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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황금의 나라, 신라의 왕릉 '황남대총'

Gijuzzang Dream 2010. 9. 6. 19:08

 

 

 

 

 

 

  

 

 

 Golden Splendors: The Royal Tomb 

                     of Silla "Hwangnamdaechong" 

 

ㅇ전시기간 : 2010년 9월 7일~10월 31일
 ㅇ전시장소 : 국립중앙박물관 1층 특별전시실

 

ㅇ전시작품 : 황남대총 북분출토 금관 등 595건 1,268점

 

 

국립중앙박물관은 용산 이전개관(2005.10.28) 5주년을 기념하여

특별전시 『황금의 나라, 신라의 왕릉 황남대총』을 개최한다.

1975년까지 경주 황남대총(경주에 있는 신라 고분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봉분이 두개인 쌍릉으로,

문화재청의 전신인 문화재관리국이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하였음)에서 발굴한 유물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왕릉의 전모를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한 특별전으로

신라 왕릉 하나만을 주제로 한 대규모 전시론 처음이다.

신라는 아주 오래 전부터 황금의 나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황금의 나라, 신라의 진정한 모습은

우리 손으로 신라 마립간(서기 4세기대 신라에서 사용한 칭호로 왕을 의미함)시기의 왕릉인

‘황남대총’을 발굴하고 나서야 체계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거대한 왕릉의 탄생 비밀과 고대국가로 성장한 신라의 국제적 위상,

그리고 신라가 황금의 나라를 이룩하게 된 배경을 밝히는데 역점을 두었다.

 

총 58,441점의 황남대총 출토품 중에서 금관을 비롯한 각종 황금 장신구와 귀금속 그릇들,

서아시아에서 온 유리그릇 등 신라 황금문화의 진수를 보여주거나 문화적 계통을 밝혀줄 1,268점을

엄선하여 전시한다. 이렇게 대규모로 일반인에게 공개하는 것은 발굴 후 처음이다.

아울러 황남대총의 구조를 쉽게 알 수 있도록 전시장에 일부 구조물을 직접 재현해 놓고,

고분 내부 구조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3D 홀로그램 영상물도 마련하였다.

이를 통해 신라 마립간시기 왕릉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이해와 더불어 간접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황남대총 출토품은 최근에 동북아시아 고고학에서 새로운 국제적 기준을 제시하고 있어

학문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

황남대총이 신라 마립간[麻立干]의 왕릉 중 하나이기에 왕릉의 축조 시점을 추론할 수 있어

절대연대와 더불어 당시의 문화유형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왕릉에서 출토된 고구려 계열의 다양한 문물들은

중국 지안[集安]에서 근년에 발굴된 고구려 태왕릉(太王陵 : 광개토대왕비 근처에 있는

초대형 기단식 돌무지무덤으로 광개토대왕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음)의 주인공을 밝힐 수 있는

많은 단서를 제공해 준다.

또한 최근 요동치고 있는 일본의 고훈시대[古墳時代]의 절대연대에도 황남대총 남분의 주인공은

새로운 학설의 근거를 마련해 준다.

즉 동북아시아 고고학에서 황남대총이 앞으로 진행될 연구에 시금석이 되기에,

그간의 연구 성과를 공개하는 이번 특별전시는 그 의의가 더욱 크다.

 

 

황남대총 북분출토 금관.JPG 

                 황남대총 북분출토 금관(높이 27.3㎝)

 

 

황남대총(皇南大塚)이란?

'황남대총'이란 이름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이루어진 발굴조사 이후,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큰 무덤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

황남대총은 남북으로 두 개의 무덤이 서로 맞붙어 있는 쌍무덤이다.

남쪽 무덤[남분: 南墳]을 먼저 만들고, 뒤이어 북쪽 무덤[북분: 北墳]을 잇대어 만들었다.

내부 구조는 모두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밝혀졌다.

 

 

황남대총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남분에는 왕이 묻혔고 북분에는 왕비가 묻혔다. 남북 길이가 120m이며 동서 지름이 80m인데,

남분은 높이 21.9m이고 북분은 높이 22.6m이다.

