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산 삼천사 대지국사비
1964년 1월8일 동아일보사에 어느 독자가 찾아와서 구양수체(歐陽詢體)의 고석비명편(古石碑銘片)
하나를 제시하고 북한산 중턱에 있는 옛 절터 돌거북 둘레에 이러한 비명편들이 묻혀 있다고
전해준 것이 계기가 되어서 나는 그날 요우(僚友) 정양모(鄭良謨), 김동현(金東賢) 양씨와 함께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날씨를 무릅쓰고 동아일보사의 지프차로 즉시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 절터는 바로 고양군 신도면 진관내리에 있는 북한산의 험준한 삼천(三川)골 막바지
속칭 눈썹바위 봉우리 밑 해발 약 350m 쯤 되는 작은 대지 위에 있었다.
어지러운 잡초와 관목들 사이에 거대한 귀부(龜趺)의 하반신이 흙 속에 묻힌 채
등은 큰 바위에 짓눌려 있고 이수(螭首)는 거북머리 앞에서 약 2m 쯤 되는 거리에 뒤집힌 채
흙에 박혀 있었다.
산산조각이 난 비편(碑片)들은 바로 이 귀부와 이수의 둘레 언 흙 속에 드문드문 묻혀 있었는데
우리는 눈보라 속에서 우선 시급하게 수습해야만 할 이 비명편(碑銘片)들을 거두는 사이에
날이 저물어 일단 철수했다가 1월10일과 1월21일에 다시 현장을 방문,
혹한 속에 언 흙을 파헤치고 비명편(碑銘片)들을 수습하는 작업을 강행했다.1)
이상 3차에 걸친 비명편(碑銘片) 수습에서
비양명(碑陽銘, 細字) 片 49개 399자, 비음명(碑陰銘, 大字) 片 25개 115자를 거두었다.
우리가 처음 신문사의 통지를 받고 현장으로 달려갈 당시
나는 이것이 삼천사지(三川寺址)의 유적이라는 것을 몰랐고
따라서 1963년 9월15일 진홍섭(秦弘燮)교수가 정영호(鄭永鎬)씨와 함께 답사하면서
은근히 비명편의 출토를 기대했던 삼천사지비(三川寺址碑)2)와는 다른 또 하나의 절터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현장을 돌아보고 나서야 비로소 이것이 바로 三川寺址임을 알게 되었고,
나는 秦교수와 더불어 이 비명편을 수습하는 즐거움을 함께 나누지 못하게 된 것을 아쉬워했다.
이 삼천사지 석비명(石碑銘)의 소재에 관해서
<동국여지승람>3)에 “三川寺 在 三角山, 有高麗李靈幹 所撰碑銘”이라 있고,
<북한지(北漢誌)>4)에는 ‘三千寺 在 小南門外 今廢有高麗 李靈幹 小撰碑“라 있어서
<동국여지승람>이 증보 간행된 조선 중종대와 <북한지>가 편찬된 경종 연간(1721-1724) 사이의
어느 해에 이 절이 폐사(廢寺)된 것을 지작할 수 있다.
따라서 이 碑銘이 현재와 같이 괴멸(壞滅)되어 버린 것도 아마 그 기간의 일로 짐작된다.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5)에 보면
失名 麗王筆이라 표기한 三川寺 대지국사비(大智國師碑)의 마멸이 심한
비양(碑陽)銘 단편(斷片) 두 개(41자)와
失名 三川碑陰이라 표기한 비음명편(碑陰銘片) 하나(24자)의 탁영(拓影)이 남겨졌을 뿐인데
이로써 보면 <대동금석서>의 원편자(原編者) 낭선군 이우(朗善君 李俁, 1637-1693) 시대에는
이미 이 碑가 대파(大破)되어 있어서
더 뚜렷한 큰 파편을 얻어 볼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 이 三川寺 비명(碑銘) 자료로서 남아 있는 것은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6)에 비양명(碑陽銘) 산편(散片) 합계 24자,
비음명(碑陰銘) 산편(散片) 합계 68자가 있으나 이상 두 금석서(金石書)에 수록된 내용에서는
대지국사(大智國師)의 이름이나 삼천사(三川寺)의 이름
그리고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비문(碑文)의 찬자(撰者) 이영간(李靈幹)의 이름이나
<해동금석원>에서 건비(建碑) 연대를 고려 문종(文宗) 시라고 한 것 등의
근거를 밝힐 수 있는 문구는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상 문헌자료 외에도 삼천사지(三川寺址)를 다룬 최근세의 문헌으로는
고종 연간에 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7)에 삼천사(三川寺)는 이미 폐사(廢寺)되었고,
다만 高麗 이영간이 지은 대지국사비명(大智國師碑銘)이 있음을 전한 대목이 있고,
<大正5년도 고적조사보고(古蹟調査報告)>8)에 일본인 학자 금서룡(今西龍)이
1916년 8월에 사지(寺址)를 조사하고자 그 근처에 이르렀으나
호우(豪雨)로 인하여 계곡이 위험해서 답사를 단념하고 돌아왔다는 요지가 보고되어 있으며,
해방 후로는 1961년 정명호(鄭明浩)씨가 이 사지(寺址)를 답사해서
귀부(龜趺)의 건재를 보고한 것이 있다.9)
이번 우리의 3차에 걸친 비명편(碑銘片) 수습에서도 큰 파편은 많지 않았고
따라서 비명(碑銘)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힐 자료는 매우 적었다.
다만 비양명(碑陽銘)에 ‘三川寺’ ‘三川民舍’ ‘三川’ 등 三川寺에 관계되는 기명(記銘)과
비양(碑陽) 우단부(右端部) 단편(斷片)에 ‘도승통(都僧統)’이라는 승직(僧職)명,
그리고 ‘계묘납월(癸卯臘月)’ 과 같은 간지(干支) 등이 주목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비명(碑銘)의 서체는 양음(陽陰)이 모두 라말(羅末)과 고려시대 초기의 여러 비명(碑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양순체(歐陽詢體)의 글씨로 비양명(碑陽銘) 세자(細字)는 자경(字徑) 2㎝ 내외,
비음명(碑陰명) 대자(大字)는 자경(字徑) 3㎝ 내외의 뚜렷하고도 격이 있는 깊은 각명(刻銘)이다.
현재 남아있는 귀부(龜趺)와 이부(螭首)의 각 부는 비례가 바르고 분명하며
또 능숙한 조법(彫法)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웅혼한 기백(氣魄)을 나타낸 직립(直立)한 귀두(龜頭) 표현과 아울러
고려시대 초기의 고격(古格)을 잘 나타낸 가작(佳作)임을 알 수 있다.
