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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 茶戶里 - 그 발굴과 기록

Gijuzzang Dream 2008. 12. 8. 02:08

 

 

 

 

 

 

 

 

茶戶里 통나무관 - 발굴 20년만의 만남


 "갈대밭 속의 나라, 다호리 - 그 발굴과 기록"

 

 

 

 


ㅇ 전시 기간 : 2008년 11월 29일 - 2009년 2월 1일
ㅇ 전시 장소 : 국립중앙박물관 역사관 특별전시실

 

 

고고학 : 다호리 발굴조사와 통나무관


다호리 유적은 1988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이래 1990년까지 모두 8차례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다호리 유적은 특이한 형태의 목관과 장제의 확인으로

그동안 막연히 토광묘, 또는 목관묘라고 부른 원삼국 묘제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게 한 유적이다.

올해 2008년은 다호리 유적을 발굴한 지 20년이 되는 해이다.  

1호묘 출토 통나무관은 2천여 년이 지난 지금 가장 완벽한 상태로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목관이며,

1988년에 발굴조사된 이래 20년만에 처음으로 공개된다. 

 

1호묘에서 출토된 통나무관은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목관은 길이 2.4m, 너비 0.85m, 높이 0.65m의 크기로,

당시 350년된 통나무(참나무로 판명됨)를 쐐기를 박아 반으로 자른 후

내부를 철제 도끼와 자귀 등 도구로 파내고 다듬어 관의 몸체와 뚜껑으로 사용한 것이다.

몸체와 뚜껑의 한쪽 옆면(발쪽 부분)에는

각각 ‘ㄴ'자형 구멍을 파서 굵은 끈을 연결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목관의 또 다른 측면(머리쪽 부분)에는 위아래로 각 2개씩의 홈이 파져 있어

X자형으로 줄을 걸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번 특별전에는 관을 내릴 때 사용한 동앗줄까지 함께 전시되었다.

무덤 안의 통나무관의 위치와 관련된 다양한 부장유물의 출토위치를 보아 장례절차를 추론해 볼 수 있다.

  

 

 

 

 

보존과학 : 통나무관을 살리기 위한 긴 여정


다호리 통나무관의 보존처리는 1988년 8월 국립중앙박물관의 故 이상수 보존과학실장이 시작하였다.

다호리 통나무관이  2천여년 동안 온전한 상태로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저습지의 토양 속에 매몰된 후

수침밀봉(水浸密封)되어 미생물에 의한 부패가 더디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수침발굴목재[Waterlogged Wood]는 적절한 보존처리를 하지 않으면

목재 내의 수분이 증발하면서 곧 바로 큰 폭의 변형과 수축을 일으켜 그 형체를 알아 볼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다호리 목관은 건조로 인한 수축변형을 최소화하는 치수안정화처리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20여 년전, 국내·외의 대형 발굴목제품의 보존처리에는

고분자 PEG(Poly -Ethylene Glycols)를 이용한 함침처리법이 가장 보편적이었는데

이는 목재 내부의 수분을 수용성의 PEG로 치환하여 수분 증발로 인한 목재의 수축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호리 통나무관과 같이 참나무로 만든 목제유물은

나무의 조직구조상 고분자의 PEG가 잘 침투되지 않는 특성을 갖고 있고,

더욱이 속이 빈 형태의 통나무는 PEG처리 중 변형이 발생되기 쉬운 구조여서

보존처리 착수 이전부터 상당한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은 목재 내부에

저분자의 PEG#200과 고분자의 PEG#4000을 단계적으로 침투시키는

2단계 PEG함침법을 적용하기로 결정하고 본격적인 보존처리에 착수하였다.

다호리 목관의 변형방지를 위한 PEG함침처리는

1988년 8월 저분자 PEG#200 5%로부터 시작하여

1997년 8월 PEG#4000 80% 농도까지 9년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이후 2000년 중순까지 약 2년간의 건조과정을 거쳐 1단계 보존처리가 종료되었다.

 

2000년도에 변형방지처리가 완료된 다호리 통나무관의 전시와 장기보관에 대하여 검토한 결과,

PEG함침처리 과정에서 발생된 부분적인 변형을 바로잡았고

2003년까지 통나무관 표면에 남아있는 PEG와 고착된 이물질을 제거하는 세척작업을 실행하였다.