신라의 쌍무덤 가운데 가장 크고 주인공들은 화려한 황금 장신구로 치장하고 있어

5세기에 만들어진 왕릉임이 분명하다.

남분의 주인공이 당시에 마립간이란 칭호로 불린 신라의 왕이지만,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다.

 

황남대총에서 확인된 문화적 요소는 많은 부분이 고구려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신라와 고구려가 서로 잘 지내던 4세기 후엽부터 5세기 중엽 사이에

황남대총이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이 기간동안 내물왕, 실성왕, 눌지왕이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황남대총 남분의 주인공은 이 세 명의 왕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장송은 무덤에서 시작된다.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은

나무로 널과 덧널을 짜고, 그 주위에 강돌로 돌무지를 쌓고, 그 위에 흙을 높게 덮은 무덤이다.

나무로 짠 널과 덧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썩어 내려앉는다.

돌무지 역시 덧널이 썩으면서 내려앉는다.

봉분은 흙을 켜켜이 다져 쌓지 않았으므로 표면에 따로 찰흙을 입히지 않으면 금방 흘러내릴 수 있다.

그러므로 돌무지덧널무덤은 생전에 만들어 두기 어렵고, 그러한 증거가 지금까지 발견되지도 않았다.

 

황남대총에는 봉분이 두 개인데,

그 이유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돌무지덧널무덤 2기를 잇대어 만들었기 때문이다.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왕을 모신 남분을 먼저 만들고, 이후에 왕비를 모신 북분을 남분에 붙여 만들었다.

황남대총은 신라 돌무지덧널무덤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쌍무덤이다.

 

 

죽은 자의 무덤 위에서 새로이 이어가는 산 자의 권력

 

마립간시기의 신라 사람들은 이승과 저승이 이어져 있다고 여겼다. 이를 계세사상(繼世思想)이라고 한다.

아울러 죽은 조상의 권위는 죽어서도 금방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무덤에는 생전에 지녔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과 음식을 가득 바쳤다.

저승에서의 삶도 풍족해야 하기에, 이에 따른 재화의 엄청난 손실은 현실에서 마땅히 감내해야 할 의무였다.

산 자는 이 모든 정성을 다하고 나서야 조상의 권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계승자는 때때로 시조 사당을 찾아 물려받은 권위를 모든 이에게 각인시켰다.

이로써 산 자는 무덤에서 권력을 이어받았고, 거대한 왕릉은 기념물이 되었다.

 

황남대총에는 왕과 왕비의 지위를 상징하는 수많은 부장품이 묻혔다.

대부분의 장신구는 황금으로 만들었다.

귀금속과 금동으로 꾸민 큰 칼과 여러 벌의 말갖춤, 그리고 금그릇과 은그릇도 권위를 드러내는 물품들이다.

무력은 여러 자루의 큰 칼과 유독 크고 긴 창, 수많은 화살로 나타내었다.

재력은 여러 개의 큰 독에 가득 담아 둔 곡식과 음식, 엄청난 물량의 덩이쇠로 드러내었다.

농사와 대장간에 쓰는 연모는 백성을 먹여 살릴 생산을 장악하고 있다는 뜻으로 넣었다.

왕실을 더욱 빛나게 한 주변 나라와의 교류는 유리그릇을 비롯한 희귀한 외국 물품으로 대신하였다.

넉넉한 일상은 갖가지 음식과 쇠솥을 비롯한 주방도구, 칠기와 수많은 질그릇으로 드러나게 하였다.

이렇듯 왕릉은 저승의 궁전에 걸맞게 꾸려졌다.

 

 

 


 

 

 

 

 

 

황금의 나라, 1600년 비밀의 문을 연 황남대총

 

 

 

무덤방 크기만 동서 24m에 남북 20m, 남북 길이 120m에 봉분 높이 23m에 이르는

현존 한반도 최대 규모 고분인 경주 황남대총(皇南大塚)이 1천600년 만에 마침내 문을 열었다.

