보지역에 대한 긴급탐사가 실시되었으며, 유물의 매장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우리관의 잠수팀이 직접 해저에 매장된 유물의 분포상태를 확인하였다.

해저에 분포된 다량의 청자들이 개펄에 묻혀 있거나 노출된 상태로 확인되므로 이 지역을 중심으로 장비탐사를 실시하여 주변 해역의 유적 분포상태를 조사하였다.
그러나 선체로 추정되는 이상체는 확인되지 않았다. 유물은 매우 넓은 범위로 분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물이 집중되어진 지역을 중심으로 해저에 6 X 4m크기로 그리드를 제작하여 설치하였다. 그리드는 원활한 조사를 위해 철재그리드를 사용하였으며 지면에서 약 50cm 가량 띄워 설치하였다. 유적의 조사는 그리드를 중심으로 실시하였으나 그리드를 벋어나는 외곽지역은 컴퍼스와 수색라인을 이용하여 조사범위를 확장하였다. 1차 조사에서는 1,932점의 청자가 인양되었으며 해군의 지원을 받아 조사를 수행하였다.

2차에서 5차까지의 해저 발굴조사는 우리관에서 직접 수행하였으며, 인양된 유물은 모두 1,003점을 인양하였으며, 지금까지 해군에 의존하던 수중발굴을 우리관에서 직접 수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군산 비안도 해저발굴 군산 비안도 해저발굴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발굴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발굴

군산 십이동파도 수중문화재 발굴조사는 전북 군산시 옥도면 고군산군도의 북서쪽 26km 지점에 위치한 ‘십이동파도 안품’ 근해에서 어로작업 중 다량의 고려청자가 발견 신고되자, 동 해저에 대한 유물매장 상태확인과 향후 정밀 수중발굴조사의 필요성을 판단하기 위해 긴급탐사를 실시하였다.
탐사 결과 유물이 조사지점을 중심으로 동서방향 길이 10m, 폭 7m 범위 내에 유물이 집중 매장되어 있었으며, 매몰된 선체 편을 발견하였다.

이 지역은 낚시와 잠수사를 이용한 키조개 채취 등으로 유물매장처의 훼손과 도굴이 우려되어 임시 사적 지정을 하고 매장유물에 대한 1차 수중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십이동파도는 군산항에서 서쪽으로 약 30㎞ 떨어져 있고, 고군산열도의 여러 섬 중에서 서쪽 끝에 위치하는 말도에서 26㎞ 정도 떨어져 있는 섬이다. 섬이 12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어 십이동파도라 불리며, 일종의 군도(群島)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십이동파도 동쪽에는 군산시가 위치하고, 북서쪽에는 어청도가 있다.

 

남동쪽에는 3,000여 점의 도자기가 인양되었던 비안도와 고군산도가 위치한다. 십이동파도를 비롯한 고군산군도 해역은 1970년대 이래 해저유물의 발견 신고가 20여건을 상회할 정도로 많은 해저유물이 매장된 해역이기도 하다.

조사가 이루어진 해역은 섬이 둘러져 있어 조류가 빠른 썰물 때에도 섬들이 이를 막아 조류가 느리게 흐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장비 탐사와 수중조사를 통해 이와 같은 조류의 흐름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발굴

따라서 조사를 진행하는데 있어서 이미 조사된 신안 ㆍ 완도 ㆍ무안 ㆍ 도리포ㆍ 비안도 등의 조사 환경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조류의 영향을 받지 않고 조사를 수행할 수 있었다.
또한 수중 시계가 2~3m 정도 확보되어 수중촬영과 그리드설치 등 수중발굴의 기본적인 교육의 장으로 이용될 만큼 좋은 환경이었다. 하지만 먼 바다라는 취약성 때문에 북서풍이나 북동풍이 불면 현장에 파도가 심하게 발생하여 위험에 노출되는 약점이 있었다. 유물 인양 지점의 해양 환경은 긴급탐사 때에 조사된 것으로 2물때(측정일자 : 2003. 10. 6.)의 만조시 수심 16~18m, 저층류 1knot이내, 수온 19℃ 내외, 시정거리는 1~4m 정도였다.

1차조사에서는 유적의 정밀조사와 5,266점의 청자를 비롯하여, 철제솥, 청동수저 등을 인양하였으며, 2차 조사에서는 선체와 주변에 흩어진 청자를 인양하였다.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발굴

인양된 도자기들은 선체내부에 가지런히 포개져 배의 공간구조에 맞추어 적재되었으며, 파손을 방지하기 위해 도자기 사이에 나무쐐기를 이용하여 한다발씩 묶음을 하였다. 배밑바닥과 도자기 사이에는 집풀과 갈대 등으로 완충역할 하였다. 매몰된 선체잔해는 길이 7m, 폭 2.5m가 남아 있었으며, 저판 3열 6재, 그리고 2층으로 구조된 만곡종통재가 발견되었다,
그 외에도 배의 선수판으로 추정되는 부재와 돌 닻장, 호롱대로 보이는 부재들이 발견되어 고대한선의 발달과정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충남 보령 원산도 수중발굴


충남 보령시 오천면 원산도리 근해에서 다량의 도자기 파편이 발견, 신고되어 동 지역과 해저에 대한 유물 매장 확인과 향후 정밀 발굴조사의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현지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지역은 태안군 안면도 보령시 원산도 사이의 좁은 해협으로 아산지구 방조제 간척공사 이전에는 유물이 매우 빠른 해역으로서, 방조제 간척 후 갯벌위에 돌과 함께 청자파편들이 나타나 있었다. 갯벌지표조사는 썰물때 청자편은 약 20~70m 범위에 패각류와 함께 노출되어 있으며, 이 지역에서 흑 · 백상감청자편을 포함하여 파편들을 육안으로 쉽게 확인되었다.
또한 갯벌 아래층에서도 파편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매장된 파편들은 약 40cm 깊이까지 교란층을 이루고 있었다.
보령 원산도 해저출토 도자기는 1차와 2차에 걸쳐 다양한 도자기 파편이 다량으로 수습되었다. 1 · 2차 출토 도자기는 기종과 문양의 형태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으며 기종별로는 대접, 접시, 잔, 완, 잔받침, 병, 향로, 호, 잔뚜껑, 의자, 베개 등으로 분류된다.




 

 

 

마도



 

 

군산 야미도 1차 발굴

전북 군산 야미도 수중발굴조사는 2005년 11월 수 백점의 고려청자를 밀매하다 붙잡힌 도굴범 자백이 계기가 되었다.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조사단은 도굴범이 알려준 동 해저지점을 긴급탐사한 결과 ,도자기가 조사해역 남동방향으로 길이 20m, 폭 20m 범위 내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갯벌에 묻혀 있는 상태를 확인하였다.
현지조사 결과를 토대로 전북 군산시 옥도면 야미도 동방해역의 본 발굴을 추진하여 4월과 5월에 걸쳐 시차를 두고 나누어 실시하였는데, 4월 조사는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는 유물 인양에 중점을 두었으며, 5월 조사는 이전 조사에서 확인 유물 집중매장지점을 중심으로 제토작업을 실시하면서 유물을 인양하였다.

발굴과정에서는 조사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하여 산발적으로 흩어져 잇는 유물 매장처 주변에 위치측정기(DGPS, Differential Global Positing System)를 이용하여 중심지점을 설정한 후 수중무인카메라(ROV, Remotely Operated Vehicle)를 이용한 해저지형을 파악하였으며, 조사 중 유물이 발견될 경우 부표를 설치하여 위치를 측정하고 현장 상태를 수중카메라와 수중비디오로 촬영하였다. 이후 제토작업 후 유물이 발견 될 경우 기록촬영 후 인양하였다.
긴급탐사와 발굴조사를 통해서 780점의 자기와 도기 편들이 인양되었으며, 선체편이나 기타 잔존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군산 야미도 2차 발굴

1차 발굴조사에 이어 2007년 6월 4일부터 6월 23일까지 이루어진 2차 발굴조사는 1차 조사지역을 중심으로 남북 200m, 동서 100m 범위의 중심라인을 설정하고, 에어리프트를 이용하여 수중 제토하는 조사방법을 채택하였다. 발굴조사는 추가 유물의 매장상태 확인과 2005년 도굴범이 불법인양한 동종의 유물확인에 중점을 두고 실시하였다.
조사지역은 새만금방조제 공사의 물막이 공사가 완료되어 조류가 약해 停潮 시간과는 관계가 없이 기상 조건과 수중시계만 확보되면 수중조사를 할 수 있었다.

유물이 분포하고 있는 해역의 수심은 5~8m 정도이며, 수중시게는 정조시 0~1m 이였다.
이번 조사에서는 새만금방조제 물막이 공사의 영향에 기인한 갯벌층이 20cm 이상 퇴적되어, 2006년 조사 때의 중심라인을 20cm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유물의 집중 분포는 산발적으로 남동쪽 조사지점에서 3곳이 발견되었는데, 유물은 기종별로 포개져 정렬되어 있거나, 다소 산발적으로 분리되어 매몰되어 있었다.
인양된 유물은 청자잔 등 총 1,026점으로 선상생활용품으로 추정되는 도기편이 산발적으로 출토되었다. 1차 조사에서 발굴되지 않은 청자잔과 청자완은 소량이 발견되었으며 이전의 대접과 접시에 비해 태토나 유약상태가 뛰어난 밝은색 암갈색의 특징을 나타냈다.
이외의 대접과 접시는 어두운 암갈색의 유약과 거친 태토로 제작되어 품질이 매우 떨어진 조질 청자였으며 유약의 용융상태가 매우 불량하지만 일부 유물은 상태가 아주 양호한 특징을 보이는 것도 있다.

 


 
 
 
수중발굴 선체 현황

 
번호 선박이름 시 대
(세기)
잔존규모(m) 선형 인양유물
1 신안선
(중국)
14 길이 28.4, 너비 6.6, 깊이 3.6 *용골 폭 71cm,
두께 50cm *외판 폭 40~60cm,두께 12cm
尖底 宋元代 도자기 등
2만 3천 여점
2 완도선 12 길이 10, 너비 3.5, 깊이 1.7 *저판 폭 35cm,
두께 20cm *외판 폭 33cm, 두께 10cm
平底 高麗靑瓷 등
3만 여점
3 진도선
(중국)
13~14 길이 14.3, 너비 2.3, 깊이 0.8 *외판 두께 10~23cm 통나무배 中國銅錢 8점
4 달리도선 14 길이 10.5, 너비 2.7, 깊이 0.8 *저판 폭 37cm,
두께 20~25cm *외판 폭 43cm, 두께 19cm
平底 밧줄 등
5 십이동파도선 12 길이 7.0, 너비 2.5, 깊이 0.8 *저판 폭 73cm,
두께 33cm *외판 폭 29cm, 두께 12.5cm
平底 高麗靑瓷
8천1백여점 등
6 안좌선 14 길이 14.5, 너비 6.1, 깊이 0.9 *저판 폭 54cm,
두께 24cm *외판 폭 43cm, 두께 18cm
平底 高麗靑瓷
船上用品 등
7 대부도선 12~13 길이 6.62, 너비 1.4 *저판 폭 46cm,
두께 25cm *외판 폭 33cm, 두께 15~20cm
平底 高麗靑瓷 4점 등
※ 수중발굴 선박이름은 대체로 발굴지역 지명으로 불려지고 있음.

