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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듬어보고(전시)

[서울역사박물관] 삼천사지 발굴유물 특별전 살펴보기

Gijuzzang Dream 2008. 11. 21. 06:11

 

 

 

 

 

 

 

 북한산(北漢山 · 836m) 삼천사지(三川寺址)

 

 

출처 : YTN /  2007-11-06  

 

 서울역사박물관<삼천사지 특별전> / 연합뉴스, 2008.11.28

 

 

 

   부처를 모신 대웅전에 가지 않는다

   마당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석탑을 보지 않는다

   영험 많은 산신각 문고리도 잡지 않는다

 

   삼천사에 가면 나는

   슬픔을 품듯 허공을 안고 헤엄치는 물고기들의 풍경 소리

   경문(經文)처럼 마음에 새기며

   대웅전 지나

   산신각 지나

   그늘진 뒤안 요사채 맨 끝 방

   섬돌에 놓인 흰 고무신을 보는 것이다

 

   누군가 벗어둔 지 오래된 듯

   빗물 고여 있고 먼지도 쌓여 있는

   그 고무신을 한참 보고 있으면

   뚝, 처마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하나

   내 이마를 서늘하게 때리며 지나가고(아, 아픈 한 생이 지나가고)

 

   가끔은

   담 밑 구멍을 들락거리는 산쥐도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는 것이다

   전생의 제 모습을 기억한다는 듯.

   - 전동균 ‘삼천사에 가면’

 

 

 ■ 북한산 삼천사의 역사  

위 치 :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 산127-1 삼천사

 

661년(신라 문무왕 1)에 북한산 증취봉(甑炊峰) 서쪽자락에

원효(元曉)대사가 창건한 삼천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창건 이후의 연혁은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지만

역사서 <고려사>에 의하면 1027년 6월 이 삼천사와 장의사. 청연사의 승려들이

쌀 360여 석으로 술을 빚은 것이 발각되어 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역시 역사서인 <동국여지승람>과 <북한지>에는

이 절에 한때 3,000여 명의 불자들이 수도할 정도로 번성했었다고 하는데

삼천사라는 사찰 이름도 이 숫자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들의 집합장소가 되기도 했었으나 이후 화재로 소실되었다.

뒷날 이 절의 암자가 있던 마애여래입상 터에 진영 화상이 삼천사라 하여 다시 중창하였다.

그 뒤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없어졌는데 1960년과 1978년 성운이 중수했다.

 

1988년에는 미얀마에서 부처 사리 3과를 얻어와 석종탑을 세우고 모셔 두었다. 

석종형사리탑은 가로 3.1m, 세로 3.1m의 4각대석 위에 놓여 있다.

1988년(무진년) 4월, 평산 성운 화상이 미얀마를 성지순례할 때

마하시사사나 사원에서 아판디타 대승정(大僧正)으로부터 전수받은 부처님 사리 3과를

88올림픽의 성공 기원을 담아 종 모양의 돌탑[石鐘塔] 속에 봉안하였다.

대웅보전 위쪽 계단을 오르면 마애불전 앞에 위치해 있다.

 

또 삼천사 경내 일주문을 들어서기 전 초입에 위치한 5층석탑은

무진년 4월, 평산 성운 화상이 미얀마를 성지순례할 때

마하시사사나 사원에서 아판디타 대승정(大僧正)으로부터 전수받은 나한사리를 봉안하였다.

 

그 밖에 사찰에서 2km 위쪽에 위치한 옛 삼천사 터에는

대형 석조(石槽)와 동종(銅鐘), 연화대좌(蓮花臺座), 석탑기단석(石塔基壇石), 석종형부도(石鐘形浮屠),

대지국사(大智國師) 법경(法鏡)의 비명(碑銘)이 남아 있는데,

그 중 동종은 보물로 지정받아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삼천사는 원효대사가 창건한 이후 존속되다가 임란이후 폐사되었다고 전해지나

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으며,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북한지> 등에 극히 단편적인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삼천사지마애여래입상[三川寺址磨崖如來立像] - 보물 제657호

시 대 : 고려시대 초기  

 

 

 

마애불에 선각을 따라 금분을 입혔던 예전의 모습

  

 

마애여래입상에는 붉은 채색과 금분의 흔적이 곳곳에 아직도 남아 있다.

 

북한산 기슭에 있는 삼천사 대웅전 위쪽 30m 지점 계곡의 병풍바위에

얕은 홈(龕室)을 파고 선각(線刻)한 높이 3.02m(불상높이는 2.6m)의 여래입상(立佛)이다. 

삼천사 대웅전 뒤편 산령각 옆에 위치하고 있다.

불상의 어깨 좌우에 큰 4각형의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마애불 앞에 목조가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게 솟아 있으며,

얼굴에서는 온화하면서도 중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이 불상은 얼굴형이 원만하고 신체도 균형을 이루고 있는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마애불로 평가된다.

광배(光背)는 2줄의 융기선(겹둥근무늬)을 이용해 머리광배(頭光)와 몸광배(身光)를 구분했으며

몸광배(身光)는 신체 윤곽을 따라 한 줄로 깊게 표현했다.

눈을 가늘게 하고 눈꼬리가 거의 귀까지 닿을 만큼 길며, 크고 긴 두 귀, 길고 큼직한 코와 반원눈썹,

미간에는 작은 백호(白毫) 구멍이 뚫려 있고, 입을 오므리고 입술이 두껍지 않으면서 

파격적인 미소를 띠게 한 것은 고려(高麗) 불상의 한 특징으로서 퍽 인상적이다. 

