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통영향토역사관] 이순신장군 초상화 - 제작연대순 전시

Gijuzzang Dream 2009. 8. 4. 13:17

 

 

 

 

 

 

 이순신 장군[1545(인종 1)~1598(선조 31)]의 영정

 - 시대별 변화모습

 

 

 

김일룡 통영향토역사관장, 30년 넘게 수집해온 자료 · 초상화 전시

 

 

 

시기와 작가에 따라 달리 구현된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모습.

왼쪽부터 이상범, 김은호, 정형모, 장우성 화백 작품(통영향토역사관 제공)

 

 

"이순신장군의 영정이 수 십년 간 여러 차례 변해왔는데도 한 눈에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우리 국민의 큰 위인인 장군의 모습을 누군가는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이순신 장군을 묘사한 인물화를 제작 연대순으로 볼 수 있는 전시회가 국내 처음으로 열리고 있다.

경남 통영의 향토사학자인 김일룡(63) 통영향토역사관장은

8월12~16일 통영에서 열리는 한산대첩축제에 맞춰

30년 넘게 수집해온 이순신 장군 관련 자료와 장군의 영정 및 초상을 시대순으로 정리해

경남 태평동 통영향토역사관 전시실에서 <이순신과 통제영 자료전>이란 특별기획전을 열고 있다.

8월 한 달간 전시될 장군의 영정과 초상 중에 원본은 1점 뿐이지만,

우리의 마음 속에 담긴 장군의 이미지가 세월에 따라 뚜렷이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이상범(李象範, 1897~1972) 화백의 작품으로 1933~52년에 한산도 제승당에 봉안됐던 장군의 영정은

짙은 눈썹과 치켜 올라간 눈꼬리로 그려져 강직한 장수의 이미지가 돋보인다.

김은호(金殷鎬, 1892∼1979) 화백이 그려 1952~78년에 제승당에 봉안된 장군은

갑옷을 입었지만 전체적인 얼굴 형태가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정형모(鄭炯謨, 73세) 화백이 그려 1978년 이후 제승당에 봉안된 영정은

눈매가 한층 다듬어져 문인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한편 정형모 화백은 역대 박정희 ·  김대중 · 전두환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한편 장우성(月田 張遇聖, 1912∼2005) 화백이 1953년 그린 뒤 충남 아산 현충사
에 봉안돼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장군의 표준영정은 무인의 풍모 보다는 고결한 인품이 강조된 초상이다.

  

 

 

이번 전시의 각 전시실은

'충무공 이순신과 임진왜란',  '삼도수군통제영',  '통제영 12공방' 등 3개 주제에 맞춰 꾸며졌다.

- 통영=이동렬 기자 dylee@hk.co.kr

- 2009.08.04  ⓒ 인터넷한국일보(www.hankooki.com)

 

 

 

 

 

 충무공 영정 변천 전시... 김일룡 관장

 

 

 <이순신과 통제영> 특별기획전 마련

영정. 초상화 시대순 전시 

 


"초기 영정이 '무인(武人)'의 기개를 강조했다면

후대에 갈수록 '문인(文人)'의 풍모가 느껴지게 모습이 바뀝니다"

김일룡(63) 통영향토역사관장이 8월 한달간 <이순신과 통제영>을 주제로 특별기획전을 열면서

이수신장군의 영정과 책에 그려진 장군의 초상을 시대순으로 전시해 관심을 끌고 있다.
그는 30년 넘게 통영과 이순신 장군, 임진왜란 자료를 수집해 왔고

한산대첩축제(8월12~16일)를 앞두고 아끼던 소장품을 무료로 공개했다.

 

 

 

비록 원본은 1점에 불과하지만

한 개인이 이순신 장군을 묘사한 그림들을 시대순으로 정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순신 장군의 영정과 각종 자료에 삽입된 초상들은 확인된 것들만 20여 종이 넘어요.

이번에는 대표적인 화가들이 그린 영정들과

일제강점기부터 1950년 광복직후에 발간된 책에 나온 것들을 한데 모았습니다"

그는 이어 "1930년대에는 '무인(武人)다운 기골(氣骨)'이 느껴지도록 장군의 모습이 그려졌다면

1970년도에는 고결한 인격을 흠모하는 경향이 부쩍 강조되면서 얼굴이 부드러워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지요"라며 자신이 느낀 변모과정을 설명했다.

그의 지적대로 이상범 화백 작품으로 1933년~1952년 사이 한산도 제승당에 봉안됐된 장군의 영정은

짙은 눈썹과 치켜올라간 눈꼬리, 굳게 다문 입 등 뚜렷한 이목구비 때문에

강직한 장수의 이미지가 돋보인다.

