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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미술관- 프리드리히'안개낀 바다위의 방랑자'/오노레 도미에'구출'

Gijuzzang Dream 2009. 8. 8. 14:37

 

 

 

 

 

 

 

 독일 함부르크미술관

 

 

독일에서 가장 큰 미술관을 소유하고 있는 함부르크 미술관은

후기 고딕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예술품들을 소장하고 있어

유럽에서도 대형 미술관으로 손꼽히고 있다.

항구도시 함부르크는 세계로 뻗어나가는 관문답게 새로운 사상에 관대했다.

그런 사회 분위기 속에 1817년 함부르크의 몇몇 시민들이 독일 최초 미술협회를 설립했지만

당시 함부르크에는 미술관이 하나도 없었다.

미술협회는 1850년 주식거래소 건물에 최초의 시립미술관을 열었다.


함부르크 미술관이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초대 관장 알프레도 리히바르크 덕분이다.

리히바르크는 1886년부터 1914년 동안 낭만주의 회화 대부분을 사들여

함부르크 미술관을 낭만주의 회화 부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미술관으로 만들었으며

또한 그는 화가들을 함부르크에 초대해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안개 낀 바다 위의 방랑자>

 

 

자연 앞에서 보잘것없는 인간의 존재 표현

 


리히바르크가 수집한 낭만주의 회화에서 당시에는 인기가 없었지만

19세기 낭만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작품은 프리드리히의 <안개 낀 바다 위의 방랑자>이다.

이 작품은 위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의 존재가 보잘것없다는 것을 표현한 작품으로서

의 풍경화 중에서 가장 숭고한 의미를 담고 있다.

시, 철학, 음악, 미술 등에서 시작된 낭만주의 사조는

19세기 유럽 전체에 퍼져 나가 공화주의, 민족주의 등 정치적으로 확산되었다.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운동의 선구자인 프리드리히는 작품을 통해 정치적 입장을 작품을 내세웠지만

그는 내면에 있던 자신만의 동경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자연을 선택하면서

당시 독일에서 가장 위대한 풍경화가가 된다.

그가 그린 북부 유럽의 풍경은 전통적인 풍경화를 뛰어넘어 심오한 종교적 상징을 부여하고 있다.

 

  

 

<안개 낀 바다 위의 방랑자>

1818년경, 캔버스에 유채, 98×74 


 

웅장한 광경을 여행자가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이 작품에서

왼쪽은 로젠베르크 산이고 오른쪽으로는 치르켈슈타인 산이 펼쳐진 엘베 사암 산맥이다.

옛날 독일 의상을 입고 칼을 찬 남자는
안개 자욱한 산 정상 가파르게 솟은 바위에 서서

뒷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는 골짜기에 피어오르는 안개 바다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바위를 지나

산봉우리와 산맥을 바라보고 있다.

프리드리히는 인물을 즐겨 그렸지만

이 작품처럼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 뒷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프리드리히의 뒷모습의 인물들은 대개 전사자들에 대한 애국적 기념물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작품에서 뒷모습의 인물들은 작품의 의미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이 작품에서 산을 오르는 과정은 힘든 인생의 여정을 암시하는 전통적인 표현방법이다.

또 산 정상에 도착하는 것은 인생의 정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상징하고 안개는 자연의 순환을 암시한다.

프리드리히는 의미가 담긴 풍경화를 제작하면서 안개를 필수적으로 그려 넣었다.

화가는 자신의 내면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한 프리드리히는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지금의 나로 있기 위해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에 몸을 맡겨 구름과 바위와 나 자신이 하나가 되어야겠다.

자연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고독이 필요하다"라고 했다.

안개와 산봉우리 너머는 모두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천상의 세계를 상징하고 있고

안개 바다 아래는 지상의 세계를 상징하고 있다. 차가운 색채를 사용해 우수와 고독의 감정을 표현했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는

결혼하던 해에 아름다운 아내 때문에 동요되는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이 작품을 제작했다.

프리드리히는 드레스덴 전쟁(1813년) 때문에 집을 떠나

이 작품의 배경이 된 엘베 사암 산맥 지방을 여행했었고

여행 중에 감명 받았던 것을 스케치한 후 화실에서 완성했다.

 

 

 


 오노레 도미에의 <구출>


낭만주의 회화의 보고인 함부르크 미술관에서 비 낭만주의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

오노레 도미에의 <구출>이다. 어느 사조에도 억매이지 않고 독창적인 화풍을 보여주고 있는 이 작품은

신화처럼 보이도록 연출해서 그렸지만 현실을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도미에는 고대 신화 주제에 집착하기도 했었다.

 

 

 

<구출>

1870년, 캔버스에 유채, 280×350 


 

해변에서 남자와 여자가 아이를 안고 빠르게 걸어가고 가고 있고

남자의 팔에 안겨 있는 아이의 신체는 축 늘어져 있다.
아이의 신체는 해변에서 물놀이를 사고를 당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으며

회색빛의 어두운 하늘과 요동치는 구름은 익사 사고의 공포심을 암시한다.

남자와 여자의 다리의 자세는 구출한 아이를 살리기 위한 부부의 급한 마음을 나타낸다.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 1808~1879)의 이 작품에서

흐릿하고 빠른 붓질은 사고의 긴박한 효과를 창출했다.

 

가난한 유년기를 보낸 도미에는

19세기 프랑스 정치와 부르주아의 생활을 풍자한 그림을 그려 명성이 높았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이행하는 정치적 과도기였던 1800년대에

일생을 보낸 오노레 도미에는 사실주의 화가, 판화가 혹은 풍자만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도미에는 1830년 프랑스 혁명 이후 기하급수적으로 등장한 정치 신문에

멍청하고 추하고 잔인한 얼굴의 남녀가 등장하는 풍자만화를 연재하면서 생계를 이었다.