이 三川寺의 존재를 전해주는 가장 오랜 기록으로는
고려 현종 12년(1021)에 세운 현화사비명(玄化寺碑銘)10)에
三川寺 住持 王師都僧統 法鏡으로 하여금 현화사 주지의 자리에 오르게 했다는 대목과
<고려사(高麗史)> 현종 18년(1027)에 三川寺 등 여러 절의 사승(寺僧)들이
범금(犯禁)해서 양주(釀酒)했으므로 의법 처단했다는 기사(記事)11)를 들 수 있다.
즉 三川寺는 11세기 초두 무렵에 알려진 명찰(名刹)의 하나였으며
당시 지엄한 국찰(國刹)인 현화사의 주지를 三川寺의 주지에서 발탁했다는 사실은
그럴 만한 三川寺의 법도(法度)를 능히 짐작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대략 이상의 사실들과 이번에 새로 발견한 비명(碑銘)들의 자체(字體)와 각법(刻法)을 살펴보면
이것은 과거 <대동금석서>와 <해동금석원> 양계(兩系)의 금석서(金石書)에 남아 있는
三川寺碑 탁영(拓影)과 동일비(同一碑)임이 분명하다.
다만 <동국여지승람>의 편자(編者)가(이것은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인용한 것이겠으나)
이것을 고려 이영간이 지은 글이라 했던 것은 당시로서는 그러한 근거가 남아 있었다고 볼 수 있고
또 <대동금석서>의 편자(編者)나 <해동금석원>의 편자(編者)가
이것을 대지국사비(大智國師碑), 高麗 文宗時 운운한 기록을 남긴 것도
역시 당시로서는 그렇게 추단할 만한 자료가 남아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보고 싶다.
따라서 이 碑의 주인공이라고 생각되는 大智국사의 위인(爲人)이나 그의 사실(史實)에 대해서는
앞으로 계속 있을 예정인 이 사지(寺址)에 대한 조사(이 유적은 대지국사의 塔碑殿址로 생각되며
일부 浮屠部材와 柱礎들이 노출되어 있다)에서 새 자료의 출현이 기대된다고 해야겠다.
다만 비문(碑文)의 찬자(撰者)로 전해진 이영간은
<고려사>에 문종을 호종(扈從), 성거산(聖居山) 박연(朴淵)에 이르렀을 때
돌연 변괴(變怪)가 일어나 문종이 크게 놀라 두려워하므로 이영간이 龍을 꾸짖는 일문(一文)을 지어
투연(投淵)함으로써 龍을 다스렸다는 설화12)를 남긴 인물이었다.
아마도 이러한 설화를 남기게 된 연유는 그의 뛰어난 문장을 전해주는 뜻이 될 것이다.
또 이 大智國師碑의 건립연대를 고려 文宗時 운운한 <해동금석원>의 기록은
<고려사>에 남아있는 이영간 在世에 관한 이러한 기록에서 추정한 것이 아닌가 한다.
- <三角山 三川寺 大智國師碑>
美術資料 제10호, 崔淳雨, 1965년 12월, 국립중앙박물관, p15-18
- <三角山 三川寺 大智國師碑>
최순우전집 2, 崔淳雨, 1992년, 학고재, p 245-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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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崔淳雨, 「三角山 三川寺碑」『東亞日報』, 1964. 1. 16. 참조
2). 秦弘燮, 「三川寺址」『한국일보』, 1963. 9. 16. 참조
3).「東國輿地勝覽」卷3, 漢城府 佛宇條 中宗 25년(1530) 刊.
4). 釋 聖能, 「北漢誌」, 숙종 27년에 축성된 북한산성에 관한 山城紀事로서 編著했다.
여기에서 三川을 三千이라 한 것은 同音에서 오는 착오로 믿어진다.
釋 聖能은 경종조의 인물로 이 冊이 印行된 것은 영조조이다.
5).『大東金石書』는 大東金石帖과 이에 輯錄한 碑目 및 그 所在 撰ㆍ書者 竪碑의 時代 등을 수록한
『大東金石書』를 통칭한 것. 조선 선조의 孫 朗善君 李俁(1637~1693) 編.
6). 劉喜海 編著 『海東金石苑』.
1811년 劉喜海는 이 金石苑 외에『海東金石存攷』를 지어 신라, 고려 양대에 걸친
碑目과 그 所在 撰ㆍ書者 등을 수록했다.
(『朝鮮金石總覽』上, 附 11에 본서 三川寺 碑文 수록, 朝鮮總督府, 1919)
7).『東國輿地備考』 卷2, 漢城府 佛宇條에
“三川寺 在三角山 今廢 有高麗 李靈幹所撰 大智國師碑銘”이라 있다.
이 책은 조선 고종 년간에 著作된 手記本으로 저자는 불명이며 1956년 서울특별시 印刊.
8). 今西龍, 「京畿道 高揚郡 北漢山 遺蹟調査 報告書」, 『大正五年度古蹟調査報告書』,
제5장 「三川寺址」 p. 39. 朝鮮總督府, 1917.
9). 鄭明浩, 「三川寺址 入口磨崖佛立像」, 『考古美術』 2권5호, 1961. 5월
10). 京畿道 開豊郡 嶺南面 玄化里 玄化寺址에 서 있는 玄化寺 碑銘에
“三川寺主 王師都僧統 法鏡住持” 운운한 기록이 있다.
이 玄化寺碑에 관해서는『高麗史』世家 卷4 顯宗 12년 辛酉 8月條에
“己未 王如玄化寺 親篆碑額篆 嘗命翰林學士 周佇製碑文 叅知政事 蔡忠順 製碑陰幷書”라 있다.
11).『高麗史』世家 卷5 현종 18년 丁卯 6月條에
“癸未 陽州秦㽵義 三川 靑 淵等 寺僧犯禁釀酒 共米三百六十餘石 請依律斷罪 從之”라 있다.
12).『高麗史』志 卷 第10 地理一, 五葉에
“朴淵 有上下 淵深皆不測 遇旱鑄雨輒應 上淵心有盤石可登覽 文宗嘗登其上 忽風雨暴作石震動
文宗驚怖時 李靈幹扈從 作書數龍之罪投干淵 龍卽出其脊乃杖之 淵水爲之盡赤”이라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김우림 관장 특별기고> - 법보신문
베일 벗은 천년사찰 북한산 삼천사지
2007년 11월 5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 1-1번지 삼천사지(三千寺址) 탑비 구역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대지국사 법경스님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명문비편 등 10~13세기 고려시대
유물이 다량 출토됐다. 삼천사는 661년 원효 스님에 의해 창건된 후 법상종의 중심사찰로
11세기 고려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크게 융성했다가 임진왜란 이후 폐사된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사』,『동국여지승람』,『북한지』등에 극히 간략한 언급만 남아있을 뿐 이에 관한
문헌기록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삼천사지가 모습을 드러낸 것. 삼천사지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서울역사박물관 김우림 관장이 상세히 소개한다. - 법보신문 편집자
흩어진 역사 파편 맞춰 옛 모습 찾은 고려 성지
<사진설명> 삼천사지탑비구역 전경.