이어 김은호
화백이 그려 1952년~1978년 사이 제승당에 봉안된 이순신 장군은

갑옷을 입었지만 전체적인 얼굴형태가 좀 더 부드러워졌다.

그러던 것이 정형모 화백이 그려 1978년 이후 제승당에 봉안된 영정은

눈매 등이 한층 다듬어진 모습으로 강직한 무인보다는 지조있는 문인의 이미지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장우성 화백이 1953년 그린 뒤 충남 아산 현충사에 봉안돼 있으며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장군의 표준영정 역시 무인보다는 관복을 입은 선비의 풍모를 강조한 분위기가 더 크게 느껴진다.

김 관장은 이밖에 1908년 <대한역사(大韓歷史)>란 책에 삽입된 작자미상의 이순신 초상과

1925년 발행된 <이순신실기(李舜臣實記)> 란 책에 삽입된 장군의 그림 등 희귀 자료들도 내놨다.

뿐만 아니라 일본 장수들의 영정 6점도 전시된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한산대첩 당시 왜의 수군장수였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

조선침략의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등

일본 장수들을 묘사한 그림 6점도 어렵게 구해 전시했다.

 

조선시대 통제영이 있었던 통영지도와 인근 고성, 거제지도, 옥포를 비롯한 각 수군 진영의 지도,

조선수군의 훈련의식을 정리한 고문헌, 병법책, 통제영 발령장, 통제영 보고문서 등도 선보인다.

 

또한 조선 수군 총사령부였던 삼도수군통제영에 신발과 망건, 활, 화살촉, 갓, 가구, 금은제품 등

각종 군수품과 공예품을 공급하던 12공방(工房) 유물들도 볼 수 있다.

말안장, 활, 화살, 부채, 갓, 탕건, 망건, 나전칠기, 소목, 동구리, 장석, 그림, 금은 장신구, 가죽, 신발

등 통제영12공방에서 만들어진 각종 군수품 및 공예품을 각 공방별로 전시하고 있다.

 
김 관장은 "이순신 장군의 영정이 수십년간 여러 차례 변했지만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어

한 번쯤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전시회 개최배경을 설명했다.

- 2009.08.03  (통영=연합뉴스) 이정훈 기자

 

 

 

 

 

 이순신 장군 초상화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생겼을까.

안타깝게도 장군이 살아 있을 때 그려진 초상화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 시대에는 큰 공을 세운 공신(功臣)의 영정을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그리기도 했다.

이순신의 부하 장수로 활약한 이운룡 장군의 영정이 그 사례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공식 영정도 남아 있지 않다.

현재 남아 있는 이순신 장군 초상화 중에 조선 시대까지 연대가 올라가는 그림은 동아대 박물관에 소장된 그림(사진)뿐이다.

세로 28㎝, 가로 22㎝인 이 그림은 조선 시대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 정확한 제작 시기나 화가는 불확실하다.

 

근대 이후 그려진 이순신 장군 영정 중 대표적인 것은 4점을 꼽을 수 있다.

그중 가장 익숙하고 유명한 것은

1952년 월전 장우성 화백에 의해 그려져 현재 아산 현충사에 소장된 영정이다. 

 

 

세로 193㎝, 가로 113㎝에 달하는 이 대형 영정은

1973년 10월 문화공보부에 의해 표준 영정으로 지정,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현재 100원 동전 앞면에 그려진 장군의 모습도 장화백의 이순신영정을 토대로 한 것이다.

  

월전 장우성이 아산 현충사의 충무공 영정을 완성하기 전 충무공 얼굴을 놓고 무척 고심했던 듯

종이를 여러 번 덧대면서 목탄으로 얼굴 표정을 그린 1953년작 영정 초본은 

일반적인 영정초본이 유지에 그려진 것과는 달리

갱지에 그려져 조합된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느낄 수 있다.
인물의 얼굴 표현에 집중하기 위해 여러 번 수정해 붙인 것은 징비록에 표현돼 있는 대로

“과묵해 수양 근신하는 선비와 같고 그런 중에도 담기가 큰 사람”이라는 대목에 주목하면서

상당히 고심했음을 알 수 있다.

위엄 있는 얼굴과 깊이 있는 눈빛이 영정 초본에도 그대로 살아 있다.

 

 
1952년 이당 김은호 화백에 의해 그려져 한산도 충무영당에 봉안됐던 영정은

유일하게 갑옷을 입은 상태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1978년 정형모 화백에 의해 옛 군복 차림의 영정이 새로 그려지면서

김은호화백의 그림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이전된 상태다.


