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어보고(전시)

[국립공주박물관특별전] 백제의 관(冠)

Gijuzzang Dream 2010. 9. 18. 11:43

 

 

 

 

 

 

 

 

 

 

기간 : 2010-09-18 ~ 2010-10-17

장소 : 국립공주박물관 기획전시실

 

 

 

 

 

 

국립공주박물관의 '백제의 관(冠)' 특별전에서는

화려한 신라의 관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던 백제의 금동관과 금ㆍ은제 관장식 등 60여 점을 볼 수 있다.

 

고대사회에서 관(冠)은 국가 통치권력의 상징물 중 정점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백제의 관(冠)은 그동안 자료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신라의 관에 비해 많은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무령왕릉 출토품의 예와 같이

관(冠)은 뛰어난 예술성이 발휘된 공예작품이자 착용자의 권위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상징물이다.

 

 

2003년 공주 수촌리유적을 시작으로 서산, 고흥 등에서 새로운 백제 관(冠)이 잇달아 발견되었고,

부여 왕흥사지와 익산 미륵사지에서 그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은제 관장식이 출토되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자료와 함께 기존의 자료를 모두 모아

예술로 승화된 백제의 권력을 재조명하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이번 전시에는 그동안 백제의 관(冠)을 대표하였던

나주 신촌리 출토 금동관(국보 295호)과 익산 입점리 출토 금동관을 비롯하여,

공주 수촌리유적, 서산 부장리유적, 함평 신덕고분 출토 금동관 등

새롭게 발견된 백제의 관(冠)들이 한자리에 소개된다.

 

또한 익산 미륵사지, 부여 염창리, 능산리, 하황리, 논산 육곡리, 나주 복암리유적 등에서 출토된

다양한 형태의 은제 관장식이 무령왕릉 출토 금제 관장식(국보 154호)과 함께 전시되며, 

여기에 관(冠)과 관장식을 지지하였던 철제 관모테,

2008년 부여 왕흥사지와 미륵사지 출토 운모제 관장식,

나주 복암리 출토 금제 원판형 관장식 등이 출품되어 백제의 다양한 관(冠)문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관(冠)’은 머리를 보호하고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기능에서 출발하였지만,

사회가 점차 발전하면서 착용자의 신분과 위치를 보여주는 고도의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

5세기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백제 관(冠)들은

백제의 세력 확장 과정에서 지방 유력세력들이 중앙귀족화 하였음을 보여주는 상징물로 추정된다.

사비천도 이후에는 성왕에 의해 관등제가 정비되면서부터

금동관이 제작되지 않고 금제 · 은제 관장식이 대신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중국 역사서에도 백제왕은 금으로 장식한 관(冠)을 사용하였고

그 아래 대신들은 은제관장식, 또는 다른 형태의 장식이 붙은 관(冠)을 사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러한 관(冠)장식의 실물들이 이번 전시에서 소개된다.

지금까지 확인된 백제 금동관은 모두 8점으로,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에 있는 삼국시대 무덤인 안동고분, 공주 수촌리 1ㆍ4호분, 서산 부장리 5호분,

익산 입점리 1호분, 나주 신촌리 9호분 을관(乙棺)에서 각각 1점씩, 모두 6점이 있으며,

백제에서 만든 수입품으로 생각되는 경남 합천군 옥전 23호분과 일본의 에다후나야마고분 출토품이 있다.


이번 전시는 백제의 관(冠)뿐 아니라 고구려, 신라, 가야, 왜 지역의 관(冠)을 비교 전시하여,

‘관(冠)’을 통해 고대의 상징문화와 공예예술 · 문화교류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높일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가야지역 출토 백제계 관(冠)인 '합천 옥전 23호 금동관'과 함께

일본 후쿠이현 주젠노모리고분(福井縣 十善の森古墳) 금동관(복원품),

일본 구마모토현 에다후나야마고분(熊本縣 江田船山古墳) 금동관(복원품) 등

일본에서 출토된 백제계 관(冠)들이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되는데,

각 국의 영향관계를 보여주는 여러 나라의 관(冠)들은

고대 동북아시아 관문화(冠文化)에 대한 시야를 넓혀줄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국가 통치 권력의 상징물 중 정점에 자리하고 있는 '관(冠)'을 통해

백제의 찬란한 문화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고대의 관(冠)

5-7세기 동북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는 금, 은, 금동으로 만든 관(冠)이 많이 제작되었다.