증취봉 능선 중단부(해발 342.4m) 일단을 정지하여 탑비전지와 대지국사탑비를 세웠다.
고려시대에 서울은 수도 개경과 더불어 3경(京)의 하나인 남경(南京)이었다.
풍수지리설에 의해 길지(吉地)라 평가되어 고려시대 내내 천도(遷都)를 대비하여
궁궐과 객사 및 향교, 사찰 등 많은 도시 시설들을 계획하고 건축했다.
특별히 국교로 공인된 불교 사찰이 남경 곳곳에 자리하고 있어 역대 왕들의 행차가 빈번히 이루어졌다.
고려시대 남경의 사찰로는 승가사, 진관사, 삼천사, 중흥사, 태고사, 미타사 등이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의 사찰은 개경이 아닌 남경의 북쪽 변두리 북한산을 중심으로 한 곳에 있었다.
남경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나 외곽지역에 있었던 점이 특이하다.
고려시대 사찰은 천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중창(中創)이나 신축을 통해 가람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지만,
일부 사찰은 폐사되어 터만 남아 있거나 사찰의 존재를 알 수 있는 석물(石物) 몇 점씩만 남아있는 경우도
흔하다. 북한산의 중흥사지와 삼천사지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중흥사지는 최근 발굴조사에서 사찰의 역사와 성격이 규명되었으며,
조사과정에서 발견된 유구에 대한 보존대책을 세우고 있다.
<사진설명> 탑비전지(塔碑殿址) 근경.
삼천사지 본사역을 바라보며 남서향 하고 있는 건물지로 원형주초와
고맥이석을 이용하여 건물을 축조했다. 정면 3칸, 측면 1칸 정도의 규모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주요사찰 삼천사 발굴
그러나 삼천사지는 폐사된 이후 축대와 일부 석물 이외에는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거의 폐허화된 상태이며, 그나마 사찰의 흔적으로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보물657호)과
대지국사탑비(大智國師塔碑)의 귀부(龜趺)와 이수 및 지면에 노출된 일부 건물지 유구 정도가 남아 있어
옛 삼천사의 자취를 전해주고 있다.
특히 삼천사지 탑비가 있던 자리에는 당당한 귀부와 이수가 남아 있음에도
아직까지 이렇다할만한 조사가 진행되지 않고 그나마 남아있는 석물이 계속 훼손되고 있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1999년부터 2004년까지 서울시 전역에 산재하는 문화유적에 대한 지표조사를 하였다.
조사 결과 수많은 유적을 찾아내었고, 조사 내용을 토대로 서울시 문화유적분포지도와 DB를 구축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유적의 훼손 정도가 심해
조사가 불가피한 유적을 대상으로 시굴 · 발굴조사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 첫 번째 발굴 대상지로 북한산 삼천사지 탑비가 있는 구역을 선정하고,
문화재청으로부터 학술발굴조사 허가를 받아
2005년 9월 12일부터 2007년 현재까지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삼천사지로 가기 위해서는
은평구 진관내동의 대한불교 조계종 삼천사 주차장을 지나 삼천리골로 들어가야 한다.
조계종 삼천사의 한문 표기는 ‘三千寺’로서,
이는 고려시대 법상종 삼천사(三川寺)와는 관련이 없는 절이다.
현재의 三千寺 경내에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마애여래입상 한 구가 있는데
이 입상은 고려시대 三川寺와 연관 있는 불상이다.
삼천리골에서 문수봉 방향으로 약 10분 가량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길 왼편 산자락에 대웅전 등 삼천사의 주요 건물이 있었던 삼천사 사역(寺域)이 나타난다.
1968년 당시, 북한 무장공비의 1·21사태로 이 일대가 민간인출입금지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삼천사지 사역에 중대규모의 군대 막사가 세워지고, 연병장을 조성하면서 넓고 편평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발굴 대상지는 이 등산길에서 부왕동암문 방향으로 20분 가량 더 올라가서
증취봉 아래 산중턱에 있는 대지국사 탑비유적이다.
삼천리골 등산길 곳곳에는 기와편과 도기편이 발에 밟힐 정도로 많이 흩어져 있다.
또한 삼천사 주차장에서 약 30분간 올라가면 그곳에도 옛 삼천사의 건물지가 있는데,
이러한 유물과 유적의 흔적은
진관내 · 외동을 비롯한 북한산 일대가 고려시대 삼천사의 사역이었음을 증명한다.
얼핏 보아도 방대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고려시대 삼천사는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고, 가람은 어떻게 배치하였을까.
또 삼천사가 배출한 인물은 누구이고,
고려시대 삼천사는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던 절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갖게 될 법하다.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방법은 현재로 매우 제한돼 있다.
우선 폐사로 말미암아 폐허가 된 상태인데다
폐사 이전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문헌 사료가 거의 없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사료인『고려사(高麗史)』에조차 삼천사 기록은 단 두 줄뿐이다.
고려 현종 정묘 18년(1027) 조에 “삼천사의 승려들이 금지된 것을 범하여 술을 빚은 쌀이
합계 360여 석이오니 청컨대 법에 따라 처단하소서 하거늘 이를 받아 들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고려사에 등장하는 유일한 삼천사 관련 기록이다.
삼천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 지리서에서도 일부 올라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등에 보면
삼각산에 삼천사가 있는데, 거기에 이영간(李靈幹)이 지은 대지국사비명(大智國師碑銘)이 있다는 정도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대지국사비명이다. 바로 삼천사의 성격을 규명할 수 있는 단서인 것이다.
국사(國師)는 고려시대 승직(僧職)의 최고 권위이다.
통상적으로 왕사(王師)를 거쳐 국사로 임명받는데, 이곳에 대지국사비명이 있다는 것은
삼천사와 대지국사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다시 말하면 삼천사의 승려가 국가로부터 국사로 인정받았으며,
이 승려를 기리는 비를 삼천사에 세우게 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법상종 사찰… 주지는 법경스님
<사진설명> 대지국사탑비 귀부.