 

2004년-2005년에는

용산 새 박물관으로의 이전 개관과 함께 1단계 처리 완료된 관부재들의 상태변화를 관찰하고

도굴로 인해 파손된 부분에 대한 복원방법, 토압으로 발생된 균열의 확장방지 대책,

PEG의 재 용출을 방지하기 위한 표면피복처리 방법 등을 검토하였다.

2006년-2008년까지

관표면의 미세한 균열을 충전 보강하고 습기에 취약한 관의 보호를 위해

고분자 합성수지[HPC(Hydroxy Propyl Cellulose)]를 관표면에 피복하였으며,

도굴시 절단 파손된 부분과 매장당시 토압으로 벌어진 균열 부를

탄소섬유와 에폭시 수지로 보강하는 등의 2단계 복원작업을 완료하였다.

 

이상과 같이 20년간의 보존처리와 복원과정을 거친 다호리 통나무관은

2008년 11월 드디어 “특별전 다호리”에서 최초로 공개된다.

 

 

 

 

 

 

 

 

 

 1. 활과 화살

 

활과 방패와 창을 잘 다룰 줄 안다.

비록 남과 다투거나 전쟁을 할 때에도 굴복한 상대를 서로 귀히 여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단궁만 사용되어왔다고 알려져 왔으나

다호리 유적에서 장궁과 함께 원통형의 긴 화살통이 출토됨으로써

단궁이 사용되기 이전에 장궁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의 우리민족을 일컫는 동이(東夷)의 ‘夷’자가 대궁의 의미임을 고려할 때 주목되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옻칠된 활의 흔적은 몇몇 유적에서 확인된 바는 있으나

실물이 출토된 예는 다호리 유적이 처음이다.

뿐만 아니라 다호리 유적에서는 장궁과 함께 단궁도 출토되어 주목을 끈다.

그리고 활 표면에는 끈으로 감은 후 옻칠한 흔적이 확인되었다.

 

중국에서는 전국시대 중기까지 장궁이 사용되다가 한대에 이르러 단궁, 노 등이 주로 사용되었고,

일본에서는 죠몬시대(繩文時代) 이래 나뭇가지를 다듬은 장궁이 계속 사용되었으며,

야요이시대(彌生時代)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활채 및 활고자가 출토된 바 있다.

 
    활쏘는 사람 토우 장식 고배  /       
활쏘는 사람 세부  

활과 화살

 

 

기원 전후의 목관묘 72기와 옹관묘 2기가 발굴된 다호리 유적은

특이한 형태의 목관과 장례 절차의 확인으로

그동안 막연히 토광묘 또는 목관묘라고 부른 원삼국 묘제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게 한 유적이다.

또 철기, 칠기 등 많은 부장품이 완벽한 상태로 출토돼 새로운 사실을 확인하게 해주었다. 

다호리 유적 발굴단 일원이었던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이 유적에서는 그동안 확인되지 않았던 철기, 칠기, 목기 등 새로운 고고자료가 출토돼

당시의 생활상을 복원하는 데 도움이 된다”며

“특히 원삼국문화가 토기, 철기, 묘제의 형식에서

한국식 동검 문화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 점도 큰 의의”라고 밝혔다.  

 

1988년 발굴조사한 기원전 1세기 무렵 창원 다호리 유적 목관묘에서

장궁과 단궁, 그리고 화살대와 화살촉이 한꺼번에 출토된 것으로 20년만에 밝혀졌다.

 

재조사 결과 출토 유물의 질이나 양에서 최대를 자랑하는 1호 목관묘 출토품 중

총길이 170㎝에 폭 3㎝인 장궁(長弓) 1점과 그보다 작은 단궁(短弓) 3점,

그리고 화살대 뭉치가 포함돼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단궁 3점 중 보존 상태가 양호한 2점은 현재 남아있는 상태를 기준으로

길이 80㎝와 53㎝( 각각 폭 4.5㎝)였다.

장궁과 단궁 모두 나무껍질 같은 것으로 겉을 감싼 다음에 그 위에 옻칠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와 함께 목관묘 34호분에서는 원통형 화살통에 담긴 쇠로 만든 화살촉 뭉치가 발견됐다.