목은 굵고 긴 편으로 삼도(三道)는 두 줄 선으로 나타내고 가슴 근처에 또 한 줄의 선을 둘렀다.

신체는 비교적 장신이지만 안정된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상체는 어깨가 벌어져 건장한 모습인데 U자형으로 넓게 트인 가슴사이로

속옷과 바지의 띠매듭이 드러나고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통견(通肩)의 법의를 입었는데

신체에 비해 다소 두껍게 나타내고 있어서 새로운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옷 속에 나타낸 신체는 부드러우면서도 평판적인 모습을 그린 듯이 묘사하고 있다.

통견의(通肩衣)를 입은 옷은 신체에 비해서 다소 무겁게 나타내었지만

띠 모양의 승각기 표현과 나비 리본 형태의 띠매듭 등은

불상 형태와 함께 고려 중기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마애불로 크게 주목되고 있다.

 

왼팔에는 겨드랑이 사이로 물결모양의 옷주름을 촘촘하게 새긴 반면

오른팔에는 성기게 표현하여 두 팔의 구조와 짜임새 있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상체의 조화로운 표현에 비해 하체는 불안정한 모습이다.

오른손은 손가락을 곧게 펴서 옷자락을 살짝 잡았고 왼손은 배 앞에 들어 손바닥을 구부렸으나

들고 있는 물건은 표현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융기선을 사용하여 양감이 느껴지지 않으며 

단순화되고 세부표현에 미숙한 점이 보이기는 하지만

신체의 비례가 자연스럽고 조각 수법이 섬세한 편이다.  (문화재청 外)

 

 

 

 

 

 북한산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  

 

 당당하고 근엄하면서도 온화 자애한 부처님

 1979년 보물 제657호로 지정 /  전체 높이 3.02m … 佛身 2.59m

 

문득 북한산 삼천사지(三川寺址) 들머리에 있는 마애여래입상이

생각났다. 망설일 것도 없이 한달음에 달려갔다.

비록 오랜만에 가는 것이긴 하지만 수십 차례 아니 그 보다 더

많이 갔던 길이기에 머뭇거릴 일도 없었다.

절을 알리는 이정표가 보이는 길로 접어들자 30여 년 전과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음식점들도 그대로, 군사훈련장도

그대로였으니 말이다. 삼천사지 마애불을 처음 찾아 간 것은

기억도 희미하지만 1974~1975년경이었다. 그 무렵 기자촌에 집이

있었고 공부를 하다가 답답하면 진관사를 거쳐 달음박질로

마애불까지 달리곤 했었다. 솔직히 말하건대 나는 그때 마애불이

무엇인지조차도 몰랐다. 다만 불교에 호의적이기는 했으되 그것은

다분히 할머니나 부모님들의 영향을 받은 것일 뿐 나의 주체적인

생각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굳이 진관사를 거쳐 마애불까지

달려갔던 까닭은 당시만 하더라도 그곳에 마애불이 있다는 것이

소문나지도 않았을 뿐 더러 사람들의 발길이 흔치 않아 조용히

마음을 쉴 수 있었던 것이 좋았을 뿐이다. 더구나 달음박질로

더워진 몸을 계곡물에 식히기가 좋았으니 철없는 소년에게는

금상첨화였던 것이다.

 

보물 제657호로 지정된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은 고려시대 마애불로는 작은 규모이지만

전체적인 비례나 상호의 조형성만큼은 빼어나다.

 

요즈음 같은 여름이면 아예 책과 도시락을 싸들고 마애불 앞을 흐르는 계곡의 나무그늘을 찾아 탁족을 하며

공부를 하기도 했다. 하루 종일 그렇게 지내던 옛 생각을 하며 걸었다. 까짓것 내리는 비를 어쩔 것인가,

맞닥뜨릴 수밖에. 비 온다고 청수(淸水)라고 불러도 좋을 계류를 못 본 듯이 지나가는 것 또한 못할 노릇이다.

군부대의 훈련장인 전투수영장이 있는 곳에서부터 걷는데 빗줄기는 점입가경이다.

점점 굵어지다가 한 순간에 그치는가 하면 또 다시 퍼붓기를 되풀이하며 발목 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잡아채는

것이 아닌가. 비 때문인지 절 마당에는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북한산 연봉들은 짙은 비안개 속으로

언뜻 모습을 드러냈다가 이내 사라지곤 했으니 산의 장엄함은 절로 더해지는 것만 같았다.

  

새로 지은 삼천사의 대웅전에 참배하고 뒤로 돌아들자 마애여래 부처님이 계셨다.

그러나 내 기억 속의 부처님은 아니었다. 한때 법신에 금칠을 한 것을 본 이후 이곳에 발길을 끊었으니

무려 14~15년은 족히 되었지 싶다. 그만큼 세월이 지났으니 변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굳이 계류를 덮어가면서까지 광장과도 같은 단을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예전, 부처님 앞으로 가려면 계류를 건너 계단을 올라야만 했다.

계류 건너에서 바라보면 마치 부처님 계신 곳이 피안인 것 같았던 것은 나만의 생각이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소망한다. 개울 건너에서 바라보던 부처님의 모습을 그리워하고

그러한 소박한 공간들이 절집에서라도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지켜지기를 말이다.

그렇게 푸른 물이 흐르는 계류를 건너 부처님에게로 가는 것과 지금처럼 잘 다듬어진 석재가 깔린 길을

걸어가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것은 어쩌면 목적만이 남고 과정은 없어지는 것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비록 세간은 그렇게 될지언정 절집에서는 굳이 과정까지 고집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머리는 소발 … 육계는 높이 솟아

 목의 삼도 길어 … 법의는 ‘통견’

 

가까이 다가가자 부처님에게 채색을 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통견으로 걸친 법의 자락은 물론 상체 전반과 두광의 왼쪽 부분에 붉은 기운이 남아 있는 것이다.

