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월전 장우성 - 승무도

Gijuzzang Dream 2009. 7. 30. 20:42

 

 

 

 

월전 장우성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깍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대에 황초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올린 외씨 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조지훈, [승무], 1939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교과서 등을 통해 배웠음직한 조지훈의 시 [승무]를 읽고

속세와 해탈의 경계에서 번민하는 젊은 여승(비구니)의 비극적인 아름다움에

감동해 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 것이다.

 

그런데 국립현대미술관에는 시 [승무]가 묘사하는 정경을 그대로 그림으로 옮긴 듯한

미술작품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 1912~2005)이

1937년에 제작한 채색화 [승무도(僧舞圖)]가 그것이다.

 

 

속세와 해탈의 경계에서 번민하는 비극적인 아름다움

  

월전의 [승무도] 역시 조지훈의 시에서 처럼 승무를 추고 있는 여승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림 속 여승은 비단 소복에 검은 장삼을 걸치고 머리에는 투명한 고깔을 쓰고 있으며,

고뇌를 상징하는 108염주를 목에 걸고 있다.

양손에는 북채를 들고 양팔을 뻗어 승무의 한 동작을 연출하고 있다.

팔과 어깨를 흘러내리는 장삼자락은 약간 날리는 모습인데

이는 춤의 동작이 느리고 조용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승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응시한다.

눈의 묘사가 흐리게 되어 있어 마치 눈물이 글썽이는 듯이 보인다.

팔과 어깨, 북채, 장삼자락 등이 서로 어울려 빚어내는 유려한 선,

비단 장삼의 화려하고 정교한 문양 등이 돋보인다.

아름다운 얼굴은 세속의 세계, 이와 대비된 삭발한 머리는 초월(종교)의 세계를 상징할 것이다.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작품이

“가사에 휘감긴 여인의 풍만한 육체와 세속과 인연을 끊은 종교적 정념이 묘하게도 서로 융합되면서

번뇌와 희열을 동시에 반영해 주고 있다”고 말했다.

 

작가 월전은 작품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기 위하여

방까지 따로 얻어 수개월에 걸쳐 제작하였다고 했다.

작품은 제16회 조선미전에서 특선 후보까지 올랐다.

작품 자체가 감상자에게 주는 느낌은 비장하고 신비롭다.

하지만 작품의 제작에 얽힌 이야기를 알면 다소 실망이 있을 수 있다.

 

우선 작가 월전은 실제로 진짜 비구니 승무를 구경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당시에 진짜 비구니가 추는 승무가 있었는지에 대한 확인부터가 어렵다.

승무란 것 자체도 사찰에서 추는 춤이 아니었다.

민간에서 사당패 등에 의해 공연된 민속무용의 하나였다.

여승이 아닌 직업 무용수들이 그 공연자였던 것이다.

물론 작품이 제작된 1930년대 당시에도

사찰에서 승려들에 의해 추어진 법고춤, 바라춤, 나비춤 등의 의식용 춤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법무(法舞)라 불리어 졌으며 승무와는 엄연히 달랐다.

승무 역시 원래는 사찰무용이었지만 조선 중기 이후 민속 무용화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실제로 월전은 [승무도]의 모델로 여승이 아닌 권번의 기생을 썼다고 술회했다.

 

“(……) <승무도>를 그릴 때는 승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찾느라 진땀을 뺐다.

요즘 같으면 무용을 전공하는 여대생에게 부탁하면 간단히 해결될 일을, 그때는 도리가 없었다.

마침 발이 넓고 사교적인 무허 정해창에게 부탁해서 승무를 출줄 아는 기녀(妓女)를 찾았다 (……).”

- 장우성 회고록 <화맥인맥>(1982) 중에서

 

따라서 조지훈의 시 [승무]와 월전의 그림 [승무도]에 묘사된 정경은

실제 비구니의 모습이 아닌 상상의 이미지였을 가능성이 많다.