 

 

진도 벽파리 통나무배 발굴조사
진도 벽파리 통나무배 발굴조사 진도 통나무배가 처음 알려진 것은 1978년 월간지『예향』에 실린 삼별초관련 답사기행문에서이다.

이를 근거로 현장을 답사하고 조사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같은해 11월 조사원을 현지에 파견하여 매몰선의 실체를 확인 조사하였다.
조사결과, 노출된 유구의 형상으로 보아 선체일 가능성이 있으나, 시굴등을 통한 정확한 확인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됨에 따라 발굴조사를 1, 2차에 나누어 실시하였다.

통나무배 발굴 조사가 수행된 곳은 마을 남동쪽 벽파염전 북편 수로에 위치하며, 통나무배는 수로옆 도로의 축대와 엇비슷한 각도를 이루고 매몰되어 있었다.

선체는 약 30cm 높이로 8m정도가 동-서를 축으로 노출되어 있었으며 노출부위가 조수 간만의 차이 때문에 물에 잠김과 노출이 반복되어 목질이 심하게 변형되어 있는 상태였다. 통나무배의 구조물은 주변 농지와 염전 배수를 위한 수로 시설후 바닥층이 점차 얕아짐에 따라 매몰선의 선체 일부가 노출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배의 잔존 길이는 16.85m, 폭 2.34m, 깊이 0.70m, 선재두께 10 ~ 23cm로 조사되었다. 선체의 기본구조는 초대형재를 이용한 통나무배 형식이지만 본체와 선수, 선미를 분리 제작하여 결구한 통나무배이다. 선형은 선수가 좁고 선미가 넓은 (頭狹尾廣)형이며, 6개소의 격벽이 시설되어 있었다.

출토된 통나무배는 본체와 선미를 분리하고 안전한 인양과 운송을 위해 우레탄 폼으로 선체 내ㆍ외부를 포장하였다. 우레탄 폼 작업에 앞서 선체의 표면건조를 억제하기 위해 PEG 10% 수용액을 선체 전면에 도포하였으며, 포장된 선체는 특별히 제작한 대형 철제틀에 고정하고 크레인에 의해 인양하였다. 인양된 통나무배는 정밀조사 및 보존처리를 위해 목포해양유물보존처리소(현 국립해양유물전시관 별관)에 운송하여 대형 옥외 탈염장에 수침, 보관하였다.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도자기ㆍ토기ㆍ기와편 등은 모두 226편이지만 완형 상태의 것은 없다. 출토된 도자편은 선체 내부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대부분 교란이 심한 무른 갯펄층에서 수습되었다. 다만 분리된 선미연결재의 하부 즉, 선미재에 8개의 소원공이 시설되어 있으며, 그 안에 동전이 각 한닢씩 삽입되어 있었다. 이는 흔히 중국의 절강성 이남지역 즉, 복건성 연안 일대에서 흔히 행해지던 의미로 압승공(壓勝孔)이라고도 한다.

 

달리도배 발굴조사

달리도배 발굴조사 달리도 매몰선은 섬 북쪽에 위치한 속칭‘지픈골’앞 해변에서 낙지잡이를 하던 마을 주민들에 의해 개펄에 노출된 매몰선체 및 유물 일부가 발견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같은 마을 주민들에 의해 매몰선 주변에서 접시와 청동숟가락 등 다량의 도자기 파편이 수습 신고되어 이에 중요성을 인식한 목포시에서는 당시 문화재관리국과 협의하여 발굴조사를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조사는 우리 관에서 수행하게 되었다.

발굴된 선체를 방사선연대측정한 결과, 13~14세기 경으로 추정되었으며, ’84년 해저에서 발굴된 완도선과 더불어 옛 배의 발달 과정과 구조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었다. 선체의 잔존 규모는 길이 10.5m, 너비 2.72m 깊이 0.8m이며, 복원 규모는 길이 12m, 너비 3.6m, 깊이 1.6m로 추정되었다. 매몰선 주변에는 많은 도자편들이 흩어져 있었지만 선체내부에는 어떠한 적화물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달리도배 발굴조사 달리도배 발굴조사

 

 

 

신안 안좌도배 수중발굴

안좌선은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금산리 해변에서 2005년 2월 현지 주민의 신고에 의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은 문화재청의 현장조사 지시를 받아 현장조사(2005. 2~5)를 실시하여, 고려후기로 추정되는 선체 1척 확인과 주변해역에 대한 환경과 현황 등을 조사하였다. 현지조사 결과를 토대로 본 조사(2005.8 ~ 9)를 추진하게 되었고, 안좌선 선체와 주변유물 발굴을 실시, 선체내부의 출토유물을 중심으로 선상 생활상 파악에 조사의 중점을 두었다.

조사방법은 선체를 중심으로 동서방향 길이 15m, 폭 7m 범위로 조사구역을 설정하여 선체조사를 실시하고, 주변 갯벌지역에 대한 확인조사를 하였다.
선체는 바닷물에 잠김과 노출이 반복되는 갯벌에 매몰되어 있어, 노출부분은 심한 손상을 받고 있었다. 특히 선체 매몰해역이 목포에서 도서지역으로 가는 항로와 인접하여 선박이 지나갈 때마다 일어나는 파도에 의해 노출 선체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매몰선체는 3년 전부터 갯벌이 침식되면서부터 노출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몰선은 선수를 동북쪽으로, 선미는 서남 방향을 향하고 있으며 약 30°가량 우측으로 기울어져 매몰되어 있었다. 선체편들은 선수와 선미부가 더 많이 노출되어 있으며, 노출 상태로 우현 외판 7단과 선체 내부 중앙에 대형 멍에형가룡이 확인되었다. 선체 내부에서는 배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밧줄과 선미좌현 안쪽 가장자리에 5~10cm 두께의 원통목편들이 한 곳에서 조사되었다.


매몰선에서 남서방향으로 각각 약 15m, 30 떨어진 거리에 선체편으로 보이는 목재 편들이 노출되어 있었다. 일부 부재는 길고 날렵하게 가공되어져 있고, 길이 방향으로 6.8m 가량 노출되어있었고, 다른 부재는 폭 1.3m, 두께 14cm의 판재를 2~3편으로 조립하였으며, 판재 조립을 위해 장삭이 박혀있었다. 이들 편들은 선체의 구조물이 이탈되어 매몰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주변에 매몰선과 관련이 있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도기편들이 선재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긴급탐사를 마무리하였다.

본발굴에서는 선체 내부의 제토작업을 선수, 중앙, 선미의 3부분으로 나누어 먼저 1m 폭으로 선체바닥까지 물분무기와 소도구(삽, 호미 등)를 이용, 제토하여 내부 구조를 확인한 후 전체적으로 제토작업을 실시하면서 도자기 등 잔존유물을 수습하였다. 노출 선체는 실측 후 각 부재별로 번호를 부여한 다음 장삭이나 피삭을 빼내거나 절단 후 부재별로 해체하여 목재 받침틀에 고정시켜 안전하게 인양하였다.

인양 선체는 현장에 정박시킨 바지선에 임시 보관후에 운반선으로 옮겨, 우리 관 탈염장에 수침보관하였다. 인양된 선체는 3개의 저판재를 결구한 평저형이며, 우측으로 30°정도 기울어져 매몰된 관계로 우현 외판 7단과 좌현 외판 2단이 남아 있었다. 이외에 닻줄로 추정되는 밧줄과 주변에 산재한 선체편, 원통목, 돌판, 도자기 등을 인양하였고, 선체 후미에서 선체내부로 물이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는 용도의 방수재료도 수습, 채취하였다.

 

 

 

 

 
 

 

 

 

 

 

 - 보존과학 -

 

<유물의 보존처리> 

 

해양문화재연구소는 고선박을 비롯한 수중문화재와 육지의 습지 등에서 발굴한 다양한 목재유물을

보존처리하는 전문기관이다. 수중문화재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고선박이다.
고선박은 수백년 동안 수중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발굴 후 적절한 보존처리를 거쳐 원형대로 보존된다.

고선박 보존은 주로 '폴리에틸렌글리콜'이라는 약품을 침투시키는 처리법을 이용한다.
또한 과학적인 보존과 복원작업을 통해 배의 제작지와 제작방법, 구조, 재질 등을 밝혀낼 수 있다.

 

 

수침목재(水浸木材, Water logged wood)란?
수침목재
▲수침목재 보존처리

경화처리실
▲경화처리실

농도상승
▲ 농도상승

육상의 저습지 또는 담수나 해수 등 수중에 장기간 매장된 상태에서, 목재의 섬유질이 분해ㆍ유실되고 대신 과량의 수분이 이를 대신한 상태의 목재를 수침목재라 한다.
수침목재는 목재의 주요성분인 셀룰로오스 등은 이미 유실되고 붕괴된 목재의 조직을 물이 지탱해 주고 있는 상태이므로 비록 외관은 견고해 보이지만 일단 외기에 노출되어 목재가 함유하고 있는 수분이 증발하면 수축과 균열이 발생하여 원형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까지 파손, 변형하게 된다.

목재의 구성성분은 셀루로오스, 헤미셀루로오스, 리그닌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수침 목재의 경우에는 그 중 골격물질을 이루는 셀루로오스 성분이 현저하게 감소 된다. 목재성분이 분해, 유실된 만큼 수분의 양이 증가하고 목재의 강도는 증가한 수분의 함량에 반비례하여 1/10 이하까지 감소한다.
 
탈염 후 경화처리실로 옮기는 사진
▲ 탈염 후 경화처리실로 옮기는 사진
탈염 후 경화처리실로 옮기는 사진
▲ 탈염 후 경화처리실로 옮기는 사진
 
 

치수안정화 및 경화처리 방법

수침목재유물의 보존처리법은 고형화 물질에 의한 수분의 치환법(수지함침법), 유기용매류에 의한 수분의 치환법(유기용매 치환법), 동결건조에 의한 수분의 승화 제거법(동결건조법)등이 많이 사용되어지고 있다.

 

 

수지함침법

 

목재내의 수분을 수지로 바꾸어주는 방법이다. 물에 녹는 수지로서는 폴리에틸렌글리콜(PEG; Polyethylene Glycol)이 널리 사용되며 이외에 설탕도 사용된다.
알콜 등 휘발성이 높은 유기용매에 녹는 재료로는 담마르(Dammar) 수지, 세틸알콜(Cetyl Alcohol) 등이며, 이 경우에는 목재내의 수분을 유기용매로 바꾸어주는 전처리가 필요하다.

수지함침법의 예(PEG 처리)
▲ 수지함침법의 예(PEG 처리)

 

 

치수안정화 및 경화처리 방법
▲수침목재 보존처리

유기용매 치환법

 

분해도가 비교적 낮은 목재유물의 경우 목재내의 불안정한 수분을 휘발성이 높은 유기용매로 모두 바꾸어준 후 대기중에서 건조한다. 알콜(Alcohol), 자일렌(Xylene) 등 휘발성이 높은 용매는 물에 비해 현저히 표면장력이 적어서 수침목재의 수축과 변형을 최소화 할 수 있다.