신라의 금관이 대표적이며 백제와 고구려, 가야, 왜 등에서도 고유한 형태의 관(冠)이 제작되었다.

이들은 소유자의 지위를 보여주는 상징물이며, 예술작품으로서도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왕희도의 백제사신(당, 염립본, 7세기) - 맨 왼쪽 해당됨.

 

 

흔히 삼국시대 관(冠) 하면,

신라 금관으로 대표되는 금속제  머리띠에 세움 장식을 갖춘 ‘머리띠 형태의 관(대관 · 帶冠)’을 생

각하기 쉽지만 이는 신라 · 가야를 비롯해 백제 남쪽 지방(나주 신촌리 금동관)에서만 발굴됐으며

한성 · 웅진 · 사비 같은 백제의 중심지와 고구려에서는 아직 발견된 바 없다.


사실 삼국시대 벽화와 토우, 각종 문헌기록 등을 검토해 볼 때

삼국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가장 보편적인 관(冠) 은

모자의 정수리 부분이 뾰족한 ‘고깔 형태의 관(모관 · 帽冠)’이었다.

모관은 한때 대관에 딸린 모자로 알려지면서 내관(內冠) 또는 관모(冠帽)로 불리기도 했으나

현재는 별개의 관(冠) 으로 이해하고 있다.

   

   - 모관(帽冠) : 기본적으로 머리를 덮을 수 있는 정수리 부분이 뾰족한 고깔 형태,

                        부속구인 금속제 관식으로 구성된다.

   - 대관(帶冠) : 머리테에 세움장식(立飾, 솟을장식)을 갖춘 형태로 주로 금속제가 많음.

   - 입관(입冠) : 챙이 있는 갓 모양이며, 현재 알려진 숫자가 매우 적음. 

           (모관)                             (대관)                                  (입관)

 

   

 

●백제의 관(冠)

백제의 관(冠)은 5세기대를 중심으로 금동의 화려한 관(冠)들이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천안, 공주, 서산, 익산, 나주, 고흥 등 당시 백제의 영향력이 미쳤던 넓은 지역에 위치한

다양한 형식의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관(冠)들은 백제의 영역확장과 관련하여

지방의 유권세력이 백제 중앙귀족으로 변화하였음을 보여주는 상징물로 추정된다.

 

 

●백제의 관(冠)장식

백제의 금동관은 6세기 중엽 이후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고, 금 · 은제 관장식이 널리 사용된다.

백제 왕은 금제 관장식을 사용하였으며 그 아래 대신들은 은제 관장식으로 관(冠)을 장식하였다.

이 외에도 관(冠) 장식이 없거나 운모로 된 관(冠) 장식을 사용하는 등 여러 가지 형태가 알려져 있다.

 

 

●백제 관(冠)과 고대 동아시아의 관문화

백제 관(冠)은 백제와 정치, 문화적으로 관계가 많았던 가야, 일본 지역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전해졌거나, 백제 관(冠)의 형태를 쫓아 현지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백제가 주변지역에 미쳤던 영향력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한편 이 시기 고구려, 신라, 가야, 왜 등 동북아시아 여러 나라의 관(冠)에서는

고유한 양식과 함께 각 나라의 영향을 보여주는 관(冠)들이 발견되고 있다.