남편이자 신라왕이었을 남자는 남쪽 봉분에,

그의 부인은 북쪽 봉분에 자리한 쌍둥이 적석목곽분(績石木槨墳. 돌무지덧널무덤)인

황남대총 특별전이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1층 특별전시실에서 개막했다.

 

전시 공간인 1층 특별전시실에 들어서면 거대한 목곽(木槨)이 눈에 들어온다.

실제 발굴 당시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무덤의 내부 구조를 거의 같은 크기로 재현했다.

황남대총 쌍분(雙墳) 중에서도 남분(南墳) 봉토 안에서 발견된 나무 기둥 구멍을 기초로

목조건축물을 실물의 95% 크기로 복원한 것이다.

이 모형은 완벽한 복원품이 아니라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기둥 구멍 흔적을 기초로 나무 기둥을 박고

들보를 얹은 수준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왜 이 무덤을 대총(大塚. 큰무덤)이라 하는지,

그리고 왜 현존 국내 고분 중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하는지를 실감케 하기에 충분했다.

 

이 목조구조물의 정확한 기능은 알 수가 없다.

무덤(돌무지)을 쌓기 위해 필요한 구조물이라는 견해가 우세하지만,

최근에는 신라고고학 전공자인 차순철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가 무덤을 조성하기 전에

시신을 임시로 안치해 둔 공간인 빈전(殯殿)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어떻든 이 목조구조물은 발굴조사 결과 규모가 동서 24m에 남북 20m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목조구조물 복판에 무덤 주인공이 안치된 목곽(木槨)과 목관이 배치돼 있다.

목조구조물 한쪽(서쪽) 끝에는 토기를 비롯한 부장품을 집중적으로 묻은 공간인 부곽(副郭)이 있다. 

 


고려대 사학과 교수이기도 한 최광식 박물관장은

"내가 명색이 신라사 전공자인데, 그동안 황남대총 발굴성과를 인용해 글도 쓰고 강연도 많이 했지만,

나부터가 막상 이런 규모에 압도당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번 특별전은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이런 무덤 배치를 기본적으로 재현하고자 했다.

목조구조물 중앙에 관을 배치하는 한편,

부곽에는 실제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 중에서도 어린아이 키만한 대옹(大瓮) 몇 점을 전시했다. 
그 주변으로 남분과 북분에서 출토된 무수한 유물 중에서도 각 종류를 대표할 만한 것들을 전시했다.

신라가 왜 '황금의 나라'인지를 실감케 하는 각종 금그릇과 금귀걸이, 금관, 금제허리띠가 그득했다.

비단 황금뿐만 아니라 은제, 동제 그릇도 풍부하고,

이 무덤이 만들어졌을 5세기대 신라사회에서는 어쩌면 황금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았을지 모르는

각종 로만글라스(로마제 유리제품)도 자태를 드러냈다.

박물관 측은 이번 전시를 통해 남분과 북분의 차이 또한 부각하고자 했다.

두 봉분이 맞닿은 곳을 조사한 결과 북쪽 봉토가 남쪽 봉토를 깎아먹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남분이 먼저 만들어지고 북분이 나중에 조성됐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두 봉분은 출토 유물에서도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남분에서는 각종 무기류가 압도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데 비해,

북분에서는 이런 유물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북분에서는 '부인대(夫人帶)'라는 글자를 적은 유물까지 확인됐다.

북쪽이 여성, 남쪽이 남성을 위한 무덤이라는 사실을 이로써 확실히 알 수 있다.


아무튼 1973년 이후 대대적으로 발굴된 황남대총이

1975년까지 발굴이 마무리된 지 35년 만에 그 비밀의 문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무덤의 주인공인 마립간과 그 부인이 쓴 금동과 순금관 등 황남대총 유물 총 5만8천441점에 달하는

황남대총 출토품 중 금관을 비롯한 각종 황금 장신구와 귀금속 그릇,

서아시아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유리그릇 등 1천268점이 전시된다.