높이 137.5㎝, 넓이 240㎝, 길이 270㎝크기로 용의 머리와 흡사하며,
배면(背面) 귀갑문에 ‘王’字 문양이 새겨져 있다.
또한 1027년에 삼천사의 승려들이 술을 빚었다는 기사에서
적어도 1027년 이전에 삼천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지국사는 법경(法鏡) 스님을 일컬으며, 삼천사의 주지를 지냈다.
그는 삼천사에 있는 동안 왕사가 되었으며, 이후 국사의 자리에까지 올라가
개경 현화사(玄化寺)의 초대 주지를 지냈다는 내용이 개경 현화사비명(1021년)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이처럼 소략한 문헌자료를 보충해 줌으로써 산산이 흩어진 역사의 궤적을 바로 맞출 수 있게 하는
실물 자료가 바로 명문비편(銘文碑片)이다. 언제 누가 무슨 까닭으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대지국사탑비의 비신은 이미 산산이 깨어져 사방에 흩어진 상태였다.
조선시대에 이곳을 방문했던 선비들이 지표에 드러난 비편 일부를 수습하여 소개한 적이 있고,
1960년대 국립중앙박물관이 제보를 받고 현장에 나가 비편 일부를 발견하고
이를 보고한 자료가 있지만 삼천사의 성격을 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번 발굴조사에서 얻어낸 최대의 성과는 고려시대 거대사찰 삼천사의 성격과
법상종의 태두였던 대지국사 법경의 이력을 밝힐 수 있는 다량의 명문비편을 수습한 것이다.
<사진설명> 대지국사탑비 이수
앞뒷면에 각각 두 마리 용을 대칭적으로 배치했으며,
여의주를 희롱하고 있는 장면을 운문과 더불어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비편의 내용을 통해 확인한 바로는 삼천사는 고려시대 법상종(法相宗)의 사찰이다.
법상종은 유식종(唯識宗) 또는 중도종(中道宗)이라고도 불리었으며,
법상종의 경전으로는 『제심밀경』, 『성유식론』, 『유가사지론』등이 있다.
우주 만유의 본체보다도, 현상을 세밀히 분류하여 설명하는 종파이다.
신라의 원측(圓測) 스님이 중국 당나라의 현장(玄奬) 스님으로부터 배워 와서 신라에 도입한 이후
경덕왕(景德王) 때인 8세기에 진표 스님이 금산사에서 이 종파를 크게 중흥시켰다고 한다.
고려시대 전기에는 대부분의 사찰이 법상종 계열이 되었을 정도로 당시 고려 최고의 종파중의 하나였다.
익히 알려진 개경 현화사도 법상종의 사찰이며,
이 절의 초대 주지였던 대지국사 법경은 두 말 할 나위 없는 법상종 승려였다.
비편(碑片)에서 역사 속 인물을 찾아내다
삼천사지 탑비구역 발굴조사 이전에도
대지국사 명문 비편을 수습하여 소개한 자료는 몇 건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조선 선조(宣祖)의 손자인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 1637~1693)가 편찬한
『대동금석첩(大東金石帖)』에 ‘실명 여왕필(失名 麗王筆)’이라 표기한
삼천사비의 비양명(碑陽銘)편 3개와
‘실명 삼천사 비음(失名 三川寺 碑陰)’이라 표기한 비음명(碑陰銘) 단편 2개의 탁본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청나라 학자 유희해(劉喜海, 1794~1852)가 편집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도
비양(碑陽) 파편 8개, 음기(陰記) 파편 8개가 필사되어 있는데
대체적으로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의 내용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상권(上卷)에서도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의 체제를 준용하고 있다.
1965년 최순우(崔淳雨)의「삼각산 삼천사 대지국사비」『미술자료(美術資料)』10 에는
1964년 삼천사지 현지답사를 통해 수습된 자경(字徑) 2㎝의 비양편(碑陽片) 49개 399자와
자경(字徑) 3㎝의 비음편(碑陰片) 25개 115자가 아무런 순서 없이 번호대로 필사되어 있다.
삼천사지 고려국 대지국사비명(三川寺址 高麗國 大智國師碑銘) / <미술자료> 10(1965)
섬세한 조각은 경이감마저
이 때 수습된 파편의 탁본이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탁본첩으로 보관되어 있다.
1976년 황수영(黃壽永)편 『한국금석유문(韓國金石遺文)』에는
196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수습한 비편 중 비양(碑陽) 16개, 비음(碑陰) 8개를 싣고 있다.
1984년의 허흥식(許興植)편 『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과
1995년의 이지관(李智冠)편 『역대고승비문(歷代高僧碑文)』에도 실려 있는데
앞에 소개한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상기한 자료들에 수록된 명문비편 탁본을 분석해 보면
고려시대 삼천사나 법경과 관련된 일련의 내용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아
하나의 단문을 형성하기도 힘들 정도로 처참하게 파쇄 된 흔적만이 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단편적인 고려시대의 관직명과 인물명, 불교용어 등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연결된 문장이 아니기에 해석에 애로가 있을 뿐만 아니라
대지국사 법경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찾아볼 수 없어
그의 생애나 행적에 대한 설명 자료로 활용하기에는 역부족인 안타까운 면이 남아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 삼천사지 탑비구역 발굴조사과정에서
대지국사 법경 스님의 행적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새로운 단서들을 찾는 행운이 잇따랐다.
수습된 대지국사 법경 스님의 명문비편은 모두 255점인데 630여 자의 글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글자가 새겨져 있지는 않지만 가로 또는 세로 괘선이 표현된 면석(面石) 비편도 수습되었다.
옅은 초록빛을 띠고 있는 각력암제 비신과 이를 받치고 있는 웅장한 귀부,
그리고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다투는 두 마리의 이무기를 머금은 이수의 조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경건함과 경이로움을 동시에 느끼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瑜伽百軸文(유가백축문), 太賢心路章(태현심로장), 龍○寺(용○사)…’명(銘) 비양편(碑陽片)
신라 법상종 승려 태현(太賢) 스님이 등장하는 대목으로
여말선초 법상종의 맥락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다.
먼저 가로 30.5㎝×세로 34.2㎝ 크기의 면석에 122자가 새겨진 비편을 살펴보면
‘…瑜伽百軸文(유가백축문), 太賢心路章(태현심로장), 龍○寺(용○사)…’와 같은 문구가 나온다.
이는 삼천사가 고려 전기 법상종의 사찰임을 증명하는 기사이다.
