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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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베 - 만남, 혹은 '안녕하세요, 쿠르베씨'

Gijuzzang Dream 2009. 7. 30. 20:08

 

 

 

구스타프 쿠르베

 

19세기 중엽 프랑스는 아직도 혁명 중일 때다.

오르낭이라는 이름 없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파리로 상경한 후,

부모님은 법률가가 되라고 했건만 그저 자유로운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한 구스타프 쿠르베.

가 프랑스 몽펠리에에서 그린 그림이다.

 

우리들에게는 “구스타프” 하면 다음에 “클림트”가 나오는 것이 더 익숙하지만,

양미술사에서 구스타프 쿠르베는 구스타프 클림트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더구나 이 그림 <만남, 혹은 “안녕하세요. 쿠르베씨”>는

서양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힌다.

도대체, 왜, 이렇게도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작품이 유명하고 중요하다는 걸까?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정말 이 그림은 ‘볼거리’가 없다.

19세기 파리의 살롱에 걸렸던 대부분의 그림들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그려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역사적인 알레고리를 통해 교훈을 전달하는 것 같지도 않다.

등장인물들이 특별한 아우라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배경을 이루는 풍경도 그저 평범한 시골길일 뿐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이 그림의 특별한 점은 바로 그 ‘평범함’에 있다.

 

 

이 그림의 특별한 점은 바로 ‘평범함’에 있다


오른쪽에 평범하기 그지없는 등산복 차림을 하고, 언덕을 막 걸어 올라 더러워진 신발을 신은 채,

무식하게 긴 작대기를 짚고 있는 사람이 바로 쿠르베 자신이다.

왼쪽 중앙에 트랜디한 신사복을 입고, 저 멀리 지나가는 마차를 타고 막 도착해

흙이 묻지 않은 맵시있는 구두를 신은 채, 우아하게 지팡이를 짚고 있는 사람은

쿠르베의 후원자인 알프레드 브뤼야스(Alfred Bruyas, 1821~1877)다.

그의 오른쪽에는 고개 숙여 인사하는 하인이,

왼쪽에는 늠름한 개 한 마리가 양쪽에서 브뤼야스를 보좌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쿠르베가 그의 후원자 일행을 동네 언덕에서 우연히 만나

“안녕하세요. 쿠르베씨”라고 말하는 그들과 인사를 나눈다는 내용이다.

얼마나 특별한가. 이렇게도 ‘평범한’ 소재를 예술작품이라고 그린 것이…….

 

실제로 이 그림이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처음 발표되었을 때 사람들은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미술계의 아카데미즘은

역사화, 종교화, 초상화, 풍경화, 풍속화 등의 규범화된 장르적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쿠르베가 내놓은 이런 장르의 그림은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러한 ‘평범함’ 뒤에는 화가 나름의 치밀한 계산이 숨어 있다.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를 잘 보라.

쿠르베는 허름한 등산복 차림에 무거운 화구통을 짊어지고 힘겹게 언덕을 올라,

자신의 작품을 사주는 후원자를 만났어도 조금도 주눅 든 기색이 없다.

인사를 하면서도 턱수염은 치켜 올라가 거만할 정도로 당당해 보인다.

반면 부자 후원자는 모자를 벗으며 점잖게 인사를 건네고 있지만

좌우로 그를 지켜주는 사람 혹은 개를 대동해야만 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돈은 있으나 ‘생기’가 없어 보이는 것이다.

 

실제로 쿠르베는 이 그림에 “천재에게 경의를 표하는 부(富)”라는 부제를 붙였다.

예술가는 돈은 없지만 천재적인 존재고,

그러니 돈 많은 부자들이 예술가를 후원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당당히 말한다.

  

살롱과 미술계로부터 비판과 찬사를 번갈아가며 받다

 


브뤼야스는 쿠르베의 그런 생각까지도 믿어 주고 따라 주었다.