1932년 청전 이상범 화백에 의해 그려진 영정도 중요한 의의를 가진 작품이다.

1932년에 벌어진 아산 현충사 보존 운동의 결과로 그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현재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들 영정은 하나 같이 제각각이어서 논란이 끝이지 않는다. 최석남씨 등 이순신 연구가들은

“김은호 · 장우성 화백의 그림은 지나치게 유약하게 그려져

장수의 풍모가 풍기지 않는다”며 이상범 화백의 이순신 장군 영정을 최고로 꼽는 경우가 많다.

이순신 장군 영정을 그린 화백들 중 일부가 친일 경력이 있다는 점도 자주 논란이 된다.

문헌에 이순신 장군의 용모를 묘사한 사례도 두 건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장군의 진짜 모습을 추정하는 것도 쉽지 않다.

유성룡이 쓴 <징비록>에는 “용모는 단아하여 마치 수양하는 선비 같다”고 묘사하고 있다.

"순신의 사람됨엔 대담한 기운이 있어 일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갔으니 본래부터 수양해 온

까닭이라 하겠다(舜臣爲人 寡言笑 容貌雅飭 如修謹之士 而中有膽氣 亡身殉國 乃其素所蓄積也)"


또, 이순신 장군의 용모에 대해 가장 자세한 기록을 남긴 인물은 삼가현감 고상안(高尙顔)이다.

그는 1594년 3월 한산도에서 장군의 얼굴을 직접 보았다. 
‘통제사와 며칠을 같이 지냈는데 그 언론과 지모는 과연 난리를 평정할 만한 재주였으나

얼굴이 풍만하지도 후덕하지도 못하고 상(相)도 입술이 뒤집혀서 복장(福將)은 아니로구나

생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순신의 재주는 정말 뛰어났지만 관상학적으로 복이 많은 얼굴은 아니었다는 감상이다.

 

유성룡과 고상안의 얼굴 묘사가 모두 사실이라면

원래 단아한 모습의 이순신 장군도 전쟁의 풍파 속에 얼굴 인상이 많이 변한 셈이다.

- 2005.08.31 김병륜 lyuen@dema.mil.kr

- 국방일보, 한국의 군사문화재 순례<83>

 

*** 고상안의 문집인 <태촌집>에 비교적 소상히 이순신장군의 용모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고상안은 임진왜란 중 삼가현감을 지냈는데 갑오년(1594) 3월말 한산도에서 실시하는 무과 참시관으로 참가했다. 그는 그 때 이순신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인상에 대해 서술했다.

 

"내가 삼가현감으로 있으면서 주사의 시험관을 맡아본 일이 있는데 그 때에 이모는 통제사로

있었고, 원균은 영남우수사이고, 이억기는 호남우수사이며, 구사직은 호서의 수사로 있었다.

반달동안을 머물면서 그들의 사람됨을 살펴보니

원 수사는 부박하고 무모한데다가 중심까지 잃고 있었고,

이 수사는 허황하고 진실되지 못하며 정기가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여

후일 혹 패전하거나 혹 단절할 염려가 있으며,

구 수사만은 다소 침착하고 안정되니 지금까지는 탈이 없으며 수복도 겸수하여 온전하다.
통제사는 동년이기 때문에 며칠을 같이 지냈는데 그 언론과 지모는 과연 난리를 평정할 만한

재주였으나 얼굴이 풍만하지도 후덕하지도 못하고 상도 입술이 뒤집혀서 마음속으로 여기기를,

'복장은 아니라고구나'하였는데 불행하게도 나국의 명이 있었고, 다시 쓰여지기는 하였으나

겨우 1년이 지나서 유탄을 맞고 고종하지 못하였으니 한탄스러움을 어찌 금하랴?

그러나 죽던 날까지 군기를 기획하니 죽은 통제사가 살아있는 고니시(行長)을 도망치게 함으로써 다소나마 국치를 씻고 공은 태상시(제사와 시호 등을 맡은 관아)에 기록되었으며

이름을 만고에 전하였으니 이는 죽어서도 죽지 않은것이다.

원수사, 이수사의 무리와 어찌 동등하게 보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 글은 관상학적인 느낌을 이야기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당시 이순신은 열흘 이상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몸이 아파, 한층 초췌한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 충무공의 영정

 

기록상으로 통영의 초묘 안에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고 하나 그 후 내력은 알 길이 없고,

순천과 여수 충민사에서 화상(畵像)을 모신 기록이 있으나 역시 알 수 없다.

