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어보고(전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전시유물 살펴보기(완도선/ 신안군 外)

Gijuzzang Dream 2010. 9. 17. 14:47

 
 
 
 
 
 
 
 목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전시유물 살펴보기

 
  
 

 

 

 

목포는 1897년 10월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개항한 이후 급속도로 성장한 근대도시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수탈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곳이기 하다.

당시 목포의 중심지였던 목포시 대의동, 중앙동, 유달동 일대에는 지금까지도 일제의 자취가 남아 있다.

그중 대의동의 목포문화원 건물은 일본영사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1900년에 목포에서 처음 서양식으로 지어졌다.

해방 이후에는 1947년부터 목포시청, 1974년부터 목포시립도서관으로 사용되다가

1990년부터 현재까지 목포문화원 건물로 활용되고 있다. 사적 제289호로 지정된 국가지정문화재이다.

그리고 옛 일본영사관 건물에서 200m 내외의 거리에는

일제의 수탈기관이었던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현재는 목포근대역사관) 건물,

일본식 정원과 가옥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훈동정원도 있다.

 

'목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는 천 년 전의 시간이 있다.

'신안선'과 '완도선'이 있다. 바다에 묻힌 뱃사람들의 아득한 시간이다.

물밑에 가라앉아 있던 시간들이 땅 위로 올라오면서 이 나라의 고고학은 세분화됐다.

그저 땅 밑만 더듬던 시대와 작별했다. 이 나라의 수중고고학은 신안선으로부터 출발한다.
 

보물선의 꿈은 현실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지금껏 이 나라 해역에서 발견된 도자기만 6만2000점이 넘는다. 그 의미도 단선적이지 않다.

바다 속에서 천 년을 잠들어있던 미술사가 살아났고, 운송 해로가 새롭게 그려졌다.

포장방법과 선원들이 배 위에서 썼던 물건들이 같이 발견되면서 바다 위의 생활사도 윤곽을 드러냈다.

  

바다의 삶을 집대성한 곳

 

1323년 여름의 일이다. 한 척의 배가 중국의 무역항 경원을 출발했다.

배는 서해를 돌아 일본 교토에 있는 사찰 동복사에 닿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배는 일본에 가지 못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풍랑을 만났을 것이라는 추측만 가능하다.

신안 증도 방축리 앞 바다에서 침몰했다. 700년 동안 거대한 바다의 무덤에 갇혔다.

그리고 시간은 그 배와 타고 있던 선원들을 아주 잊었다.
 
꼭 30년 전 그 바다에서 그물질을 하던 어부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걸려나온 잡어들 사이, 흠집조차 나지 않은 원나라의 청자가 있었다.

그렇게 700년의 잠 속에서 신안선은 깨어났다.

그 바다 밑에 신안선은 뱃머리를 북동쪽으로 향한 채 20m의 뻘층 속에 매몰돼 있었다.

갯벌에 묻힌 우현과 좌현 일부가 살아 남았다.
 
먼저 배에 실린 화물에 대한 인양작업을 실시했다.

침몰선도 수중에서 해체해 720조각으로 나눠 인양했다. 배의 규모는 예상의 한도를 훨씬 능가했다.

폭 11m, 길이 34m, 선체 깊이 3.7m에 이르는 200톤급 무역선이었다.

중국학계는 신안선을 두고 고대 무역선 사상 3대 발견 중 하나로 평가한다.
 
배는 문자 그대로 보물선이었다. 발굴된 유물은 2만3502점이었다. 도자기만 2만661점에 이르렀다.

대다수가 중국산 청자였으며 고려청자와 일본의 자기도 일부 섞여 있었다.

그리고 공예품, 목재, 식물 씨앗, 악기, 벼루, 놀이도구, 생활용품 등 다양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중국동전도 28톤이나 발견됐다. 기원전 14년에 만들어진 고대 화천(貨泉)에서부터

1310년 발행된 중세 지대통보(至大通寶)에 이르기까지 종류만 299종이다.

동전의 용도는 일본에서 화폐나 원광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안해저유물의 발굴이 거의 끝나갈 무렵 완도 약산면 앞바다에서 또 하나의 발굴이 이루어진다.

이번에는 키조개를 캐던 잠수부들이 몇 점의 고려청자를 물밑에서 들고 나왔다.

그 바다에서는 3만 점의 고려청자가 인양됐다. '완도선'이다.

목포해양유물전시관은 신안선과 완도선을 담아놓고 있다.

두 배에서 나온 유물을 따로 모아놓은 각각의 전시실이 있다.

 

신안선 · 완도선 · 떼배 · 멍텅구리배…

 

만지면 부스러질 것 같다. 실제로 틈이 많고 약한 목재들이었다.

물밑의 세월 700년은 나무들이 썩고, 형체도 남지 않을 만큼 부서지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물기를 걷어내고, 약품을 바르고 여러 과정을 거쳐 배를 복원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완전한 형체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아있는 우현과 좌현 일부만으로도 배는 충분히 위압적이다.

배의 주변을 두른 선형 구조물은 배의 크기를 제대로 구현해내고 있다.
 
거친 바다를 품고 살았을 뱃사람들의 슬픈 역사가 그곳에 있다.

신안선이 그렇고, 완도선 또한 그러하며 떼배와 멍텅구리배도 마찬가지다.

 

'어촌민속실'에는 역사의 파편들이 모여 있다. 전통을 타고 내려오는 어로의 방법들이 전시됐으며

낙지바구니, 장어통발, 망사리, 태왁(해녀들의 도구) 등 뱃사람들이 쓰던 물건들이 모여 있다.

그들의 문화도 빼놓을 수 없다. 어촌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의 규율들이 적혀져 있으며

뱃고사와 뱃서낭 등 풍어와 목숨의 안녕을 기원하는 문화도 전시돼 있다.
 
'선박사실'에 간다. 거기 이 나라 배의 역사가 있다.

선사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바다를 곁에 두고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치열한 꿈이 있다.

인간이 바다와 만나고 소통할 수 있는 최고의 도구는 배다.

말로만 듣던 장보고의 배가 있고, 조일전쟁 때 바다를 지켰던 이 나라의 전선 판옥선이 있다.

거북선도 빼놓을 수 없겠다.

제주 사람들이 탔다는 떼배는 작고 조밀하다.

'조선통신사선'의 세밀한 꾸밈에서는 국가를 대표했던 배의 위엄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건물의 외곽, 바다에 그 어떤 배보다 뱃사람들과 가까운 한 척의 배가 그물을 펼치고 있다.

신안의 전장포와 영광 낙월도 사람들의 배, '해선망어선'이다. 일명 '멍텅구리배'로 불린다.

수백 년 동안 서해안을 점령했던 새우잡이배다. 옛 사람들은 '중선' 또는 '곳배'’라고 불렀다.

그러나 동력선이 끌어주지 않으면 스스로 한 치도 움직일 수 없는 특징으로 인해

멍텅구리배가 더 익숙한 이름이 되었다.

1995년 6월 정부의 어업구조 조정으로 이 땅에서 완전하게 사라진 배이다.
 
무동력선인 멍텅구리배의 특징은 닻의 크기에서 잘 드러난다.

멍텅구리배는 조류가 빠른 곳에 배를 대고 오랫동안 한곳에 머물며 새우를 잡는다.