1960년 정영호 박사가 조사한 보고서에도 붉은 흔적이 남아 있다고 되어 있지만

상호나 두광 그리고 법신 광배의 왼쪽에 남아 있는 금분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것은 내가 처음 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겨우 마애불과 당우 한 채만이 있던 시절부터 그 변화를

꾸준히 지켜봤으니 결코 내 눈이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최근 들어 철원 도피안사나 장흥 보림사의 철불에 덧 입혔던 개금을 벗겨내는 작업을 해

성보의 본래 모습을 되찾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이곳 또한 붉은 채색의 흔적만으로도 귀한 모습이건만

기왕에 칠했던 금분을 벗겨내려면 깔끔하게 처리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투정은 그만 두기로 했다. 비를 맞으며 바라보는 부처님의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먼 곳에서 뿌연 빗발 사이로 보이는 부처님의 모습은 그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묘하게도 하염없이

내릴 뿐 더러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빗발이 부처님에게는 들이치지 않으니 그 또한 신기한 일이었다.

부처님이 새겨진 바위 위로 마치 옥개석처럼 큰 바위 하나가 가리고 있어 그가 비를 막아 주고 있었던 것이다.

조각 또한 어디 한 곳 상한데 없이 보존 상태가 뛰어난 것도 그 바위가 역할을 톡톡히 했지 싶다.

더구나 부처님 상호 위로는 삿갓형태의 홈을 파서 지붕을 씌웠던 흔적이 남아 있고

양 어깨에서 1m 남짓 떨어진 곳에 남아 있는 사각형의 홈은 지붕을 받치기 위한 지주를 끼웠던 흔적이다.

곧 이 마애불은 전각 안에 모셔졌던 것이다. 전각이 언제 헐렸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옥개석과 같은 바위

그리고 전각이 있었기에 거센 비바람과 모진 눈보라를 견뎌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었으리라.

 

더욱 묘한 것은 일자로 찢어진 눈이건만

매섭기는커녕 오히려 그 눈에 원만함이 스며 있다는

것이다.

또한 눈이나 입 어느 것도 미소를 머금고 있지

않지만 상호 전체에서 풍기는 것은

근엄하면서도 은근한 미소가 아닌가.

잘못 봤나 싶어 뚫어지게 바라보기를 되풀이했지만

당당하며 근엄한 상호에서 풍기는 묘한 매력을

지울 수는 없었다.

 

마애불 전체에 걸쳐 채색을 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사진에 보이는 붉은 색이 그것이며

금색은 후에 칠했다가 지워진 것인지 벗겨 낸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고려시대 마애불들에게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특징인 무뚝뚝함이나 덤덤함과는 달랐다.

그것이 이 마애불의 특징일 것이다. 상호와 어깨 이하의 조각이 서로 부조화이면서 조화로운 것 말이다.

어깨 이하로는 어느 누구도 반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한 눈에 고려시대의 것임을 알 수 있지만

상호만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통일신라의 흔적들이 솔솔 살아나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비례는 고려시대의 마애불들과 달리 알맞으며 크기 또한 다른 것들과 비교해 아담한 정도이다.

같은 북한산에 있는 고려시대의 마애불인 승가사의 그것과 비교를 해봐도

크기는 대 여섯 배나 될 만큼 작지만 비례에서 월등하다.

대개의 고려 마애불들이 그렇듯이 상호에 비해 어깨의 급격하게 좁아져 어색한 비례가 많은데

삼천사지 마애불은 그렇지만도 않았다. 더구나 상호는 부조로 새기지만 아래로 내려 갈수록

선각으로 마치는 경우가 태반인데 반해 이 마애불은 상호와 상체 그리고 손발은 저부조,

오른쪽 어깨를 중심으로 하는 상체의 옷 주름은 음각 그리고 광배나 연화대좌

그리고 군의 자락과 같은 것들은 굵은 양각선으로 표현되었으니

고려시대 마애불로는 독특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각들 중 가장 허술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양 손인데

그 중 왼손은 마치 무엇인가 들고 있는 양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게 복부에 대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그만 발길을 돌렸다. 멀리서 밀려오는 먹구름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삼배를 올리고 두어 발짝이나 걸었을까. 천둥이 귓전을 울리는가 싶더니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대웅전 처마 아래에서 잠시 머뭇거렸지만 기다려서 될 성 싶은 일이 아니었다.

본디 삼천사가 있었던 절터로 오르고 싶었지만 마음을 접고 훌쩍 빗속으로 나서자

오히려 비에 씻겨 나가는 몸이 청신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걸으며 머리에 떠 올린 것은 삼천사에 잠시 주석했던 대지국사(大智國師) 찬영(粲英)스님이었다.

1341년, 그의 나이 14살에 북한산 중흥사의 원증국사(圓證國師), 곧 태고 보우스님에게서 삭발염의하고

가지산(迦智山)과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행 한 후 1356부터 1358년까지 삼천사에서 머물렀다.

굳이 스님이 생각난 까닭은 충주 엄정면 억정사지에 남아 있는 비문에 따르면

스님의 “얼굴은 근엄하지만 말씀은 온화하였고, 입으로는 남의 잘하고 잘못하는 일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얼굴에는 기껍거나 불만스러운 표정을 나타내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저지른 지나간 잘못을 마음속에 두지 않았으며,

비록 원수일지라도 마음에 원한을 품고 있지 않았고, 항상 다른 사람의 잘하는 것만 말하였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오늘 마주 한 마애불의 모습과 스님의 모습이 어쩐지 닮아 잇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 때문이었다.