 

이 가운데 150점이 황금 제품이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 · 은제 그릇.

 
발굴 당시 왕의 무덤임을 확신하게 한 금ㆍ은 그릇,

일본산 원석으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영롱한 비취 곡옥 등 장신구, 금관과 순금 허리띠, 칼 등이다.

고둥의 끝 부분을 잘라 만든 야광조개국자, 비단벌레에 황금을 입혀 만든 비단벌레 장식 말안장 꾸미개,

각종 황금 장신구와 귀금속 그릇들, 서아시아에서 건너온 유리그릇, 곡옥 등

보기만 해도 화려한 유물이 가득하다.

 

 

한편 철제 유물도 상당히 많다. 황남대총 남분에서 나온 철기류는

김해 대성동 고분 전체에서 나온 것보다 많아 신라가 가야보다 철이 더 풍부했음을 보여준다.

또 중국 남조의 도자기, 지중해 연안의 유리그릇, 일본에서 온 고둥 껍데기와 경옥(硬玉) 등은

신라가 당시 국제교류가 활발했음을 알려준다.

 

 

황남대총은 '황금 신라'의 정점이다.

이토록 화려한 '황금 물결'은 황남대총 이후 신라 무덤에선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이유가 뭘까.

"마립간의 등장으로 상대 우위의 왕이 등장하면서 상징이 필요했고 거기 부합한 것이 금이었다"며

"신라 중기 이후 신라 왕호가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뀌어 왕권이 절대화되면서

황금이 왕실의 전유물이 됐고 일반인들은 금을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또 "7세기 초 법흥왕이 불교를 도입하면서

사찰과 불상에 금이 많이 필요했던 것도 황남대총 이후 고분에서 금을 만나기 어려운 이유"라고 설명했다.

 

무덤 구조와 연관 있다는 해석도 있다.

마립간 당시 무덤은 나무 틀 위에 돌무더기를 쌓는 적석목곽분이었는데,

이것이 위치 파악과 도굴에 매우 힘든 형태였다는 것.

 

황남대총은 경주 황남동에서 1975년 발굴됐으며 신라 고분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또 봉분이 두 개인 쌍릉이다.

마립간인 남자의 무덤은 남분, 왕비인 여자의 무덤은 북분으로 불리는 부부 무덤이다.

 

그런데, 마립간의 무덤인 남분과 부인의 무덤인 북분은 유물에 차이가 있다.

 

참고도판2.JPG

남분에서는 환두대도 등 각종 철제 무기류가

많이 쏟아져 나온 데 비해,

북분에서는 황금으로 된 유물이 많았다.

 

또 남분에서 60대 남자의 유골이 나왔고,

새 날개 모양의 금제 관꾸미개(남분 출토, 길이 49.0㎝)금 허리띠 등 왕의 무덤으로 상징되는 유물이 발굴되었다 .

 

북분에서는 '부인대(夫人帶)'라는 명문이 새겨진

유물이 나와 주인공이 여성임이 확인되었다. 
 

황남대총은 아직도 여러 미스터리를 간직하고 있다. 가장 큰 미스터리는 부인의 관(冠)이다.

그런데 마립간의 관(冠)은 금동관인데 비해, 부인의 것은 금관이다. 모양도 부인의 관이 더 화려하다.

남분은 5세기 초중반, 북분은 5세기 중후반 사이에 만들어져 20년 정도의 차이가 나는 것으로 추정된다.

마립간이 부인보다 지위가 높은데 왜 관(冠)은 부인의 것이 더 좋은 것일까, 풀리지 않은 의문이다.

 

황남대총은 신라 마립간(4세기 신라에서 사용한 왕의 칭호로 6명의 마립간이 있었다) 시기의 왕릉으로

추정될 뿐 무덤의 주인공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눌지 마립간(눌지왕 · 417~458, 재위 417~458)설과

내물 마립간(내물왕 · 356~402, 재위 356~402)설이 유력했는데

이번 전시를 통해 실성 마립간(실성왕 · 402~417, 재위 402~417)설이 새롭게 제기됐다.