동력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

거센 물살 속에서 배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무겁고 큰 돛이 필수였다.

보통 배의 길이가 15m 내외인데 닻의 길이가 그 절반에 해당하는 8m 크기였다.

이 나라에 단 한 척 남은 멍텅구리배를 목포해양유물전시관에서 만난다. 

- 2006-06-30 ⓒ 전라도닷컴

 

 

 

  

 

천년 전 조새, 지금도 사용한다.

 

조새는 굴을 따는 어로도구이다.

굴은 우리나라 연해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예부터 우리 민족의 먹을거리로서 중요한 패류이다.

선사시대 유적인 조개더미(패총)에서 굴 껍질이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즐겨먹었을 식품으로 추정된다.

 

조선 성종 12년(1481)에 펴낸『동국여지승람』에는 굴이 강원도를 제외한 7도, 70여 고을의 토산품으로

기록되어 있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널리 애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굴은 흔히 석화(石花)라 부르는데,

이는 바위에 붙어있는 굴 껍질이 하얀 꽃처럼 보이기 때문에 유래되었다고 한다.

굴은 단백질 등 영양분이 풍부하여 ‘바다의 우유’라는 별칭이 붙었고,

국 · 전 · 죽 등 다양한 음식에 쓰이며 젓갈을 담거나, 생으로 먹기도 한다.

특히 겨울철에 나는 ‘매생이’(해조류)국에는 꼭 굴을 넣어야 제 맛이 난다. 숙취해소에 그만이다.

 

조새의 구조


굴을 채취하기 위해서는 바위에 붙어 있는 굴 껍질을 벗기고 알을 채취하는 도구가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조새인데 형태는 매우 간단하다.

생김새를 보면 그림 1에서 보듯이 손잡이, 몸통, 쇠날, 그리고 종질개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체 길이는 25~30㎝ 정도이고,

쇠날은 굴 껍질을 벗겨내는 날이며, 종질개는 굴의 눈을 문질러 껍질에서 떼어낼 때 쓰인다.
이 굴까는 조새가 천년 전의 난파선에서 2점이 나온바 있다.

1984년과 1985년 사이 전남 완도군 약산도 앞 바다에서 발굴한 도자기 운반선(완도선)에서

3만여 점의 도자기와 함께 이 어로도구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발굴된 조새가 현재 사용되는 것과 거의 같다는 점이다.

현재 완도지역에서 쓰이는 조새


 

완도선은 고려시대 해남 진산리 도요지에서 도자기를 싣고 남해안으로 항해하다 침몰한 난파선인데,

선적품인 도자기의 연대로 보아 11세기로 추정된다.

이렇게 보면 완도선 출토 조새는 약 천년 전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배에는 솥 · 수저 · 청동밥그릇 · 시루 · 숫돌 · 나무함지 등 선상에서 사용하던 생활용품이 나왔는데,

조새도 그중 하나이다.

돛을 이용한 항해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도중에 포구나 피항지에 정박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선원들이 먹을거리를 조달하기 위해 이 조새를 사용해 굴을 채취했을 것으로 보인다.

굴 채취하는 것에 한해서는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도구를 썼다고 볼 수 있다.

완도선에서 출토된 조새 (쇠날과 종질개 부분은 부식됨)


이렇듯 하나의 도구가 변하지 않고 사용되는 일은 드문 일인데,

이는 바위에 붙은 굴을 채취하는 작업 특성상 껍질을 쫄 수 있는 간단한 도구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바닷가에는 굴이 자라고 있고,

복잡하게 새로운 발명품이 나올 필요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거의 변하지 않고 같은 방법으로 굴채취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물질문화의 요소 중 어떤 것은 사라지고 어떤 것은 남아있는데

이처럼 오랜 기간 생활문화의 영속성을 지니고 있는 조새를

바다에서 찾아내니 바다야말로 ‘문화의 보고’가 아닌가 싶다.

- 곽유석, 문화재청 국립해양유물전시관 해양유물연구과장

- 2007-08-03 문화재청

 

 

 

 

 

 

 고려시대 완도선

 

 
 완도해저 발굴조사

완도 해저발굴조사 사진

1983년이 저물어 가는 12월, 전라남도 완도군 약산면 어두리 앞 바다에서 키조개 채취작업을 하던 잠수사들이 몇 점의 옛 그릇을 건져 올리게 되었다.

이 발견은 수중유물에 대한 관심을 한껏 높여준 신안해저 발굴이 끝나 갈 무렵이었으며, 또 한번 이목을 집중시켰다.

 

문화재청(당시문화재관리국)은「완도해저유물 발굴조사단」을 조직하고 수중발굴조사( 1983 - 1984년)를 실시하게 되었다. 해저에는 수 많은 유물을 가득 실은 옛 배 한 척이 침몰되어 있었다.

침몰된 배는 심하게 부식된 상태였지만, 특히 3만여 점의 도자기는 보존상태는 양호했으며, 이 외에 솥, 청동그릇, 숟가락 등의 선원생활품과 도구들도 남아 있었다.

완도 앞바다에 침몰한 이 배는 10톤 규모의 외돛배이며, 11세기 중·후반경 해남 진산리에서 그릇들을 싣고 항해하다가 완도 어두리 앞바다에 침몰한 고려시대 상선(商船)이었던 것이다.

 

완도해저 발굴의 성과는 11세기 후반경 고려 도자기에 대한 연구와 이해의 폭을 넓혀주었으며, 무엇보다도 자료의 부족으로 연구가 부진했던 '우리배(韓船)'의 역사와 그 발달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학술자료를 제공한 점을 들 수 있다.

완도 해저발굴조사 사진

 
 
완도선의 규모

완도선 상상 복원도

길이 : 약 9 m
너비 : 약 3.5m
깊이 : 약 1.7m
적재중량 : 약 10 ton

 
 
완도선의 구조

완도해저 침몰선은 고려시대 11세기경 우리나라 배로 추정된다.

배 이름은 발견된 곳의 지명에 따라 '완도선(莞島船)'이라 부른다.

완도선은 천년이라는 시간동안 바다속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뱃조각들은 심하게 부식되었으며, 이물(船首)과 고물(船尾)은 썩거나 센 물살에 의해 많은 부분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배밑(底板)과 삼(外板) 등 배의 구조는 비교적 잘 남아있었다.

 

완도선을 만든 나무는 주로 소나무와 상수리나무이며,

일부 남해안에서만 자생하는 나무도 포함되어 있어서 남해안 지방의 배임을 알게 해 준다.

완도선은 지금까지 발견된 전통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구조선(構造船)으로서

'한선(韓船)"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 주었으며,

우리 배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이정표와 같은 귀중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완도선의 구조

 
 
 완도선의 특징

완도선의 복원 모형


완도선은 후대 전통 한선의 구조와도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완도선은 비록 삼과 배밑의 경계부에 구조된 'ㄴ'자형 부재처럼 통나무배의 전통이 아직 남아있기는 하지만 완전한 구조선(構造船)으로서, 우리 배의 뿌리를 확인시켜 주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완도선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배의 중앙단면이 마치 나무상자 처럼 평평한 평저(平底)단면구조를 지닌다. 이는 우리 배, 한선의 독특한 전통인 평저형선이다.

  

삼(外板)은 5단으로 구조되었으며, 삼은 '턱붙이 겹이음(rabbetted clinker joint) 방식으로 이음하도록 구조되어 있다.


