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위창 오세창 편역 <근묵(槿墨)>

Gijuzzang Dream 2009. 6. 30. 23:01

 

 

 

 


 

 위창 오세창 편역 <근묵(槿墨)> 실물 재현

 

국역 곁들여 선조들 글씨의 향기 부활하다

 
 

1981년 출간된 ‘근묵(槿墨)’ 상 · 하권,

여기에 실린 정몽주의 편지

(촬영협조· 가회고문서연구소)

‘해마다 보내주시는 햅쌀을 받는데, 마음 깊이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6월부터 이질을 앓아 30일이 되어가는데, 요즘은 조금 나아졌습니다….’

 

포은(圃隱) 정몽주가 고려 말 문신 이집(李集)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인용한 정몽주의 편지는 <근묵>에 실려 있다.

 

 

미시적 역사 읽기가 어느 때보다 각광받는 요즘,

선조들이 남긴 편지야말로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최적의 사료다.

 

또한 당시 서체를 감상할 수 있는 예술작품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구한말의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 서예가, 서화 수집가인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은 주목해야 할 인물이다.

 

그는 신라시대부터 1920년대까지 1117명의 역대 서화가를 기록한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사 책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펴냈을 뿐 아니라,

고려 말에서 대한제국 말까지 서화가들의 진필을 수집해

<근역서휘(槿域書彙)> <근역화휘(槿域畵彙)> <근묵(槿墨)> 등을 펴냈다.

그가 편찬한 책들만 살피더라도 한국서예사를 꿰뚫을 수 있을 정도다.

 

 

1943년 출간된 <근묵>은 정몽주를 비롯해 퇴계 이황, 다산 정약용 등 1136명의

서화가와 학자들의 서간 · 시문 · 현판 등 1136점의 친필을 34책으로 엮은 서책이다.

고문서 연구에 몰두해온 역사학자 하영휘 가회고문서연구소장은

“600여 년에 걸친 작품들이 한데 실렸기에 한국서예사 흐름과 서체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뿐 아니라, 조선시대 사회상을 읽을 수 있어 사료적 가치 또한 높다”고

평가했다.

 

이런 <근묵>이 조만간 대중 앞에 선보인다.

<근묵>을 소장한 성균관대 박물관이 1136점의 작품 전부를 정밀하게 촬영,

실물 크기와 원색을 살려 펴내기 때문이다.

또한 최초로 국문 번역까지 완료해, 일반인이 그 내용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했다.

국역판까지 합쳐 모두 5권으로 구성된 이 책의 정가는 100만원이 될 예정.

 

성균관대 관계자는 “1000부만 한정 제작하며,

원래의 서책이 국보로 지정되도록 노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책의 출간을 맡은 성균관대 출판부는 최근 일간지 광고를 통해

<근묵>을 ‘국보급 유물’로 칭하며 예약 판매 중임을 알렸다.

 

 

서체는 물론 생활상도 볼 수 있는 국보급 古書

 

위창이 엮은 서화집 중 실물 그대로 재현되고 국역까지 이뤄지는 것은

이번에 나오는 <근묵>이 처음이다.

서울대 박물관이 소장한 <근역서휘>와 <근역화휘>는

1990년대 초 일부만 출판됐다.

성균관대 박물관은 1981년 <근묵>을 상 · 하권으로 나눠 출판했는데,

실물 크기도 아니고 흑백 인쇄라는 한계가 있었다.

국역도 되지 않았고, 인쇄 상태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권당 5만원에 출간된 <근묵> 또한 요즘 고서점에서

100만원 넘는 가격에 거래될 만큼 가치가 높다고 한다.

 

위창이 선조들의 글씨를 모아 펴낸 것은 호사스러운 취미가 아닌,

나라 잃은 민족의 역사와 문화, 혼을 지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육당(六堂) 최남선은 <근역서화징>에 대한 서평에서

“조선이 예술국이지만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들이 매몰되어

그 면모가 엄폐된 것을 갖은 난관을 무릅쓰고 찾아내고 보존하여

조선의 예술적 터전을 지켰다”고 평가했다.

 

위창은 <근역서휘> 발문에

“후세 사람들이 옛사람을 오늘날의 사람처럼 가까이 대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고

썼다.

 

이번에 국역까지 되어 출간되는 <근묵>은 그러한 위창의 뜻을 잘 살린 것이다.

한편 성균관대 박물관은 출간을 기념해

<근묵> 특별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위창 바람’이 얼마나 넓고도 향기롭게 퍼질지 기대해볼 만한 일이다.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 2009.06.30 692호(p51~51) 주간동아

 

 

 

 

 

  

“풍년이 들어 벼 한 석 보낸다”

 

600여 년 선조들 타임캡슐 ‘근묵’, 완역본으로 재출간

 

 

현대인은 문자메시지로 살지만, 소설 ‘임꺽정’에

“양반은 편지로 살고, 아전은 포흠으로 살고 기생은 웃음으로 산다”고 할 정도로

조선시대까지 가장 주요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편지였다.