 



 2. 다호리의 고급문화, 칠기 

 

칠기란 옻[漆]나무 수액을 채취하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침전시켜 얻은 정제된 용액을

나무와 바구니, 토기 등에 바른 기물을 가리킨다.

원하는 광택과 색상을 얻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말리고 바르는 작업이 반복된다.

 

칠기는 제작 기법에 따라 여러 가지로 구분된다.

우선 건조시킨 나무로 기물을 만든 다음 그 위에 칠 작업을 한 목심(木芯)칠기,

모시(紵)로 형태를 만든 후 옻칠을 반복하여 고급 칠기를 만드는 협저(夾紵)칠기,

그리고 대나무와 버드나무 가지를 이용해 기물을 짜고 칠을 한 남태(籃胎),

토기 위에 칠을 한 도태(陶胎)칠기 등이 그것이다.

 

다호리 유적에서는 목심칠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골분을 섞은 낙랑계 칠기와는 달리 목기 표면에 직접 옻칠을 바른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한편 다호리 유적보다 늦은 시기이지만 김해 가야의 숲 조성부지내에서 조사된 3호 목관묘에서는

부채, 칠초철검 등과 함께 원통형의 협저칠기가 출토된 바가 있다.

 

옻칠은 표면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과

방부(防腐), 방수(防銹), 방습(防濕), 내열(耐熱), 방수(防水), 접착성 등의 효과가 있다.

그러나 원료인 옻나무 재배지가 한정되고, 까다롭고 복잡한 제작과정 때문에

전문집단만이 칠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따라서 칠제품은 일반인보다는 일부 계층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다호리 유적에서는 합, 통과 같은 용기류를 중심으로 무기류, 공구류를 비롯해

붓, 부채 자루 등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옻칠이 사용되었다.


       다호리 칠기 일괄   /  토기 위에 칠(맨 위 노란색층)을 바른 모습

        주칠 삼각거치문 칠기   /   주칠 삼각거치문 칠기 문양 세부

 


 3. 다호리의 음식문화

 

변진은 토지가 비미하여 오곡과 벼를 심기에 좋으며,

다호리 유적에서는 원형두, 방형두, 원통형칠기, 뚜껑달린 원통형칠기, 사각합, 컵형 칠기 등이

출토되어 칠기가 당시 최고 상층 집단의 식기 또는 제기로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제사 지낼 때 상위에 올리는 삼색과실(三色果實)인 밤과 감도 출토되어

한경(중국거울)에 등장하는 명문상의 대추와 함께

이 때 이미 제사의 기본 상차림이 마련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 64호에서 출토된 부엌칼과

63호에서 출토된 칠기 국자가 담긴 토기 등도

당시에 다양한 먹거리를 조리하던 다호리의 음식문화를 반증해 준다. 

 

 
                       감이 담긴 고배     

                      출토 밤                 /                밤이 담긴 고배

 

율무 출토

  

1988년 경남 창원 통나무 널과 부장 바구니 안에서 쏟아진 다양한 철기와 칠기 유물들로 잘 알려진

다호리 유적의 1호 무덤(기원전 1세기)에서는 나뭇잎과 불명종자, 밤 등의 자연유물들도 출토되었다.

특히 가장 오래된 고대 목관으로 큰 관심을 모은 통나무 목관 주위에서 출토된

제기(祭器)들에 담기거나, 그 주변에서 발견된 과일 혹은 곡물류는

그 종류가 밝혀지지 않고 불명종자로 언급되어 왔다.

최근 전문가에게 분석을 의뢰한 결과 국내에서 가장 오래 묵은 감과 율무 등으로 밝혀졌다.

 

기원전 유적에서 식용했던 감과 율무 유물이 확인된 것은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거의 유례가 없다.

한·중·일이 원산지인 감의 경우 옻칠된 제의용 접시(두형 칠기)에 올려진 채 출토됐다.

그동안 밤으로 생각해 왔으나 경북농업진흥청 조두현 박사의 최근 분석 결과

형태, 표피 색도 등에서 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박물관 쪽은 밝혔다.