배의 횡강도를 얻기 위해 게롱(加龍木)으로 좌·우 뱃전을 붙들고 있다.

 

이물과 고물은 배밑과 삼 등으로 미뤄 볼 때, 곧고 넓은 모습을 취했을 것이다.

 

배의 모든 구조는 나무못(피쇠)으로 고정하였다.

  배밑은 긴 나무못인 가쇠로 연결되었다.


배 목재를 보호하기 위한 전통방법인 '불'과 '연기'로 그을리는 연훈법이 있는데,

  이미 완도선 때에도 이 방법이 쓰여졌음을 알 수 있다.


배밑 중앙의 시설로 보아 이 배는 외돛으로 항해했다.

 
 
 완도선의 유물

도자기

완도선에는 30,701점이나 되는 유물이 실려 있었다. 고려청자 30,645점, 잡유 26점,

토제품 2점, 철제품 18점, 목제품 9점, 석제품 1점 등이다.

 

완도해저 고려청자는 11세기 후반경에 만들어진 녹청자계통의 도자기이다.

도자기의 특징과 발견된 지점으로 보아 실생활용 그릇으로 추정된다.  

도자기 종류는 대접과 접시, 완, 잔 등이 대부분이며, 청자광구병(廣口甁) 103점과

청자매병 11점, 그리고 청자장구 2점, 유병(油甁), 호(壺), 발(鉢) 등이 있다.

 

도자기는 전남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에서 생산된 것으로 보인다.

진산리 가마터는 고려시대 대표적인 녹청자 생산지로서,

1983년 가마터 104기가 조사되었다.

해남 진산리는 내륙과 바다, 영산강의 자유로운 해운교통 조건을 갖추고 있어

도자기 수송에 매우 유리한 지역이다.

 

완도선은 이곳에서 도자기를 가득 싣고 진도와 해남 땅끝, 완도 본섬을 지나 남해안으로 항해하다 약산도 앞 바다에서 침몰한 것으로 추정된다.

완도선 도자기 유물
 

그 밖의 유물

완도선에서 발굴된 유물은 대부분 도자기이지만

그밖에 도구, 선원생활품 등의 유물도 30여 점 포함되어 있다.

이들을 재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금속제품은 18점으로 솥, 청동그릇, 숟가락, 국자 등이며,

바닷물에 의해 부식이 매우 심한 상태이다.

목제품은 9점인데 함지와 어로도구(조새), 나무망치 등이 있고,

토제품으로는 시루 등 2점이 있다.

또한 칼이나 도구를 가는데 쓰여진 숫돌도 1점이 포함되어 있다.

완도선 기타 유물

 

 

 

 

 
고려시대 선상생활

완도 해저발굴조사 사진

고려시대 배는 11~12세기경 완도선과 십이동파도선, 14세기경 달리도선, 안좌도선 등 4척이 발굴되었다.

 

완도선과 십이동파도선은 도자기운반선으로 선생생활용품으로 보이는 유물이 함께 실려 있었다. 달리도선의 경우는 삿갓 1점과 약 10cm두께의 밧줄만 발견되었다.

 

항해동안 선원들은 배위에서 숙식하였다. 사기그릇 단지 등에 쌀이나 누룩, 된장, 간장 등을 실었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 조선시대 조운선에 지급되는 품목 중에는 술빚을 쌀과 장 담글 콩을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시대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선상생활을 뒷받침해주는 유물이 완도선과 십이동파도선에서 발견되었다.

완도선에는 청동그릇류, 청동숟가락, 청동국자, 철제솥, 시루, 목제함지박 등이, 십이동파도선에는 청동숟가락, 철제솥, 시루, 작은 단지, 항아리 등이 수만점의 도자기와 함께 실려 있었다. 이 유물들은 선원들이 직접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철제 삼족솥과 토제시루는 거의 같은 유형이다. 또한 십이동파도선의 철제솥 아래에는 넓고 평평한 돌판이 발견되어 눈길을 끌었다. 돌판은 솥에 불을 짚을때 목선이 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용도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 돌판 윗부분은 불에 그을린 흔적이 있다.

 

이들 도자기운반선은 주로 연안 항로를 따라 소비지까지 항해하였다.

항해속도는 물때와 바람에 의해 좌우되지만 순풍과 조류를 잘 타면 일정은 절반이상 단축시킬 수 있었다.『宋史』고려조에 명주(현재 영파)를 출발한 배가 2일 만에 흑산도에 도착했고, 여기서 다시 2일 만에 개성의 외항인 예성강 입구에 도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최상의 조건일 때 이고, 실제로는 이보다 며칠 씩 더 걸렸을 것이다.

 

선원들은 나침반, 해도에 의존하기보다는 지형지물에 밝았으며, 섬과 연안의 높은 산 등을 가눔하며 배의 방향을 정하였다. 이러한 항해는 자연스럽게 육지나 섬을 따라가는 연안항해가 되었다.

 

고려시대 유물

고려시대 유물

 

 
바닷길로 운송하는 도자기

군산시 십이도파도헤저 도자기

우리 나라 바다에서는 수많은 옛 도자기가 발견되고 있다. 그 중 대부분은 고려시대 도자기이다.

 

고려시대 도자기 생산은 중요한 국가산업으로 초기부터 특수 마을을 지정하여 관에서 주도적으로 관리하였으며, 이들 지역은 송화·강화·부안·강진·해남 등으로서 해로를 통해 운반이 유리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시대 도자기기술은 9~10세기경 중국에서 전래되어, 11~12세기에는 비색(翡色) 청자를 생산하는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12~13세기에는 독창적인 상감청자를 탄생시켰다. 고려 후기인 14세기에는 청자가 쇠퇴하면서 조선시대 분청사기로 넘어가는 전 단계의 청자들이 만들어졌다.

 

지금까지 우리 나라 해역에서 발견된 도자기는 6만 2천여 점이 넘는다.

이들은 미술사뿐만 아니라 도자기 운송 해로와 포장방법, 생활사 연구 등 고려시대 생활사 복원에 중요한 자료이다.

 

수중발굴 고려청자

 
청자에 담긴 고려의 문화

도자기의 역사는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된다.

토기(土器)와 도기(陶器)가 만들어지고 보다 발전된 기술이 가미되어 자기(磁器)가 된 것이다. 자기에 유약을 바르고 높은 온도에서 구우면 청자(1200℃)나 조선백자(1300℃), 분청사기와 같은 아름다운 도자기가 완성된다.

 

고려청자는 신비롭고 은은한 푸른색을 띠고 있는 우리나라 대표 문화유산 중 하나로, 옥(玉)의 하나인 비취와 색이 비슷하다 하여 고려청자의 빛을 ‘비취색’이라고 한다.

 

고려청자는 10세기경에 시작되어 11세기에 눈에 띄게 발전하였다.

12세기에는 중국의 영향에서 점차 벗어나 고려만의 특유한 세련되고 아름다운 선과 모양을 갖추고, 동시에 다양한 무늬 기법으로 장식한다. 또한 비색 청자가 완성되고 상감청자가 새롭게 개발되는 등 도자기 산업은 더욱 발전하였다. 13세기에는 중국 원나라와의 오랜 전쟁을 겪으면서 도자기 문화도 영향을 받게 된다.

