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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 책봉 - 왕의 즉위 - 왕의 죽음

Gijuzzang Dream 2009. 7. 1. 10:46
 
 
 
세자 책봉식
 
왕위를 계승할 자, 세자
 
조선시대 왕위 계승의 원칙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우선 중전의 몸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이 왕위를 계승해야 하는 것이고,
왕이 될 사람은 덕이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 그 두 번째이다.
이 조건을 만족시키는 왕손은 '대를 이을 아들'이라는 의미의 세자(世子)로 책봉되어,
후계자로서의 준비에 만전을 기울여야 했다.

조선 27대 왕 중에 위의 적장자 원칙에 따라 세자 책봉을 받고 왕위에 오른 임금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7명이다.
적장자는 아니지만 그 덕을 인정받거나
중전에게 아들이 없어 후궁의 아들이나 왕족으로서 왕위에 오른 임금은 19명이다.
덕종, 순회세자, 소현세자, 문조는 세자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고,
양녕대군, 연산군의 아들, 광해군의 아들은 폐세자가 되어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대궐의 정전에서 거행된 의식, 세자책봉례

왕세자 책봉도

세자를 책봉하는 임명서를 수여하는 의식을 '세자책봉례'라고 한다.
세자책봉례는 대궐의 정전에서 거행되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세자책봉례의 순서가 기록되어 있다.
첫 번째 북이 울리면, 의장을 갖추고 군사를 배치한다.
두 번째 북이 울리면, 문무백관과 종친들은 근정문 밖의 위(位)로 나아가고,
왕세자가 면복을 갖추고 등장한다.
세 번째 북이 울리면, 지위에 따라 종친과 문무백관이 동서로 줄지어 서며,
종이 울리다가 그치면 악기 연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왕이 가마를 타고 나선다.
문무백관과 왕세자가 왕에게 차례로 사배(四拜)를 하며,
꿇어앉은 세자 앞에서 왕은 전책관을 통해
죽책문(竹冊文), 교명문(敎命文), 세자인(世子印)을 전해 준다.
죽책문은 대나무로 만든 임명장, 교명문은 세자에게 당부하는 훈계문,
세자인은 세자를 상징하는 도장이다. 세자에 책봉된 이후에는 중국 황제의 고명을 받았다.
그리고 성균관에 행차하여 제자로서 공자에게 인사를 드렸다.
 
왕의 되기 위한 훈련, 세자의 하루
 
세자의 자리에 오르면, 궁궐의 동쪽에 거처가 있다 하여 '동궁(東宮)',
혹은 계절 중 봄에 비유하여 '춘궁(春宮)'이라 불렸다.
책봉 후에는 세자익위사의 호위를 받으며
조선의 내로라하는 실력자들로 구성된 세자시강원의 관료들로부터
왕으로서 요구되는 식견과 능력을 기르는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의관을 정제하고 왕을 비롯한 왕실의 어른들에게 문안 인사를 가는 것이
공식 일과의 시작이었다.
문안인사 후에는 조강, 주강, 석강으로 나뉘는 세자시강원의 강의를 들으며 유교 공부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틈틈이 말 타기, 활쏘기, 붓글씨 등 이른바 육예(六藝)를 연마하였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왕실 어른들에게 다시 인사를 드림으로써 세자의 하루는 마감된다.
 
부왕을 대신한 정치, 대리청정
 
세자는 원칙적으로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되며,
위와 같은 일과를 보내며 후계자로서의 자질을 기르는 것을 본분으로 삼아야 했으나,
부왕 대신 국사를 처리하는 대리청정을 하기도 하였다.
세종의 아들 문종, 선조의 아들 광해군,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예가
그러하다.

 

 

 

 

왕위 즉위식
 
그림-조선시대 왕의 면복
 
선왕 장례의 한가운데, 세자의 왕위 계승
 
왕실 후계자로 정해진 세자는 언제 왕위를 물려받게 될까?
조선 왕조의 왕위 계승은 선왕이 승하하거나 왕의 자리를 물러났을 때 이루어졌다.
건강의 악화, 반정 등의 이유로 세상을 뜨기 이전에 왕의 자리를 물러난 경우는
27대 왕 중 태조, 정종, 태종, 단종, 연산군, 광해군, 고종 7명의 경우에 불과하며,
나머지 20명의 왕은 모두 승하한 후 다음 왕에게 옥새를 넘겨주었다.
 