 

1932년 일제강점기에 현충사 재건을 위한 운동이 일어났을 때

성금 16,021원30전으로 사당 및 영정을 모시고, 남은 돈 386월65전은 현충사 기금으로 하여

6월5일 송진우, 백관수, 유억겸 등이 참석하여 영정봉안식을 가졌다.

그때 1932년 한산도 제승당(制勝堂)을 중건(重建)하면서 충렬사 보존회에서

당시 동아일보사의 협조를 얻어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화백이 영정을 그려 창건된 충무영당(忠武影堂)에 처음으로 봉안하였다.

그 후 20여 년간 이 영정이 봉안되어 오던 중 보다 정확한 고증을 위해

1949년 다시 충무공기념사업회편집위원(위원장 이은상)들이 이당 김은호 화백으로 하여금

두 폭의 충무공 영정을 그리게 하여 정부가 공인본(公認本)으로 인증했다.
두 영정 중 하나는 전남 순천의 충무사로 보내져 봉안된 문관 모습의 모대본 좌상(帽帶本 坐像)이다.

이 조복(朝服) 좌상(坐像)은 현충사에 모셨다가 순천 충무사로 옮겼으나 화재로 영정도 소실되었다.

다른 하나는 경남 한산도의 제승당에 모시게 된 무관 모습의 갑주본입상(甲胄本 立像)이다.

갑주본 입상(甲冑本 立像)은 한산도 영정각에 모셔져 보존되고 있다. 
 

현재 현충사의 영정은 이충무공의 영정을 그리기 위하여 많은 학자들의 고증이 있었는데

유성룡의 <징비록>에 나타난 고증에 입각하여 1953년 월전 장우성화백이 그린 것으로

1973년 10월30일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는 현충사에 봉안된 영정을 비롯,

순천 충무사(1953년 이당 김은호화백 작품)에 모신 조복좌상과

한산도 충무영당(1950년 이당 김은호화백 작품)에 모신 갑주입상 등을 볼 수 있다.

- 현충사 홈페이지 중에서 정리 

 

 

.....

역사적인 인물의 초상화 중에도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것이 많다.

눈동자가 닮지 않았다느니 입이 잘못 그려졌다느니 하는 평가 때문에 크고 작은 수정 작업을 거쳐야 했다.

현충사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초상화도 당초에는 청전(靑田) 이상범이 1960년대에 그렸으나,

복장과 투구 등의 고증이 정확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어 이당 김은호가 다시 그렸다.

그런데 그마저 얼굴이 지나치게 곱고 여성스럽다는 지적이 제기돼 월전(月田) 장우성이 다시 그렸다.

월전의 충무공 초상화는 2~3회의 수정을 거친 끝에

1973년 10월30일에 충무공 표준영정으로 지정 공표됐다.

그전에 그려진 이당의 충무공 초상은 현재 한산도 영정각에 있다고 전해진다.

- 신동아, 2006년 10월호, 김정(한국조형교육학회 고문 jkim0124@yahoo.co.kr)  중에서

 

 

 

 - Tip (1) : 통제영 공방  

 

통제영 공방은

지방관청의 6방(이, 호, 예, 병, 형, 공방)가운데 하나로 제반 공전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관아.

 

임진왜란 초기 외딴 변방에서 각종 군수품을 자체적으로 조달해야만 했던 이충무공의 한산진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임란직후 통제영이 이곳 두룡포로 옮겨와 더욱 창성하자,

제반 군기와 진공품을 조성하는 통제영 공고 및 공방도 크게 번창하게 되었다.

 

그후 공방운영이 가장 활발했던 18세기 후반, 중요제품의 각 생산공방이 대규모로 밀집하여

상호 분업 및 협업을 이루는 12공방체계를 갖추면서부터

지방의 공방 즉 외공방 가운데 관급장인의 수는 물론, 다양한 공산품의 생산 등 그 규모가 가장 컸었다.

그리고 생산품 또한 그 품질이 가장 우수하여 하여 「통영」이란 지명을 각각 붙여

통영갓, 통영자개, 통영장석, 통영소반, 통영부채 등으로 칭하며

통영에서 만들어진 각종 공예품을 최상품으로 일컫게 되었다.

 

통제영12공방은 구통영초등학교 운동장 서쪽에 위치했으며, 그 맥이 오늘에 이어져

현재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를 가장 많이 보유한 예향 통영의 전통공예로 계승되고 있다.