14세기 후반에는 해안지역에 왜구 침략이 빈번함에 따라 강진과 부안의 장인들은 내륙으로 이주하였으며, 청자는 점차 쇠퇴하였다. 이후 고려 말기의 상감청자는 조선시대 분청사기로 이어지게 된다.

 

청자는 대부분 귀족들이 사용하였으며 일반인들은 거친 막청자를 사용하였다.
고려청자는 통일신라 말과 고려 초에 새로운 귀족층이 된 호족들, 그리고 불교와 차문화 등의 영향으로 급속히 유행하였다. 찻잔, 잔받침, 차단지, 술주전자, 꽃병, 향로, 연적, 벼루, 베개, 의자, 기와, 장식품 등 다양한 생활도구들이 청자로 만들었다.

 

고려청자는 무늬와 형태에 다양한 의미가 깃들어 있다. 한국 전통의 토속신앙에서부터 불교, 노장사상, 도교, 풍수도참사상 등이 담겨 있다. 그 예로 청자에 자주 등장하는 용, 봉황, 사자, 연꽃 무늬는 왕실과 불교의 영향이며, 모란꽃은 부귀를 상징합니다. 복숭아와 석류는 도교의 영향이다. 대나무와 학, 매화, 국화는 귀족과 선비문화가 담겨 있다.

 
고려청자의 생산과 포장, 운송

우리나라 여러 해안에서 신고되어 학술 발굴조사로 건져 올린 문화재는 거의 대부분 고려청자이다. 이것은 해상교류가 활발했던 국제적인 나라이자, 조운로와 같은 해상운송로가 발달했던 ‘고려’의 특징 때문일 것이다. 또한 도자기의 성분은 오랜 기간 바다 속에서도 부식되지 않기 때문에 잘 남았다.

 

고려시대 자기는 특수 지역을 지정하여 관에서 주도적으로 관리하는 대표적인 산업이었다. 청자는 흙과 유약의 성분에 따라, 가마에 불 때는 조건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 도자기 생산지는 우수한 기술이 바탕으로 조성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운송이 편리한 해안지역에 위치하였다. 강진, 부안, 해남 등 고려시대 주요 가마에서 생산된 자기는 바닷길을 통해 지방과 개경 등 여러 지역으로 운송되었다.

고려시대 도자기 운송 해로
 

지금까지 우리나라 해역에서 발견된 고려청자는 6만 9천 여 점이다. 이들 청자는 대부분 운송 중 선박과 함께 침몰하였다. 청자운반선은 전남 완도, 군산 십이동파도, 충남 태안 대섬 등 3곳에서 발견되었는데, 침몰선에는 고려시대의 도자기 포장과 적재상태가 매우 잘 남아 있었다.
십이동파도 청자운반선의 경우, 종류별로 긴 나무 막대를 이용하여 묶은 후, 묶음 사이사이에 짚이나 갈대를 끼워 깨지지 않도록 하였다.

고려시대 도자기 운송 일러스트

태안 대섬 청자운반선에는 약 4층 정도로 자기를 포개어 실었다. 십이동파도 청자운반선과 마찬가지로 종류별로 길게 포개었으며, 이것을 다시 가로와 세로로 겹쳐 실었다. 그 사이에는 깨지지 않도록 짚과 나무쐐기를 넣어 끈으로 묶어 포장하였다.

 

특히 태안에서는 '탐진(耽津)'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목간이 발견됨에 따라 고려시대 대표적인 도자기 생산지인 강진에서 제작되었음이 밝혀졌다.

목간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유적
▲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유적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유적

▲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유적

태안 대섬 해저 유적
▲ 태안 대섬 해저 유적
태안 대섬 해저 유적
▲ 태안 대섬 해저 유적

도자기 포장상태 재현(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 도자기 포장상태 재현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도자기 포장상태 재현(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 도자기 포장상태 재현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완도 해저의 고려청자


청자 병(완도 해저, 11 ~ 12세기)
▲ 청자 병(완도 해저, 11~12세기)

완도 해저의 청자운반선에는 30,645점의 고려청자가 실려 있었다. 출토품은 대부분 고려 전기의 생활도자기로서 전남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 청자 가마터(海南 珍山里 窯址 ; 사적 제301호)에서 생산된 것과 동일하다.

그릇의 종류는 녹청색과 녹갈색을 띠는 대접과 접시, 완, 잔이 있으며, 광구병(廣口甁), 매병(梅甁), 장고(杖鼓) 등도 100여 점 발견되었다. 특히 매병과 장고에는 모란꽃과 국화, 넝쿨(唐草)무늬가 철화(鐵花)로 그려져 있다.

청자 대접(완도 해저, 11 ~ 12세기)
▲ 청자 대접(완도 해저, 11~12세기)
청자 철화 모란꽃·넝쿨무늬 장고(완도 해저, 11 ~ 12세기)
▲ 청자 철화 모란꽃·넝쿨무늬 장고
(완도 해저, 11~12세기)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의 고려청자

십이동파도 해저 출토품
▲ 십이동파도 해저 출토품

십이동파도의 청자운반선에는 8,737점의 고려청자가 실려 있었다. 대부분 무늬가 없으며 색깔은 녹갈색과 담녹색을 띤다.

그릇의 종류는 대접과 접시, 꽃모양 접시가 가장 많으며, 찻잔과 기름병(油甁) · 광구병(廣口甁) · 대접뚜껑 · 받침대 모양 청자 등도 있다.
출토품들은 11~12세기 경에 전남 해남군 화원면 신덕리 가마터(全南 海南郡 花源面 新德里 窯址)에서 생산된 것과 비슷하다.

청자 접시(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11 ~ 12세기)
▲ 청자 접시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11~12세기)
청자 대접(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11 ~ 12세기)
▲ 청자 대접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11~12세기)

청자 기름병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11~12세기)
▲ 청자 기름병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11~12세기)

청자 단지(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11 ~ 12세기)
▲ 청자 단지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11~12세기)

청자병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11~12세기)
▲ 청자병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11~12세기)

청자 꽃모양 접시(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11 ~ 12세기)
▲ 청자 꽃모양 접시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11~12세기)
 
 
태안 대섬 해저의 고려청자

태안 대섬의 고려청자운반선에는 강진에서 제작된 고려청자 약 3만 여점이 실려 있었다. 그 중에서 파손이 적고 상태가 좋은 도자기는 2만3천 여 점이다.

태안선에는 도자기 외에도 배의 부속도구인 닻돌(碇石) 2점과 닻줄 물레(호롱), 그리고 철제솥, 청동 그릇, 인골 등도 발견되었다.
도자기 꾸러미 사이에는 탐진(강진)과 개경 등이 기록된 목간도 발견되었다. 도자기는 12세기의 특징이 잘 표현되어 있으며, 개경의 귀족이나 관청 등 지배층과 사찰에서 사용하는 고급품으로 추정된다.

해저 고려청자

대부분 대접과 접시 · 완 등이며, 사자장식 향로, 두꺼비모양 벼루, 참외모양 주전자와 항아리, 발, 잔, 합 등의 특수한 청자류도 있다. 특히 백자합 1점이 발견되어 눈길을 끈다.