당당하고 근엄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온화로우며 자애로운 그것 말이다.

맑은 물이 뒤엉켜 파도처럼 솟구쳤다간 흘러가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일어섰는데도 비는 여전하다.  

 

특징 / 고려 마애불로는 작은 편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은

북한산 자락인 서울시 은평구 진관외동에 있다.

1979년에 보물 제657호로 지정됐다.

지금 마애불 근처에 세워진 삼천사(三千寺)는

역사적으로 이 마애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예전에는 '삼천사지 입구 마애여래불'이라 불렀다.

 

본디의 삼천사(三川寺)는 마애불이 있는 곳으로부터 1km 남짓, 30분 가까이 올라야 한다.

예전에 가 봤을 때는 귀부와 이수만이 굴러 다녔는데

지난 해 발굴을 통해 사라진 비석의 몸돌 편들을 다량 수습했다고 한다.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의 전경이다. 마애불의 머리 위에 삿갓형태의 홈이 파져 있으며

                                             어깨 옆으로도 사각형 홈이 있어 전각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마애여래입상은 고려 초기에 조성되었으며 전체 높이가 3.02m, 불신은 2.59m에 이르지만

고려시대 마애불로는 작은 규모에 속한다.

현재는 이마에 백호가 박혀 있지만 예전에는 구멍만 남아 있으니 그것 또한 후대에 누군가가 손을 댄 것이다.

머리는 소발이며 육계가 다소 높이 솟았다는 느낌이 든다. 목의 삼도는 길게 표현되어 가슴께 까지 내려오며

법의는 통견이다. 가슴에는 띠 매듭이 보이는데 겉에 걸친 가사 속의 내의(內衣=승각기)를 묶은 것으로 보인다.

광배는 두광은 두 겹이며 신광은 한 줄로 표현되었다.

  

가는 길 : 지하철 구파발역 2번출구에 내리면 평일 오전 8시20분, 10시, 11시에 삼천사행 승합차가 다닌다.

승용차로 가려면 구파발에서 북한산 방향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불광동 기자촌 이정표가 보인다.

그곳에서 우회전하여 1.5km정도 가다보면 삼천사 이정표가 왼쪽으로 있다.

- 이지누, 기록 문학가

- 불교신문 2353호,  2007년 8월22일자

 

 

 

 

 

 ■ 삼천사지 발굴조사  

위 치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 1-1번지 삼천사(三川寺址)

 

 

서울역사박물관은 2005년 9월12일부터 2007년 12월말까지 3년 동안

경기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 1-1번지 일원 소재 삼천사(三川寺) 터의 발굴조사를 통해

대지국사 법경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250여 점의 명문비편을 비롯해

탑비전(塔碑殿)으로 추정되는 고려전기 건물터 등을 확인했다.

이번 전시는 북한산 삼천사지 탑비구역 발굴조사의 내용과 성과를

일반시민 및 관계 전문가에게 공개하고 상대적으로 부족한 고려시대 불교 관련유물의 실물전시를 통해

그동안 미진하였던 고려 전기 불교사의 연구 분위기를 새롭게 진작시키고자 기획됐다.

 

고려 전기 법상종의 태두 대지국사 법경스님을 기리는 탑비는

후대에 귀부와 이수만 남긴 채 철저히 파쇄되어 역사의 그늘로 사라졌으나,

발굴조사를 통해 비로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명문(銘文) 비편류(碑片類)가 이번에 최초로 공개가 되며

이를 통해 그동안 사료의 부족으로 답보상태였던 나말여초의 대표적인 종파인 법상종의 근원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또한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대지국사 탑비전 유구도 그 사례가 희소해서

제대로 성격 규명이 어려웠던 고려 전기 불교사원의 가람배치 이해에 큰 몫을 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크게 3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주제는 ‘三川寺址와 大智國師 法鏡’이다.

고려 전기 법상종의 태두였으나 베일에 싸인 주인공 대지국사 법경의 감춰진 생애와 관련 사실을

이번 발굴조사현장에서 새롭게 수습된 200여 개의 대지국사 법경 명문 비편을 통해

하나하나 밝혀 봄으로써 삼천사지와 법경, 그리고 법상종의 관계를 조명해 본다.

 

두 번째 주제는 삼천사지 탑비구역의 주요 건축물인 ‘塔碑殿’이다.

예가 많지 않은 고려 전기 대표적인 불교건축 요소들을 3D영상과 3차원 가상입체모형,

그리고 출토유물 등을 통해 묘사하게 되는데 해발 340여m에 위치한 삼천사지탑비구역을

마치 현장에서 보는 것과 같이 생생한 느낌이 들도록 제작했다.

탑비전과 대지국사탑비의 건립 광경, 산사태로 인한 매몰 장면,

발굴조사로 다시 찾은 천년 사찰의 모습을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세 번째 주제는 ‘유물의 재발견’으로서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각종 유물들을 전시함과 동시에

출토 당시 파손되고 퇴색된 유물들을 어떻게 수습하고 보존처리하여

원형에 가까운 유물로 만드는지 보존처리 전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 준다.

 

마지막 부분에는 ‘발굴조사 광경’을 동영상으로 제작해 상영함으로써,

조사과정을 여과 없이 그대로 보여주고자 한다.

한여름의 무더위와 한겨울의 삭풍에도 쉼없이 진행됐던 지난 3년간

북한산에서의 각종 영상 기록은 발굴조사의 또 다른 묘미를 전달해 준다.