먼저 유가(瑜伽)라는 단어는 법상종의 용어이고,
유가론 100축문은 『유가사지론(瑜伽師之論)』100권을 말하는 것으로
유가사지론은 법상종의 중심 경전이다.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에 소재한 칠장사(七長寺)의 혜소국사비(慧炤國師碑)는 고려 문종 14년(1060)에
세워졌는데 비문의 내용에 ‘만행문중(萬行門中)에 구화(구和)가 가장 중요하지만 성(性)과 상(相)이 함께
통하는 것은 십칠지(十七地)인 유가교문(瑜伽敎門)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제 종전에 의행(依行)하던
구화문(和門)을 버리고 이 유가수행문(瑜伽修行門)으로 나아가야 하겠다’라는 문장이 보인다.
여기서 ‘십칠지’와 ‘유가교문’이라는 말에 주의해보면 십칠지는 불교 용어로
앞서 언급한『유가사지론(瑜伽師之論)』5분(分)의 처음 본지분(本地分)에 나오는 말이다.
유가사지론은 법상종의 중요한 경전이라고 했고,
유가교문은 법상종을 일컫기에 당연히 혜소국사는 당시 법상종의 승려이고
칠장사도 법상종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례에 비추어 삼천사 역시 고려 전기 법상종의 사찰이며,
대지국사 법경 스님도 법상종의 승려임이 증명되는 것이다.
또한 스님의 법명인 ‘법경’은 본래 법상종의 용어로서
6경(境)의 하나인 제6의식(意識)의 대상을 말하고 있어
법경이 법상종과의 관련으로 법명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태현(太賢)’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이는 신라의 승려로서,
태현의 『성유식론학기(成唯識論學記)』에 인용된 주석서 『광석본모송석(廣釋本母頌釋)』을
말하는 것으로서, 물론 태현도 법상종의 승려이다.
‘이령간(李齡幹)’ 비양편(左 ).
비 앞면 처음 시작하는 부분으로
찬자(撰者)인 이영간과 서자(書者)로 추정되는 최홍검(崔弘儉)의 이름이 보인다.
‘…○十二僧臘八十五(○십이승랍팔십오)…’명(銘) 비양편(右).
고려 초기 대지국사 법경 스님의 세속 나이와 출신지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유일한 자료다.
또 다른 비편으로 가로 48㎝×세로 38㎝ 크기의 면석에 127자가 새겨진 비편인데
비문의 서(序) 마지막 단락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무엇보다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대지국사의 승랍(僧臘)과 세수(世數)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담고 있다.
‘…○十二僧臘八十五(○십이승랍팔십오)…’ 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 대지국사 법경의 속세의 나이를 92세로 추정해본다면
적어도 7세에 출가해 구족계를 받고서 정식으로 승려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出赤縣之郊(출적현지교)…’ 이라는 지명이 나오는 데
적현은 지금의 경기도 파주, 임진, 장단 인근의 지명으로 법경의 출생지를 유추해볼 수 있는
근거자료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한 같은 비편 상에 나오는 ‘…弟子三川寺主首座珍岳(제자삼천사주수좌진악)…’ 이라는 대목을 통해
대지국사의 제자인 진악의 존재를 살펴볼 수 있다.
상기한 제문헌에서 언급된 대지국사비문의 찬자(撰者) 이영간의 이름을
처음으로 비편의 양면(陽面)과 음기(陰記)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게 된 것도 큰 수확중의 하나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등에는 고려 이영간(李靈幹)이 지은 비명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번 조사결과 비편에는 이령간(李齡幹)으로 음각되어 있음이 새롭게 밝혀져
기존의 조선시대 문헌의 표기와 다른 점이 발견되었다.
대지국사 행장 첫 발견
<사진설명> ‘이령간(李齡幹)’ 비음편(左).
비 뒷면의 일부분으로 비의 찬자인 이영간의 이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오른쪽) ‘중희십(重熙十)’ 비양편(右) 탁본.
좌측에 보이는 세로 획선으로 보아 비 앞면의 제일 끝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비의 건립연대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더불어 이번에 수습된 음기 편에 나오는 ‘…紫金魚袋臣崔弘儉奉(자금어대신최홍검봉)’ 에서
‘최홍검(崔弘儉)’은 『고려사(高麗史)』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인물로서,
비문을 시작하는 비 앞면 우측 하단에, 비문을 지은 이영간의 바로 옆줄에 이름을 남기고 있어서
대지국사의 비문을 쓴 서자(書者)로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최홍검이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것으로 보아 적어도 고려의 4품 이상 관헌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밖에 비 양면의 편에서
법경이 ‘대지(大智)’라는 시호를 받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智易名(○지역명)’이란 문구와,
관직명인 ‘기상시(騎常侍)’, ‘중승(中丞)’과 같은 단어가 나오고 있다.
그리고 1032년 법경을 국사(國師)로 임명한 고려 제9대왕 ‘덕종(德宗)’을 표기한 것도 보이며
‘천복(天福)’이란 단어가 새겨진 비편도 출토됐는데
이는 중국 후진(後晋)의 연호(936~943)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어 주목된다.
또한 ‘중희십(重熙十)’이라 새겨진 비편이 있는데
글자가 새겨진 좌측에 종(從)으로 획선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비 양면의 좌측 단 끝선의 일부로 보인다.
따라서 중희(重熙, 중국 요나라 흥종의 연호) 10년을 탑비 세워진 건립연대로 가정해 본다면
대지국사 탑비는 고려 정종(靖宗) 7년(1041) 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매몰된 탑비에서 옛 寺格을 보다
삼천사지 탑비구역 유적의 발굴조사는 A, B의 2개 지구로 구분하여 실시되었다.
해발고도 342.4m에 위치하는 A지구에서는
대지국사탑비, 대지국사탑비의 귀부와 이수, 부도 지대석과 하대석,
탑비전으로 추정되는 일련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A지구에서 서남향으로 약 100m 정도 떨어진 해발고도 302.6m에 해당하는 B지구에서는
법당지(法堂址)로 보이는 건물지가 조사되었다.
발굴 이전 상황을 살펴보면,
탑비구역(A지구)의 경우 대지국사탑비의 귀부 및 이수의 상부 일부만 노출되어 있었을 뿐
나머지 유구는 산사태로 무너져 내린 토사로 인해 지표 아래 3~4m 깊이에 매몰되어 있었다.
이번 조사로 인해 새로 찾은 탑비전의 경우에도 두터운 토석층(사태로 인한 교란층)에 의해
완전히 매몰되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으며
유구 전면에 수령 30~40년 정도의 참나무와 교목들이 자생하고 있었다.