따라서 조선 왕 대부분의 즉위식은 선왕의 장례 기간에 이루어졌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는 이 의식을 국장절차 중 하나의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사위(嗣位), 반교서(頒敎書)라고 한다.
 
그림-어보, 청석
 
용상에 오르는 순간, 새 왕의 등극
 
왕의 즉위식은 선왕이 승하한 지 6일이 지난 후 거행된다.
선왕의 시신을 모신 빈전의 동쪽에 왕세자가 머물 천막을 치고,
유언장과 옥새를 여러 가지 의장물과 함께 설치하여 새 왕에게 옥새를 건네 줄 준비를 한다.
 
왕세자는 천막 안에서 입고 있던 상복을 벗고 예복인 면복(冕服)을 갈아입고 빈전의 뜰로 나아간다.
그리고 선왕의 유언장과 옥새를 받아 각각 영의정과 좌의정에게 전해주고는 천막으로 돌아간다.
천막에서 다시 나온 왕세자는 붉은 양산과 푸른 부채를 든 자들에게 둘러싸여
가마를 타고 용상이 설치된 정전으로 향한다.
이리하여 왕세자가 오른쪽 계단을 통해 용상에 올라앉는 순간, 새로운 왕이 탄생하게 된다.
즉위교서가 반포된 후 정전에서는 향을 피우고,
즉위식장의 대소 신료들은 두 손을 마주잡아 이마에 얹으면서 “천천세(千千歲).”라고 외친다.
이는 왕조의 운명이 오래도록 영원하라는 뜻이다.
 
눈코 뜰 새 없는 일과, 왕의 하루
 
조선의 왕은 선왕의 생존기간이나 재위기간이 일정치 않았으므로,
고작 7세의 나이에 즉위한 헌종에서 57세에 왕위에 오른 태조까지
그 즉위 때의 나이가 천차만별이다.
 
즉위 후에는 매우 바쁜 일상을 보내게 된다.
왕이 처리하는 업무가 만 가지나 되기 때문에 왕의 집무를 '만기(萬機)'라고 하는 것이다.
 
왕의 하루 일과는 네 단계로 구분된다.
아침에는 신료들로부터 정치를 듣고, 낮에는 왕을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만나며,
저녁에는 조정의 법령을 검토하고,
밤에는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을 한다 하여 왕의 사시(四時)라고 한다.
왕으로 즉위하는 순간부터 이렇게 눈코 뜰 새 없는 ‘왕의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다.

 

 

  • 조선 27대 왕의 즉위 정보

출생년도 즉위년도 즉위시 나이 즉위장소 재위기간
1대 태조 1335 1392 57세 수창궁 7년
2대 정종 1357 1398 42세 경복궁 근정전 2년
3대 태종 1367 1400 34세 수창궁 18년
4대 세종 1397 1418 22세 경복궁 근정전 32년
5대 문종 1414 1450 37세 동별궁 빈전 2년
6대 단종 1441 1452 12세 경복궁 근정문 3년
7대 세조 1417 1455 39세 경복궁 근정전 13년
8대 예종 1450 1468 19세 수강궁(현재 창경궁) 중문 1년
9대 성종 1457 1469 13세 경복궁 근정문 25년
10대 연산군 1476 1494 19세 창덕궁 인정전 11년
11대 중종 1488 1506 18세 경복궁 근정전 39년
12대 인종 1515 1544 30세 창경궁 명정전 8개월
13대 명종 1534 1545 12세 경복궁 근정전 22년
14대 선조 1552 1567 16세 경복궁 근정전 41년
15대 광해군 1575 1608 34세 정릉동 행궁(현재 창덕궁) 서청 15년
16대 인조 1623 1623 28세 경운궁(현재 덕수궁) 27년
17대 효종 1619 1649 31세 창덕궁 인정전 10년
18대 현종 1641 1659 19세 창덕궁 인정전 15년
19대 숙종 1661 1674 14세 창덕궁 인정전 46년
20대 경종 1688 1720 33세 경덕궁(현재 경희궁) 4년
21대 영조 1694 1725 31세 창덕궁 인정전 52년
22대 정조 1752 1762 25세 경희궁 숭정문 24년
23대 순조 1790 1800 11세 창덕궁 인정전 35년
24대 헌종 1872 1834 7세 경희궁 숭정문 15년
25대 철종 1831 1849 19세 창덕궁 인정전 14년
26대 고종 1852 1863 11세 창덕궁 인정전 43년
27대 순종 1874 1907 33세 원구단 3년