 

마립간은 황금을 통해 나라의 위계를 새로 만들었다.

마립간을 중심으로 일정 범위에 속하는 왕족은 황금제 장신구로 꾸민 복식을 착용하는 등

'황금의 나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황남대총 출토물은 동북아시아 고고학에서의 기준점으로도 주목하고 있다.

신라 황금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은 물론

고구려 계열의 다양한 문물들은 중국 지안에서 발굴된 고구려 태왕릉의 주인공을 밝히는 데

단서를 제공하고 있으며,

일본 고훈 시대의 연대 추정에도 새로운 학설의 근거를 마련해 준다고 국립중앙박물관 측은 설명했다.

- 2010.09.06

 

 

 

 

 

  

 황남대총

  

경주 시내에 자리잡고 있는 황남대총은

신라 왕릉급 중심 묘제(墓制)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 중 최대급에 해당하는 왕릉이며,

왕의 무덤에 왕비의 무덤을 덧붙여 만든 쌍무덤, 즉 표형분(瓢形墳)이다.

 

1973년에 발굴조사된 황남대총은 금관(국보 191호)과 금허리띠(국보 192호),

신라 무덤에서 출토된 유일한 은관(보물 631호) 등

다량의 국가지정문화재(국보 4건, 보물 10건)를 포함한 58,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된 최고의 왕릉이다.

또한 고구려, 중국, 일본, 서역 등 다양한 지역으로부터 들어온 청동제품, 흑갈유병, 조개류,

유리제품 등은 마립간시기 신라의 왕성한 국제 활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그 중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금관과 금허리띠는

1973년 발굴 이후 일련의 조사과정을 마친 뒤 국립중앙박물관의 대표적인 유물로써 전시되어

국내는 물론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관람객에게 선보였다.

 

 

황남대총 북분 목곽 내부 출토상태

▲ 황남대총 북분 목곽 내부 출토상태

 

황남대총 북분의 목곽 내부 출토상태로

사진의 가운데 부분에 보이는 금관과 금허리띠가 있는 부분이 목관의 중심부가 되며,

금관 윗부분에 보이는 곳이 다양한 장신구류와 마구류와 금속용기류 등이 부장된 수장부에 해당된다.

 

 

황남대총 북분 출토 금관

황남대총 북분 출토 금관, 국보 191호, 높이 27.3㎝

 

신라에서 가장 큰 무덤이 바로 황남대총(皇南大塚)이다.

그 중 조금 늦은 시기에 만들어진 왕비의 무덤[北墳]에서 출토된 금관은

현재까지 출토된 세움장식을 갖춘 금관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3개의 나뭇가지모양[樹枝形]장식과 2개의 사슴뿔[鹿角]장식을 관테의 안쪽에 덧대고

금못을 3개를 ∴모양으로 박아 고정하였다.

관테에는 상하의 가장자리에 2줄의 연속점무늬[點列紋]와 파도모양무늬[波狀紋]를 1줄씩 표현하고

그 가운데에 곱은옥[曲玉]을 1점씩 매달았다.

세움장식의 작은 나뭇가지는 3단(段)으로 만들었고

각 단마다 비취제 경옥(硬玉)을 5개씩 매달아 화려함을 더하였다.

관테의 앞면에는 모두 6개의 굵은고리 귀걸이가 드리워진채 출토되었다.

 

 

 

 

신라의 허리띠꾸미개

 

 

허리띠꾸미개는

버클에 해당하는 띠고리, 허리띠 끝에 다는 띠끝꾸미개,

가죽 또는 비단 허리띠의 겉면을 꾸몄던 띠꾸미개,

허리띠에 매달아 드리웠던 띠드리개로 구성된다.

 

신라에서 처음 쓴 귀금속제 허리띠꾸미개는 용무늬 띠꾸미개(龍文透刻銙板)로 여겨지는데,

이는 고구려로부터 도입된 도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용무늬 띠꾸미개와 거의 동시에

고구려에서 도입된 세잎무늬 띠꾸미개(三葉透彫銙板)가 고유한 도안으로 정착되어 훨씬 널리 쓰였다.