B지구 역시 유구 상면 전체가 수목으로 덮여 있었고
간혹 건물 주초석(柱礎石)으로 보이는 석괴(石塊)와 기단부 일부, 그리고 축대 일부가 노출되어 있어
건물지의 가능성만을 엿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도량 전체가 산사태에 매몰
<사진설명> A지구 발굴 전 전경.
대지국사탑비의 귀부 및 이수의 상부 일부만 노출되어 있었을 뿐
나머지 유구는 산사태로 무너져 내린 토사로 매몰되어 있었다.
A지구에 있는
대지국사탑비 귀부의 크기는 길이 270㎝, 너비 240㎝, 높이 138㎝이며 조립질(粗粒質) 화강암을 사용했고,
이수의 크기는 길이 185㎝, 너비 55㎝, 폭 80㎝인데 세립질(細粒質) 화강암을 이용하였다.
귀부는 용의 머리와 흡사하게 표현이 되어 있으며,
배면에 육각형의 귀갑문이 베풀어져 있는데 그 안에 ‘王’자 문양이 새겨져 있다.
또한 발 부분을 ‘L’자형으로 처리하여 비늘문을 장식했고,
귀갑대(龜甲帶)를 주름문으로 표현하여 돌리고 연주문을 장식하였다.
이러한 양식은 고려전기 법상종 사찰인 개경 현화사비의 귀부(1021),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비의 귀부(1085),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의 귀부(1060)의 것과 유사하다.
탑비전지는 이 대지국사 법경의 귀부가 놓여 있는 지점에서 동쪽으로 약 4m 떨어져 있는데
건물지의 주향은 북동-남서방향이다.
본 조사에 앞서 시행된 지표조사에서 석축이 확인되고 자기와 와편들이 수습되었으나,
대규모 산사태로 생긴 토사가 두껍게 덮여 있고
일부에는 후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민묘(民墓)가 자리하고 있어
건물지의 구체적인 규모를 파악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발굴조사에서 대칭적인 구조가 일부 남아있어
정면 3칸, 측면 1칸 정도의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탑비전지를 찾을 수 있었다.
탑비전은 기본적으로 치석된 원형주초에 고맥이석을 사용한 구조인데
건물 정면과 측면에 각주를 사용하여 1칸씩 외여닫이문을 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지 정면 원형주초 사이의 간격은 210㎝이고 중앙 각주(角柱) 사이의 간격은 100㎝이다.
고맥이 초석 안쪽으로 5줄의 화강암 판석(폭 40~50㎝, 길이 50~80㎝, 두께 10㎝ 내외)이 놓여 있는데
이는 탑비전이 축조된 이후 후대에 만들어진 구들시설이며,
이 시설하단부에서 고래로 보이는 석렬과 와편들이 출토되었다.
탑비전지 내 구들부 상단에서 철제 솥을 비롯한 철제유물과 청동발 2점이 출토되었는데
산사태로 인해 밀려 내려온 거대한 암괴에 의해 찌그러진 상태로 수습되었다.
또한 탑비전지 동쪽 끝부분에서 청자상감용문호편이 수습되기도 하였다.
탑비전지 하단에는 2단의 기단부를 조성하고 계단과 문지를 만들었는데,
탑비전에서 서쪽방향으로 내려가는 첫 번째 기단부 계단(4단)은 잘 다듬은 화강암 장대석을 이용하였으며,
부도 지대석을 중심으로 좌우에 하나씩 설치하여 대칭을 이루고 있다.
탑비전지 정면의 기단 갑석과 탑비전지 남쪽 기단갑석은
산사태로 인해 제자리를 이탈하여 바닥에 떨어지거나 유실된 상태이나
다행히 탑비전지 북단 기단부가 일부 원형으로 남아 있어 전체 구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사진설명> 탑비전지 및 고래 건물지.
삼천사지 본사역을 바라보며 남서향 하고 있는 건물지로
원형주초와 고맥이석을 이용하여 건물을 축조했다.
정면 3칸, 측면 1칸 정도의 규모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탑비전지에는 후대에 만들어진 구들시설이 확인되며
구들부 상단에서 철제솥을 비롯한 철제유물과 청동발 2점이 출토되었다.
대지국사 부도지대석에서 다시 아래쪽에 있는 두 번째 기단부로 내려가려면
화강암을 ‘口’자 모양으로 붙여 만든 신방석(가로190㎝×세로 90㎝)을 지나
두 번째 계단지를 지나게 되는데, 이것 역시 면을 고른 화강암 장대석(가로 270㎝×세로 52.4㎝)을
활용하여 3단의 계단을 만들었다.
하부계단석 좌우측 모서리에서 진단구로 추정되는 도기 호가 각각 1점씩 확인됐다.
계단지 밑에 배수로가 연결되며, 배수로 서쪽에 치석된 화강암을 사용하여
회랑지로 보이는 건물지를 구획했고 축대 상단에 출입문 주초석을 마련했다.
또한 탑비전지 좌우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지를 두고 담장을 활용하여
효율적인 공간 활용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북쪽 건물지는 탑비전과 마찬가지로 원형주초를 사용하였는데 현재 4개의 주초가 확인되고 있다.
출토유물로는 각종 꺾쇠류, 문고리, 돌쩌귀 등 가옥 관련 철제유물들이 대다수이며,
산사태로 인해 유구의 교란이 심한 상태이다. 남쪽 건물지는 탑비전 축조이후 수축된 흔적이 보이며,
역시 사태로 인한 유구 손상이 심해 제 모습을 찾기 어려운 형편이다.
구들부에서 고려 유물 출토
2007년도 조사에서 탑비전의 후면에 쌓은 옹벽선을 일부 찾았는데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있는 동남쪽 부분의 구조를 살펴보면
장대석을 길이방향으로 3단 쌓기 하여 경사면을 마구리하였다. 이 옹벽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가로 220cm× 세로 230cm크기의 정면 1칸, 측면1칸의 아궁이가 딸린 집자리가 조사되었는데
맷돌 상부 1매와 질그릇 등이 수습되었다.
대지국사탑비 구역은 경사진 구릉의 일단에 높이 1~4m의 화강암 축대를 삼면으로 쌓아 공간을 만든 후
장대석을 활용하여 방형의 터를 조성했으며,
구릉의 생토면을 파낸 후 점토층을 다져 기초를 마련한 위에다 건물지를 축조했다.
담장지와 배수로 일부에서 후대에 개축된 흔적이 확인되며,
산사태로 인해 유구가 교란된 부분이 관찰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주 건물지인 탑비전을 비롯하여 부속 건물지까지도 모두 고려시기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다.