 

그러나 편지는 인편으로 전달됐고 종이도 구하기 쉬운 물건이 아니었기에

자주 쓰기는 어려웠다. 그런 만큼 편지에는 보내고 받는 사람의 진정성이 담기고,

시전지를 아름답게 꾸미고자 하는 디자인 감각도 더해졌다.

 

역사책에서 그 이름을 들었던 ‘근묵(槿墨)’은

고려의 정몽주에서 대한제국 말기의 이도영까지 선인 1136명의 서간류 소품을

감식학의 대가인 위창 오세창(1864~1953) 선생이 수집해서 엮은 책.

6월29일 ‘근묵’을 소장한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이 처음으로 한글로 풀고 주석을 단

완역본 ‘근묵’ 출간을 발표해 미술사학계의 비상한 관심이 쏠렸다.

 

‘근묵’은 작가의 연대가 600여 년에 걸칠 뿐 아니라

작가층도 왕에서 승려, 중인을 망라한다.

따라서 글씨는 물론 당시 사회와 경제,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지만,

워낙 방대해 번역과 출판 작업이 지금까지 미뤄졌다.

 

세월이 흘러 선조들이 쓰던 한자와 한문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조차 점점 줄어들어 시급하게 번역할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성균관대 박물관에서 6년에 걸친 노력 끝에 번역과 주석을 단 완역본을 펴냈다.

덕분에 일반 독자들의 감상도 훨씬 쉬워졌다.

완역본 ‘근묵’은 1000질이 한정 제작돼 판매된다.

 

 

정조(1752~1800)가 친척에게 보낸 선물 목록

 

“상림(왕의 농장)의 벼 한 석.

금년 가을 풍년이 들어 소출이 배나 많아 전에 말로 보내던 것을 석으로 보낸다.

내원의 담배 두 봉.

토양이 적합하고 맛이 좋아 삼등(평남 삼등에서 나는 질 좋은 담배)에 못지않다.

게장 한 항아리. 원에서 딴 밤 한 말. 새로 심은 것인데 맛이 이렇게 좋다.”

 

 

김정희(1786~1856)가 아내를 잃은 사람에게 보낸 편지

 

“아내를 잃은 슬픔에 놀라움을 누를 수 없습니다.

… 나는 일찍이 이런 상황에 익숙해진 적이 있기 때문에 그 단맛과 쓴맛을 잘 압니다.

마음을 안정시키고 슬픔을 삭이는 데는 종려나무 삿갓을 쓰고 오동나무 나막신을 신고

산색을 보고 강물 소리를 들으며 방랑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윤선도(1587~1671)가 지인에게 보낸 편지

 

“작년에 받은 영감의 편지를 지금도 펼쳐보며 그리움을 달랩니다.

… 저는 영감의 염려 덕분에 죽지 않고 나이를 한 살 더 먹었으나

노환이 날로 심하여 뼈대만 남았을 뿐입니다.

… 영감이 만약 왕명을 받아 이쪽으로 오신다면

죽기 전에 한 번 해후할 길이 있겠지만 어찌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덕무(1741~1793)가 성리학자 조경암에게 보낸 편지

 

“4월20일 쓰신 편지를 이달 26일에 받았습니다.

… 대군자께서 저를 문장의 명목으로 지목하신 것은 잘못된 격려이며

진정한 충고가 아닌 것 같습니다.

… 과거시험의 속된 학문에 골몰하여 세월을 허송한 것도 이미 죄과인데,

어찌 문장에 힘을 쏟을 겨를이 있었겠습니까.

예로부터 ‘불후’라고 자칭하는 유명한 인물과 학자들이

스스로 세우고 스스로 의지한 것은 모두 축적된 힘에서 나왔습니다.

 

… 근년 이후로 혈기가 장성하고 지혜가 조금 열려 명예를 추구하는

썩은 학자의 습성을 자못 씻으려고 지난날을 반성하며

늘 방안에 홀로 앉아 ‘논어’와 ‘소학’의 의미를 되새기며

거기 있는 한마디 말로 나의 행동 하나를 검증하고

한 구절로 나의 생각을 비교하며

진솔한 성품을 돈독히 하여 결점을 고치고 모자람을 보충하는 법을 삼고자 합니다.

 

그러나 자연히 쌀과 소금이 떨어지면 아녀자의 우는 소리에 마음이 흔들려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여 스스로 실행하다가 그만두고 맙니다.

…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 주간동아, 2009.07.14 694호(p66~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