 

황남대총 북분 출토 금허리띠
황남대총 북분 출토 금허리띠, 국보 192호, 길이 120.0㎝

 

 

황남대총 북분의 허리띠는

1개의 띠고리[鉸具], 28매의 띠꾸미개[銙板], 1개의 띠끝꾸미개[帶端金具]로 구성된다.

황남대총을 비롯한 5세기대 신라 허리띠의 띠꾸미개는

좌우가 대칭이면서 사각형 판에 인동무늬가 간략화된 세잎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띠드리개[腰佩]는 13줄인데 그 중 1줄은 길다.

단면이 편평한 방형판과 원형판을 교대로 엮어 만들었는데,

작은 방형판의 상하에 둥근 고리를 만들어 원형판의 상하에 나 있는 장방형 홈에 끼웠다.

띠드리개의 끝에 곱은옥[曲玉]이 매달리는 경우 둥근판이 6개, 나머지는 5개씩이다.

끝 장식으로는 홀모양판[圭形板] 5개와 물고기모양판 1개, 손칼모양 장식 1개, 수실모양 1개,

변형 쌍룡무늬 모양 투조장식이 있다.

3개의 곱은옥중 2개는 금으로 만들었고, 1개는 금모를 씌운 경옥(硬玉)이다.

 

 

  

은허리띠(銀製腰帶), 남분 출토

 

 

 

‘부인대’명 은제 허리띠(夫人帶銘銀製腰帶), 북분 출토

 

‘부인대(夫人帶)’명 은제허리띠, 대단구길이 12.3㎝

 

허리띠꾸미개는 금제ㆍ금동제로 나뉘는데, 착용했던 사람의 지위를 반영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제는 왕족 이상만 착용할 수 있었으며 이들은 은제와 금동제도 소유하였다.

금동제와 은제는 그 아래의 지배층인 ‘간(干)’들이 쓴 것으로 보인다.

 

황남대총에서는 모든 재질의 허리띠꾸미개가 출토되었다.

이는 주인공이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는 왕족 이상의 인물이었음을 알려준다.

북분에서 발굴된 은제 허리띠꾸미개에는 ‘부인대(夫人帶)’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이 무덤의 주인공이 여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은허리띠(銀製腰帶), 북분 출토

 

  

 

 

 

 

고리자루큰칼

 

 

자루 끝에 고리가 달려있어 이름 지어진 고리자루큰칼(鐶頭大刀)은

중국 漢나라 때부터 만들어졌으며,

기록에 따르면 관료가 관복을 착용할 때 지니는 물건이었다고 전한다.

기원전후 한반도에 전래된 이후 2세기 즈음에 널리 퍼져 무기로 쓰였으며,

출토상황으로 볼 때 주로 남성의 전유물로 인식된 듯하다.

처음에는 실용무기였으나,

4세기 후반부터 귀금속으로 꾸미고 칼자루의 고리 안에 여러 형상을 넣은 것이 만들어졌다.

 

귀금속으로 꾸민 고리자루큰칼은 단순한 무기라기보다

소유한 사람의 지위를 드러내는 복식의 하나이므로,

이를 따로 구분하여 장식대도(裝飾大刀)라고도 부른다.

 

이 장식대도가 황남대총 남분에서는

피장자가 착용하였던 1점, 부장품수장부에서 금은장환두대도 9점이 매납되었다.

특히 피장자 착장품은 양측에 자도(子刀, 소형) 3개가 각각 부착되어 있으며

다른 대도와 제작방법이 다르고 또한 인부도 짧아 실제로 사용하기보다 상징용일 가능성이 높다.

 

수장부의 금은장환두대도 9점은 삼환두대도가 6점 삼엽환두대도가 3점이다.

금은장환두대도의 자도(子刀)는 삼환두형이 9점, 삼엽환두형이 4점이다.