 

동결건조법

 

동결건조법은 목재가 함유하고 있는 수분을 동결한 후 고진공하에서 기체 상태의 수분으로 동결한 후 고진공하에서 기체 상태의 수분으로 승화시켜서 제거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목재의 분해 정도나 수종에 따라 적당량의 수용성 수지(PEG)로의 전처리를 통하여 처리후 목재의 물성을 용이하게 설정할 수 있다. 또한 탈색, 표백 등의 처리를 하지 않아도 건조 후 목재는 신재와 같은 신선한 색을 되찾을 수 있으므로 목간 등 묵서나 채식(彩飾)이 있는 목재유물 보존처리에 효과적이다.
동결건조법의 예(처리 전)
▲ 동결건조법의 예(처리 전)
동결건조법의 예(처리 후)
▲ 동결건조법의 예(처리 후)

 

 

도자기 보존

도자기의 보존처리는 물리적인 힘에 의하여 깨지지 않은 것은 처리가 비교적 간단하게 이루어 진다. 하지만 바다 속에서 인양된 도자기는 탈염과 이물질 제거가 필수적이다. 이외의 도자기는 담수에서 깨끗이 씻은 다음 깨진 편들을 접합해 주어야 한다.

 

①복원전의 모습 - 보존처리 전 유물상태 조사, 사진촬영

②탈염 - 흐르는 물에 7~10일간 담구어 염분 제거

③패각류 제거 - 작은 대나무칼 등으로 패각류 제거

④산ㆍ중화처리 - 남아있는 패각류 및 오염물 제거

⑤탈색 - 균이나 미생물 등에 의해 생긴 색 제거

⑥세척 및 건조 - 초음파 세척 후 건조

⑦복원 - 부서진 도자기 파편의 접합과 복원, 완료

 

금속유물 보존

금속유물은 대부분 부식물이 두껍게 뒤덮이고 여러 점의 유물이 한덩어리로 겹쳐져 깨지거나 찌그러진 채 발견된다. 따라서 보존처리에 앞서 X선 촬영, 녹 분석 등을 통해 정확한 유물의 상태를 파악한 다음 유물의 처리를 한다.
금속유물의 보존은 유물의 상태에 따라서 방법을 달리하지만 일반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다.

 

①기록 - 보존처리 전 상태 기록

②예비조사 - 비파괴조사, 성분 분석 등

③녹 제거 - 표면의 흙, 이물질, 악성녹 제거, 안정된 상태녹은 보호

④탈염 - 금속 부식의 원인 제거

⑤건조 - 수분, 유기용매 건조

⑥경화 - 합성수지를 사용한 재질의 안정화

⑦접합/복원 - 파손, 손실부의 형태 보완

⑧보관 - 유물의 종류에 따라 항온, 항습 조절

 

 

 

<선박의 보존처리>

  

우리나라 침몰선 보존처리

 

신안선 보존처리
신안선은 14세기 초기 중국 원대의 배로 그 구조와 형태로 보아 동양 고대선의 귀중한 자료로 조선사 와 교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마미송, 광엽삼나무로 만들어진 거대한 선체의 구성재들이 매우 불규칙한 상태로 분해되어 있었으며 PEG 함침법으로 1981 ~ 1999년까지 보존처리 하였고, 2004년까지 복원을 완료하였다.
 
완도선 보존처리
완도선은 11세기경의 고려시대 우리나라 선박으로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등을 사용하였으며 매우 취약한 상태였다. 1992 ~ 1994년에 PEG 함침법으로 보존처리를 완료하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 복원되어 있다.
 
진도선ㆍ달리도선ㆍ십이동파도선의 보존처리

진도선은 1992년 전라남도 진도군에서 발굴 되었다.

조사결과 하나의 대형목재를 U자형으로 파낸 통나무배로서

녹나무와 마미송(중국소나무)로 제작되었으며,

달리도선은 1995년 목포시 달리도 해안에서 발굴인양 되었고

주로 소나무와 상수리나무로 만들어졌다. 이 두 선박은 현재 PEG 함침법으로 경화 처리 중이다.

십이동파도선은 2004년에 발굴인양된 고려시대 배로 탈염처리 중이다.

 

 

 

 

 

 

세계 침몰선 보존처리
선박이름 보존처리 방법
그리스상선 키프러스에서 발견된 B.C 4세기경의 상선으로 왁스성분을 목제에 스며들게 하여 보존처리 후 복원하였고, 전시실에는 공기조절 장치를 하여 변형을 방지
바이킹선 1950 ~ 1960년대에 덴마크 로스킬데 해협에서 바이킹선 5척을 인양하여 PEG함침법으로 보존처리
천주만선 중국 송대의 선박으로 신안선과 함께 중국 선박구조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방부처리와 함게 탈수처리에 의한 자연건조처리
브레멘코그 1962년 독일 브레멘 항 건너편 서쪽 강에서 준설작업을 하던 중 발견 됨.
1379 ~ 1380년 사이에 구주참나무재로 만들어진 목조선박으로
PEG함침법으로 보존처리
바사호 바사호는 1628년 스웨덴 스톡홀름항에서 처녀항해 중 침몰 됨.
전장 43.3m, 폭 11.5m, 선미높이 18m의 스웨덴의 군함으로 자동분무기를 활용하여 PEG 도포처리.
메리로스선 1970년대 인양한 영국 루터 왕조시대의 전함으로 1986년부터 PEG함침법으로 보존처리.

 

 

 

 

 

 

 

 - 해양문화 -

 

<전통한선과 어로 민속> 

 
전통한선조사
전통한선조사

우리나라는 바다에 둘러싸인 국토환경과 강을 이용한 수로 등이 발달된 지리적 환경으로 인해 고대부터 해양문화가 발달하였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의 영향을 받아 우리 전통배는 다른 나라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우리 배 한선(韓船)의 역사는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오고 있으며, 일제강점기에 일본식 개량 목선(木船)을 강요당하면서 전통 배 제작은 급속히 감소하였다.

그후 근대화 과정에서 동력선이 등장함에 따라 수요가 감소하자 목선조선소들은 하나씩 사라졌으며, 일부는 FRP, 철제 선박 조선소로 변화되어 갔다. 이와 함께 20세기에 들어서, 지방자치제의 발달로 지역정화사업들이 곳곳에서 활발히 진행되어, 이제는 목선을 제작하는 조선소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우리 전시관은 이렇게 사라져가는 우리 전통 한선 조사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1994년 개관이전 보존처리소시기부터 전통배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전통 한선조사는 한선의 형태와 구조, 조선기술, 조선장인, 용어, 어로관행, 어로민속 등을 종합적으로 실시하였다. 주로 선박 조선장인 또는 제작자, 실제 승선한 경험이 있는 어부, 주민 등과 면담을 통해서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때에 따라 직접 고기잡이에 동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사는 수중발굴 고선박 연구와 복원, 그리고 전통어로민속과 어촌문화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전통한선조사 현황
 
조사기간 내용
2008. 2~12
  • 조 사  명 : 우이도 전통한선과 어로민속
  • 조사지역 : 전남 신안군 도초면 우이도리
  • 조사내용 : 전통어선, 어로관행, 민속문화, 사회생활, 생업활동,
    어로도구조사 및 수집

우이도 본섬은 10.7㎢(밭 0.81㎢, 임야 7.05㎢, 기타 2.84㎢)이며 해안선은 21㎞이다.

동소우이도는 0.45㎢(밭 0.12㎢, 임야 0.20㎢, 기타 0.13㎢)이며,

서소우이도는 0.27㎢(밭 0.08㎢, 임야 0.14㎢, 기타 0.05㎢)이다.

목포에서 서남쪽 51㎞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멍섬, 솔섬, 꽃섬, 대섬, 어낙도 등 27개 군도로

이루어졌다. 인구는 228명(남자 121명, 여자 107명)이며, 총 세대수는 117세대이다.

행정구역상 1구, 2구 3구로 나누어진다.

1구는 진리, 예리, 선창구미, 대초리를 포함하나 현재 대초리는 폐촌이 되고,

예리 또한 1가구만 거주하고 있다.

2구는 돈목리, 성촌리 구역이며, 3구는 동리와 서리 구역이다.


우이도는 전통적으로 어업보다는 중간거래상 성격의 상고선 운영이 활발했다.

인근 흑산도나 가거도, 태도 해역에서 어선으로부터 물고기를 수집하여

목포나 영산포 등지로 내다 팔았다.

주로 조기를 사다 마을의 저장고(‘조기간장’)에 소금에 절여 보관하였다가

추석이나 설 때 내다 팔았다. 현재 조기간장이 남아있으며, 배를 댔던 전통 선창이 잘 남아있다.

 

선창은 돌로 쌓아 만든 것인데 1745년 3월에 중건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도 전통 선창 안쪽으로 배를 대고 있으며, 선창 안에는 배를 묶는 기둥인 계선주가 서있다.

 

마을의 북서쪽에는 바람을 막아주고, 허한 곳을 보호해주는 우실(‘성재담’)이 아직도 남아있고,

남서쪽에는 상당과 하당이 한곳에 있는 독특한 형태의 당집이 잘 남아 있다.

현재는 당제를 지내지 않고 우실도 훼손된 채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
마을 주민 문채옥씨의 5대 조상인 문순득이 1801년 겨울에 흑산도로 홍어장사를 하기 위해

홍어를 사러 갔다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4년여를 거쳐 우이도로 돌아온 이야기가

<유암총서(柳庵叢書)> 내에 기록으로 전해온다.


현재는 새우잡이, 멸치잡이, 꽃게잡이가 주 어업이고, 산에 염소를 방목해 수입을 올리고 있다.

목포와 우이도를 매일 ‘섬사랑 6호’가 1회 왕복하고 있으며,

여름철에는 피서객들이 몰려 돈목리는 민박업이 성하다.

돈목리와 성촌에는 모래언덕과 해수욕장이 발달하여 여름에는 많은 사람이 찾는다. 


 

2007. 5~9
  • 조 사  명 : 만재도 전통한선과 어로민속
  • 조사지역 : 전남 신안군 흑산면 만재도리
  • 조사내용 :전통어선, 어로관행, 민속문화, 사회생활, 생업활동,
    어로도구조사 및 수집

만재도는 면적이 0.6㎢, 해안선 길이는 5.5㎞의 작은 섬이다.

이 섬은 목포에서 105㎞ 떨어져 있으며, 뱃길로는 약 5시간 걸리는 낙도이다.
인구는 2006년 말 109명(남자 54명, 여자 55명)으로 47가구가 살고 있다.

대부분 어업과 낚시 민박에 종사하며, 젊은 여자들은 물질을 한다.

주 소득 상품은 우럭, 농어, 조피볼락, 전복, 미역, 다시마 등이다.

마을어장은 100ha, 어선은 현재 31척을 보유하고 있다.

경지면적은 59ha이나 논은 없고, 밭도 이제는 거의 곡식을 재배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가라지 잡이가 주 생업이었으며,

마을 해변에 1960년대까지 가라지파시가 서기도 했다.

해녀들이 물질을 하여 전복, 홍합 등을 따고, 마을 공동작업으로 미역, 김 등 해조류를 채취해

공동분배 한다. 전통배의 흔적이 남아있는 목선은 폭이 넓으며,

태풍 시 육지로 들어올리기 좋게 뱃전 난간이 외부로 돌출되어 있다.
해충 퇴치 의식인 ‘진대기끗자’ 의례가 아직도 행해지고 있으며,

겨울이면 마을 주민 3분의 2 정도가 목포나 도회지로 나가 섬을 비우고

다음해 2~3월에 다시 돌아오는 계절적 이주 현상을 보인다.