율무의 경우도 중국사서 <후한지>에 기원후 후한 시대부터 건강식으로 음용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번에 확인된 것은 그보다 1세기 이상 앞선다.

박물관의 윤태영 학예사는 “율무 원산지가 베트남, 중국 남방 지역이란 점에서 다호리의 율무는

기원전부터 한반도가 중국 남방 지역과 활발한 문물 교류를 벌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며

“함께 나온 밤도 크기가 작은 충청 밤과 큰 평안도 밤이 섞여 있어

당시 한반도 내 물자 교류도 빈번했음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율무는 벼과에 속하는 식물로 의이(薏苡) 혹은 의이인(薏苡仁)이라고 하며,

베트남이 원산지로 일반적으로 약재 혹은 식용으로 쓰인다.

『후한서(後漢書)』「마원열전(馬援列傳)」에는 율무와 관련된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다.

마원은 남쪽 지방 교지(交趾 : 베트남)에 있으면서 몸을 가벼이 하고 욕망을 줄임으로써

장기(瘴氣 : 풍토성의 나쁜 기운)를 이겨내려고 율무를 상식(常食)하였다고 한다.

당시 남쪽에서 나는 율무의 종자가 굵었는데, 마원이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율무를 수레에 싣고 오자

사람들은 그것을 남쪽 땅의 금은보배라 하였고 권세가들은 모두 그것을 얻으려고 하였다.

마원이 이 말을 들어 주지 않자 미움을 받았고, 마원이 죽자 그가 가지고 온 것이 율무가 아니라

남쪽의 금은보화라고 모함해 광무제가 몹시 화를 내면서 마침내 마원을 미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터무니없는 모함을 받는 것을

‘의이방하빈(薏苡謗何頻) : 율무의 비방은 어찌 그리 잦은가’라고 한다.  

 

 


 4. 다호리 사람들의 정신세계

 

다호리유적에서는 당시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부채는 이미 발견 당시부터 시신의 가슴이나 얼굴을 가리는 장법으로 보아

도교와 관련된 것으로 인식되어 왔으며, 새로이 운모가 출토되어 이를 더 확신시켜 준다.

 

부채는 다호리유적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이후 김해 가야의 숲 조성부지에서도 출토되었으며,

성주 예산리유적에서도 출토되는 등 발견예가 증가되는 추세이다.
그리고 부채의 출토 위치 또한 다호리 유적의 것과 동일하여 같은 용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1호분 부채 복원품 

 

한편 운모는 최근 백제 왕흥사지 출토 관장식, 경주 쪽샘지구 목곽묘에서도 출토된 바 있지만

다호리 유적의 것이 현재 가장 이른시기의 것이다.

운모는 갈아서 마시면 불로장생한다는 도교의 신약재료로 알려져 있다.

이 유물의 출토는 다호리 유적의 사람들도 일찍부터 도교적인 관념세계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다호리 4호분 출토 운모      

          

기원전 1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경남 창원 다호리 유적 목관묘에서

영원불멸의 생명을 준다는 선약, 운모가 다량으로 발견돼 화제다.

운모는 표면이 생선의 비늘처럼 생겨 '돌비늘'이라고도 불리는 화광암 계통의 광물질로

영지버섯 등과 함께 영생불사의 약물로 불린다고 한다.
일반인들에게 '운모'라는 명칭은 다소 생소하게 들리지만

알고 보면 오늘날에도 널리 사용되고 있는 상당히 친숙한 물질이다.
운모는 흑운모와 백운모 두 가지로 나뉜다.

흰 빛을 띠는 백운모는 사찰을 화려하게 장식하거나 벽화제작 때 안료로 쓰이기도 하며,

불에 잘 견디는 속성 때문에 난로의 창 등에도 사용되고 있다.

반면 흑운모는 철분이 많아 이용 가치가 적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운모는 한약재로 사용되기도 한다.

타박상을 입었을 때나 종기가 곪았을 때 붙여 통증을 멎게 하는 '운모고'가

바로 운모를 이용해 만든 약재다. 이 외에도 소독, 만성장염 등에 약제로 쓰이기도 한다.