 

 

장식손칼(裝飾刀子), 북분 출토

 

 

고리자루큰칼(鐶頭大刀), 남분 출토, 길이 93.2㎝

 

 

고리자루큰칼(鐶頭大刀), 남분 출토, 길이 77.4㎝

 

 

고리자루큰칼(鐶頭大刀), 남분 출토, 길이 88.4㎝

 

 

고리자루큰칼(鐶頭大刀), 남분 출토, 길이 93.2㎝

 

  

북분에서는 무덤의 크기에 비해 환두대도를 비롯 각종 무기류가 매우 빈약하고 종류 또한 단순하다.

무기로 볼 수 있는 것은 환두대도, 삼지창, 철모, 양익형철기, 철촉 등으로

오히려 무기보다는 의기(儀器)일 가능성이 높다.

 

장식대도는 부장품수장부에서 금동 및 은으로 장식된 환두대도 6점이 출토되었으나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는 것은 2점이다. 2점 모두 삼엽환두대도다.

 

이러한 대도(大刀)는

경주 보문리 부부총(夫婦塚), 경주 성주 성산동 1호고분, 경북 의성탑리 고분 등에서 출토되었다.

 

 

황남대총 남분 출토 금목걸이
황남대총 남분 출토 금목걸이, 국보 194호, 길이 66.4㎝

금목걸이는 주인공의 목에 걸린 채 출토되었다.

맨 아래에 달린 금제 곱은옥[曲玉]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속이 빈 금구슬 3개씩을 두고 그 사이를 금사슬로 연결하였다.

좌우 양끝에는 둥근 모양의 작은고리가 달려 있어 서로 연결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겹으로 엮은 금사슬, 금구슬, 곱은옥 등의 비례와 전체적인 크기가 조화를 이룬다.

이러한 금제 목걸이는 신라 목걸이 중에서 특이한 형태이며,

경주 월성로 가-13호 출토 금 목걸이와 비교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황남대총 남분 출토 은관
황남대총 남분 출토 은관, 보물 631호, 높이 17.2㎝
금 이외에 은이나 금동으로 만든 관의 수량이 금관보다 많다.

그중 은관은 부식이 잘되기 때문에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경우가 적지만

황남대총 남분에서는 완형에 가까운 예가 1점 출토되었다.

금제 관식, 은제 관모와 함께 부장품 수장부의 가장 윗쪽에서 출토되었다.

은관은 세움장식의 가장자리를 가위로 오린 다음 좌우로 비틀면서 꼬아서 만들었다.

이러한 기법은 고구려의 관장식에서 자주 보인다.
관테의 가운데에 물고기의 꼬리지느러미 모양의 큰 세움장식을 함께 오려 장식한 다음,

좌우에 새날개모양의 세움장식을 1개씩 은못으로 부착하였다.

관테와 세움장식에는 금동제 달개를 많이 매달았으나 현재는 일부만 남아 있다.

가장자리에는 뒷면으로부터 두드려낸 연속점무늬 1줄을 장식하였다.

 

 

 

황남대총 남분 출토 은관모
황남대총 남분 출토 은관모, 높이 17.0㎝
은관모는 1매의 은판을 고깔모양으로 접어 만들었다.

아랫쪽 테두리는 조금 둥글게 만들고 끝은 밖으로 한겹 말아 붙여 처리하였다.

뒷면에는 완만한 다이아몬드 무늬를, 몸통에는 번개무늬를 두드려 내었다.

모자의 앞쪽에는 금동의 투조판(透彫板)을 덧댄 5각형의 은판을 덧붙였다.

오각형판에는 간략화된 용무늬 혹은 넝쿨무늬[唐草文]를 가득 표현하였다.

이 금동판의 바탕은 무늬가 없는 은판이어서

금제투조문양 사이사이에 백색의 은판이 드러나 보이는 효과를 노린 것 같다.

하단 가장자리에는 관모에 접합하기 위한 구멍이 있다.

 

- 최흥선,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특별전시실

- 2010년 10월13일 국립중앙박물관 ‘제 214회 큐레이터와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