마을 조직으로는 마을총회와 이장, 부녀회, 노인회, 어촌계 등이 존재하며 마을을 이끌고 있다.

섬 주변에 좋은 바다 낚시터가 형성되어 일년에 약 1,500명 정도 낚시꾼이 다녀가

민박으로 주민 소득을 올리고 있다. 

  

2003. 3
  • 조 사  명 : 섬진강 일대 전통 한선조사
  • 조사지역 : 섬진강 및 광양만 일대
  • 조사내용 : 전통 선박 및 포구 조사

사라져 가는 해양전통문화 조사 사업의 일환으로

바다와 강, 포구 그리고 지역별 전통선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배짓기 장인을 발굴하여 전통선 건조방식과 구조 등을 기록하고자

1993년부터 어로 및 전통 배에 대해 조사해 왔으며,

탐문조사를 통하여 사라지고 변형되어가는 전통선을 중심으로 조사되고 있다.

이번 조사는 광양만 일대와 섬진강에서 활동하건 전통선과 섬진강 나루들을 조사하였다.

 

2002. 10
  • 조 사  명 : 울릉도 전통한선 및 어촌민속조사
  • 조사지역 : 경북 울릉군 울릉도
  • 조사내용 : 어로관행, 어로도구조사 및 수집, 구비전승

울릉도는 동해 바다 한 가운데 화산폭발로 인해 우뚝 솟은 섬으로,

동해에서는 유일하게 사람이 생업에 종사하며 사는 섬이다.

해발 984rn의 성인봉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 내린 산 능선으로 인해 지형이 험준하고

경사가 심해 나리분지를 제외하면 평지가 거의 없다.
경북 포항에서 217km이며, 후포에서 159km, 강원도 묵호에서 161km 떨어진 거리에 있다.
가장 가까운 육지는 강원도 삼척시 임원항으로 137km 거리를 두고 있다.

울릉도에는 현포 고분군과 출토품으로 보아 1세기경부터 사람이 산 흔적이 있으며

<삼국사기>에  '우산국(于山國)'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 지증왕 13년(439) 이사부의 토벌로 신라에 항복하고 조공을 헌납했다.

그 후 '우릉도'(于陵島), '우릉도'(羽陵島), '무릉도'(武陵島) 등으로 불렀으며,

1438년 도민귀환령을 내려 전 도민을 육지로 귀환하게 하여 빈섬이 되었다. 

오랜 세월 무인도로 있다가 1882년 개척령 반포에 따라 다시 주민이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그 해 7월 16가구 54명의 농민들을 4척의 관선을 동원하여 이주시켰다.

1900년 강원도 울도군(鬱島郡)으로 편제되었다가, 1907년 경상남도 울릉군으로,

1914년에 경상북도 관할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었다.
1915년 울릉도로 개편하고 울릉도청(鬱陵島聽)을 두었다가

1947년 다시 울릉군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섬의 면적은 약 73km로 동서직경이 10km, 남북직경이 9.5km이며 섬 둘레는 56.8km이다.

임야가 76%이며, 농경지 18%, 기타 6%로 주거지의 면적이 적다.

2002년 현재 3,776세대에 9,95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2001. 10
  • 조 사  명 : 태도 전통한산과 어촌민속조사
  • 조사지역 : 전남 신안군 흑산면 태도 일대
  • 조사내용 : 어로관행, 어로도구(조사 및 80여점 수집), 구비전승, 선사 및 역사유적 조사

태도는 흑산도와 남쪽 가거도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상태도ㆍ중태도ㆍ하태도 등 3개의 섬을 통칭하는 이름인데,

주변의 작은 섬(무인도) 12개를 모두 합해 '태도군도'라 부른다.
제일 위에 있는 섬이 상태도, 가운데 있는 섬이 중태도, 아래 있는 섬이 하태도이다.

 

목포로부터 140.8km, 흑산도로부터 33.3km거리를 두고 있으며

경도는 동경 125" 3', 위도 북위 34" 3'에 속한다.

태도는 뭍에서 멀고 바람이 심해 사람의 발길이 드물었다.

그래서 비교적 섬의 자연환경이 훼손되지 않고 잘 남아 있다.

물이 깨끗한 데다가 수심이 깊고 남해와 서해의 빠른 물살이 교차하기 때문에 어족이 풍부하다.

행정구역상 전남 신안군 흑산면에 속하고 태도 출장소가 설치되어 있다.

법정리는 1개이고, 3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면적은 4.74km에 해안선의 길이는 26.8km이다.
인구현황을 보면, 2001년 현재 99가구에 256명(남 131명, 여 12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이 중 어가 75가구, 농가 18가구, 기타가 6가구이다 

태도에는 하태도 패총 3기와 중태도 패총 추정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산 흔적을 살필 수 있다.

역사시대에는 주로 나주목에 속했었고,

고려 말 조선 초 왜구 침략에 의한 주민의 이주, 임진왜란 때의 공도정책(空島政策) 등으로

현재의 주민이 들어간 것은 17세기 중반 무렵이다.

일제시대에는 무안군에 속했고 1969년 1월 1일 신안군 창설로 신안군에 속하게 되었다.

 

섬이름의 유래는 돌김인 석태(石苔)가 많이 나는 섬이라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돌김뿐만 아니라 태도에는 미역 · 가사리 · 톳 등 풍부한 해조류와 전복 · 소라 · 홍합 · 문어 등 어패류가 서식하고 있다.

 

2001. 2
  • 조 사  명 : 추자도 전통한선 및 어로민속조사
  • 조사지역 : 제주도 북제주군 추자도 일대
  • 조사내용 : 전통한선, 어로관행, 어로도구, 구비전승 등

추자도는 제주에서 북쪽으로 45km, 육지부 완도에서 정남쪽으로 70km 지점에 있는 섬이다.

목포로부터는 98km 떨어져 있다.
이 지역은 상추자, 하추자, 횡간도, 추포도 등 4개의 유인도와 38개 무인등 총

42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친토)로 제주도의 다도해라 불리울만하다.

이 섬들은 황해로 북상하는 황해난류의 중심해역이며

제주도의 서부해역을 돌아오는 난류성 어족의 길목이어서

어족이 풍부하고 다양한 어장을 형성하고 있다.

추자도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산 흔적이 나타난다.

대서리의 고인돌군과 오지박의 소규모 패총 등을 감안하면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생활한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시대 들어와서도 육지와 제주(탐라)를 왕래하는 중간 지점에 위치한

지리적인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왕래하고 살았다.

특히 이 섬은 육지에서 제주를 오가다 풍랑을 만나면 피해 가는 피항지 역할을 했다.

이런 상황들이 고려되어 고려시대 1273년에는 순풍을 기다린다라는 뜻의 '후풍도(侯風島)'라는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조선시대 김상헌이 어사의 명을 받들어 제주를 순행하고 돌아오면서 적은 기행문인

<남사록(1602년)>에 추자도 기록이 나온다.

"추자도는 주(州)서북 대양중에 있는데 둘레가 30리요, 두 봉우리가 높이 솟아서

수목이 우거지고 샘이 많으며 안에는 배를 감 출 수 있다.

무릇 바다를 건너는 자들은 다 여기에서 바람을 기다리고 옛 역참터와 무덤이 많다.
옛날에는 인가가 있었으나 고려 충정왕 2년 경인(庚寅)에 왜적이 자주 침범하였기에

도근천리로 이주하였다. 대저 제주도 가는자는 나주를 떠나면 영산포를 따라

무안의 대굴포, 영암의 화무지와도, 해남의 어란포를 지나며,

해남을 떠나면 삼촌포 울도를 거쳐 강진 군영포를 따라 영슬도, 삼내도를 지나는데

편풍을 만나면 3주에야 이 섬에 도달하게 된다" 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2000. 9
  • 조 사  명 : 진도 관매도 전통한선 및 어로민속조사
  • 조사지역 : 전남 진도군 조도면 관매도
  • 조사내용 : 관매도 전통배, 어로관행, 어로도구, 어로신앙, 구비전승

관매도는 전남 진도군 조도 면에 속한 많은 섬 중 하나이다. 
조도면은 면소재지가 있는 하조도를 비롯하여 155여 개의 크고 작은 조도군도(鳥道群島)의

많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도(鳥道)라는 이름은 섬들이 마치 새떼가 무리 지어 날아가는 모습이라 붙여진 것이다.

이 섬은 진도군 임회면 팽목리에서 남쪽으로 약 15km 거리에 있고

면소재지인 하조도에 서 남쪽으로 2.3km 떨어져 있으 며,

동경 126" 4', 북위 134" 13‘에 위치한다. 면적은 5.73km, 총 해안선은 17km이며

연평균 기온은 약 14'C , 연평균 강수량은 약 1,000mm이다.

인구는 2000년 6월 현재 217가구에 414명(남 187명, 여 227명)이 살고 있다.

이 중 1인가구가 62가구를 차지한다. 그러나 실제 거주하는 사람은 366명으로

그 인구 구성은 50대 이상의 장 · 노년 인구가 229명으로 약 63%를 차지하고 있다.

해안은 주로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고

특히 남쪽 해안에는 낭떠러지와 파도, 조류 등에 의해 생긴 동굴이 발달되어 있으며

북서쪽 해안은 모래밭이 펼쳐져 천연 해수욕장이 형성되어 있다.

인접한 각흘도, 방에섬, 목섬은 썰물 때는 관매도와 연결된다. 이러한 여건으로

해안경관이 뛰어나고 주변 조도군도의 아름다운 섬를과 어울려 천혜의 절경을 이루고 있다.

조도지역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주요 산은 현지에서 '돈대봉'이라 부르는 관매산(219m)이 최고봉으로 섬 남쪽에 자리하고

그 외 100m내의 작은 봉우리가 몇 개 있다. 마을은 '돈대봉' 북쪽면에 집중 자리잡고 있으며

관매해수욕장을 끼고 있는 관매리가 중심마을이다.

관매리 왼쪽으로는 관호리, 북서쪽으로는 장산편 마을이 있다.

관매도는 3개의 자연마을이 있는 비교적 작은 섬이다.

 

1999. 10
  • 조 사  명 : 영산강 일대의 어로민속조사
  • 조사지역 : 영산강 하구에서부터 영산포 일대
  • 조사내용 : 영산강 유역의 옛 어로관행과 강배, 나루터, 민속신앙 등 조사

영산강은 전라남도 담양군 용면 용추봉(560m)에서 발원하여

광주광역시, 나주시, 함평군, 영암군, 등 광주와 전남의 2시 6군을 흘러

목포에서 바다와 합류하는 강이다. 길이는 136km이며 총 유로 연장은 2,740km나 된다.

유역면적은 광주 ·전남 땅의 30% 정도에 해당될 정도로 넓으며

농경과 각종 어로활동으로 예부터 많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된 강이다.

유역 이곳저곳에는 옛 사람들의 흔적이 수 없이 널려 있다. 

강의 중상류 지역인 광주 첨단과학기지내 산월동과 치평동유적에서

주먹도끼와 찍개 등 후기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되었고

신석기시대 유물인 돌도끼, 끌, 낫, 돌칼, 삼각형석도, 방추차 등 다양한 용도의 생활유물이

강 전역에서 출토된다.