 

통제영 공고(工庫) : 통제영 공방(工房)에 딸린 관창으로 주로 진공품과 군기를 조성했으며

외감 1인, 색리 2인, 고직 2인이 있었다. 통제영 공고에 딸린 통제영12공방은 아래와 같이 정리된다.

 

1. 선자방 : 단오절선을 주로 생산 진공하는 독립된 공방

2. 입자방 : 통영갓으로 일컬어지는 흑립, 벙거지, 패랭이 등을 만듬

                 (전승 - 중요무형문화재 4호 통영갓 기능보유자 정춘모씨)

3. 총 방 : 말총을 엮어 망건, 탕건, 유건 등을 만듬

                 (전승 - 중요무형문화재 4호 통영갓 기능보유자 정춘모씨)

4. 상자방 : 버들가지나 대오리를 엮어 고리를 만듬

                 (전승 - 중요무형문화재 114호 염장으로 통영문대발의 기능보유자 조대용씨)

5. 화원방 : 지도와 수조도 및 의장용 장식화를 그림

6. 소목방 : 각종 나무로 가구 및 문방구 등을 만듬

                 (전승 - 중요무형문화재 55호 소목장 기능보유자 고 천상원씨)

7. 야장방 : 쇠를 녹여 각종 철물을 주조함

8. 주석방 : 주석, 백동 등으로 각종 장석을 만듬

                 (전승 - 중요무형문화재 64호 두석장 기능보유자 김극천씨)

9. 은 방 : 금, 은 제품을 만듬

10. 칠 방 : 각종 공예품에 칠을 함(전승 - 중요무형문화재 10호 나전장 기능보유자 송방웅씨)

11. 동개방 : 활통인 동개를 만들었으며, 후기에 폐방

12. 화자방 : 신발을 만들었으며 후기에 폐방

13. 안자방 : 말안장을 만들었으며 후기에 폐방

14. 패부방 : 자개를 붙여 나전제품을 만들었으며 후기에 신설

                   (전승 - 중요무형문화재 10호 나전장 기능보유자 송방웅씨)

15. 주피방 : 가죽제품을 만들었으며 후기에 신설

16. 미선방 : 둥근 부채를 만드었으며 후기에 신설

 

 

 

  - Tip (2) : 임진왜란 주요 해전  

 

선조 25년 임진년(1592)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5월 6일 경상우수사 원균과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당포(현 산양읍 삼덕리 당개) 앞 바다에서 최초의 연합함대를 결성한 이래,

현 통영의 해역을 거점으로 하여 옥포해전, 당포해전, 한산해전 등 연이은 승첩을 거두어

다시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옥포해전(1592. 5.7) : 왜적선 26척 격파

합포해전(1592. 5.7) : 적선 5척 격파

적진포해전(1592. 5.8) : 적선 11척 격파

사천해전(1592. 5.29) : 거북선이 최초로 출진하여 적선 13척을 격파.

당포해전(1592. 6.2) : 적선 21척 격파.

당항포해전(1592. 6.5) : 적선 21척 격파

율포해전(1592. 6.7) : 적선 7척 격파

한산해전(1592. 7.8) : 거제도 견내량에 내침한 왜적의 주력함대 73척을 한산도해역으로 유인하여

                                  59척을 일시에 격파, 일명 한산대첩

안골포해전(1592. 7.10) : 적선 30척 격파

                                       왜적 수군의 주력함대를 일시에 괴멸시켜 제해권을 완전 장악함으로써

                                       적의 후방보급로를 차단하여 수륙병진작전을 저지시켰으며

                                       호남과 평안도 지역을 계속 확보함.

부산포해전(1592. 9.1) : 적선 100여 척 격파

 

이충무공은 선조 26년(1593) 7월 14일, 이곳 한산도에 진을 설치하여 바다를 지키는 한편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약칭 통제사)에 제수됨으로서

한산진영은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영(약칭 통제영)이 되었다.

선조 30년(1597) 2월 이충무공이 파직 압송될 때까지 

3년 8개월 동안 진중생활이 지속되었던 곳은 한산도 제승당이었다.

 

칠천량해전(1597. 7.16) : 정유재란으로 원균 통제사가 부산포해역으로 출전했다가

                                       적의 기습으로 패하여 한산진영 소실됨

명량해전(1598. 9.16) : 제 3대 통제사로 다시 제수된 이충무공이

                                    13척의 전선으로 적선 133척을 맞아 31척을 격파시켜 모두 물리침

노량해전(1598. 11.19) : 음력 12월16일 새벽에 남해의 노량해전(임란해전 최후의 결전)에서충무공 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