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전의 [승무도] 역시 조지훈의 시에서 처럼 승무를 추고 있는 여승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림 속 여승은 비단 소복에 검은 장삼을 걸치고 머리에는 투명한 고깔을 쓰고 있으며,
고뇌를 상징하는 108염주를 목에 걸고 있다.
양손에는 북채를 들고 양팔을 뻗어 승무의 한 동작을 연출하고 있다.
팔과 어깨를 흘러내리는 장삼자락은 약간 날리는 모습인데
이는 춤의 동작이 느리고 조용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승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응시한다.
눈의 묘사가 흐리게 되어 있어 마치 눈물이 글썽이는 듯이 보인다.
팔과 어깨, 북채, 장삼자락 등이 서로 어울려 빚어내는 유려한 선,
비단 장삼의 화려하고 정교한 문양 등이 돋보인다.
아름다운 얼굴은 세속의 세계, 이와 대비된 삭발한 머리는 초월(종교)의 세계를 상징할 것이다.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작품이
“가사에 휘감긴 여인의 풍만한 육체와 세속과 인연을 끊은 종교적 정념이 묘하게도 서로 융합되면서
번뇌와 희열을 동시에 반영해 주고 있다”고 말했다.
작가 월전은 작품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기 위하여
방까지 따로 얻어 수개월에 걸쳐 제작하였다고 했다.
작품은 제16회 조선미전에서 특선 후보까지 올랐다.
작품 자체가 감상자에게 주는 느낌은 비장하고 신비롭다.
하지만 작품의 제작에 얽힌 이야기를 알면 다소 실망이 있을 수 있다.
우선 작가 월전은 실제로 진짜 비구니 승무를 구경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당시에 진짜 비구니가 추는 승무가 있었는지에 대한 확인부터가 어렵다.
승무란 것 자체도 사찰에서 추는 춤이 아니었다.
민간에서 사당패 등에 의해 공연된 민속무용의 하나였다.
여승이 아닌 직업 무용수들이 그 공연자였던 것이다.
물론 작품이 제작된 1930년대 당시에도
사찰에서 승려들에 의해 추어진 법고춤, 바라춤, 나비춤 등의 의식용 춤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법무(法舞)라 불리어 졌으며 승무와는 엄연히 달랐다.
승무 역시 원래는 사찰무용이었지만 조선 중기 이후 민속 무용화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실제로 월전은 [승무도]의 모델로 여승이 아닌 권번의 기생을 썼다고 술회했다.
“(……) <승무도>를 그릴 때는 승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찾느라 진땀을 뺐다.
요즘 같으면 무용을 전공하는 여대생에게 부탁하면 간단히 해결될 일을, 그때는 도리가 없었다.
마침 발이 넓고 사교적인 무허 정해창에게 부탁해서 승무를 출줄 아는 기녀(妓女)를 찾았다 (……).”
- 장우성 회고록 <화맥인맥>(1982) 중에서
따라서 조지훈의 시 [승무]와 월전의 그림 [승무도]에 묘사된 정경은
실제 비구니의 모습이 아닌 상상의 이미지였을 가능성이 많다.
대신에 당시에도 이미 ‘젊은 비구니가 추는 춤으로서의 승무’라는 도상(圖像)은 확립되어 있었다.
승무도상은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1892~1979) 등에 의해 의해서 지속적으로 그려졌다.
이당은 월전의 스승이었다. 즉 월전은 진짜 비구니의 승무를 보지 않고
기존의 승무도의 도상만을 그대로 전습받아 [승무도]를 제작했을 것이다.
스승 이당은 1922년 조선미전에서부터 수차례 승무의 도상을 그려 출품하여 왔고,
자신의 문하에 들어온 제자들의 교육과정 가운데 하나로 승무 그리기를 필수코스로 가르쳤다고 한다.
이당이 왜 그토록 [승무도]를 중요시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다만 화려한 법의를 걸친 미모의 여승이 등장하는 [승무도]의 도상 자체가
섬세한 채색미인도를 추구했던 이당의 관심을 끌었으리란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승무도]는 그 허구적 소재로 인해 리얼리티가 반감됨에도 불구하고 미술사적 가치는 적지 않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