 



 

 

 

공주 수촌리Ⅱ-1호분(2003년 발굴, 용 14마리 투각)

 

 

 

 

 형(原形)에 맞게 복제한 공주 수촌리고분 백제 금동관

 

 

 

 

  

 

공주 수촌리 Ⅱ-4호분 금동관(복원품)

 

 

 

 

 

 

 

 

 

 

 

나주 신촌리 9호분 금동관(국보 295호)

이 금동관은 대형 옹관에서 발견되었다. 내관은 절풍형이며, 외관에는 3개의 자연수지형 세움장식이 있다. 그런데 세움장식의 중기가 3개로 독특한 형식이며, 수지도 여러 층이다.

세움장식의 꼭대기는 보주형이고 줄기와 가지에는 꽃무늬 장식과 함께 수많은 달개가 달려 있다.

 

 

 

 

  

 

안동고분 금동관(출토당시모습, 보존처리 이전, 보존처리 후)

백제계 금동관 8점 중 관 상단부 중앙에 깔때기형 장식물을 설치한 것은

수촌리 1호 출토품이 유일하다. 이 수촌리 금동관은 특이하게도 상단부 중앙 말고도

통상의 백제계 금동관처럼 뒤쪽에도 별도의 깔때기형 장식을 설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서산 부장리 5호분 금동관모(5세기 중엽)

백제 금동관이 보여주듯 모관(帽冠)들은 자작나무 껍질(백화수피 · 白樺樹皮)로 속심을 만든 뒤

직물과 귀금속(금동판)을 덧대거나 비단을 비단을 씌운 것이 특징이다.

 

 

 

 

 

논산 육곡리 7호분 은제 관장식

은제관꾸미개는 백제문화의 정수를 담고 있는 유물이다.

이전부터 논산 육곡리, 남원 척문리, 나주 흥덕리, 나주 복암리 3호분, 부여 화황리 등

백제의 굴식돌방무덤에서는 은으로 만든 꽃 모양의 관꾸미개가 출토되고 있다.

관모의 앞부분에 달린 역삼각형의 관모테에 꽂는 장식품인 관꾸미개는

형태는 어느정도 정형화돼있는 것은 사실.

얇은 은판을 길게 오려 줄기를 만들고 좌우 곁가지에 꽃봉오리를 오려 만든 후

가운데를 V자 모양으로 접는다. 무늬는 좌우대칭이며, 꽃봉오리, 잎, 줄기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줄기의 양 옆에 달린 잎의 모양에 따라 크게 남성용, 여성용 등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은제 관꾸미개, 부여 능안골고분군 출토

백제 귀족의 집단무덤 중 하나로 꼽히는 부여 능사리 능안골고분군은

주변에 백제 능산리 무덤 동쪽에 있는 백제나성(사적 제58호)과 청마산성(사적 제34호) 등

역사적인 유적지가 밀집돼있다. 당시 높은 금속 기술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백제에,

더구나 귀족들의 집단 무덤이니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어마어마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당시 무덤의 형식과 출토된 유물을 통해 6-7세기경 백제 귀족층의 무덤으로 추정됐다.

이곳은 1994년 12월 부여공설운동장 건립을 위해 도로공사를 하던 중 백제고분이 노출돼

발굴조사가 시작되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됐다. 이후 1995부터 2년간 조사된 능안골고분군은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30여기, 돌덧널무덤(석곽묘) 20여기, 독무덤(옹관묘) 4기 등이 발견됨.

홑무덤(단장묘)이나 합장묘, 어린아이 무덤 등 다양한 형태로 매장되었는데,

주(紬) · 사(紗) 등의 옷감 및 금귀걸이, 금동귀걸이, 은제관장식과 요대장식, 철제 관고리와 관정,

성인 남녀와 어린이의 뼈 등 각종 유물이 출토되면서

백제후기의 묘제형식과 당시의 직물 등 백제사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꼽히고 있다.