 

 

왕의 죽음
 
그림-영월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승하한 단종의 능 장릉
 
호화로운 생활과 비례하지 않았던 왕의 건강
 
519년의 긴 세월을 이어온 조선 왕실에는 모두 27명의 왕이 존재하였다.
왕들은 장엄한 구중궁궐에서 화려한 의복을 입고,
전국 각지에서 진상한 최고급 식재료를 이용하여 차린 수라상을 받았으며,
아름다운 궁녀들을 곁에 두고 지냈다. 조선의 내로라하는 명의들은 궁궐에서 늘 왕의 건강을 살폈다.
그러나 왕들은 이러한 호화로운 환경에서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다지 건강하지 못하였다.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은 44세로 주로 눈병, 종기, 중풍 등의 병을 겪다가 승하하였다.
 
만기(萬機)를 처리해야 하는 왕의 직업병
 
일단 왕위에 오르면 그 뒤로는 정신 없이 바쁜 왕의 일과가 시작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처리해야 할 업무가 산처럼 많기 때문에
왕이 집무하는 일들을 만 가지 일이라는 뜻의 “만기(萬機)”라고 하였다.
게다가 왕의 집무는 철저히 정신노동이었다.
주로 앉아서 신료들을 접견하고 공문서를 읽었으며, 자리를 이동할 때에는 가마를 이용하였다.
 
격구나 활쏘기 등의 간단한 활동을 제외하고는 운동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따라서 혈액 순환이 원활히 되기가 어려웠고, 당뇨와 고혈압에 쉽게 걸렸다.
눈병이나 종기가 나면 쉽게 낫지 않았으며, 이는 결국 왕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원인이 되었다.
실제로 세종과 숙종이 당뇨병으로, 태조, 정종, 태종이 중풍으로 인한 뇌출혈로,
문종, 성종, 효종, 정조, 순조가 종기로 세상과 작별하였다.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 정치사의 희생양
 
그런가 하면 질병과는 상관없이 정치사의 희생양으로 운명을 달리한 왕도 있다.
6대 임금 단종은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당했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있어 감옥이나 다름없는 영월의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결국 17세의 어린 나이에 사약을 받고 승하하였다.
이로서 단종은 조선 27대 왕 중 가장 어린 나이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단종과는 다른 경우이나 연산군과 광해군도 반정에 의해 폐위되고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다.
 
왕의 급서 앞에 제기되는 독살설
 
정사로는 전해지지 않지만 일부에서는 계획적인 독살로 인해 임종을 맞은 왕이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한다. 반대 세력과의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극한 긴장을 맞았을 때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왕들의 경우 오랜 세월 이러한 의심을 피해갈 수 없었다.
 
문정왕후가 자신 소생의 아들 명종을 왕위에 올리기 위하여 인종을 독살했다는 설이나,
노론 벽파를 견제하는 정책을 펼쳤던 정조가 노론 가문 출신인 정순왕후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설
등이 그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을 뒷받침해주는 정확한 근거는 없으며,
수백 년을 지속한 왕조의 한 가운데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던 권력 투쟁의 단면을 보여줄 뿐이다.
 
개인사일 수 없었던 왕의 질병과 죽음
 
뜸뜬 자리의 종기가 점차 견디기 어렵다.
이에 나도 모르게 지난 무신년 역적들을 국문할 때의 일이 생각나는구나. ……
이 뒤로는 담금질을 영구히 없애도록 하라.

『영조실록』1733년 8월의 기사에는 위와 같은 하교가 기록되어 있다.
왕의 종기 하나가 당대의 잔혹한 형벌 제도를 폐지시킨 셈이 되었다.
이처럼 왕의 질병과 죽음은 온전한 개인의 것이 아니었으며, 당시의 정치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