B지구는 A지구 탑비전의 조성 방식과 같이 능선의 일단을 정지하고서
화강암 괴석을 활용하여 축대를 쌓고 건물지를 축조했으며,
중앙 건물지 가운데 방형의 불단(佛壇)으로 보이는 시설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법당지로 추정된다.
건물지의 주향은 동-서 방향이다. 계곡에서 올라오는 계단부가 심하게 붕괴되어 있으나
산사태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여타 구조물들은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어
전체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
<사진설명> 부속건물지.
탑비전지 하단에는 2단의 기단부를 조성하고 계단과 문지를 만들었다.
계단지 밑에 배수로가 연결되며, 배수로 서쪽에 치석된 화강암을 사용하여
회랑지로 보이는 건물지를 구획했고 축대 상단에 출입문 주초석을 마련했다.
또한 탑비전지 좌우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지를 두었다.
4개의 주초 중 3개가 남아 있고 나머지 1개는 교란되어 있는 상태이다.
기단부의 장대석을 다룬 솜씨나 전체적인 구조로 보아 고려시대에 축조된 건물지이나
후대에 수차례에 걸쳐 수축한 것으로 보인다. 건물지 내부에 남-북 방향으로 구들을 놓았다.
<사진설명> 불단.
건물지 중앙에 화강암 장대석을 ‘ㅁ’자형으로 붙여 만든 불단(가로 190cm×세로 170cm)이 있다.
건물지 하부에 온돌시설의 일부인 고래가 지나가는데 5열이 확인되며
화강암 할석과 기와편을 사용했고 점토를 활용하여 마감하였다.
건물지 중앙에 화강암 장대석을 ‘ㅁ’자 형으로 붙여 만든 불단(가로 190cm×세로 170cm)이 있다.
건물지 하부에 온돌 시설의 일부인 고래가 지나가는데 5열이 확인되며
화강암 할석과 기와편을 사용했고 점토를 활용하여 마감하였다.
불단의 중심 지표 밑 10㎝지점에서 석조보살두(石造菩薩頭)가 출토되었다.
삼불보관(三佛寶冠)에 입술 일부와 화불(化佛) 일부에 붉은 채색을 하였으며,
머리 부분에도 검은 채색을 한 흔적이 있다.
<사진설명> 석조보살두(石造菩薩頭).
높이 3.7㎝의 소형 보살두로 고려시대 유물이다.
삼불보관에 입술 일부와 화불 일부에 붉은 채색을 하였으며,
머리 부분에도 검은 채색을 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중심 건물지 기단석과 계단지 일부가 교란된 상태이나
발굴조사를 통해 복원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데 기단부의 가로 길이는 980cm이다.
기단부와 문지 사이에는 화강암 박석(薄石)으로 바닥을 깔아 처리하였는데
가장자리 부분만 남아 있고 가운데 부분은 비어 있는 상황이다.
후대에 구들시설을 하면서 재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220cm 크기의 장대석 2매를 맞붙여 문지를 만들었는데 비교적 유구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또한 중심 건물지 북쪽과 남쪽에 일련의 건물지들이 연접해 있는데
모두 동-서 방향으로 연도를 놓았으며, 남쪽 건물지의 경우 아궁이와 주초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사료 부족한 고려불교 복원 ‘촉매제’
삼천사지 탑비구역 발굴조사는
희귀한 고려시대 유구와 유물을 다수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조사지구 전역에서 수습된 대지국사명문비편을 비롯한 고려시대 유물 약 500여 점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은 은제칠보문투각장식, 청동제 합(盒)과 수저 등을 비롯한 금속유물,
금니 목가구편 등 목제유물, 분청사기, 청자, 도기 등의 도ㆍ자기류 및 어골문(魚骨文)계열과
초화문(草花文)계열의 평기와, 막새, 치미 등의 기와류로 분류된다.
이 중 주요유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청동합 등 청동유물 일괄
2개의 손잡이 달린 청동대발(靑銅大鉢) 2점은 산사태로 인해 형태가 심하게 훼손된 채 출토되었다.
크기는 구연(口緣) 둘레 110cm, 굽 높이 1.7cm의 것과 구연둘레 124cm, 굽 높이 2cm인 것이 있다.
전자의 내부에 바구니로 보이는 물건이 들어있었다.
청동사리합(靑銅舍利盒)은 뚜껑과 몸체가 분리된 채로 출토되었으며,
몸체 안에 석제받침이 동반해서 나왔다.
뚜껑 하단에 턱받이를 마련하여 몸체와 결합을 쉽게 하였다.
청동합은 높이 5.3cm, 구경 6.7cm의 뚜껑이 있는 그릇이다.
뚜껑의 중심부에는 지름 0.2cm인 원형의 음각선을 중심으로
각각 크기가 다른 2조의 원형 음각선을 3개 장식하였다.
▷철제유물 일괄
철제 솥, 철제 발(鉢), 철제가위, 부젓가락 등 생활용구류와 호미, 철부, 쇠스랑과 같은 다양한 공구류,
그리고 돌쩌귀, 철정, 문고리장식 등과 같은 건축 관련 철제유물이 출토되었다.
(사진 위) 은제칠보문투각장식.
탑비전지 북쪽 기단부 아래에서 수습되었다.
은제투각칠보문 구슬 3개와 청동제 16화형고리 1개, 3개의 사다리꼴 장식편으로 구성됐다.
(사진 아래) ‘가순궁주’ 명 금니목가구편.
목가구편의 일부분으로 추정되며 목심은 부식되어 남아있지 않고
목가구 겉면 칠기막에 금니로
‘가순궁주왕씨 아 가우신안공○○세시○○(嘉順宮主王氏 我 嘉 新安公○○世時○○)’
라는 문구가 남아 있다.
▷도ㆍ자기류
10세기 말~17세기에 해당되는 자기(磁器)를 폭 넓게 확인했다.
특히, 11세기 전반과 여말선초(14~15세기경) 자기의 출토 비중이 높다.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유물은 해무리굽 청자와 백자완(白磁碗)이며 하한에 해당하는 것은
분청사기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전기(15세기 전반경) 자기이다.
더불어 조선 중기(17세기)에 해당되는 백자철화 문병이나 대접 등도 일부 수습되었다.
도기류는 고려~조선시대의 연ㆍ경질도기인 옹(瓮), 호(壺), 병(甁) 등의 기종이 출토되었다.
청자상감용문호는 중심 문양대에 두 마리의 용이, 그 상하에 연판문(蓮瓣文)이 시문(施文)되어 있다.
두 마리의 용 가운데 한 마리는 길게 표현되어 있고
다른 한 마리는 나머지 공간에 맞도록 자세를 웅크리고 있다.