부여 능안골 고분군 36호분에서 은제관꾸미개와 더불어 역삼각형 모양의 철제테가 발견됐는데

이는 은제관꾸미개를 세워 붙일 수 있는 모자의 심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사기’와 ‘백제본기’에 따르면 주서(周書)’·‘북사(北史)’ 등의 중국 사서에 

왕은 검은 비단으로 만든 모자에 금꽃으로 장식하였고, 6품 나솔(奈率 · 백제 16관등 중) 이상의

대신들은 은꽃으로 장식하였다”는 기록을 뒷받침하는 자료이다.

은제관식과 함께 출토되는 철제 역삼각형 관모테를 통해 철제 뼈대가

비단으로 만든 관의 전면에 배치되고 그 중앙에 은제관식이 끼워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능안골고분군의 은제관꾸미개는 남녀합장묘인 36호에서 2점, 44호에서 1점 총 3점이 출토됐다.

이 은제관꾸미개는 여성용에 비해 무늬가 복잡하고 화려한 남성용이다.

여성용과의 차이점은 맨 위의 꽃봉오리 외에도 좌우에 각각 2개씩의 가지가 더 있고

여기에 꽃봉오리와 잎이 달려있어서 모두 5개의 꽃으로 장식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형태의 은제관꾸미개는 부여 하황리, 나주 복암리 3호분 5호 석실에서도 확인된다.

한편 36호 돌방무덤에서 은제관꾸미개와 함께 출토된 철제테에는 천이 여러 겹 감겨 있었으며,

분석 결과 평직물과 나(羅 · 그물 형태)로 확인됐다.

문헌기록에 나타나고 있는 나관(羅冠 · 삼국시대에 관인·귀인계급에서 착용한 관모)의 실상을

확인시켜 주는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은제관꾸미개는 논산과 남원 등 주로 지방에서 발견됐기 때문에

출토된 지역에서는 백제의 직접 통치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몇몇 학자는 그 지역의 기반을 가진 지방의 우두머리가 사용했을 거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부여 왕흥사지 목탑지의 운모 관장식

 

 

 

 

 

 

금제관식() - (국보 154호) 높이 30.7×29.2㎝, 너비 14×13.6㎝

금제관식(王妃) - (국보 155호) 높이 22.6㎝, 너비 13.4㎝

  

 

 

 

 

나주 복암리 3호분 7호묘 동편 금제 관장식

  

 

 

 

 

안동 지동2호분 금동관

 

신라 관(冠) 중 평상시에 사용하는 관모는 옆에서 보았을 때 마늘모양의 폭이 좁은 모자로서

금, 금동, 은의 금속제와 백화수피제 혹은 천, 가죽 등의 유기질로 되어 있다.

신라의 외관은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나무나 초화를 아주 간략하게 도안화시킨 ‘山’자형의

직선적인 장식으로 된 3개의 입식과 뒤쪽에는 사슴뿔 모양의 장식을 비스듬하게 세웠고

금관의 표면에는 영락과 곡옥을 매달았다. 입식의 끝은 보주형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산(山)자형 관(冠)이 시기에 따라 변화하는데 입식의 단수가 3단에서 4단으로 늘어나면서

위, 아래 단이 가까워지고, ‘山’자형입식의 각도가 둔각에서 직각으로 되고,

대륜과 입식을 고정하는 못의 수가 2개에서 3개로 증가하며,

대륜부 영락의 단수가 1단에서 3단으로 점차 늘어난다.

 

이러한 관(冠)은 대개 5~6세기 중엽까지 낙동강 이동(以東)지역에 분포하며

이후 신라의 영역변경에 따라 넓게 확산되는데

6세기말에는 강원도 동해 추암동 가-21호분, 충청북도 단양 하리, 안동 지동 2호,

울릉도 현포리 고분군 등지에서 퇴화한 형태의 금동관이 발견된다.

이러한 관(冠)이 대형분이 아닌 중소형분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전과 같은 정치적 권위의 상징물이 아닌

재지의 무속인이 사용한 주술적인 성격으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라의 관(冠)은 자료가 매우 풍부하여

그 재질의 차이로도 고분 피장자의 사회적 성격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순금제관은 모두 경주의 중심고분에서만,

그 밖의 중소형분 혹은 신라의 변경지역에서는 금동제나 은제관이 출토하는 것으로 보아

중앙으로부터 분여받은 것으로 보인다.