   

 

 

그런데, 삼천사지에 대한 첫번째 조사는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이루어졌는데,

일본인 학자 금서룡(今西龍)을 비롯한 조사단 일행이 근처까지 왔다가

심한 폭풍우를 만나 현장답사를 단념하고 돌아갔다는데

이들은 <大正 5년도 고적조사보고>를 통해 삼천사지의 중요성과 그 위치 등을 나름대로 정리해 놓았으며,

대지국사비의 몇몇 조각들이

<대동금석서>, <해동금석원> 등의 금석문 책자에 수록되어있다는 사실을 주목하기도 하였다.

 

이후 한동안 삼천사지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1963년 정영호 교수 등의 첫 현장답사가 있은 후,

그 이듬해에 중앙박물관에 의해 본격적인 삼천사지 조사가 추진되었다. 

3년여 에 걸쳐 최순우(崔淳雨)  당시 국립박물관장, 황수영 박사, 진홍섭 선생 등에

의해 추가 수습이 이루어져 중요한 발견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대지국사비의 조각편들을 다수 발견하였던 것이다.

이 때 발견된 비편들을 판독한 내용이 최순우 선생에 의해 발표되기도 하였지만

1968년 무장간첩 침투사건 1.21사태로 인해 당시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면서 

사실상 발굴이 답보 상태로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한 상태였다.

 

이후 1999년 조계종부교문화재발굴조사단의 북한산 불교유적 지표조사와

1999~2004년 서울역사박물관의 서울시 문화유적지표조사에서

다수의 와편과 도기편 및 건물지 등이 잇달아 발견되면서

삼천사지에 대한 발굴조사의 필요성이 정식으로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문화재청의 허가 아래 서울역사박물관은

서울지역 문화유적에 대한 순수학술발굴조사사업의 일환으로

삼천사지 관련 발굴지역을 크게 2개 지구로 나누어 작업을 진행하였다.

 

문화유적 발굴조사     문화유적 발굴조사
2005년 9월부터 착수된 현장 발굴 작업에는

서울역사박물관 자체 연구진을 비롯, 연인원 수백 명이 투입됐다.

조사 대상지가 평지가 아닌 산 중턱이라 중장비를 사용할 수도 없어

일일이 인력을 모아 수작업으로 큰 바윗덩어리를 제거하는 등 발굴 과정 중 많은 어려움을 거쳤다.

“작업 당시엔 힘들었지만, 사실상 산사태로 뒤덮여있던 큰 바위 덕에

그 아래의 귀중한 유물들이 그간 일반인들에게 전혀 노출되거나 훼손당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본다”고 최형수 유적조사팀장은 덧붙였다.

 

2005년 9월12일부터 2007년 12월말까지 3년 동안 서울역사박물관의 발굴 조사를 통해

A지구에서 대지국사탑비전지와 부속건물지가 새로 확인됐고

B지구에서 법당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조사되었다.

A지구의 경우 건물지와 함께 발굴된 유물 등으로 미뤄

고려 전기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돼 대지국사탑비와 연관된 시설물임이 확인됐다.  

 

이번 조사의 중요한 성과로는

기록이 부족하여 실체를 알 수 없었던 북한산 삼천사지 및

고려전기 법상종 승려인 대지국사(大智國師) 법경(法鏡)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250여 점의 명문비편(銘文碑片)을 비롯하여

탑비전(塔碑殿)으로 추정되는 고려전기 건물지 등을 새로 확인하였다는 점,

그리고 청동사리합(靑銅舍利盒), ‘가순궁주’명금니목가구편(‘嘉順宮主'銘金泥木家具片),

은제투각칠보문장식(銀製透刻七寶文裝飾), 철제공구류(鐵製工具類), 고려석조보살두(高麗石造菩薩頭)

고려시대 전ㆍ중기에 해당하는 희귀한 유물들 총 500여 점이 출토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 건물지

A지구 탑비전의 조성방식과 같이 능선의 일단을 정지하여 화강암괴석을 활용하여 축대를 쌓고

건물지를 축조했으며, 중앙건물지 가운데 불단으로 보이는 시설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법당지로 추정된다.

 

건물지의 주향은 동-서방향이다.

계곡에서 올라오는 계단부가 심하게 붕괴되어 있으나

다행히 여타 구조물들은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중심건물지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추정되며, 정면 주초간 거리는 270㎝이다.

4개의 주초 중 3개가 남아 있고 나머지 1개는 교란되어 있는 상태이다.

건물지 안쪽에 화강암 장대석으로 만든 불단이 있는데 잔존부 크기는 가로 190㎝×세로 170㎝이다.

건물지 하부에 온돌시설의 일부인 고래가 지나가는데 5열이 확인되며

화강암할석과 기와편을 사용했고 점토를 활용하여 마감하였다.

출토유물로는 유구 전역에 걸쳐 분청사기인화문편과 도기편 등이 수습되었으며,

기와류로는 청해파문(靑海波文, 푸른 바다에 일어나는 파도를 문양으로 나타낸 것으로

조선시대에 주로 사용되었으며, 불에 약한 목조건물에서

물水기운으로 불火기운을 누르려는 水火사상을 의미)과 복합어골계의 와편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청해파문(靑海波文)의 기와유형

 

 

■ 대지국사탑비 귀부 및 이수

거북모양의 비석 받침돌은

고려 때 이영간(李靈幹)이 지은 대지국사탑비(大智國師塔碑)의 귀부(龜趺)이다.

현재 탑비는 파손되어 볼 수 없으나 운용문(雲龍紋)으로 가득 찬 탑머리는

정교한 옛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귀부의 크기는 높이 137.5㎝, 넓이 240㎝. 길이 270㎝,

이수의 크기는 가로 185㎝, 세로 55㎝, 폭 80㎝이다.