 

작품 하단에 짧게 첨부하곤 했던 짧은 글은

이미지가 비꼬는 상황을 또 한번 비꼬면서 이중적인 풍자를 보여준다.

부조리한 상황에서 능청스럽게 극단의 긍정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도미에의 시선이다.

19세기 정치와 사회를 아울렀던 도미에의 작품세계는

신랄하게 대상을 비판하면서도 끝까지 유머를 잃지 않았다.

만화사와 미술사를 가로지르는 오노레 도미에의 작품들이 그 어떤 역사책보다도 소중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의 정치 풍자화는 서민들의 민심을 대변했지만,

일간지와 잡지에 게재한 몇몇 판화작업은 국왕과 정부를 모욕했다는 죄를 인정받아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군주 정치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자주 투옥되었다.

투옥으로 인해 관료정치의 부정들을 직접 경험한 도미에는 그 이전보다 더 신랄하게 사회를 비꼬았지만

한편으로는 일상을 꾸려가는 평범한 사람들을 그림에 담기 시작했다.

작품의 소재가 파리 시민의 다양한 생활상으로 확장된 것은 이때부터다.

 

이 작품은 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거친 붓질과 강한 명암 대비로 극적인 효과를 주어 작품의 주제를 표현했다.

 

- 2009년 08월 04일 ⓒ ScienceTimes [명화산책]

- 박희숙 서양화가, 미술 칼럼니스트

 

 

 

 

 

 

오노레 도미에는 1830년에 잡지 <가르강튀아 (La Gargantua)> 창간에 관여하였고

그 지면에 풍자 만화를 게재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1832년에는 국왕을 비판하는 정치만화를 기고하였다가 투옥된 적도 있다.

그는 6개월 금고형을 선고 받았고 2개월을 감옥에서 보낸 후 나머지 4개월은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다.

그럼에도 그의 작업은 멈추지 않았고, 당국은 1835년에 이 잡지를 폐간시켜 버렸다.

모든 신문 잡지에 정치풍자 캐리커처를 전면 금지하기도 하였다.

 

도미에는 잡지 <샤리바리>로 활동 무대를 옮겨

신흥 지배층의 위선을 풍자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분노를 그렸다.

도미에가 사회적 현실을 즉각적으로 표현하고 또 이를 널리 알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유화나 수채화처럼 한정된 제작 조건에서 일했던 것이 아니라

 대량 복제가 가능한 석판화를 활용했기 때문이라는 점도 있다.

 

19세기 중엽에 그 효용성이 널리 알려진 석판화는

대도시 곳곳에 석판화 가게가 문을 열 정도로 대중적인 예술 기법이 되었다.

저렴한 가격에 풍경화나 사회적 정보를 찍어낼 수 있었기 때문에 일반 대중도 이를 사용하였는데

도미에는 바로 이 대중적인 매체를 활용하여

자신의 예술적 표현을 신속하면서도 광범위하게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도미에 풍자화의 백미는

그가 1845년에서 1848년 사이에 연속 작업으로 제작한 법조계 풍자화이다.

그는 법조인들을 경멸하였다. 그 자신이 성장기에 법률 집행관의 심부름꾼으로 일하면서

그 비정하고 폐쇄된 세계를 일찍 체험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판사, 변호사, 검찰관 등이

거만한 자세로 세상 형편을 쥐락펴락하는 모습을 몸소 겪기도 했다.

진지하게 세상의 낮은 자리를 살핀 도미에는 자신의 석판화 작업을 통하여

법률가를 비롯한 지배층의 오만함을 맘껏 풍자하고 비판하였다.

 

1848년, 마침내 공화국 시대가 열린 후, 도미에는 프랑스 전역의 공공 기관에 걸려 있는

왕의 초상화를 대체할 공화국 상징물 그림에 몰두하였다.

대규모 공모전에도 참가하여 당선도 되었다. 그러나 도미에는 상징화 완성을 하지 못했다.

아니, 그보다는 그 작업 과정에서 미묘한 기법을 체득하게 되었다.

자연광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미려한 표현으로 윤곽선이 희미해지면서,

그 대상과 주위 공간이 모호해지면서 오히려 미학적인 일체감을 갖는 기법을 그는 발견했다.

 

미술사가들이 인상주의의 시작을 도미에로 설정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격렬한 정치화를 그렸던 도미에는 파리 외곽의 일상 풍경을 미려하게 그려내는 화가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도미에에 불만을 표시하였고

신문 잡지는 '뽀샤시'하게 변한 도미 그림을 더 이상 원하지 않았으나,

이 미묘한 색채 속에서 근대를 발견한 시인 보들레르는 도미에를 격찬하고 지지하였다.

 

시인 보들레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시대 파리에서 들라크루아에 비할 수 있는 작가는 두 명뿐, 앵그르와 도미에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도미에는 근대 시민사회의 직업윤리인 근검, 절약, 저축 같은 것을 경멸하였다.

보들레르가 지지할 만한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늘 경제적인 궁핍에 시달렸고

구빈원을 들락거렸으며 지인들의 도움으로 연명하는 수도 많았다.

그는 열심히 작품 활동을 했지만 돈이 생기면 누구에게나 빌려주었었다.

 

물놀이 하는 아이들, 강에서 빨래하는 사람들, 선술집 취객들, 공사장의 석공들 같은

일상그림으로 모네의 따스한 인상과 고흐의 격렬한 인상에 큰 영향을 미친 도미에는

1877년에 백내장을 앓기 시작하여 만년에는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화가로 쓸쓸하게 죽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