운모가 묘지에서 출토됐다는 것은 바로 그 시대에 도교가 번창해 시신과 함께 운모를 넣어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징표라고 한다. 운모에 영생불사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 바로 도교라는 것.

도교신학에서는 운모를 장기간 복용할 경우 신선이 되게 하는 선약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운모를 죽은 자와 함께 묻은 것은 도교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죽은 자의 영원불멸, 즉 환생을 기원하는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다호리 유적(昌原 茶戶里 遺蹟)

 

 

경상남도 창원시(舊地名: 의창군) 동면 다호리 232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철기시대의 분묘유적이다.

1988-1991년까지 6차례에 걸쳐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널무덤(木棺墓) 총 44기가 조사되었으며, 1988년 8월 사적 제327호로 지정되었다.

 

유적의 북쪽 약 1㎞ 정도에는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주남저수지가 있으며,

북쪽으로 약 10㎞를 가면 낙동강의 본포(本浦)나루에 이른다.

또한 낙동강을 따라 내려가면 김해, 부산까지 갈 수 있어 당시에도 이 강을 따라

많은 교류가 있었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유적이 위치하는 논밭 일대는 해발 433m의 구룡산(九龍山) 북서줄기와 이어지는

해발 20m 정도의 야산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린 야트막한 구릉이었던 곳으로

현재는 감나무 과수원과 계단식 논밭으로 개간되어 있다.

유적의 분포범위는 야산에서 구릉의 아래쪽으로 너비 30-40m, 길이 150m에 달한다.

 

인접한 유적으로는 성지(城址)와 고분군(古墳群)이 알려져 있다.

성지는 동면 무성리의 무성성지와 북면 화천리 성지가 있다.

무성성지는 해발 69m의 산 정상부에 위치한 토성으로,

현재 남-북의 길이가 100m 정도이다.

화천리 성지는 둘레가 약 600m로서 석축부분도 확인되고 있다.

고분군으로는 동면의 봉곡리 고분군, 북면의 화천리 고분군 및

동전리 고분군 등이 확인되고 있다.

 

1, 2차 조사에서 확인된 유구는 총15기이나

후대의 1기를 제외하면 14기가 된다.

이 중에는 독널무덤(甕棺墓)이 2기이고,

나머지는 모두 널무덤(木棺墓) 계통의 것들이다.

이들 널무덤은 크게 3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제1유형은 무덤구덩이(墓壙)의 규모가 비교적 크고 깊은 편으로

길이, 너비, 깊이가 2.4-2.78×1.1-1.36×1.2-2.05m의 것이다. 다른 유형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무덤구덩이 바닥면 중앙부에 장방형의 부장갱(副葬坑)이 있으며 부장품이 비교적 많은 점이다.

 

제2유형은 무덤구덩이의 규모가 제1유형과 비슷한 예도 있으나 대체적으로 약간 작은 편이며

무덤구덩이 바닥면 중앙부의 부장갱은 보이지 않는다.

무덤구덩이의 규모는 2.0-2.7×0.8-1.25×0.9-1.68m 정도이다.

 

제3유형은 무덤구덩이의 규모가 제일 작고 얕다. 규모는 1.6-2.0×0.55-0.64×0.2-0.4m 정도이며,

역시 무덤구덩이 바닥면 중앙부의 부장갱은 보이지 않는다.

1·2차 조사에서는 나무널의 실체를 확인한 것이 커다란 성과 중의 하나인데, 널은 통나무로 제작되어 있었다.

또한 부장양식에서도 관내부장(棺內副葬) 뿐만 아니라 널 아래에 설치한 부장갱을 비롯한

널 아래의 부장방법이 확인된 것은 앞으로의 조사에도 많은 참고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즉 나무널이 썩어 존재하지 않았다면

널 아래의 부장품을 관내 부장품으로 오인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유물은 철기류, 칠기류, 토기류로 나눌 수 있다.

철기류는 많은 양이 출토되었고 종류면에서도 매우 다양하다.

무기류로 철검(鐵劍), 쇠투겁창(鐵矛), 쇠꺾창(鐵戈), 쇠화살촉(鐵鏃) 등이 있다.