귀부는 용의 머리와 흡사하게 표현이 되어 있으며 背面에 육각형의 귀갑문이 베풀어져 있는데

그 안에 ‘王’자가 새겨져 있다. 또한 발부분을 ‘L’자형으로 처리하여 비늘문을 장식했고,

귀갑대를 주름문으로 표현하여 돌리고 연주문을 장식한 점 등은

고려 전기 법상종 사찰 인 현화사비,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비,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금산사 혜덕왕사비 귀부의 양식과 유사하다.

이수는 귀부 정면에 놓여 있는데, 여의주를 희롱하고 있는 두 마리 용을

운문과 더불어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는데

앞뒷면에 각각 두 마리씩 배치하여 대칭적인 모양을 보여주고 있으며, 측면에도 운룡문이 베풀어져 있다.

 

 

 

 <참고 :  대지국사탑비(大智國師塔碑)를 지은 고려 때의 이영간(李靈幹)>

담양이씨 시조 이영간(李靈幹)이 어렸을 때, 금성(金城) 밖의 연동사(煙洞寺)에서 공부를 하다가

어느날 어떤 아이와 함께 바위 위에서 장기를 두었는데,

큰 호랑이가 바윗가에 앉아서 눈여겨보고 있었으나 잡아먹거나 해칠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이영간이 조용히 장기를 끝내고 돌아와서 그 연고(緣故)를 자세히 이야기하였더니,

스님이 이상히 여겨서 그 자리에 가보니, 아이와 호랑이는 간데온데 없고,

오직 바위 위에 장기판만 있고, 그 아래에 호랑이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그 바위의 이름을 ‘소년암(少年巖) ’이라고 하였는데, 지금도 그 발자국이 남아 있어서

아무리 장마를 겪어도 이끼가 끼지 아니하고 그 완연(宛然)함이 마치 어제 일과 같다.

 

또 절의 스님이 술을 담가서 거의 익을 때쯤 되면 누가 감쪽같이 훔쳐 먹으므로,

스님이 이영간을 의심하여 두세 번 종아리를 때렸다.

이영간이 몰래 엿보니, 늙은 살쾡이가 와서 훔쳐 마시므로, 이영간이 잡아서 죽이려 하였다.

그 살쾡이가 말하기를, “네가 만일 나를 놓아주면 평생에 쓰일 신기한 술법(術法)의 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하였다.

때마침 청의 동자(靑衣童子)가 나타나 한 권의 책을 던져 주므로, 이영간이 그 살쾡이를 놓아주었다.

그리하여 그 책을 간직하여 두었는데, 나중에 장생하여 벼슬하매, 그 모든 하는 일이 보통보다 달랐다.

그 기이한 일을 다 적을 수는 없고, 오직 그 하나를 들면,

고려 11대 문종(文宗)이 박연(朴淵)에 거둥하여 돌 위에 앉았는데 이영간이 시종(侍從)하였었다.

갑자기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쳐서 임금의 앉은 자리가 움직이니,

문종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하였다. 영간이 칙서(勅書)를 지어 못에 던지니,

용(龍)이 이윽고 나타나 보이는지라,

이에 이영간이 수죄(數罪)하여 그 등을 때리니, 못의 물이 새빨갛게 되었다.

【영인본】 5책 664면

【태백산사고본】 55책 151권 21장 B면

≪신증동국여지승람≫ 地理志 / 全羅道 / 長興都護府/ 담양도호부(潭陽都護府) / 이상한 일[靈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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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朴淵) 이규보(李奎報)가 이르기를,

“예전에 박 진사(朴進士)라는 자가 있어, 피리를 못 위에서 부니, 용녀(龍女)가 감동하여,

그 남편을 죽이고〈박진사를〉데려다 남편을 삼았으므로, ‘박연’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위 · 아래 못이 있는데, 모두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개성(開城)의 한우물[大井]과 임진(臨津)의 덕진(德津)과 함께 세 곳 용왕(龍王)이라 하여,

가물 때 비를 빌면 응험이 있으므로, 지금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게 한다. 위 못 가운데 반석(盤石)이 있는데, 일을 좋아하는 이들이 간혹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서 구경한다.

 

고려 문종(文宗)이 일찍이 그 반석 위에 올랐는데, 별안간 비바람이 사납게 몰아치며,

반석이 진동하여, 문종이 몹시 놀랐다. 담양(潭陽) 사람 이영간(李靈幹)이 모시고 있다가,

칙서(勅書)를 지어 못에 던지고, 용의 죄를 들어 꾸짖으니, 용이 감동하여 그 등[脊]을 드러내매,

영간이 장(杖)으로 치니, 못물이 모두 붉어졌다 한다.

폭포가 있어서 아래 못으로 날아 흐르는데, 사람들이 여산(廬山)보다 훨씬 낫다 한다.

이제현(李齊賢)의 박연사(朴淵詞)에 이르기를, “흰 폭의 깁이 천척에 날으니, 파란 물이 만 길에 맑았다.

옛 임금이 이곳에 올랐다 하니, 반석이 못 가운데 있음이라.” 한 것은 곧 이를 가리킨 것이다.

인달암(因達巖)현의 남쪽 성거산(聖居山) 북쪽 탑동(塔洞)에 있다.

둘레가 1천여 척이며, 높이가 4백여 척인데, 중[僧]이 이르기를, ‘사신암(捨身岩)’이라 한다.

고려 때에는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지금 혁파하였다.