 

 

 

  

 

 

 대구 달서(비산동) 37호분 1실 금동관(신라,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1호 돌덧널에서 2개의 금동관이 발견되었다.

2개의 금동관 크기가 거의 같은 것으로 보아 한 사람이 사용하던 것으로 보인다.

세움장식은 3단의 직각수지형이고 뒷면에는 사슴뿔 장식이 2개 있으며 심엽형 달개가 달려 있다.

내관은 반구형을 이루고 있다.

 

 

 

 

 

  

부산 복천동 10, 11호 금동관(신라)

곡옥은 없으며, 달개는 세움장식에만 달려 있다. 관테 길이는 50㎝로 어린아이용에 가깝다.

3개의 세움장식이 위로 갈수록 안으로 좁아지는 것으로 보아

위가 뾰족한 고깔형 관모에 붙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세움장식의 곁가지 모양이 다른 금동관보다 고식(古式)으로 추정된다.

가장 늦은 금동관의 곁가지는 직각에 가까운데, 이 금동관은 나뭇가지에 더욱 가깝고,

특히 세움장식 꼭대기에는 인동무늬가 간략화된 것으로 보이는 삼엽문(세 이파리 무늬)

투조로 표현되어 있어 고구려적인 느낌이 든다.

 

 

 

 

 

 성주 가암동 금동관(가야,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금동관으로는 고령 지산동 32호분, 30-2호분, 성주 가암동 고분군 출토의 외관이 있고,

내관으로는 합천 옥전 23호 출토품이 있다.

고령 지산동 32호분 출토품은 입식이 1매로 불상의 광배모양을 띠며 작은 연봉오리모양 장식이 있다.

대륜부와 입식의 가장자리, 그리고 입식의 전면에는 타출점렬문 2열과 그 사이에 타출방식으로 된

파상문을 장식하였다.

고령 지산동 30-2호 출토 금동관의 경우 대륜모양은 32호와 같으나 초화형입식을 3매 세웠으며,

입식의 형태는 매우 간략화되고 단순해진 연봉오리모양을 하고 있다.

위의 2점은 모두 대륜부가 완전히 돌아가지 않고 부분적인 것으로 보아

대륜부 내측에 천이나 가죽을 대어 머리띠를 만들고 전액만을 장식한 형태로 생각된다.

내관의 형태를 띤 합천 옥전 23호분 출토품은 무늬가 없는 테두리의 안에는 삼엽문으로 장식하고

정수리부분에 금동봉이 있어 술 혹은 깃을 달아 장식한 것으로 보인다.

 

 

 

 

 

 

 

 고령 지산동 32호묘 출토 금동관 

이 금동관은 무덤의 주인공이 착장한 것이 아니며 부장토기 위에서 출토되었다.
관테의 중앙에 불상 광배모양의 솟은장식을 세우고 있는데,

이것은 일본 후꾸이현 니혼마쓰야마[福井縣 二本松山]고분에서 나온 은제 도금관(銀製 鍍金冠)과

형태가 유사하여 서로 간의 교류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신라의 관은 대부분 순금제의 맞가지 솟은장식(出字形立飾), 사슴뿔모양을 하고 있지만,

가야의 관은 순금보다는 대부분 금동으로 만들고, 관테 위에 풀잎이나 꽃잎모양[草花形] 또는

나무가지모양[樹枝形]의 솟은장식(=세움장식, 立飾)을 달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형태적으로 이 금동관은 초화형의 입식이 특징이며 신라의 금동관에 비한다면 매우 간략하다.