청동기시대 유적인 고인돌은 4,200여기(전남 일대 19,000여기)가 영산강 유역에 집중되어

당시의 인구밀집도와 문화적인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원삼국ㆍ삼국시대의 토광묘, 옹관묘, 석실분 등 많은 고분군이 강유역 여기저기에 분포되어

고대문화의 융성함을 알 수 있다.

 

왕건은 영산강 수로를 통한 후백제의 공략으로 통일국가의 기반을 닦았고,

고려시대부터는 조창이 설치되어 영산강 곡창지역의 농산물이 실려 나가는 조운로로서

번성하였다.

영산강은 고대, 중세, 근대를 통해 사람들에게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어패류를 제공해 주어

삶의 터전으로 만들어 주었고, 강줄기를 타고 많은 물자와 사람, 문화가 드나들면서

내륙과 바다를 잇는 문화 전파의 한 경호로서 전남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바탕이 된 강이다.

이번 조사는 전남의 역사와 문화의 한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영산강문화에 대해

그 흔적을 조사하고 기록하였으며 이 내용들은 제보자의 구술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주 조사지역은 영산포 일대, 나주시 동강면 일대, 나주시 다시면 구진포 일대,

무안군 몽탄면 일대, 무안군 일로읍 청호리 일대 등이다.

 

1999. 3
  • 조 사  명 : 강원도 정동진 떼배조사
  • 조사지역 : 강원도 강릉시 정동진 일대
  • 조사내용 : 강원도 정동진 일대에서 사용되고 있는 전통 떼배의 구조와
    어로관행 조사, 도면작성, 사진촬영 등

동해안 뗏목배는 강릉시 정동진 일대에서 미역, 다시마 등 해조류를 채취하고

간단한 어로활동에 활용되는 배이다.

'뗏목배'란 나무, 대나무, 갈대 따위를 엮어 만든 수상 운송수단으로서

주로 가까운 바다에서 해초를 채취하거나 낚시 및 간단한 어로 도구를 이용 고기를 잡는데

사용되는 원시적인 형태의 배를 말한다.

 

우리나라의 뗏목배는 모든 연안지역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특히 동해안지역과 남해안 그리고 제주도 등지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60년대 이후 어선의 대형화, 개량화의 과정을 통해 대부분이 소멸되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뗏목배는 제주도 지방의 떼배와 동해안지역의 떼배가 유일하다. 

정동진 일대에서 사용되고 있는 뗏목배는 현지에서 '토막배', '뗏목배', '뗏마' 등으로 부르며

제주도 떼배와 비교하면 크기가 작은 것이 특징이다.

길이가 보통 3~4m 안팎이고 뗏목 밑판의 원목 수는 7~8본이다.

참고로 제주도 떼배는 길이 5m 안팎이고 밑판 원목 수가 9~12본 정도이다.

 

동해안 뗏목배는 강원도 정동진을 중심으로 경상북도 일부 지역에서도 사용되고 있으며,

그 분포 범위는 해안가의 지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즉 해안가의 지형이 암석으로 이루어진 곳에서 주로 토막배가 이용되는데

이는 바위에 자생하는 해양식물의 채취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바위에 붙은 미역, 다시마를 채취 하는데는 조그만 뗏목 보다 편리 한 배가 없다.

 

1998. 6
  • 조 사  명 : 통영 통구민배 조사
  • 조사지역 : 경남 통영시 광도면 안정리 예포 3구 마을
  • 조사내용 : 배의 구조, 어로관행, 어로신앙 등 통영 지역에서 내려오는 전통
    통구민배의 구조와 어로관행 조사, 도면작성, 사진촬영 등

'통구민배'는 경상남도 남해안 지역에서 사용되어 온 우리 전통 선박이다.

근현대에 들어 많은 변화와 개량이 이루어졌지만

현재까지도 통영 일부 지역에서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주민들의 구전에 의하면 아주 오래 전에는 통나무 속을 파내서 만들었기 때문에

'통선'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다른 이름으로는 '통구마니', '통구맹이', '통구민'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배는 이물(船首), 멍에를 제외하고는 현대 목선의 형태로 변형되어

예전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전통배 연구자인 이원식씨는 1990년에 쓴 『한국의 배』 97쪽에서 통구민배를

"통영 지방의 독특한 바닷배이다. 이물비우의 폭을 비교적 좁게 만들어 물의 저항을 줄이려고 노력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옛날의 만듦새가 남아 있는 것은 이물비우와 멍에 그리고 돛과 노 뿐이고 나머지는 개량되거나 개조되었다.

고물칸에는 뜸으로 지붕을 덮어 햇빛과 비를 피하고 있다. 지금은 고깃배로 쓰이고 있다 "

라고 그 변화를 소개하고 있다.

 

이렇듯 통구민배는 많은 변형을 거쳐 현재의 개량선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지금은 동력을 장치해 돛과 노도 사라져 버렸고

오직 이물과 멍에 부분만이 옛 모습을 지니고 있다.

가장 큰 변형은 일제시대 서양식 개량 목선의 조선기술이 도입되면서 이루어졌다.

현재 통구민배의 결구방식과 못의 사용 방법이 현대의 목선과 동일한데

이는 일제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 한번의 큰 변화는 사라호 태풍을 전후한 시기이다.

그 전에는 통영 일대에 많은 통구민배가 있었으나 태풍에 의해 거의 파손되었다.

1960년대 새로 건조되는 배는 모두 동력장치를 부착해 배의 외형이 커지게 되었고

특히 동력장치 장소인 고물(船尾)의 경우 보다 넓어지게 되었다.

현지 조사를 통해 조사한 통구민배는 길이가 8.5m, 너비 2.5m, 깊이가 1.13m이다.

현재의 통구민배들은 대체로 이 정도 크기이며 전통적인 통구민배는 이보다 작았다고 한다.

 

1998. 4
  • 조 사  명 : 강화도 곳배조사
  • 조사지역 :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어류마을
  • 조사내용 : 강화도 지역에서 내려오는 전통 곳배의 구조와 어로관행조사,
    도면작성, 사진촬영 등

'곳배'란 곳(돌망태)에 돌을 넣어 배밑에 매달아 배가 떠내려가지 않게 하고

뱃머리, 즉 이물을 바닷물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돌려

그 자리에서 밀물, 썰물과 함께 밀려 들어 오는 고기나 새우 등을 어망에 가두어 넣는

어로활동을 하는 어선을 말한다.

이 배가 주로 이용된 곳은 서해안과 접해 있는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일대이다.

이 지역에서 곳배에 의한 어로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이유는 조수간만의 차이가 많아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어로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배에 대한 명칭도 지방마다 차이가 있는데

경기도에서는 '곳배', 충청도에서는 '실치잡이배', 전라도에서 는 '멍텅구리배'로 불린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1995년 이전까지 영광 낙월도 해역에서 새우잡이에 사용되어 왔으나

정부의 어업구조 조정 계획에 의해 모두 폐선되었고 그 중 1척이 우리관에 기증 전시되고 있다.

충청도 지방의 곳배는 1척이 남아 있는데 현재 인천시립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충남 서산지역에서 실치잡이에 사용된 것으로

그 형태는 전라도, 경기도 지역의 곳배와 동일하다.

경기도 지역의 곳배는 강화도에 그 전통이 남아 있다.
강화도 곳배는 원래 돛배로서

'시선(柴船)'이라는 명칭으로 불린 황해도ㆍ경기도 지역의 상선 및 화물선을 모태로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한강 하류인 강화도를 근거지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 마포까지 오르 내리던 배로,

땔나무나 수산물을 운반하였다고 한다.

구한말 개량선과 기선의 등장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며,

해방전까지 강화도를 중심으로 서해 도서지역에 수십 척이 있었으나

해방 후 대부분 새우 잡이에 사용할 수 있도록 무동력 어선으로 개조하였다고 한다.

 

곳배에 대한 선행연구를 보면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바닷배가 개조되어 고깃배로 쓰이고 있다.

이 배는 강화도 어류정 앞바다에서 새우잡이를 하고 있는 '곳배'이다.

배의 길이는 8발, 너비 3발, 높이는 1발 반 정도가 된다.

삼판은 7폭을 턱 따서 널판대기를 겹쳐 만들었고 피쇠를 박았다. 

배밑, 이물, 고물, 뱃전의 만듬새는 전통적인 한선과 같고 배밑은 평평하다라고 하고 있다.

 

강화도 곳배는 전라도ㆍ충청도지방의 곳배와 그 선형이 동일하다.

곳배는 이물과 고물부분이 유선형을 취하지 않고 칼로 직각으로 잘라 놓은 듯한 선형으로

강화도에서는 일명 '쪼각배'로 불리우고 있다.

1998년 현재 조사지역에 남아 있는 곳배는 2척이다.

강화도를 중심으로 인근 섬 사이 좁은 수로에서 빠른 조류의 흐름을 이용하여 새우를 잡았다.

곳배는 닻 역할을 하는 '고'를 이용해 배를 정박시키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며

'곳젓배'라고도 부른다. 1990년 경기도 지역에 10척의 곳배가 남아 있었으나

1995년경 정부의 어업구조조정 일환으로 모두 폐선되었다.

이번 조사에서 확인한 1척의 곳배는 보상 문제 때문에 아직 남아 있던 배이다.

이 배는 전남 낙월도의 멍텅구리배 보다는 작은 규모이며 형태도 약간 옛 형태를 띤다.

 

1996. 12
  • 조 사  명 : 제주 떼배 원형복원 자료조사
  • 조사지역 : 제주도 남원읍 위미리
  • 조사내용 : 떼배 원형복원을 위해 남원읍 위미리지역 중점조사

'떼배'는 제주도 지방에 남아 있는 원시형태의 뗏목배이다.

떼배의 제작과정과 구조 그리고 용어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잔존하는 원시형태의 뗏목배를 살펴보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한선(우리나라 배)의 원시적인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제주도 떼배는

현재 남아 있는 수량이 많지 않고 배를 건조할 수 있는 기능인이 드물어

예비조사가 미흡한 상태에서 현지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지 문화기관 및 연구자들의 도움을 받아 떼배를 소유하고 있거나

배를 만든 경험이 있는 제보자를 소개받아 제작과정과 용어 등을 채록할 수 있었다.
떼배를 한 척 만들려면 통나무가 7개에서 13개정도 사용된다.

통나무의 직경은 약 25~40Cm 안밖인데 제보자들의 증언에 따라 다소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제주도에서 자생하는 나무 중 떼배의 재료로 사용되는 나무는

한라산에서 자라는 구상나무가 제일 좋은데

일제강점기 말 벌목을 금지한 이후로는 삼나무를 이용했다.

근래에는 제주도에서 나무를 구하기 어려워 일본산 삼나무를 구입하여 만들기도 하였다.

 

떼배 제작시 구상나무를 제일로 여기는 것은

무게가 가볍고 단단하며 물에 강하고 부력이 좋아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이다.