대접과 접시에는 파도 · 물고기 · 앵무새· 연꽃 · 모란 · 국화 · 넝쿨 등 다양한 무늬가 장식되었다. 또한 벼루에는 반점과 같은 희고 검은 무늬(鐵花·堆花)가 있으며, 잔과 잔뚜껑 일부에도 검은 풀잎(鐵花)이 간결하게 그려져 있다.

청자 항아리와 청자 참외모양 주전자 그리고 청자완

청자 사자모양 향로(태안 대점 해저, 12세기)
▲ 청자 사자모양 향로

(태안 대점 해저, 12세기)

청자 두꺼비모양 벼루(태안 대점 해저, 12세기)
▲ 청자 두꺼비모양 벼루

(태안 대점 해저, 12세기)

청자 발우(태안 대점 해저, 12세기)
▲ 청자 발우(태안 대점 해저, 12세기)

청자 연꽃잎무늬 대접(태안 대점 해저, 12세기)
▲ 청자 연꽃잎무늬 대접
(태안 대점 해저, 12세기)

청자 파도·물고기 무늬 완(태안 대점 해저, 12세기)
▲ 청자 파도·물고기 무늬 완
(태안 대점 해저, 12세기)

청자 잔 (태안 대점 해저, 12세기)
▲ 청자 잔 (태안 대점 해저, 12세기)

청자 철화무늬 (태안 대점 해저, 12세기)
▲ 청자 철화무늬

(태안 대점 해저, 12세기)

비안도 해저 출토품
▲ 비안도 해저 출토품
 
군산 비안도 해저의 고려청자

비안도 해저에서는 고려청자 3,178점이 발굴되었으며, 안타깝게도 침몰선은 발견되지 않았다.

청자 연꽃잎무늬 잔(군산 비안도 해저, 12세기 후반)
▲ 청자 연꽃잎무늬 잔

(군산 비안도 해저, 12세기 후반)

이곳은 새만금 간척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곳과 가까운 해역으로서, 방조제 축조 때문에 생긴 빠른 조류가 바닷속 갯벌을 쓸어감에 따라 800여 년간 잠들었던 도자기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릇의 종류는 대부분 대접과 접시이며, 완과 통형잔(筒形盞), 상감무늬 합(盒) 등이다. 대접과 접시에는 연꽃, 모란꽃, 앵무새 무늬 등이 그려져 있고, 특히 합 8점에는 음각 또는 흑백 상감의 국화와 모란꽃 무늬가 장식되었다.
이 청자들은 전북 부안군 유천리 가마터(全北 扶安郡 柳川里 窯址 ; 사적 제70호)에서 출토된 도자기와 가장 유사하다. 고려시대의 부안은 고급 도자기를 많이 생산하여 강진 청자와 함께 명성이 높았던 곳이다.

청자 상감 국화무늬 합 (군산 비안도 해저, 12세기 후반)
▲ 청자 상감 국화무늬 합
(군산 비안도 해저, 12세기 후반)

청자 모란무늬 합 (군산 비안도 해저, 12세기 후반)
▲ 청자 모란무늬 합
(군산 비안도 해저, 12세기 후반)

청자 앵무새무늬 대접(군산 비안도 해저, 12세기 후반)
▲ 청자 앵무새무늬 대접
(군산 비안도 해저, 12세기 후반)

청자 발 (군산 비안도 해저, 12세기 후반)
▲ 청자 발

(군산 비안도 해저, 12세기 후반)

 
 
보령 원산도 해저의 고려청자

보령 원산도 고려청자 유적은 원산도 사창(社倉) 마을 앞 해안의 갯벌지역으로, 약 1,000여 점의 청자 파편들이 발견되었다. 비록 모두 파편이지만, 고려청자 전성기를 대표하는 뛰어난 품질의 비색청자이다.

 

그릇의 종류는 대접과 접시, 잔은 물론 특수한 용기인 향로와 매병, 의자, 베개 등 매우 다양하다. 무엇보다도 그릇의 정교한 장식과 무늬, 유약, 제작기법이 국보나 보물급 청자들과 비슷하여 학술적 가치가 높다.
원산도 청자들과 비슷한 유물로는 1237년 축조된 강화 길정리의 희종 석릉(江華 吉亭里 熙宗 碩陵 ; 사적 제369호), 1239년 축조된 강종비 원덕태후 곤릉(康宗妃 元德太后 坤陵 ; 사적 제371호), 1245년 창건된 강화 선원사(江華 禪源寺址 ; 사적 제259호) 등의 출토품이 있다.

청자 방형 향로(원산도 해저, 13세기)
▲ 청자 방형 향로(원산도 해저, 13세기)

청자 방형 향로 복원 후 모습

▲ 청자 방형 향로 복원 후 모습

청자 향로(원산도 해저, 13세기)
▲ 청자 향로(원산도 해저, 13세기)

청자 사자모양 향로 복원 후 모습 (국보 제 60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청자 사자모양 향로 복원 후 모습
(국보 제 60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자 오리모양 향로(원산도 해저, 13세기)
▲ 청자 오리모양 향로

(원산도 해저, 13세기)

청자 오리모양 연적 복원 후 모습(원산도 해저, 13세기)
▲ 청자 오리모양 연적 복원 후 모습
(국보 제 74호 간송미술관 소장)

청자 동자상(원산도 해저, 13세기)
▲ 청자 동자상(원산도 해저, 13세기)

청자 동자상 복원 후 모습
▲ 청자 동자상 복원 후 모습

청자 의자(원산도 해저, 13세기)
▲ 청자 의자(원산도 해저, 13세기)

청자 국화·연꽃·넝쿨무늬 투각 의자 복원 후 모습 (보물 제416호,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
▲ 청자 국화 · 연꽃 · 넝쿨무늬투각의자 복원후 모습
(보물 제416호,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

 
 
태안반도 해저의 간지명 고려청자

태안반도 주변 바다는 예로부터 연안항해를 할 때 반드시 지나가는 항로에 위치하며, 항해 중 난파로 해저에 가라앉은 문화재들은 1976년 이후 신고되고 있다. 수중 발굴은 1981년부터 1987년까지 이뤄졌다.

이때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수 십 점이 발굴되었다.
그 중 고려청자는 40점으로, 제작 시기가 빠른 해무리굽 청자완 1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고려 후기에 제작된 것. 대표적인 유물은 청자투각받침대 1점과 『己巳』라는 글자가 새겨진 간지명(干支銘) 상감청자들이다. 己巳年(기사년)은 1329년으로, 출토된 청자의 제작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태안반도 해저 출토품
▲ 태안반도 해저 출토품

청자 국화·연꽃·넝쿨무늬 투각 의자 복원 후 모습 (보물 제416호,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

 
무안 도리포 해저의 상감청자

무안 도리포의 해저 유적에서는 고려청자 638점이 발견되었다.

모두 고려청자가 쇠퇴하는 14세기의 상감청자이다.

그릇의 종류는 대접과 접시가 대부분이고, 잔 · 잔 받침 · 발 등도 있다.

그릇의 안과 밖에는 구름과 봉황, 국화, 모란, 연꽃, 버드나무 무늬 등이 상감기법으로 장식되었고, 굽의 받침에는 모래나 흑색 태토빚음을 사용하였는데, 흑색 태토빚음 받침은 고려시대 강진의 가마에서 사용한 대표적인 기법이다.