 

대가야관의 문양은

초기에는 점으로 선을 이룬 것처럼 보이는 곡선적인 물결무늬와 선문을 비교적 정교하게 시문하나,

후기가 되면 문양의 시문간격이 벌어져 점선과 같은 형태로 변화하며,

물결무늬도 직선적인 형태로 바뀌고 여러 가지 장식물을 매단 것이 등장하였다.
이 금동관은 띠 모양의 관테 위에 광배모양의 금동판 세움장식을 세우고

여섯개의 머리둥근못으로 고정시켰다. 좌우에는 끝이 양파모양인 가지를 세워 붙였다.

철띠 위에 세워진 철판은 몸체와 머리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금동판의 꼭대기는 큰 연꽃봉오리처럼 만들었고, 표면에는 못으로 두드린 점선무늬가 있는데

점선의 교차점이 황금분할점이다. 풀잎 또는 꽃잎 모양(草花形)을 장식한 대가야의 대표적인 관이다.

몸체를 나누고 있는 띠와 관의 가장자리, 철띠의 가장자리는 점으로 이루어진 물결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관(冠)의 곳곳에는 영락을 금동실로 매달기 위해 뚫은 구멍이 있다.

 

 

 

 

 

고령 지산동 30호분 금동관(복원품)

1995년 지산동 30호분 순장곽(2곽)에서 15cm길이의 자그마한 금동관이 발굴됐다.

이 금동관은 소형이고 보다 간소한 형식이며 무덤의 주인공이 착장한 것이 아니다.

이 금동관은 왕관 정면과 우측에 보주형 장식이 구부러져 있고, 띠 모양의 관테에

끝이 양파모양의 장식 3개를 세워 붙였고, 달랑거리는 동그란 장식을 곳곳에 달았다.

관테는 3~11세 가량의 어린아이의 이마에 두를 수 있는 정도로 길이가 짧아 양 끝에 뚫린 구멍에

끈이나 가죽을 연결하여 착용하였던 것 같다. 뒤편에는 가죽끈으로 머리를 묶은 흔적이 남아있다.

5세기 전반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금동관을 싸고 있는 섬유 조직이 발견되었는데, 아마 비단일 것으로 추측된다.

고령 지산동 44, 45호분에도 직물흔적이 남아 있는데,

(대가야시대 왕의 순장묘(殉葬墓)로 밝혀졌는데, 44호에는 40여명, 45호에는 14명을 순장하였다) 

이와 같은 가야의 직조 기술은 나중에 왜에까지 전해지게 된다.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옥전M6호 금동관

옥전M6호분 출토 금동관은 신라관(冠)의 독특한 특징인 出字形 입식을 갖추고 있지만,

신라의 관(冠)과는 입식의 형태가 많이 다르며 제작기법도 조악한 편이므로

신라의 영향을 받아 합천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알려진 자료로 보면, 가야적인 관(冠)은 고령에 집중되어 있고,

본격적으로 신라문화가 가야로 파급되는 6세기 전반의 어느 시점부터

합천에서도 신라적인 관(冠)을 제작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대가야의 금제관은 2점이 전해지는데, 

 

 고령 지산동 금관(가야) 국보 제138호, 삼성 리움미술관

 

하나는 고령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금관으로 삼성 리움미술관 소장이다.

비교적 넓은 관테에  3단으로 이뤄진 풀잎모양 장식(초화형입식) 4개를 일정한 간격으로 세웠다.

동그란 달개장식과 경옥제, 곱은옥(曲玉)이 부착되어 달랑거리게 했다.

풀잎모양의 장식이 자연스럽고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달개장식(영락)이나 곱은 옥(곡옥)의 부착은 신라관의 영향으로 추정한다.



또 하나(오른쪽)는 일본인 小倉武之助(오쿠라)가 수집하여 일본 동경국립박물관에 기증한 것으로

띠 모양 관테 위에 가운데는 양파모양 가지를, 좌우 끝에 두개의 나뭇잎 모양의 가지를 세워 붙였다.

양옆에는 밖으로 휘는 새 깃모양 장식을 ‘V’자 모양으로 세운 형태이다.