제보자들에 의하면 50~60년 전만 하여도 관청에 허가를 얻어 겨울철이나 봄에 한라산에 올라

구상나무를 벌목하였다고 한다. 벌목된 구상나무는 껍질을 벗기지 않은 상태로 그 자리에서 I~3개월간 건조시킨 다음 눈의 미끄러움을 이용하거나, 나무에 구멍을 파 끈으로 묶은 후

인력으로 산 밑까지 운반한 뒤 달구지 또는 바닷길을 이용해 마을 포구까지 옮긴다.

마을로 옮겨진 구상나무는 다시 수개월간의 건조과정을 거친 후 떼배 제작에 사용된다.
  

제주도 떼배는 우리 나라 해안의 지형조건과 조수간만의 차이를 이용할 수 있는

평저의 뗏목배로서 구조적인 면에 있어 매우 원시적이지만

우리 나라 전통선박의 밑판 구조와 동일한 생김새와 만듬새를 가지고 있다.

 

1996. 4
1997. 4
  • 조 사  명 : 소흑산도 가거도배 조사
  • 조사지역 : 전남 신안군 소흑산도(가거도)
  • 조사내용 : 가거도배 구조 및 어로방법, 민속조사

가거도(可居島)는 행정구역상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하조도리에 속한다.

경도 125"7', 북위 34"4' 에 위치하고 있다.

가거도라는 지명의 유래는 기암괴석과 후박나무 숲으로 섬 전체가 이루어져 있고

사람이 가히 살만한 곳이라 하여 가거도라 하였다.

가거도는 조선시대 공첩(公牒)에 명시된 명칭으로는

'嘉佳島(가가도)', '佳可島(가가도)', '可佳島(가가도)'였다.

1847년에 가거도로 명칭이 바뀌어 불리어 왔으며,

1864년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에도 가거도로 표시되어 있다.

현재의 소흑산도라는 명칭은 일제시기에 불리기 시작했으며

해도상에 표시하였던 것이 이어져 온 것이다. 그

리고 신유년(1801)에 고수정에게 내린 나주목사의 첩지에 보면 '嘉佳島'라 하였고

그 후의 호적단자에는 '可居島'라 기록되어 있다.

문화유적 및 문화재로는 가거도 패총이 지방기념물 제130호로,

멸치잡이노래가 지방유형문화재 제22호로, 구굴도 해조류 번식지가 천연기념물 제341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기암괴석이 많으며 주변 해안에 바다 낚시터가 형성되어

돔, 농어 등이 잘 잡혀서 해마다 많은 낚시꾼들이 다녀간다.

'가거도배'는 목선이라는 이름으로 현지에서 불리어 왔다.

우리 나라 최서남단에 위치하여 육지와 왕래가 쉽지 않은 절해의 섬에서 전답도 거의 없이

바다에 생업의 대부분을 의지하였다. 따라서 가거도에서는 배가 가장 귀중한 재산으로

가족 및 친지가 함께 배를 중심으로 한 생업의 체계를 이루었다.

 

섬사람들 생활의 대부분이 바다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배와 관련된 그들만의 독특한 생활을 영유하면서

어업의 어려움을 달래고 만선의 기쁨 등을 노래한 멸치잡이 노래,

거센 파도와 싸우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배를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 '배발올리기' 등의

배와 관련된 관행이 발전하였다. 또한 연근해를 왕래하는 화물선의 역할을 담당하여

섬사람들의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가거도의 어로관행을 살펴보면 섬 전체가 바위와 산으로 이루어져 논농사는 불가능하고

약간의 밭 경작만 가능하다.

그러나 주변 해역에 수산자원이 풍부해 바다에 의존하는 어로가 주생업 수단이다.

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멸치잡이와 김, 미역, 홍합 등 해조류 채취를 주생업으로 살아왔다.

그 중에서 멸치잡이는 '가거도배'라는 이 지역 특유한 배를 만들어 분기초망 어법에 의해

이루어졌다. 어로방법은 밤에 배를 타고 인근 바다로 나가 횃불을 켜 몰려드는 멸치떼를

그물을 이용해서 떠올린다.
작업 인원은 12명이 한팀을 이루는데, 주로 친척이나 친한 사람들끼리 구성되었다.

때에 따라서는 13~17명까지 승선하는 경우도 있었다.

작업 인원의 확보 차원에서 딸을 낳으면 건장한 사람을 사윗감으로 삼기 위해

12~13세가 되면 양가가 약혼의 형식을 갖추어서 혼인을 약속하는 풍습도 있었다.
 

멸치잡이는 양력 5월부터 9월까지 행해지며 초들물과 초저녘 7~8시경에 멸치가 잘 잡힌다.

특히 썰물이 되었다가 밀물이 들어오는 시기에 잘 잡힌다.

초저녁에 어황이 좋으면 10시경에 돌아오지만 새벽까지 멸치를 잡을 때도 있다.

선원들의 역할은 각자 분담하였는데 횃대 잽이는 횃불을 들고 멸치떼를 유인하는데

이는 주로 선주가 맡는다.

몽둥이 잽이는 멸치 떼를 발견시 '에요-에요-'소리를 지르면서 몽둥이로 뱃전을 두드려

멸치를 갯가로 유인하는 역할을 한다. 앞잡이는 2명으로 배를 어느 지점으로 이동을 결정하고

살대(긴장대)로 물살을 치면서 배가 갯가로 밀리지 않게 한다.

그물 잽이는 3~4명으로 뒤쪽 장부대 1명, 앞쪽에 2~3명이 그물을 잡고 작업하는데

몽둥이 잽이도 합세하여 그물을 잡는다.

밑노꾼 6명, 젓노꾼 2명으로 구성된 노꾼들은 노를 젓고 그물작업을 돕는다.

 

뱃일을 하고 돌아오거나 풍랑이 심해 급히 조업을 중단하고 돌아오면,

선원들과 마을 사람들이 배올리기에 동원된다.

젊고 힘이 있는 사람 5~6명이 배 밑을 들어올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배에 걸어 놓은 줄을 끌거나 굄목을 깔아 배가 미끄러지도록 한다.

지휘자는 뱃머리 위 또는 배 밖에 나와서 배발올리기 소리를 한다.

그리고 멸치잡이때 부르는 멸치잡이 노래는 노동의 고단함을 이기는 노래로 불리어 왔다.

 

1995. 2
1995. 5
1995. 9
  • 조 사  명 : 영광 멍텅구리배 조사
  • 조사지역 : 전남 영광군 낙월도
  • 조사내용 : 멍텅구리배 구조 및 어로관행 조사

우리나라 서해안 도서지방에서는 오래 전부터 전통적인 어로방법으로 젓새우를 잡아 왔다.

젓새우는 소금에 절여 새우젓을 만드는 작은 새우의 일종으로

서해의 도서와 연안지역에서 주로 생산되고 있다. 
 

이 지역은 수심이 깊지 않고 개흙과 모래톱이 적절히 섞여 있어 새우의 서식지로 알맞으며

또한 간만의 차가 크고 조류가 빠른 해양환경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생태적 조건을 가진 서해안에서는 새우잡이 어로가 예전부터 발달해 왔다.

특히 조류를 이용한 어로활동이 활발했는데 그 대표적인 어선이 '멍텅구리배' 이다.

멍텅구리배는 그 형태와 어로방법에 있어 수백 년간을 거의 변하지 않고 전래된 전통 한선으로

우리 민족 생활문화사의 한 단면을 보여 주고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따라서 배와 어망의 보존은 물론 어로관행과 어로신앙 그리고 어로활동과 관련된

주민들의 생활문화를 조사, 정리해 두는 것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현지조사를 통하여 각종 자료와 멍텅구리배 1척을 확보하였다.

현지조사 당시는 이미 멍텅구리배로 어로작업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자료는 주로 제보자들의 구술에 의한 것이다. 

또한 폐선 조치된 멍텅구리배 중에서 영광군 상낙월도의 현종호(14톤) 1척을

전라남도로부터 기증 받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야외전시장에 전시하고 있다.
 

멍텅구리배의 구조는 일반적인 형태는 이물, 고물부분이 유선형을 취하지 않고

칼로 반듯이 잘라 놓은 듯 뭉툭하게 생겼다.

전체적으로 보면 사각형 상자 모양으로 투박한 형태이다.

이런 선형을 지니고 있는 것은 밀물과 썰물의 센 조류에 잘 견디고 부력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특히 이물이 뭉툭한 것은 암해(질)를 끌어올리고 내리기 편리하게 한 구조이다.

조사대상인 현종호의 규모 및 구조는 다음과 같다. 
전체 길이는 15.5m, 너비는 이물 6m, 고물폭 3.4m이며 배의 깊이는 이물 3.5m, 고물 1.3m이다.

먼저 이물비우의 앞쪽은 두꺼운 널판을 가로로 대어 박았는데 이는 전통한선 제작방식이다.

 

외판은 턱을 따서 겹쳐 물리는 전통 한선 양식으로 하지 않고

널판자를 맞대어 붙여서 쇠못을 박았다.

고물비우도 역시 전통 한선 양식으로 널판지를 가로로 대지 않고 개량된 형태이다.

 

배밑 구조는 여러판재를 붙여 평직 하게되어 있다.

뱃전 위에는 멍에를 4군데에 가로질러 걸었지만,

멍에 아래에는 전통 한선 양식인 장쇠를 걸지 않고 격벽으로 시설했다.

갑판 부분은 중앙에 돛대가 있고 수해가 배의 날개처럼 가로질러 뻗어 있다.

이물에는 닻을 감아 올리기 위한 큰 호롱이 있으며

암해(질)를 감거나 풀어주는 이물사데통(이물호롱)이 그 좌 · 우에 각 1개씩 설치되어 있고

그 앞에 이물사데통의 보조 호롱인 글리사데통(글리호롱)이 있다.

 

선미부분에는 그물을 감아 올리는 아드레사데통(아드레호롱)이 좌ㆍ우로 1개씩 있다.

중앙의 수해와 아드레사데통 사이에 선실을 두었고

선실 내부에는 갑판 밑으로 통하는 통로가 마련되어 사다리를 통해 밑 선실로 오갈 수 있도록 하였다.

윗 선실은 선장의 생활공간이며 밑 선실에는 선원들이 숙식을 해결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멍텅구리배의 주요 장치는 돛대, 수해와 암해, 닻, 큰 호롱, 글리사데통, 이물사데통,

아드레사데통, 선실 등이 있다.

돛대는 배 중앙에 설치되어 있으나 이는 돛을 달기 위한 것이 아니고

수해의 양날개를 줄로 묶어 잡아 주는 기둥역할과 그물을 들어올리거나 물건을 옮겨 실을 때

쓰는 기중 막대의 버팀대 역할을 하고 있다.

 

멍텅구리배의 어로관행은 낙월도의 해양환경은 앞서 약술했듯이

조류가 세고 개흙과 모래가 섞인 해저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환경은 새우 서식지로 알맞고 따라서 이 섬의 주변 모두가 새우잡이 어장이다.

이곳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멍텅구리배를 이용하여 이곳에서 새우 잡이를 해왔다.

새우 잡이는 이 섬의 경제적 기반이며 그들만이 만들어 내는 독특한 문화적 토대라 할 만큼

그들의 생활과 밀접하다.