철검의 경우 검파(劍把)나 검파두식(劍把頭飾)은 청동으로 제작되어

세형동검문화단계의 그것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검신(劍身)이 철로 바뀌고 단조품(鍛造品)이기 때문에

등대, 혈구(血溝) 등이 보이지 않는다.

쇠꺾창의 경우도 단조품이라 등대와 혈구가 없을 뿐 동꺾창과 동일한 형태이다.

쇠투겁창의 경우는 형태에 있어 북부지역의 용연동(龍淵洞) 및 상리(上里) 유적 출토품과 통하고 있어

중국식동모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쇠화살촉은 무경역자식(無莖逆刺式)으로 그동안 조양동, 노포동 등에서 출토된 예가 있다.

 

공구류는 쇠도끼가 중심을 이루는데 그 종류가 다양하다.

주조(鑄造)의 공부(斧)는 공부(部)의 단면이 제형(梯形)을 이루고 세신을 가진 것,

단조(段造)의 판상쇠도끼(板狀鐵斧), 방주상쇠도끼(方柱狀鐵斧),

그리고 쇠판을 말아 붙여 공부를 형성하고 어깨를 가진 유견쇠도끼(有肩鐵斧) 등이 있다.

이러한 쇠도끼들은 형태적으로 모두 독특한 것으로 중국의 쇠도끼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목병(木柄)이 부착된 쇠도끼들을 보면 목병에 삽입한 방법이

오늘날의 도끼와 같은 형태, 자귀와 같은 형태의 2가지 방법이 있다.

도끼와 같은 형태는 나무를 베거나 무기로 사용하였다고 생각되며,

자귀와 같은 형태는 깎거나 다듬는 공구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판상쇠도끼는 도끼와 같이 사용하기도 하고 ‘ㄱ’자형의 자루에 묶어 자귀와 같이 사용하기도 하였다.

 

농기구로는 따비와 낫이 있다.

따비는 2종류가 출토되었는데, 하나는 폭이 좁고 길며 단면이 삼각형을 이룬 것이며,

다른 하나는 폭이 좀 더 넓고 짧은 것이다. 따비는 오늘날의 따비와는 형태에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앞 부분 끝(先端部)의 휘어진 각도로 보아 따비로 보인다. 낫은 오늘날의 낫과 형태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칠기류는 많은 양이 출토되었을 뿐 아니라, 그 종류도 매우 다양해

이 시기의 칠문화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각종 용기류(容器類)를 비롯해 무구류(武具類), 공구류(工具類), 농공구류(農工具類),

그리고 붓, 판자(板子)에 이르기까지 일반화되어 있다.

칠은 거의 모두가 흑칠(黑漆)인데 주칠(朱漆)도 보인다.

칠기 중 용기류의 기형은 남부지방의 후기무문토기 기형과 유사한 것이 많다.

칠기는 그동안 세형동검문화기의 서흥 천곡리, 아산 남성리, 함평 초포리 유적 등에서 발견된 바 있어,

적어도 세형동검문화기부터는 제작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토기류는 무문토기(無文土器)와 와질토기(瓦質土器)가 출토되었다.

대부분의 분묘에서 무문토기와 와질토기가 공반되고 있어

이 유적 출토 무문토기와 와질토기는 큰 시기 차 없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무문토기의 기형에는 독모양토기(甕形土器), 깊은바리모양토기(深鉢形土器),

두형토기(豆形土器), 토기뚜껑, 주머니호가 있다.

와질토기는 쇠뿔손잡이항아리(組合式牛角形把手附壺)와 주머니호가

대표적인 기형이다.

 

한편 제1호 분에서는 각종 청동기, 철기, 칠기 등 수많은 부장품이

통나무널과 함께 완벽한 형태로 출토되어 주목되는데,

특히 부장품 중에는 다섯 자루의 붓이 포함되어 있어

한국에서의 고대문자 사용에 대한 고고학적 물증이 될 수 있으며,

원삼국 초기 대외교역의 서사용구(書寫用具)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3·4차 조사에서는 널무덤 15기가 조사되었는데

1·2차 조사에서 확인된 유구들과 유사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다만 새롭게 확인된 것을 살펴보면 단야공구(段冶工具)의 하나인 쇠망치(鐵鎚)가 출토되었다.

