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촌부 김희동, 해삼 망태 들고 성종 만나러 무작정 상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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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종(1457∼1494, 재위 1469∼1494)은 영특하고 국량(局量)이 넓을 뿐 아니라 미복잠행(微服潛行)으로도 유명한 군주였다. 밤이면 편복으로 갈아입고 어두운 한양 장안을 돌아다녔다. 중신들은 만류했으나 성종은 듣지 않았다.
‘백성이 잘 살고 못 사는 것을 내 눈으로 친히 보아야 믿지 않겠는가’라는 것이 국왕의 명분이었다. 금지옥엽이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중신들은 근심했으나 국왕은 한두 명의 무예별감(武藝別監)만 데리고 단신 보행했다. 그나마 근시(近侍)도 못하게 하고 멀찌감치 뒤따르게 했다.
어느 날 밤 성종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운종가(雲從街 · 지금의 종로)로 나섰다. 광통교 위를 지나는데 다리 아래에 한 사람이 쪼그리고 앉아 졸고 있었다. 나이는 마흔 남짓 돼 보이는데 행색이 남루한 것이 시골 사람이 틀림없었다.
성종이 가까이 가서 누구냐고 부드럽게 묻자 그는 천천히 일어나 “저는 경상도 흥해(興海) 땅에 사는 김희동(金喜東)이라는 숯장수인데, 마흔이 넘도록 어진 임금님이 계신다는 한양 구경을 못했지요. 그래서 서울 구경도 하고 임금님도 뵈려고 벼르고 별러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저녁밥을 먹고 하룻밤 잘 만한 탄막(炭幕)을 찾아 헤매다 보니 날이 저물어 하는 수 없이 이곳에서 밤을 새우기로 했지요. 그런데 뉘신데 밤이 깊은 서울을 이렇게 나다니시오. 보아하니 선비 같은데…” 라고 했다.
성종은 속으로 웃으며 사실 어질고 착한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이렇게 자기를 찾아온 시골 백성이라 생각하고, 그의 소박함과 순진함에 감동했다.
성종은 시치미를 뚝 떼고 “나는 동관에 사는 이 첨지라는 사람이오. 임금이 있는 곳을 알기는 하오만, 만일 알려주면 임금에게 무슨 말을 전하려 하오?”라고 물었다.
촌부의 순수함에 감동한 왕
그러자 김희동은 서슴지 않고 “참말이지, 우리 고을에선 사람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우리 임금님을 칭찬하오. 임금님이 백성을 사랑하셔서 우리가 걱정 없이 잘 산다는 거지요. 내가 서울에 와서 그냥 돌아가기도 뭣해 임금님이나 한번 뵈옵고 돌아갈까 하오. 빈손으로 뵙긴 뭣할 것 같아 우리 고을 명산인 전복과 해삼 말린 것을 좀 가지고 왔지요. 임금님께 이것을 드려 수라 반찬이나 합시사 하고. 보아하니 서울 양반으로 거짓은 없을 듯한데 어디 임금님을 좀 뵙게 해주시구려” 라고 간청했다.
그때 멀리서 무예별감들이 달려왔다. 성종은 그들에게 귀띔하고는 “이 사람들을 따라가면 임금을 만날 수 있도록 해줄 터이니 안심하고 가시오” 했다. 김희동은 한양의 인심이 좋지 않다는 말만 들었는데 참 인심 좋은 사람을 만났다 생각하고, 별감을 따라 그의 집에 가서 묵었다. 별감은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여관집 주인처럼 대접했다.
이튿날 성종은 편복 차림으로 별감의 집에 들렀다. 그러자 희동은 몹시 반가워하며 “이렇게 시골 사람을 후대하시니 이 첨지의 은혜가 큽니다.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 주간동아, 2009.06.30 692호(p7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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