 

 

1993. 12
  • 조 사  명 : 전라남도 남해안지역 조사
  • 조사지역 : 전남 완도 및 강진, 장성, 보성 등
  • 조사내용 : 전라남도 남해안지역의 조선소와 어로도구

 

 

1993. 11
  • 조 사  명 : 전라남북도 해안지역 조사
  • 조사지역 : 전북 군산 및 북안, 전남 영광 법성포항 등
  • 조사내용 : 전라남북도 일대 해안지역의 조선소

 

 

1993. 10
  • 조 사  명 : 제주 떼배 조사
  • 조사지역 : 제주도 일대
  • 조사내용 : 제주도 성산읍 신양리, 남원읍 위밀, 서귀포시 보목동, 북제주군 애월면 구엄리 등 지역의 전통 떼배 조사
 

 

 

<고선박 복원> 

  

해양문화재연구소는 수중에서 발굴한 옛 배(고선박)와 우리 전통배를 연구하고 복원하고 있다.
고선박은 수백년 수천년 동안 바다 속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원래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발굴 이후 오랜 기간 보존처리가 필요하며, 이 과정을 거친 후 실물 복원이 이루어진다.

 

 

수중발굴 고선박
고선박 복원 대부분 원형을 상실한 채 인양되는 침몰선의 원형을 찾고 복원하는 것은 사라진 고대문명에 대한 의문점을 하나씩 풀어가는 고고학적 자료로서 타임캡슐과 같은 것이다.
침몰선 복원은 선박이 지니고 있는 원래의 모습을 찾아 복원하는 중요한 과제로서, 침몰선을 인양하는 방법, 전시적 개념 등에 따라 그 방법을 달리 한 것으로 고유의 장ㆍ단점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고대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침몰선이 원형대로 복원되는 작업은 고선박 복원가를 중심으로 고고학자와 보존 과학자, 항해기술과 선박구조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프로잭트로서, 선체의 윤곽을 직관적으로 느끼고 판단하는 것은 숙달된 전문가의 도움으로 부터 해결될 수 밖에 없다. 고선박 복원
 
 
수중발굴 고선박 실물복원 현황

 

 
조사기간 내용
1994
  • 선 명 : 완도선
  • 최대길이 : 약 9m
  • 최대너비 : 약 3.5m
  • 형심· 중앙부 : 약 1.7m
  • 적재중량 : 약 10ton

전라남도 완도군 약산면 어두리 바다에서 키조개를 잡던 어부들이

약 900년전의 것으로 보이는 몇 점의 도자기를 건져 올려 완도선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유물이 매장된 곳은 어두섬 사이에는 암초가 형성되어서 밀물 때는 물속에 잠기지만

썰물 때에도 위부분만 약간 드러나기 때문에 항해하기에 매우 위험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물의 흐름은 2노트 ~ 3노트로 혼탁한 물 때문에 수중조사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개펄속에 묻힌 그릇은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았지만,

배는 심하게 훼손되어 이물과 고물은 썩어 없어진 채 배밑과 일부 삼판만이 남아 있었다.

10톤 크기의 완도선에는 도자기를 비롯해 무려 30,701점의 유물이 실려 있었다.

 

완도 해저 발굴의 가장 큰 성과는 고려시대 배를 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배는 지금까지 발견된 '우리 배(韓船)' 가운데 가장 오래된 구조선(構造船)으로서

우리 배의 역사와 발달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완도선은 1983년 12월에 실시된 제 1차 조사와 1984년 3월~5월까지 70일간 2차에 걸쳐서

수중발굴이 실시되었으며. 완도선 복원은 1995 년 3월에 시작하여 1995년 11월에 완료하였다.

 

 

1. 완도선의 구조
완도선 구조는 두터운 밑판(底板) 5재를 평평하게 맞대어 붙였으며

턱붙이 방법으로 이어 조립한 삼판(외판)과

좌 · 우 삼판을 잡아주는 게롱(加龍)으로 이루어졌다.

배밑과 삼판은 가쇠(長?)와 피쇠(皮?)로 연결되었다.

이런 만듦새는 전형적인 우리 배(韓船)의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배를 짓는데 사용된 선 재목은 소나무와 상수리나무인 것으로 밝혀졌으며,

그 외에도 남해안 지역의 특산 나무도 포함되어 있어서

이 배가 남해안 지방에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1) 배밑(底板)

- 완도선은 5재의 두터운 목재를 나란히 연결해 배밑을 만들었다.

그 생김새는 배 앞쪽과 뒤쪽 부분을 치켜 세워 마치 활모양처럼 되어 있다.

배밑의 조립은 밑판 목재의 옆구리에 구멍을 내고 ‘가쇠(장삭)'라 부르는 긴 나무못으로

고정하였다. 완도선의 가로 단면은 ‘’의 모습을 한 평저형(平底型)선박이다.


2) 삼판(外板)

- 뱃전을 이루는 삼판은 모두 5단으로 이루어 졌으며,

아랫 삼과 윗 삼의 연결은 '턱붙이 겹이음(rabbetted clinker joint)' 방식으로 이음하고,

피쇠(皮?)로 고정하였다.
배밑과 삼판의 연결은 소위 ‘만곡종통재’를 택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통나무배의 전통이 아직 이 배에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3) 이물과 고물

- 완도선의 앞부분과 뒷 부분은 썩어 없어져 확실한 생김새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배의 만듦새와 완도선의 남은 형태로 미루어 보아 이물은 곧고 넓으며,

고물은 비교적 좁고 배꼬리 쪽으로 길게 뻗은 모습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4) 게롱(加龍木)

- 게롱은 우리 배의 만듦새 가운데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인데,

뱃전의 삼(杉)마다 가로대기 재목을 꿰어 양 뱃전을 붙들어 주는 기능을 한다.

완도선에서는 게롱의 배치가 후대에 나타나는 것처럼 정형화되어 있지는 않다.

맨 꼭대기의 삼에 걸치는 ‘멍에’는 발견되지 않았다.


5) 추진과 조종

- 완도선 배밑의 중앙에는 돛대를 세웠던 돛대구멍이 보이며

돛을 이용해 항해했음을 알 수 있다. 닻, 키, 노 등의 장비는 발견되지 않았다.


6) 선재(船材) 보호

- 우리 배는 전통적으로 선재(船材)를 보호하기 위해 불과 연기로 그을리는 ‘연훈법(煙燻法)’을

사용하였는데, 외판에 그을린 흔적이 있어 이미 완도선 제작시기에도 이 방법이 쓰여졌다.


7) 배 못

- 우래배의 두드러진 특징은 철못보다는 나무못을 주로 사용한 점을 들 수 있다.

완도선에 사용된 못으로는 배밑의 연결에 가쇠(長삭)를,

그리고 삼판에는 피쇠(皮삭)를 사용하고,

이들을 고정하기 위해 배못의 끝에 ‘쐐기’와 ‘산지’를 박았다.

완도선 복원은 실측을 기초로 한 도면상 복원과 이에 따른 축소 모형선을 제작하였으며

이 모형선은 실물 원형복원의 기본 참고 자료로 활용하였다.

복원 방식은 모형자료를 활용하여 각도(기울기, 휨)에 맞추어 구조물(프레임)을 지주보강하여 조립하였으며, 또한 훼손, 유실 되어버린 장삭, 피삭을 신재(新材) 제재목으로 대체하여 기본적인 선형(船型)을 구성하였다.

저판과 외판, 외판과 외판의 단계적 조립을 위해 파손부위를 가공이 용이한 재료로 보강하였다.

선형 유지를 보강하는 방법으로 복원하였다.

 

2. 부재별 조립
1) 저판 조립
- 저판 5材중 중앙재는 장부이음의 결구형식으로 3재를 연결하였다.

· 右저판재(底板材) 2조는 각각 2, 3재로 반턱이음 연결방법으로 조립되며

만곡재를 연결하기 위해서 '┗ '자형에 시설하였다.

복원이 완료된 저판의 평면 형태도 중심부를 기준으로

선미와 선수 양방향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2) 만곡부종통재
- 만곡부종통재는 저판과 외판을 연결해주는 '┗ '자형의 부재로서

연결부는 반턱맞춤으로 조립되었으며, 측면곡선의 휨이 크고 저판 연결면의 부식이 심하여

밑부분에 동재(銅製)지주를 사용하여 조립하였다.

 

3) 외판복원
- 외판은 좌 · 우 양현 4단까지 남아있으며, 5단째로 보이는 선체편도 있으나

불분명하여 복원하지 못하였다.

만곡부종통재까지 조립된 상태에서의 '┗ '자형의 각도와 외판 하연내측면에 각도 따라

조립하였으며, 또한 선편 상면에 '┗ '자형에 홈을 파고 그 위에 윗단 외판재 조립하는

홈붙이 겹이음(rabbetted clinker-built)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각외판재는 2~3재의 선재(船材)를 반턱이음으로 연결한 후 피삭(皮?)을 박아 결구하고 있다.

또한 외판을 잡아주는 가룡이 3구간에 확인된다.

 

4) 지주 구조물
- 구조물은 양현에 각각 4개씩 (선수부 1, 중앙부 2, 선미부 1) 총 8개를 설치하였다.

구조물의 재료는 외판재의 강도에 따라 파손을 방지하고 작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목재를 사용하였다. 구조물의 크기와 각도는 위에서 언급한 값에 따라 제작하였으며

외판 기울기의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좌우 이동이 가능하도록 제작하였다.

또한 높이와 넓이를 조정하기 위해서 장부맞춤을 하고

외판의 측면이 기대어지는 부분은 홈을 파서 연결하였다.

구조물의 연결부분은 외판을 1단에서부터 순서대로 작업하기 위해 볼트, 너트를 사용하여

복원하였으며 복원 한 결과 각도는 선수쪽 10˚정도이고 선미쪽 20˚로

선미쪽의 경사각이 높음을 알수 있었다.

 

완도해저에서 인양되어 약 12년 동안의 보존처리과정과 1995년에 9개월간 조립 복원하여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제 1실에 전시되어있다.

 

 

2004
  • 선 명 : 신안선
  • 최대길이 : 약 34m
  • 최대너비 : 약 11m
  • 형심·중앙부 : 약 9m
  • 적재중량 : 약 260ton

우리나라 수중발굴의 기초가 되었던 신안해저발굴은 1976년부터 1984년까지 9년 동안

조사되었으며, 이때 중국 도자기와 동전 등 많은 유물을 인양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인양된 선박은 일반적으로 발굴지역의 이름을 부여하는데

이에 따라 ‘신안선’이라 부르고 있다.


선체는 발굴현장의 여건으로 인해 원형을 유지한 채 인양할 수 없어

모두 하나하나 부재별로 해체하여 인양하였다.

인양된 선체편은 수중에 오래있었기 때문에 섬유질이 유실되고 재질이 약화되어

적절한 보존처리를 해주어야 원형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선체편들은 인양되기 시작한 1981년부터 약 20년 동안 보존처리를 하였으며,

보존 처리된 선체는 1994년부터 시작하여 2002년 12월 복원 완료하였다.

또한 2003년과 2004년에는 유실된 부분의 형태와 배의 전체규모를 알 수 있도록

선체하중계산과 설계과정을 통해 스테인리스 스틸 프레임을 사용하여 배 선형을 복원하였다.