【영인본】 5책 673면

【태백산사고본】 56책 152권 10장 B면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 황해도 / 연안 도호부 / 우봉현  

 

  

 

 

명문와 (銘文瓦) / 고려, 길이 28.5cm, 너비 19.0cm

회색 경질소성의 암키와이다.

외면에는 대칭 어골문에 ‘三川’銘이 횡대 문양으로 양각되어 있다.

외면 단부는 물손질로 문양이 지워져 있고 내면에는 포목흔이 보인다.

1/5정도 와도로 자른 후 측면을 분할하였다.

 

 

 

■ 부도지대석과 하대석

귀부 정면에서 남동쪽 방향으로 2m 떨어진 지점에 부도의 지대석으로 추정되는 장대석 4매가

‘口’자 모양으로 놓여 있는데, 크기는 가로 190㎝, 세로 180㎝,

지대석 동쪽에 방형의 판석으로 만들어진 하대석이 상하가 뒤집혀 놓여 있는데

크기는 가로 130㎝, 세로 140㎝이다. 하대석의 각 면에는 眼象이 3구씩 배치되어 있다.

 

■ 대지국사명문비편(大智國師銘文碑片)

 

 

 

  

  

 

'…瑜伽白軸文, 太賢心路章…'銘 비양편(碑陽片)    고려 / 세로 34.2, 가로 30.5

'유가'(瑜伽) 백축(白軸)은 법상종의 중심 경전인 유가사지론(瑜伽師之論) 100권을 의미한다.

바문 주인공인 법경이 법상종 승려로서 그 법맥을

신라 경덕왕 때 저명한 승려로 한국 법상종의 종조로 거론되는 태현(太賢)에서

구하는 언급으로 추측된다.

 

  

   

 

'十二臘八十五…'銘 碑陽片   고려/ 세로 38㎝, 가로 48

'十二臘八十五…'를 통해 대지국사의 세수(世數)를 추정해볼 수 있는 자료이다.

'…出赤縣之郊…'은 지금의 경기도 파주, 임진, 장단 인근의 지명으로 출생지를 유추해볼 수 있다.

 ‘…弟子三川寺主首座珍岳…’이라는 대목은 대지국사의 제자인 진악의 존재를 살펴볼 수 있다.

  

 

 

 

'이영간(李齡幹), 최홍검(崔弘儉)'銘 碑陽片  고려/ 세로 27, 가로 15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고려 이영간이 지은 비명이 있다고 하였는데,

대지국사 비문에서는 찬자(撰者)로 이영간이 확인된다.

이와 함께 옆줄에서 확인되는 최홍검이란 인물은 대지국사의 서자(書者)로 추정된다.

 

 

조선 초기에 고려 500년 정사로 기획되고 완성된 편년체 역사서 <고려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법상종(法相宗)파 승려로 왕사(王師 : 왕의 불교 개인교사)에 이어

국사(國師 : 전체 불교계를 대표하는 '종정')에 오른 고려전기 불교계 거물이었던

대지국사(大智國師) 법경(法鏡)은 고려 현종대(1009~1031) 수도 개성에 창건한

법상종 종찰 현화사(玄化寺)의 초대 주지로 고려 전반기 법상종파의 화려한 등장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애와 활동을 입증해줄 유일한 자료인 비문이 일찍이 파손되어

당당한 귀부와 이수가 현존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미술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소홀히 취급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이번 조사에서 비문 파편 255점을 찾아냈다.

이 중 글자를 새긴 비양편(碑陽片)이 91점, 글자가 없는 면 조각인 비음편(碑陰片)이 32점,

기타 음양을 구별할 수 없는 조각이 132점이었다.

이 파편들에서 지금까지 확인 가능한 글자는 총 630여자.

대부분 도끼로 찍어내고 다시 그것을 잘게 부순 듯, 비편마다 확인되는 글자는 몇 글자 남짓하나

개중 어떤 비편에서는 수십 글자가 확인되는 경우도 있다.

 

단절된 구절이 대부분이라 비문 전체 판독에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따르고 있으나, 성과 또한 적지 않다.

예컨대 비편 중 하나에서는 이영간(李齡幹)이란 인명이 확인되어,

몇몇 문헌에 대지국사비문의 찬자(撰者)로 알려진 이영간(李齡幹)을 비문에서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삼천사를 소개하면서 기록한

"고려시대 이영간(李靈幹)이 지은 비명이 있다"는 구절의 이영간과 같은 인물이다.

나아가 이영간이란 인명이 들어간 바로 옆줄에서는 최홍검(崔弘儉)이란 인명도 나타난다.

"비문 찬자 바로 뒤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최홍검은 비문을 직접 새긴 인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귀부와 이수만 남긴 채 행적을 적은 비신(碑身)은 산산조각 나서 묻혀 버렸던

법경의 탑비(塔碑) 파편들을 발굴조사를 통해 대거 수습,

이들 비편(碑片)에 적힌 내용 중에는 법상종의 법맥과 관련한 중대한 언급도 보인다.

 

이 중 1점에는 '…瑜伽白軸文, 太賢心路章, 龍○寺…'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비문 주인공인 법경이 법상종 승려로서 그 법맥을 신라 경덕왕 때 저명한 승려로

한국 법상종의 종조로 거론되는 태현(太賢)에서 구하는 언급으로 추측된다.

이 구절에 보이는 '유가백축문'(瑜伽白軸文)은

법상종의 중심 경전인 유가사지론(瑜伽師之論) 100권을 의미한다.

 

이번 발굴조사로 대지국사(大智國師) 법경(法鏡)의 출신지와 나이 등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행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十二僧臘八十五…' 또 '…出赤縣之郊…'銘의 수습된 비편에 의하면

법경은 적현(赤縣) 출신으로 승랍(僧臘) 85세에 세속(世俗) 92세였던 것으로 드러난다.