이런 특징으로 볼 때 무안 도리포의 상감청자는 전남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10호 가마터(全南 康津郡 大口面 沙堂里 窯址)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리포 해저 출토품
▲ 도리포 해저 출토품

도리포 해저 출토품

 

 

  

 

중세 중국무역선, 신안선

 

신안선은 1323년 여름, 중국에서 일본으로 항해였으며, 전남 신안해저에 침몰된 불운의 무역선이다.

배에는 수많은 무역품이 실려 있었다.

 

 

중세 중국 무역선, 신안선
신안선

700여년 동안의 긴 잠에서 깨어난 신안선은 뱃머리가 북동쪽으로 뉘어진 채 20m 깊이의 바다 속에 매몰되어 있었다.

바닷물에 드러난 선체와 많은 화물들은 강한 조류와 바다 생물에 의해 손상을 입거나 떠밀려가 원래의 모습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바닷속 갯벌만은 배를 보호하고 있었다.

갯벌에 묻힌 우현은 비교적 잘 남아 있었으며, 좌현은 1/3정도만 남아 있었다.

발굴은 먼저 배에 실려 있던 화물들을 인양한 후 침몰선은 수중에서 해체하여 720편의 선체편으로 분리해 인양되었다.

신안선은 중국 무역선으로, 절강성 경원항(현, 영파)에서 출항하여 일본으로 항해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배가 건조된 지역은 중국 복건성지역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배는 세계적으로 오랜 역사를 가지며, 형태(船型) 또한 매우 다양하다.

중국 해선은 복선(福船), 사선(沙船), 조선(鳥船), 광선(廣船) 등 4종류 분류된다.

항주만(抗州灣) 이북은 연안항로가 수심이 얕기 때문에 사선과 같은 평저형이 발달하였으며,

이남지역은 수심이 깊고, 만이 좁고 길며 섬들이 많아서 복선과 같은 첨저형 해선이 발달하였다.

신안선은 바로 중앙에 대형 용골(龍骨)을 갖춘 첨저형 해선(解船)이며, 그중에서도 복선(福船)형 구조의 배이다. 용골은 위쪽으로 구부러진 곡선형이며, 돛이 3개있는 목제 범선이다. 배 형태는 넓은 폭에 비해 길이가 짧다. 화물적재 창고(艙)는 7개가 있으며, 넓고 깊어 많은 화물을 적재할 수 있다. 주로 마미송과 넓은잎 삼나무로 건조되었다.

우리나라 신안선 발견은 중국학계에서 고대 무역선사상 3대 발견중 하나로 평가한다.

신안선

현재까지, 중국 고대 침몰선은 중국 해역에서 40여척, 한국해역에서 2척이 발견되었다. 일본에서는 닻 등 배 구조물은 발견된 사례가 있다. 중세무역선이 가장 많으며, 그 중 1984년 산동성 봉래시 등주항에서 신안선과 시대, 구조 등이 비슷한 봉래 고선(古船)이 발견되었다.

신안선의 발견은 문헌상으로 상상하던 중세 동아시아 선박을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하였다. 세계수중고고학계를 놀라게한 신안선은 약 20년간의 과학적 보존과 복원과정이 이뤄졌다.

또한 배를 보호하고,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선형 구조물’을 설치하여 전시하고 있다.

  

 신안선의 구조

 
신안선 상상 복원도
주요내용 실제 규모 잔존된 규모
길 이 약 34.8m 28.4m
너 비 약 11m 6.6m
깊 이 약 3.75m -
선수높이 약 7m -
톤 수 200ton -
 
신안선의 구조  

 

 

배의 밑 부분에 용골(龍骨)이 시설된 V자형 단면구조(斷面構造)로 7곳에 칸(隔壁)이 시설된 8개의 창고(船艙)로 구분되어 있음.


외판의 이음은 마치 물고기 비늘처럼 겹쳐 붙인 홈붙이 클링커식(rabbeted clinker) 외판 접합구조이며, 바닷물과 맞닿는 부분은 얇은 포판재(包板材)로 보호함.


선수(船首)와 선미(船尾)는 편평한 형태를 이루고, 갑판 좌우에 V자형의 깊은 물길(水路)과 배 중앙부에 2조의 대형 물통(水槽)이 시설되어 있음.


배 짓는 나무로는 중국산 소나무(馬尾松)와 넓은잎삼나무(廣葉杉)가 사용되었으며, 철못(鐵釘)이 사용되고, 배의 틈새는 박실과 동유회(桐油灰 ; 석회와 오동나무 기름을 혼합한 방수 재료)를 사용하여 방수를 하였음.


최소한 2개 이상의 돛대를 지닌 범선(帆船)으로서, 중국의 전통 선형(船型) 중 복선형(福船型) 선박으로 분류됨.

 

 

 신안선의 항로

옛 기록에 의하면 일본과 중국을 연결하는 항로에는 3방향의 물길이 있었다.
하나는 우리 황해를 우회하는 북로(北路)이고,

또 하나는 남쪽으로 나카사키(沖繩)를 경유하는 남도로(南島路)가 있다.

그러나 중세의 무역선들은 동지나해와 황해의 경계를 따라 항해하는 남로(南路)를 주로 이용하였다. 즉 양자강 하류에서 주산열도(舟山列島)를 거쳐 우리 나라 제주도 남쪽을 통과한 후 일본 구주의 오도열도(五島列島)를 목표로 항해하는 것이다.

신안선의 항로

 

 

 신안선이란

신안선은 중세 중국과 일본 간의 무역선이다.

14세기는 우리나라는 고려왕조, 중국은 원(元)왕조, 일본은 가마쿠라막부시대로서, 활발한 교역이 이뤄지는 시대였다.

1323년 여름, 신안선은 당시 중국의 무역항 경원(慶元 ; 현재의 영파)에서 수만점의 무역품을 싣고 일본을 향해 출항하였다. 최종목적지는 일본 교토(京都)에 있는 사찰 동복사(東福寺)였다. 서남계절풍을 이용해 고려해역을 지나는 국제 교역항로인 남로(南路)를 따라 항해하였다.

그러나, 약 700년후 신안선은 일본이 아닌 우리나라 전남 신안 해저에서 발견되었다. 아마도 신안선이 항해 중 태풍을 만나 우리나라 서남해안을 표류하다가 침몰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 분석결과, 신안선에 승선한 사람들은 중국인 선원과 일본인 무역품 주인 또는 그 대리인 등으로 추정된다.

침몰선은 발견지역을 따라 신안선이라 부르고 있으며, 700년간의 역사적 비밀은 배와 함께 발굴된 유물을 통해서 밝혀졌다.

 
항해시기와 국적을 알려주는 유물들
중국동전 중국 연호가 기록된 화물표
출항지가 쓰여진 청동 저울추 목적지가 쓰여진 목패
 신안선 무역품
신안선 무역품

신안선은 당시 무역품과 무역규모를 알 수 있는 수많은 무역품이 실려 있었다. 발굴된 유물은 23,502점이며, 도자기 등 각종 공예품, 동전, 목재(자단목), 식물 씨앗, 악기, 벼루, 놀이도구(장기, 주사위), 실생활품 등 매우 다양하였다. 대부분 중국제품이지만, 고려청자와 고려 청동거울 등 고려제품과 나막신, 칼코 등 일본제품도 일부 발견되었다.