중간에는 동그란 달림장식(영락, 瓔珞)이 일정한 간격으로 달려 있으며,

가지의 끝부분에는 긴 하트모양, 중간 가지의 양옆에는 세로로 긴 풀잎모양의 장식이 달려있다.

 

 

 

 

 

익산 입점리 1호분 금동관

정면에서 보면 폭이 좁으며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고깔형 모자이다. 5세기 전후의 유물로 보인다.

투각으로 장식했으며 동물의 꼬리 같은 장식이 1개 달려 있다.

이런 형태의 모자는 중국 남조시대에 유행했던 것으로, 일본에서도 가장 오래된 전방후원분인 구마모토 후나야마고분에서도 이와 똑같은 금동관이 발견되었다.

입점리 부근에서 금동제 관편이 40점 발견되었는데 약 4개의 관(冠)이 매장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금동관모 복원처리 전 / ⓒ문화재청 사진

 

 

금동관모 복원처리 후 / ⓒ문화재청 사진

 

 

전남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 안동고분 금동관(5세기후반, 한성백제)

2006년 3월 발견 직후 금동관을 비롯한 금속유물 일체를 수습 당시 관에 뒤엉킨 각종 이물질을

제거하고 심하게 뒤틀리고 훼손된 부분 등을 되돌리고 접합하는 과정 등을 거쳤다.

보존처리 결과 옛 백제 영역이나 백제의 영향이 짙은 옛 가야, 일본열도에서 발견되는 백제계 금동관에서 특징적인 긴 대롱을 갖춘 깔때기(혹은 꽃봉오리) 모양 장식물이 관 뒤쪽에 달린 것과는 달리

이번 안동고분 출토품은 상단부 중앙에 꽂혔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장식물은 금동관 발견 당시에는 관(冠) 본체에서 떨어져 있었지만, 

보존처리 과정에서 그것이 꽂힌 자리가 발견됨으로써 원래 위치를 찾은 것이다.

 

금동관모(金銅冠帽)는 높이 23.2㎝로 금동판을 도려내는 투조(透彫) 기법으로 꽃봉오리, 나뭇잎 등의 장식물을 만들었다. 이러한 투조기법은 익산 입점리, 서산 부장리 출토물들과 같은 백제계열 방식이나, 꽃봉오리 장식봉이 관모 중앙에 꽂혀 있던 것으로 확인되어 장식봉을 관모 뒤쪽에 꽂는 일반적인 백제계 양식과 달랐다고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밝혔다.

 

 

 

 


- 공주 수촌리 금동관(왼쪽)과 일본 에다후나야마 금동관 비교 -
고고학계는 제작 방식이나 무늬 등이 일치한다고 지적한다.

 

 

 

 

 

일본 구마모토현 에다후나야마고분(熊本縣 江田船山古墳) 금동관 (복원품)

熊本縣 江田船山古墳(구마모토현 에다후나야마고분),

福井縣 十善の森古墳(후쿠이현 주젠노모리고분) 등의 금동관모는

익산 입점리 1호분 출토품의 계통으로 파악되고 있다.

江田船山古墳(에다후나야마고분), 滋賀縣 鴨稻荷山古墳 · 山津照神社古墳, 佐賀縣 島田塚 출토의

 二山式 冠은 예전에는 倭의 독자적인 것으로 인식되어왔으나,

익산 입접리 1호분 출토 이후 백제 冠 그 계통으로 추정한다.

 

 

 

 

 

<'백제의 관(冠)' 전시유물>

(上, 왼쪽) 대구 비산동 37호분 금동관(신라), 복원품

(上, 오른쪽) 나주 신촌리 9호분 금동관(국보 295호)

 

(中, 왼쪽) 일본 구마모토현 에다후나야마고분(熊本縣 江田船山古墳) 금동관, 복원품

(中, 오른쪽) 대구 비산동 37호분 금동관

 

(下, 중앙) 일본 후쿠이현 주젠노모리고분(福井縣 十善の森古墳) 금동관, 복원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