대신에 당시에도 이미 ‘젊은 비구니가 추는 춤으로서의 승무’라는 도상(圖像)은 확립되어 있었다.

승무도상은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1892~1979) 등에 의해 의해서 지속적으로 그려졌다.

이당은 월전의 스승이었다. 즉 월전은 진짜 비구니의 승무를 보지 않고

기존의 승무도의 도상만을 그대로 전습받아 [승무도]를 제작했을 것이다.

스승 이당은 1922년 조선미전에서부터 수차례 승무의 도상을 그려 출품하여 왔고,

자신의 문하에 들어온 제자들의 교육과정 가운데 하나로 승무 그리기를 필수코스로 가르쳤다고 한다.

 

이당이 왜 그토록 [승무도]를 중요시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다만 화려한 법의를 걸친 미모의 여승이 등장하는 [승무도]의 도상 자체가

섬세한 채색미인도를 추구했던 이당의 관심을 끌었으리란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승무도]는 그 허구적 소재로 인해 리얼리티가 반감됨에도 불구하고 미술사적 가치는 적지 않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정교한 사실성과 채색화 특유의 화려한 색감을 조화시키다

 


첫째, 월전의 [승무도]는 우리나라의 근대 채색미인화의 완성적 단계에 이른 작품이다.

원래 우리나라는 채색미인화의 전통이 없었다.

그러다가 1910년대에 김은호에 이르러 일본을 통해 들어온 채색미인화가 그려지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채색 미인도에 부여된 과제는 대단히 모순적인 것이었다.

즉 색채화 특유의 장식성을 유지하는 한편으로는 서양화에서와 마찬가지로 근대적인 사실성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초기 채색화는 이런 모순된 과제가 절충적이고 불완전하게 해결되어 왔다. 이당과 월전의 1920~30년대 채색화가 대개 그러했다.

 

러나 월전의 [승무도]에 이르면 인물과 동작, 의복 등의 묘사에서 자연스럽고 정교한 사실성이 유지되는 가운데서도 채색화 특유의 화려한 색감을 잃지 않고 조화를 이룩하는 것이다.

 

둘째, 월전의 [승무도]는 이당의 것과는 다른 월전식의 승무도를 보여준다.

즉 김은호의 [미인 승무도](도판 참고)는 춤사위의 조형적 아름다움을 묘사하는데 중점이 두어져 있다. 인물의 자세도 드라마틱하고 활발하다.

반면 월전의 승무도는 조용하고 절제되어 있다.

번뇌하는 내면의 묘사가 외형적 조형의 아름다움과 어우러져 깊은 울림을 낳는다.

동적이고 외형적인 이당의 승무도에 비해 월전의 그것은 정적이고 내면적이다.

 

외형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승무도]가

비극적 내면묘사로 옮겨간 데에는 1930년대 문학의 영향도 크다.

비단 조지훈의 시 [승무]에서가 아니더라도 여승에 대한 비극적 이미지는

[승무도]가 그려지기 1년 전인 1936년에 발표된 백석(白石 1912-1995)의 시에서도 다루어졌다.

 

여승은 합장을 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녯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여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 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 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백석, [여승], 1936

 

 

이러한 비극적인 정서가 1930년대의 조선의 문학과 미술에서 유행한 데에는 군

국주의로 치닫던 당시의 암울한 식민지적 상황이 많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  1912. 6. 22- 2005. 2. 28)

경기도 여주 출신으로 이당 김은호 문하에서 한국화에 입문했다.

그림을 시작한지 2년만에 조선미전 입선으로 등단했고

1944년에는 선전 추천작가로 화가로서 최고의 영예를 얻었다.

서울대학교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지냈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역임했다.

문인화 전통에 따른 수묵담채 위주의 인물화를 그리면서도

서구풍의 사실적인 표현을 도입했다.

전통 문인화의 화법을 현대적 감각으로 변용하여

대한민국 한국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 장 엽,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 네이버캐스트 [오늘의 미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