무역품들은 발견당시 배 내외부에 흩어져 있었으나, 본래는 7개의 화물창고(船倉)에 쌓여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배에 화물을 실을때는 먼저 천 개(本)가 넘는 자단목(紫檀木)을 차곡히 싣은 후, 그 위에 중국동전 28톤을 적재하였다. 도자기와 칠기, 금속제품 등은 나무상자로 포장하였다.

이 유물들은 중세 동아시아 무역활동 실증자료로서, 그동안의 문헌과 발굴 이상의 역사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또한 고려와 일본제품은 중국제품에 비해 극히 적은 수량이지만, 항로상 고려 경유, 고려인과 일본인 승선 등을 상상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아울러 중세 동아시아 무역사, 사회·경제상, 공예미술(工藝美術), 선박사, 등 역사복원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유물 내용
도자기 금속제품 석제품 동전 자단목 기타
청자 백자,청백자 기타
12,377점 5,311점 2,973점 729점 45점 28톤 1,017본 575점
20,661점
무역품 포장상자와 목재유물
무역품 포장상자

신안선 무역품은 직사각형과 원통형 나무상자에 포장되었다.
이 중 원통형 상자는 형태에 따라 두 종류가 있으며, 액체류 또는 곡식류 포장용의 높고 좁은 형태와 도자기류 포장용의 낮고 넓은 형태의 상자이다.

상자들의 크기는 높이 39~66.5cm, 길이 53~74cm, 너비 37.4~48cm 등으로 다양하다. 일부 상자 외부에는 ‘대길(大吉)’, ‘산(山)’  ‘♠’  ‘∴’ 등 여러 가지 문자와 부호들이 쓰여 있는데, 이것은 무역품 주인이나 내용물을 구분하는 표시로 추정된다.

목제유물은 포장상자외에 화물표, 반, 그릇, 합, 원통용기, 빗, 보살상, 도장(용인각), 장기말, 주판알, 저울대, 일본 나막신, 칠기제품 등이 매우 다양하다. 화물표(木牌)는 신안무역선의 역사를 풀어준 중요한 단서가 되는 유물이다. 화물표는 360점이 발견되었으며, 배의 출항 년도와 시기, 화물내용, 화물주인, 선단구성 등이 묵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칠기제품은 대부분 정교하고 칠윤기가 아름다우며, 명문이 새겨진 것들도 있다. 목제유물 중 특히 눈에 띠는 것은 일본 장기말이다. 모두 7점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오랜 항해동안 선원들이 오락용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도자기
중국 도자기

신안선에는 도자기가 2만점 이상 실려 있었다.
도자기는 대부분 중국도자기이며, 고려청자와 일본도자기도 소량 발견되었다.
도자기 생산지는 중국 절강성과 강서성을 중심으로 한 용천요(龍泉窯)와 경덕진요(景德鎭窯) 등이며, 중국에서 일본으로 수출한 무역품으로서, 당시 일본은 중국도자기 수입의 전성기였다.

신안선의 항해한 중국 송ㆍ원나라때는 해상교역시대였으며, 그 결과 용천요 청자 등 도자기 생산과 유통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신안선에서 발굴한 도자기는 대부분 원나라때 도자기이며, 남송(南宋) 양식의 청자어룡식병, 청자삼족향로, 청자완 등도 소량 발견되었다.
도자기는 중국의 대표적인 무역상품이었으며, 세계적으로 가치를 인정받는 명품도자기였다. 중국 도자기는 세력을 상징하는 물품이자 사치품으로 특수한 계층만이 소유할 수 있었다. 주로 9~10세기경부터 19세기경까지 약 천년에 걸쳐 아시아를 비롯한 유럽, 아프리카, 지중해 등 세계 각지로 수출되었으며, 고려시대에도 수만점의 중국도자기가 수입되었다.

고려청자
고려청자

신안선에는 고려청자 7점이 실려 있었다. 신안선의 고려청자는 매병과 대접, 잔받침, 베개, 연적 등이 있으며, 12~14세기경에 고려시대 대표적인 도자기 생산지인 강진과 부안 등지에서 제작된 도자기이다.
수많은 무역품 중 고려청자의 발견은 신안선의 고려 경유와 교역, 그리고 고려인의 승선 등을 유추하게 하였다. 그러나, 도자기 제작시기가 신안선의 항해시기보다 빠른 점, 적은 수량, 선적 위치 등으로 미루어 볼때, 당시 중국에서 수집되어 실린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청자는 신안해저 외에도 중국과 일본의 여러 유적에서 중국도자기와 함께 소량씩 발견되고 있다. 이 유물들은 고려도자기 유통과 교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동전
동전

동전은 무려 28톤(약 800만개)이나 실려 있었다. 모두 60여 종류로서 화천(貨泉 ; A.D. 14년)에서부터 지대통보(至大通寶 ; 1310년)에 이르기까지 약 1300년에 걸친 중국 동전이다. 동전은 배의 화물창고(船艙) 아랫부분과 선미쪽에 실려 있었으며 그 위에 무역품 상자가 쌓여 있었다. 이것은 항해를 할 때 무역선의 안정성과 균형 유지를 위해 선택한 선적방법으로 추정된다.

동전은 수 백 개씩 꾸러미 형태로 묶여 주머니에 담겨 있었다. 여기에는 대전(大錢)이라 부르는 1문전부터 대형의 고액 화폐도 포함되는 등 여러 종류가 섞여 있었다. 동전 꾸러미에는 東福寺, 釣寂庵, 敎仙, 一田早米, 八郞, 松菊得 등 사찰과 사람 이름, 그리고 쓰임새가 기록된 화물표[木簡]도 발견되었다.
신안선이 항해하던 전·후 시기 일본은 중국에서 막대한 양의 동전을 수입하였다. 이 중국동전은 일본사회에서 화폐로서 유통되었으며 동복사와 같은 사찰에서 대불(大佛) 조성 원재료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속유물
금속유물

신안 침몰선에서 인양된 금속유물은 총 729점이다. 종류는 청동거울, 병, 잔, 촛대, 자물쇠, 향로, 주방용기, 악기 등 여러 가지 물건이 인양되었다. 이들 유물은 공예품, 제사용품, 일상생활용품, 그리고 선원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상생활용품 등으로 구분된다.

청동추는 저울추이며,「慶元路」라는 이름이 몸체에 새겨져 있다.

 

‘경원’은 현재 중국 절강성 영파(寧波; 닝보우)의 옛 이름으로, 이 침몰선의 출항지를 추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였다.


고려 청동숟가락은 수량은 적지만 버드나무 잎과 제비꼬리 모양으로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숟가락 형태이다.


청동거울은 10여 점이 발견되었는데, 고려와 중국·일본 동경이 섞여 자후(子厚)라는 명문이 있는 동경은 고려의 유물로 추정된다.


주석정은 다른 금속과 합금에 사용되는 주석 덩어리로서, 모두 300여 점이 인양되었다. 표면에「上品白銅重 --- 」등 주석정의 등급과 무게가 새겨져 있다.

금속괴
금속괴

신안선에는 불상이나 금속장식품 등을 만들 때 사용하는 원재료인 금속괴가 345점이나 실려 있었다. 금속괴는 중국과 동남아시아, 고려, 일본의 주요 교역품 중 하나였다.
금속괴 가운데는 「平心」 「王九郞」 「王乙斗」 「上品白錫中〇〇 足」 등 글자가 새겨져 있다.