이 쇠망치의 확인으로 많은 단조쇠도끼(鍛造鐵斧)가 이 지역에서 직접 제작되었음을

실증적으로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쇠망치는 쇠집게, 모루 등과 함께 세트를 이루는 단야구로

평양 정백동 62호묘에서도 쇠집게와 함께 출토된 바 있다.

 

철제 고사리형장식부철기(裝飾附鐵器)가 출토되었다.

그동안 알려진 철제 고사리형장식이 있는 철기로는

경주 조양동 목곽묘에서 출토된 ‘S’자형 말재갈멈추개와

경주 구정동 목곽묘출토의 철모, 가야고분 등에서 출토되는 미늘쇠(有刺利器)와 판갑옷(板甲) 등이 있는데

모두 철기시대 후기 이래의 고분에서 출토된 것이다.

이런 철기의 전통을 이 유적에서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철판을 두드려 길게 늘인 뒤 둥글게 말아 붙인 제작방법은

철을 다루는 기술이 고도로 발달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칠기에서도 새로운 것이 확인되었는데 1·2차 조사시는 칠기에서 주칠이 보이지 않았으나

원통형(圓筒形)칠기의 구연부 상단에 주칠로 된 삼각거치문(三角鋸齒文)이,

칠초(漆초)에는 주칠로 된 선문(線文)이 있어,

이 시기에 흑칠 이외에도 주칠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형태의 칼집도 확인되었다.

칼집은 형태가 세장한 장방형의 것으로 기존에 타 유적을 통해서 알려진 형태와 더불어

칼집 형태의 새 자료가 확인된 것이다.

 

토기에서도 1·2차 조사에서 발견되지 않은 승문(繩文)이 타날된 토기가 출토되었다.

세승문(細繩文)이 타날되고 그 위에 1조의 선문이 있는 항아리(短頸壺)가 출토되어

이 유적이 철기시대 전기에 속하는 유적이지만 약간의 연대폭을 가진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소형토기도 발견되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우각형동기(牛角形銅器), 유구동기(有鉤銅器),

쌍두관상동기(雙頭管狀銅器)가 정식 발굴조사에 의해 출토되어 많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5·6차 조사에서는 총 15기의 널무덤과 독널무덤 2기가 조사되었다.

대체적인 내용은 1-4차 조사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몇 가지 점에서 특징들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1-4차 조사시와는 달리 제1유형으로 분류한 널무덤이 발견되지 않은 점이다.

즉 무덤구덩이의 바닥면에 부장갱을 설치한 유구가 전혀 조사되지 않았다.

물론 제3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도 2기 밖에 되지 않고 모두 제2유형에 속하는 것들이다.

이는 시기적인 차이가 있는 것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또 다른 특징은 부장품 중 청동제품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굴의 피해를 입은 것이 많기 때문에 발견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소편(小片)이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던 점은 주목된다.

1-4차 조사에서는 청동유물이 여러 점 출토된 1호분을 제외하고는

일부 널무덤에서 동검(銅劍), 동모(銅矛) 등의 무기류가 1-2점씩 출토되었다.

 

무기류에만 일부 상징적으로 잔존되었던 세형동검문화의 내용이

시기적으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인접된 분묘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다호리지역이 다른 지역보다 빨리 철기문화를 소화함으로써 청동기문화가 급격히 소멸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가장 오래된 원통형의 칠기화살통이 출토되었다.

화살통은 흙에 눌려 납작한 채로 발견되었으며 상태가 불량하여 칠피(漆皮)만 남아 있으나

형태를 복원할 수 있었다. 동검의 칠초와 같이 표면에 문양이 없고 흑칠에 돌대(突帶)가 돌려진 것으로 보아

이 시기 한국의 특징적인 유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돌대로 보아 목태(木胎)로 추정되며, 길이가 90㎝ 정도로 긴 것으로 보아

이 화살통과 세트를 이루는 활은 장궁(長弓)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원통형화살통의 발견 예는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방언(方言)』과 『좌전(左傳)』의 기록에 보이는 독환(독丸)과

『설문(說文)』 및 『한서(漢書)』 한연수전(韓延壽傳)에 보이는 ‘란()’이라고 하는

뚜껑 있는 통형의 화살통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이 화살통이 독환 및 란(籣)으로 불리우는 유물이나,

그림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단정하기는 어렵다.