이들은 ‘천재’와 ‘자본’이 서로 보완하며 결합할 때 사회에 기여하는 예술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믿었던 프랑스 사회주의자 푸리에(Francois Marie Charles Fourier, 1772~1837)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렇기 때문에 브뤼야스는 1853년 살롱에 출품했다가 악평을 받았던 쿠르베의 작품들을 기꺼이 사주었다(그 중에는 유명한 작품 [목욕하는 사람]도 있다).

1855년 쿠르베가 만국박람회장 옆에 ‘리얼리즘관’이라는 간판을 붙인 건물을 짓고 박람회로부터 거절당한 작품들을 가지고 개인전을 열었을 때도 돈을 대 주었다.

 

쿠르베는 푸리에 , 프루동 (Pierre-Joseph Prouhdon, 1809~1865) 등 사회주의 사상가들에게 도취되었고 보들레르와 샹플뢰리 의 친구였으며 스스로 공화주의자였다.

살롱과 미술계로부터 비판과 찬사를 번갈아가며 받았고, 파리와 고향 오르낭을 오가며 도시의 시민들과 좋아하는 시골 풍경을 마음껏 그렸다.

 

말년에 제국 정부가 레지옹도뇌르 (Légion d'honneur) 훈장을 주겠다는 것도 거절하고

프러시아와의 전쟁 중에는 파리에 있는 예술작품의 보호 책임자로 일했다. 

1871년 파리코뮌 때는 제국주의의 상징인 방돔 광장의 기둥 파괴를 주도했다가 감옥살이를 했다.

이후 벌금을 내지 못해 스위스로 망명을 가야 했다.

스위스의 시골 마을 투르 드 페(La Tour-de-Peilz)에 은둔해 살며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생긴 건강악화로 인해 1877년 5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주위에 널려 있으나 발견하지 못하는 평범한 ‘진실’을 그리다


자, 그림을 다시 보자.

보통의 화가들이 자신의 높은 지위를 상징하기 위해

귀족과 같은 근사한 옷을 입고 근엄한 표정을 지은 모습으로 자신을 표현한 그림은 예전에도 많았다.

하지만 쿠르베의 옷은 ‘평범함’을 넘어 너무도 소박하다.

화가의 높은 지위는 당당한 태도와 남모르는 ‘자존심’에서 나오는 것이지

귀족이나 부르주아를 모방한 값비싼 의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편한 옷에 화구를 메고 그림 그릴 곳을 찾아다니며 일하는 모습에서 ‘진솔함’이 묻어난다.

 

역시나 이 그림은 결코 ‘아름답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꾸밈없는 ‘진실’이 들어있다.

그저 시골의 특별할 것 없는 풍경과 소박한 옷차림이

웅장한 자연이나 화려한 의상보다 진실함을 담고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남프랑스 특유의 따사로운 햇살과 그 햇살이 만드는 땅 위의 그림자,

그리고 아무렇게나 피어난 듯한 길거리의 들풀도 참 진실해 보인다.

우아한 포즈도 유려한 선도 인상적인 색채도 없어 ‘볼거리’가 없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가깝고 친근하다.

 

쿠르베는 부르주아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아름다움’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널려 있으나 발견하지 못하는 평범한 ‘진실’을 그리고자 했던 것이다.

이 작품이 서양미술사상 혁명적인 작품 중의 하나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나는 그림으로 먹고 살면서

단 한 순간이라도 원칙을 벗어나거나 양심에 어긋나는 짓은 하고 싶지 않네.

또 누구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아니면 쉽게 돈을 벌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싶지도 않네.”  

- 쿠르베의 편지 중에서

  

 


구스타브 쿠르베 Gustave Courbet (1819.6.10-1877.12.31)

1840년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할 계획으로 파리로 갔지만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1850년을 전후로 자신의 고유 화풍인 사실주의 색채를 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천사를 그려달라는 주문에 "천사를 실제로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릴 수 없다"라고 말한 일화는 사실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을 잘 드러낸다.

회화의 주제를 눈에 보이는 것에만 한정했고

견고한 마티에르와 스케일 큰 명쾌한 구성으로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젊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 네이버캐스트, [오늘의 미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