 

신안선의 발굴
▲ 발굴(1976~1984년)

신안선의 보존처리
▲ 보존처리 (1981~1999년)

모형제작1
▲ 모형제작1 (1982~1986년)

모형제작2
▲ 모형제작2 (1982~1986년)

복원 1
▲ 복원 1 (1994~2002년)

복원 2
▲ 복원 2 (1994~2002년)

복원 3
▲ 복원 3 (1994~2002년)

복원 4
▲ 복원 4 (1994~2002년)

복원 5
▲ 복원 5 (1994~2002년)

선체선형받침대 제작
▲ 선체선형받침대 제작(2003~2004년)

 

최대길이(最大船長) : 약 34m
최대너비(最大船幅) : 약 11m
형심ㆍ중앙부(型深ㆍ中央部) : 약 9m
적재중량(積載重量) : 약 200ton

 

우리나라 수중발굴의 기초가 되었던 신안선 복원순서를 크게 분류하면, 먼저 선저 구조인 용골을 설치하고 늑판, 익판, 격벽 그리고 외판 순으로 진행하였다.

 

신안선 복원을 위한 1차적으로 인양 년, 월, 일 그리고 구획별 위치를 기록한 라벨과 실측 번호를 토대로 1/5모형선을 제작하였으며, 이 모형선은 실물 원형복원의 기본 참고 자료로 활용하였다.

 

선체편 수는 인양당시 720편이었으나 그 중 포판재(선체를 보호하기 위한 얇은 판재) 223편을 제외한 구조재 497편이 복원되었다.

 

1. 신안선의 구조

1)용골(배밑구조, 船底構造)

- 신안선은 단면이 ‘V'자처럼 뾰족한 첨저형(尖底型) 선박으로서 배밑에는 대단히 튼튼하고 큰 사각단면의 용골이 놓여진다.

용골(龍骨)은 마치 인체의 척추와 같다고 비유할 수 있다. 용골 위에는 칸막이판적벽과 외판의 밑부분이 되는 익판이 연결되어 있으며 격벽과 외판을 잡아주는 늑판이 있어 든든한 배밑구조를 이룬다.

 

2)격벽(칸막이구조)

- 칸막이는 인체의 갈빗대와 같은 역할을 한다. 즉, 배의 틀을 이뤄 배의 형태를 결정해 주며 배 전체의 강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 갈빗대 모습의 늑골을 주로 사용하는 서양배와는 달리 중국배는 칸막이벽이라는 독특한 구조를 가진다. 신안선에는 7개 구간에 격벽이 설치되어 7격벽 8격창의 구조로 시설되어 있다.

 

3)익판(龍骨翼板)

- 익판은 늑판(肋板)이라고도 하며 선체구조로 볼 때 척추와 갈빗대(격벽)을 잡아주는 기능의 하부 기초가 되는 부재이며, 용골과 외판을 잡아주는 연결 매체이기도 하다.

 

43)외판구조(外板構造)

- 외판이란 마치 인체의 피부 즉 외피에 해당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신안선의 대표적인 특징은 외판이음은 종연(縱緣)의 접합방식은 ‘홈붙이 겹이음(rabbetted clinker joint)'과 사모턱이음이며 회연(橫緣) 접합방식은 홈턱솔이음과 반턱이음 방식으로 된 한 겹(單板)구조라는 점이다.

 

5)선수ㆍ선미구조(船首ㆍ船尾構造)

- 신안선 이물과 고물은 각각 평판형 선수와 각형 선미구조로 이뤄졌다. 신안선의 선수는 용골에서부터 뻗어 오른 수주에서 점차 위로 향하며 넓어지는 평판선수재가 붙여진다. 선미는 전통적인 동양식트렌섬(transome)형 선미구조를 이룬다.

 

6)기타구조물

- 신안선에는 돛대받침인 장좌(檣座)가 2곳에서 확인되었다.

4번째 칸막이 벽의 앞에 놓인 돛대받침은 중앙돛대(本檣)이고, 7번째 칸막이 벽 앞의 돛대받침은 앞돛대(前檣)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

 

신안선은 중앙돛대와 앞돛대 외에도 갑판 위에 세워진 뒷돛대와 함께 셋이상의 돛대를 지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4번째와 5번째 칸막이벽 사이에는 식수를 담았던 큰 수조(水槽)가 설치되어 있다.

 

 

  

2. 복원 방법 및 과정
1) 방법
복원 대상 선체편의 고유번호(라벨)와 도면을 확인하여야 하며,

도면과 라벨명 위치에 따라 선체편 위치 확인을 하였다.

 
조립구간의 선체편과 도면을 맞춰보고 못구멍 위치와 간격 그리고 톱질한 부분의 나이테 등을

확인하며, 확인된 선체편은 조립구간으로 이동하여 조립한다.

선체 편을 조립할 때 안전을 기하기 위하여 상부에 있는 호이스트 크레인을 사용하여

완전한 위치를 찾을 때까지 반복하여 위치 확인을 하며 구간이 확인되면 조립한다.

이때 사용되는 조립도구는 유압잭, 슬링밴드, 클램프 그리고 자동 바를 이용하여

고착이 완료 될 때까지 안전하게 잡아준 다음

에어공구인 드릴을 사용하여 못 구멍의 이물질을 제거 후

이물질이 제거된 선체 편은 스테인리스 스틸 볼트(13mm) 나사못으로 고착한다.

나사못은 선체편의 두께에 따라 적절한 치수를 사용하여 고정한다.

 

2) 과정
용골→ 격벽 1단→ 익판→ 격벽 2~4단→ 외판 1~5단→ 늑골→ 격벽 5~7·8단→외판 6~13단→ 스티프너(stiffener)→ 선수판재→ 돛대(장각, 장좌, 빗장)→ 물통구조물→ 연결보강판 순으로 조립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실물 크기의 전시물을 관람객에게 보여줄수 있게 되었다.
신안선은 신안해저에서 인양되어 약 20년 동안의 보존처리과정을 거쳐

2004년 선형을 나타내는 프레임 제작을 끝냄으로서 복원 완료하였다.


 
수중발굴 고선박 모형복원 현황
 

조사기간 내용
1994
  • 선 명 : 신안선
  • 축척 : 1/10, 1/5
  • 수량 : 2척

신안선 1/5축소 모형제작 복원은

1982년 10월부터 1986년 6월말까지 약 4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1/10모형은 1986년 9월부터 1987년 12월까지 1/5모형을 바탕으로

상부구조를 추정하여 복원되었다.
모형복원은 실물복원의 전 단계 과정으로 잔존선편을 실측하여

1/5크기로 실측도면에 맞추어 형태를 만든 후,

선편이 만들어지면 수중에서 실측한 자료를 근거로 조립한다.

조립이 완료되면 1/10크기로 잔존부위와 상부구조를 추정하여 모형복원 한다.

 


1/5모형

1/10모형

 

 

1994
  • 선 명 : 완도선
  • 축 척 : 1/2
  • 수 량 : 1척

완도선은 이물(선수)과 고물(선미)은 유실되었으며

본 바탕을 이루는 두터운 목재 5列를 갖추고 있는 배밑(저판)과

배의 형태 갖추는 좌우현 외판이 잔존하고 있다.

저판은 '장삭'과 외판은 '나무못'으로 고착하여 연결된 구조를 갖추고 있는 전통 우리 배이다.

 

모형복원은 잔존 선체편과 발굴 당시 도면을 근거로 1994년에 1/2축소 크기로 이루어졌다.
완도선은 동반유물과 배를 복원한 결과 11세기경에 사용된 배로 추정되며,

고려시대 배의 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어 선박 연구자들에게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완도선 상상 복원도

길이 : 약 9 m
너비 : 약 3.5m
깊이 : 약 1.7m
적재중량 : 약 10 ton

 

1/2모형


 

 

 

1998
  • 선 명 : 달리도선
  • 축 척 : 1/10, 1/20
  • 수 량 : 2척

달리도선은 1995년 6~7월에 목포시 충무동 달리도 해저에서 발굴 인양된 배이다.

배의 구조는 두터운 저판을 편평하게 3列로 갖추고 있으며 좌우 외판으로 선형을 이루고 있다.

선수 · 선미구조는 덧붙이는 선수 판과 홈에 삽입되는 선미판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가룡, 멍에로 외판과 돛대를 잡아주는 구조이며

연결방법은 저판은 장삭과 외판은 나무못으로 연결되었다.

 

모형복원은 실물복원의 연구 자료로 활용하기 위한 전 단계의 과정이다.

모형복원 과정은 잔존 선체 편을 실측하고,

실측된 선체편을 여러 가지 공구를 사용하여 가공한다.

가공된 선체 편을 구간별로 조립하면 모형복원이 완료된다.
달리도선은 1/10 크기와 전시를 위해 1/20 크기로 잔존 형태만을 복원하였다.


 

 

2001,
2007
  • 선 명 : 진도 통나무배
  • 축 척 : 1/10 모형복원(잔존부위), 1/5 모형복원(추정복원)
  • 수 량 : 2척

 

잔존 최대길이는 16.85m, 최대 폭은 2.34m, 깊이는 0.70m, 선재(船材) 두께 10~23cm이다.

진도통나무배 모형복원은 처음에는 1/10 크기로 잔존부 만을 복원했다.

2008년에는 1/5크기(400×80×21.6cm)로 추정 원형복원 되었으며,

 

복원과정은

①CAD기초설계(발굴도면을 전산화) ②기본설계(구조, 선형, 단면, 측면 설계)

③실시설계(기본설계에서 나타나는 구조, 문헌자료, 회화 자료를 활용하여 설계)

④3D 이미지(실시설계에서 완성된 도면을 이미지 편집을 통해 보여줌)작업

⑤설계에 나타난 치수에 따라 목재구입 및 수종식별분석 ⑥모형제작

등의 순으로 복원하였다. 

 

 

 

 

2007
  • 선 명 : 안좌선
  • 축 척 : 1/10 모형복원(수중발굴 잔존부위)
  • 수 량 : 1척
2007
  • 선 명 : 십이동파도선
  • 축 척 : 1/10 모형복원(수중발굴 잔존부위)
  • 수 량 : 1척

 

-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참고> 계 수중문화재 발굴역사
년도 내용
1446 이탈리아 네미호수에서 로마시대 배 발굴
1867 노르웨이에서 3척의 바이킹선 발굴
1928 이탈리아 네미호수에서 1세기 로마시대 바지선 발굴
1954 이집트 쿠프 대피라미드 옆에서 4,600년 전의 고선박 발굴
1958 덴마크 로스킬데 해협에서 11세기 바이킹선 5척 발굴
1961 스웨덴 스톡홀름항에서 17세기 ‘바사’전함 발굴
1966 자마이카 근해에서 ‘포트로얄’ 수중유적지 발굴
1973 중국 천주항에서 송나라(13세기) 때 배 발굴
1974 일본에서 전함 ‘가이요마루’선(1868년) 발굴
1976 한국 신안 앞바다에서 중국 무역선(14세기) 발굴
1982 영국 솔렌트해에서 ‘메리로즈’전함(1545년) 발굴
1982 터어키 보드룸 해저에서 청동기시대 난파선 발굴
1984 한국 완도 앞바다에서 고려시대 배(11세기) 발굴
1992 필리핀에서 스페인 상선 ‘샌디에고’(17세기) 발굴
1994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14세기 등대 발굴
2003 한국 군산 비안도에서 고려청자 3천여 점 발굴
2004 한국 군산 십이동파도에서 고려시대 배 · 도자기 발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