 

후한(後漢) 기남화상석(沂南畵像石)에는 활을 집어넣은 건()과 함께

원통형 같이 좁고 긴 형태의 화살통이 표현되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원통형 칠기화살통의 실물 출토 예로는 평양의 낙랑고분인 석암리(石岩里) 219호분에서 출토된 것 2점이 있다.

이 중 1점은 길이가 71.95㎝로 다호리 출토품에 비해 짧은 편이며,

내부에서 화살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화살통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형태 뿐이다.

운두가 얕은 뚜껑이 있는 원통형의 것으로 흑칠에 투조은판(透彫銀板) 장식이 가해진 것이며

신부(身部)의 속심은 피혁(皮革)이다.

 

다른 1점은 형태, 길이가 같으나 칠화문상(漆畵文像)이 있는 것이다.

다호리 출토품과는 원통형 칠기화살통이라는 점만 같을 뿐이지

길이, 장식, 문양 등 세부적인 형태에서 차이가 난다.

그동안 화살통은 고분시대의 호록(胡)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므로

철기시대 초기로 올라가는 새로운 형태의 화살통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 것은 의미가 크다.

 

또 다른 특징은 토기에 있어서 소위 장란형토기(長卵形土器)가 출토되어

이전에 발견된 이러한 형식의 토기류들의 성격 파악에 도움을 얻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1-4차 조사에서 발견된 소형토기로 검은간토기 목긴항아리(黑陶長頸壺)가 출토되었는데

세형동검문화의 대표적인 검은간토기 목긴항아리가

와질토기 목긴항아리 이외에 소형토기로서도 그 전통을 잇고 있었던 점은 매우 특이하다.

 

이밖에 회문(回文)과 같은 새로운 칠기문양이 확인되었고 철제낚싯바늘도 출토되었다.

그동안 칠기문양은 주칠의 단순한 선문 또는 삼각거치문 정도가 알려졌으나,

5·6차 조사에서와 같이 문양만 돋보이게 하여 흑칠로 처리한 것도 확인되어

당시 칠공예(漆工藝)의 수준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철제 낚싯바늘의 부장은 다호리 주민이 낚시어업도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쇠망치가 출토된 제17호분의 피장자가 대장장이와 같은 철기제작에 종사하였던 인물이라고 할 때,

낚싯바늘이 출토된 분묘의 피장자는 어업에 관계된 인물일 가능성도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유물 가운데 칠초세형동검(漆細形銅劍), 칠초철검(漆鐵劍), 철과(鐵戈), 쇠뿔잡이항아리 등의 유물은

서북지방 널무덤에서 출토된 고조선(古朝鮮)적 요소와

남부지방의 철기시대 문화의 연속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들이다. 

 

그리고 성운경(星雲鏡), 오수전(五銖錢), 대구(帶鉤), 칠목기(漆木器), 칠초철검(漆鐵劍),

고리자루칼(環頭刀) 등은 중국적 요소인 한식유물(漢式遺物)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경주 조양동에서도 일부가 출토된 바가 있다.

이것은 철기시대 초기에 한반도 남부지방과 한(漢), 낙랑(樂浪)과의 교섭이 활발하였음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이다.

참고문헌

。義昌 茶戶里遺蹟 發掘進展報告 Ⅲ

   (李健茂 · 尹光鎭·申大坤·鄭聖喜, 考古學誌 第5輯, 韓國考古美術硏究所, 1993)

。茶戶里遺蹟 出土 붓(筆)에 대하여(李健茂, 考古學誌 第4輯, 韓國考古美術硏究所, 1992)

。義昌 茶戶里遺蹟 發掘進展報告 Ⅱ

   (李健茂·尹光鎭·申大坤·金斗喆, 考古學誌 第3輯, 韓國考古美術硏究所, 1991)

。義昌 茶戶里遺蹟 發掘進展報告 Ⅰ

   (李健茂·李榮勳·尹光鎭·申大坤, 考古學誌 第1輯, 韓國考古美術硏究所, 1989)

- 고고학사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