무역품 포장
무역품 포장 상자
▲무역품 포장 상자

무역품은 잘 짜여진 나무상자로 포장되어 있었다. 상자들은 크기가 다양하며, 형태는 직사각형과 원통형의 두 종류가 있습니다. 나무상자에는 화물의 소유자 표시로 보이는 「大吉」 「山」 등 글씨나 부호가 새겨져 있다.
상자 안에는 각종 무역품을 종류별 또는 용도별로 가지런히 포개어 포장하였으며, 그 사이에 나무뿌리나 줄기, 나무조각 등을 넣어 서로 부딪혀 깨지는 것을 방지하였다.

  

 

 

 

실크로드를 통한 향나무 교역
전시실의 자단목
▲ 전시실의 자단목

자단목(紫檀木)은 태우면 향기로운 연기를 내는 분향료(焚香料)와 고급 공예품 재료로 사용하는 나무이다. 백단(白檀), 황단(黃檀)과 함께 단향(檀香)의 한 종류이며, 원산지는 인도 남부와 스리랑카이며 한국과 중국, 일본에는 대체로 불교와 함께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자단목 1,017본(本)은 신안선 맨 아래 부분에 적재되어 있었다. 이 중 350여 점에는 다양한 문양과 문자, 기호 등이 음각 또는 묵서(墨書)로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자단목의 용도와 소유주를 표시한 것으로 추정된다.

  
▲ 다양한 기호가 표시된 자단목

 

 

향료ㆍ약재

신안선에서 인양된 향료·약재는 후추, 산수유, 사군자, 은행, 매실, 호도, 계피, 생강 등 25종이나 된다. 주로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당시 교역 범위가 매우 넓었음을 알 수 있다.
향료 · 약재는 송(宋) · 원(元)나라 때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 중국으로 수입 또는 전래되었다. 특히 후추는 중세 동서양의 주요 교역품으로서 큰 비중을 차지한 품목이다. 후추의 경우, 중국 정부는 전매제도로 민간에 판매하여 국가의 재정수입을 올렸으며, 일본 등지로 수출하는 품목 중 하나였다.

 
후추 / 원산지 : 인도(신안 해저)
 
복숭아 / 원산지 : 한국, 중국(신안 해저)
 
여지 / 원산지 : 중국(신안 해저)
 
은행 / 원산지 : 중국(신안 해저)

 

 

목제품

목제품은 보살상, 무역품 상자, 목패(화물표), 저울대, 자(尺), 자단목, 부채, 장기말, 나막신, 삿갓, 칠기(대접·벼루) 등이 있다. 무역품 상자와 자에는 大吉(대길)이라는 글자가 기록된 것도 있다.

또한 부채와 두루마리 그림의 종이부분은 오랜 침몰과정에서 사라져버린 상태였다.

석제품

▲ 맷돌(신안 해저, 중국 14세기)

석제품은 벼루, 맷돌, 돌판, 방추차 등 40여 점 발견되었다. 벼루는 모두 20여 점이며 봉황무늬 벼루와 같이 예술성이 높은 공예품도 있다.

 

 

기타

향신료와 약재

신안선에는 유리 세공품과 동물뼈로 만든 도장, 주사위 등도 실려 있었다.

7백년 전의 주사위는 흥미롭게도 오늘날의 것과 거의 동일한 형태이다.

 

 

 

 신안선 속의 일본문물

신안선에서는 고려의 공예품과 생활용품도 발견되었다. 출토품은 고려청자 7점과 청동 거울, 청동 숟가락 등. 고려 제품은 신안선이 고려를 경유하여 일본으로 항해하였을 가능성도 상상하게 한다.

 

고려청자는 사자모양 연적, 연꽃무늬 매병, 상감기법의 뚜껑 · 베개 · 잔받침 등 고급품으로 13~14세기경에 강진 사당리 가마에서 제작된 도자기로서 중국에 건너간 도자기를 일본인이 다시 수집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세계에서 청자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고려와 중국뿐이었다. 고려청자는 신비한 색상과 정교한 장식, 뛰어난 조형미를 갖추었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 상류사회에서도 호평을 받는 명품이었다.

 

청동숟가락은 고려 숟가락의 특징이 잘 나타난 제비꼬리모양 손잡이를 하고 있다. 고려의 청동거울로는 ‘子厚(자후)'가 새겨진 거울’이 있습니다. 거울의 면에는 구름과 두 마리 물고기 무늬가 엇갈리게 배치되었으며, 그 옆에 ‘子厚’가 양각으로 새겨졌습니다. 이러한 특징은 중국 금나라의 청동거울 양식으로서, 고려에서 모방하여 제작한 고려제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토 매병 ( 신안 해저 일본 가마쿠라 시대)

신안선에 실린 일본 문물들

 

 

 

 

 

 

 

 

 

 

 

 

 

 

 

 

 

 

 - 강진 옹기배 해상로드탐사 - 

 

 옹기 가득 싣고, 옛 뱃길 오백리를 가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소장 성낙준)는 근 · 현대 강진 지역의 옹기운반선 ‘봉황호’를 복원해

2010년 9월 8일부터 11일까지 강진에서 여수까지 옛 방법 그대로 항해하는

‘강진옹기배 해상로드탐사’를 실시한다.

 

   

 

봉황호는 길이 20m, 너비 5.9m, 깊이 1.9m 크기로 세 개의 돛이 달려 있다.

배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 옹기장 정윤석이 제작한 옹기 500여 점을 싣고 간다.

강진 칠량 봉황마을에서 출발한 배는 완도 평일도(8일), 고흥 외나로도(9일), 여수 백야도(10일)를 거쳐

11일 여수항에 도착할 예정이다.

 

항해는 50년 경력의 뱃사공이 주도하는데,

동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바람의 힘만을 이용하는 옛 항해 방법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속도를 측정하고 바람을 이용하는 방법, 연안 항로에서 이정표가 되었던 지형지물 인지 방법 등

전통 항해 기술은 학술 보고서와 영상다큐멘터리로 제작해 향후 관심 있는 국민들에게 제공할 계획이다.

 

관련 행사로는 9월 7일 오후 2시 강진문화회관에서 ‘옹기와 옹기로드’를 주제로 학술세미나가 열리고,

9월 8일 오전 10시 강진 봉황마을에서 오백리 뱃길의 시작을 알리는 출항 행사가 있다.

여수항에 도착하는 9월 11일 오후 2시에는 ‘옹기장터’를 마련해

지역 주민들에게 중요무형문화재 옹기장이 직접 만든 제품을 판매한다.

 

강진옹기배 해상로드탐사 행사는 남해안 옹기 운반의 실제를 규명하고,

이제는 사라져 가고 있는 전통 항해 방법을 기록해 이를 후대에 전승하고자 한다.

또한, 강진 옹기의 우수성을 알려 지역 경제 활성화에 이바지 할 수 있을 것이며,

더불어 목적지인 여수에서 열리는 2012여수세계박람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원하는 마음도 담았다.

행사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와 강진군, 국립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이 공동으로 주관하고,

여수 도착 환영행사와 옹기장터는 여수시가 주최한다. 

 

 

- 2010년 9월1일,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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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배, 한선(韓船) :  http://blog.daum.net/gijuzzang/851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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