중국 안휘성 제현에서 출토된 용문호(龍文壺)와 비교된다.
▷기와류
평기와 중 단독문의 경우는 고려시대 기와의 특징인 어골문이 다수 확인되고
복합문은 어골문, 초문, 집선문계가 주문양을 이루고 있다.
명문(銘文)기와에는 ‘삼천(三川)’, ‘삼천 부(三川 夫)’ 명(銘) 의 사찰명 암키와,
‘보(甫)’, ‘김철○(金哲○)’ 명의 암키와, ‘○○主○○○’ 명 암막새, ‘○○王○○’ 명 암키와가 수습되었고,
막새 문양으로는 연화문, 당초문 등이 나왔다.
이 외에도 치미(鴟尾), 전(塼), 귀면와편(鬼面瓦片) 등도 함께 출토되었다.
▷은제칠보문투각장식
탑비전지 북쪽 기단부 아래에서 수습됐다.
은제투각칠보문구슬 3개와 청동제 16화형(花形)고리 1개, 3개의 사다리꼴 장식편으로 구성됐다.
구슬 일부에서 금색이 관찰되는데 이는 은으로 구슬을 만든 후에 표현에 금도금한 흔적으로 추정된다.
12세기경에 유행하던 문양과 장식들이 표현되어 있어 유물의 연대를 가늠해 볼 수 있는데
이와 유사한 장식이 국립중앙박물관 동원기증품과 일본 동경박물관 오쿠라 컬렉션에 남아 있다.
▷‘가순궁주’ 명 금니목가구편
목가구편의 일부분으로 추정되며 목심은 부식되어 남아있지 않고
목가구 겉면 칠기막에 금니(金泥)로
‘가순궁주왕씨 아 가우신안공○○세시○○(嘉順宮主王氏 我 嘉 新安公○○世時○○)’ 라는
문구가 남아 있다.
<고려사>에 가순궁주는 고려 21대 희종(熙宗)의 4녀로서
신안공(新安公) 왕전(王佺, ~1261)과 혼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가구편의 연대는 적어도 13세기경에 해당됨을 알 수 있으며
고려시대 목칠공예 편년 및 기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다양한 문양의 (금동목가구장식)金銅木家具裝飾이 여러 점 수습되어
예가 희소한 고려 중기 목가구 및 문양사 연구에 참고가 된다.
(사진 위) 청자사기상감용문호.
탑비전지 동쪽 끝부분에서 수습되었다. 높이 21cm, 구경
(사진 아래) 기와류.
평기와는 어골 단독문과 어골문에 방곽, 격자 등의 여러 형태의 문양들이
횡대로 결합되는 복합문이 확인된다. 막새는 연화문과 귀목문이 주로 나타난다.
▷석조보살두
B지구 중앙 건물지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불단의 중심 지표 밑 10㎝지점에서 출토되었다.
유구의 중첩순서로 보아 후대에 불단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매납(埋納)된 것으로 보인다.
높이 3.7㎝의 소형 보살두로 고려시대 유물이다.
삼불부관(三佛寶冠)에 입술 일부와 화불(化佛) 일부에 붉은 채색을 하였으며,
머리 부분에도 검은 채색을 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보통 5불이나 7불을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석조 보살두는 특이하게도 3불을 표현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한국에서 출토된 바가 없어 불교미술사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금동불상편
B지구 중앙 건물지 북쪽 기단부 아래에서 수습되었다. 손가락 편 일부와 또 다른 금동편 1점이 수습됐는데
2005년 지표에서 수습한 불명금동편과 성분조성이 흡사하여 같은 금동불상편의 일부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서울역사박물관이 2005년 9월부터 2007년 11월까지 3개년에 걸쳐 발굴 조사한
고려시대 절터 삼천사지에 대해 4회에 걸쳐 살펴보았다.
그동안 역사 속에 묻혀 있던 고려시대 삼천사지와 대지국사 법경의 모습을 재조명해 볼 수 있는
다양한 유구와 유물들을 확인할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매우 인상적인 발굴조사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우리 발굴단에게는 찌는 무더위와 쉴 새 없이 퍼붓는 장대비
그리고 정말 매서운 혹한기 산바람은 생각만 해도 진저리쳐질 정도로
극심한 체력과 정신력의 소모를 가져오기도 했다.
기계장비나 전기 등 문명의 이기를 일절 사용할 수 없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오직 인력에만 의존하여
바윗돌을 끌고 굴리면서 망연자실하기도 했지만 단 한건의 사고 없이 무사히 조사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과 대지국사 법경 스님의 돌보심 때문이 아닌지 되뇌어 보게 된다.
이처럼 고단하고 지리한 시간 속에 진행된 삼천사지 발굴조사는
고려시대 유구와 유물을 수습함과 동시에 답보상태로 남아 있었던
고려 전기 불교사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청동합 등 청동유물 일괄.
청동대발 : 구연둘레 124cm(구경 39.5cm), 굽 높이 2cm로 외부에 종이 흔적이 남아 있다.
청동사리합 : 청동제로 양식 및 연대로 보아 대지국사 것으로 추정되나
아쉽게도 내부 사리구 등은 확인되지 않았다.
청동합 : 원래 동반 출토된 철제발 안에 흙과 섞여 들어 있어
출토당시에는 존재여부를 알 수 없었으며 정리 작업 중 X-레이 투시로 찾은 유물이다.
베일을 벗고 환생한 삼천사
A지구의 탑비전과 부속 건물지는 유구의 구조와 출토 유물의 연대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 전기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어 대지국사탑비와 연관된 시설물임이 확인되었다.
B지구에서는 법당지로 추정되는 일련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불단이 있는 중앙 건물지는 고려시대에 속하며, 부속 건물지는 후대에 수축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다량으로 수습된 명문비편은
대지국사 법경의 행적 및 나말여초 법상종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이다.
문헌기록에 단편적으로 전해오는 역사적 사실을 대지국사 비문을 통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문헌자료에 실려 있지 않은 새로운 자료도 다수 발견되어
사료가 부족한 고려시대사 연구에 있어 촉매 역할을 톡톡히 할 것으로 기대된다.
가히 고려시대 유물의 보고라 할 수 있는 삼천사지 출토유물은
그동안 베일에 가려진채 숨어 왔던 고려시대 삼천사를 환생시키고
공백상태에 있는 남경의 모습을 복원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 서울역사박물관 김우림 관장
- 법보신문 연재, ① 927호, 2007년 12월 03일 ② 928호, 2007년 12월 12일
③ 929호, 2007년 12월 20일 ④ 930호, 2007년 1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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