 

아울러 '중희 10'(中熙十)이라는 연대를 포함한 비편도 나옴으로써

만약 이것이 탑비를 건립한 연대로 본다면 대지국사 탑비는 고려 정종(靖宗) 7년(1041)에 세워진 셈이다.

 

대지국사 탑비가 언제 훼손됐는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

그런 가운데 조선후기 이후 그 파편이 더러 수습되어 소개되기도 했다.

예컨대 유희해(劉喜海)가 편찬한 금석자료집인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는

비양편과 비음편이 각각 8점씩 수록됐다.

 

한국 불교사 전공인 남동신 덕성여대 교수는 이런 비편이 발견됨으로써

"고려초기 불교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법상종의 뿌리를 추적할 수 있는 근거 자료 중

하나를 확보하게 됐다"고 말했다.

 

박물관의 사종민 조사연구과장은 “개경의 현화사 주지였던 대조국사 법경이 법상종이었고,

고려 초기 국사나 법사가 법상종 인물들이 많은 등 상당히 융성했다”며

“이번 발견으로 그 동안 지지부진했던 법상종 관련 연구가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 청동사리합(靑銅舍利盒)

지름 8.9cm, 높이 8.3cm. 탑비전의 북쪽기단 하부에서 출토되었다.

뚜껑의 윗면에 2조의 원형 음각선을 2.1cm 간격으로 2줄 장식하였고,

뚜껑과 몸통 옆면에도 약 0.1cm정도의 촘촘한 간격으로 음각장식을 하였다.

원형의 몸통 옆면에는 섬유와 종이가 일부 겹쳐진 채로 남아있다.

바닥면에도 2조의 음각선을 1.7cm간격으로 2줄 장식하였다.

사리합의 양식 및 연대로 보아 대지국사 법경과 연관되는 유물로 추정된다.  

 

 

 

 

 

■ 탑비전지(塔碑殿址)

대지국사탑비의 귀부에서 동쪽으로 약 4m 지점에 위치. 건물지의 주향은 북동-남서방향.

대규모 산사태로 인한 지형변동과 토압, 토사 및 거석의 매몰과

일부에는 후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민묘가 자리하고 있어

탑비전지(塔碑殿址)의 1/4정도만 노출되어 건물지의 구체적인 규모를 단언하기는 힘들지만

대칭적인 구조를 감안하면 탑비전지(塔碑殿址)의 경우

정면 3칸(210×340×210㎝), 측면 1칸(340㎝)정도의 규모로 추정된다.

 

치석된 원형주초에 고맥이석을 사용한 고려전기의 전형적인 양식을 갖춘 구조로

건물 정면과 측면에 각주를 사용하여 1칸씩 외여닫이문을 달았다.

또한 원주 법천사지 탑비전의 배치방식과 같이 탑비를 가운데 놓고 건물을 ‘⊓’형으로 배치하였다.

어골문계열과 초화문계열의 고려시대 와편과 귀목문막새 등 막새류가 주류를 이루고 출토되었고,

석축기단하부, 문지하부, 축대하단에서 진단구(鎭壇具)로 보이는 도기호와

햇무리굽 청자편, 상감청자, 청자용문호, 청동대발, 철제발, 청동수저, 동전, 水晶片(六角) 등이

출토되었으며, 명문비편을 포함한 대지국사비편이 유구 전역에서 수습되었다.

 

 

청동합(靑銅盒) / 고려, 높이 5.3㎝, 입지름 6.7㎝, 바닥지름 5.1

철제발에 담긴 내부흙에서 확인되었다. 직립형 구연에 광견형의 청동합이다.

뚜껑에는 원형의 음각선을 둘렀다.

 

 

철제발(철제발) / 고려, 입지름 26, 높이 10, 두께 0.3

반구형의 철제 발로 구연부는 직립되어 있다. 내부흙에서 청동합이 발견되었다.

                                                                                                                                                                       

    

  

청동명문대발 (靑銅銘文大鉢) / 고려, 높이 26.8cm, 너비 49.0cm

매장당시 토압으로 인하여 형태가 온전하게 유지되지 못하고 찌그러져있다.

그로 인해 본래의 기형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바닥의 지름, 구연부의 크기와 몸체의 높이 등을 보아

전체적으로 완만한 선을 그리며 입구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형태를 띠는 것으로 추정된다.

바깥면의 입술을 따라 가장자리 일부에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 명문은 지역, 사찰명, 시주자의 이름이 가는 점선으로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三角山 大智庵 ○○施主 崔梵伊○○ ’이다.

 

 

 

철제 삼발솥(鐵製三足鼎) / 고려, 지름 45.5, 높이 22.5

철제솥의 다리 3개 중 2개는 결실되었다.

 

 

 

귀목문 암막새(鬼目文平瓦當) / 고려, 길이 6.3㎝, 너비 29.0, 두께 2.9

회색 경질소성의 귀목문 암막새로 반구형으로 돌출된 귀목 주위에 2조의 돌선이 돌려져 있다.

 

 

 

청자상감국화문 완(碗) / 고려, 높이 5.6, 입지름 15.0, 바닥지름 4.5

내저면의 작은 원각에는 이중의 중권문(重圈文)이 둘러져 있고,

내측면에는 구연부 아래에 당초문대와 이중 중권문 내에 국화문이 상감되어 있다.

바깥에는 선문(線文) 내에 국화문이 흑백상감되어 있다.

유약은 회색으로 깨끗한 편이며 굽 안에는 규석받침 흔적이 보인다.

 

 

 

햇무리굽 청자편

 

 청자상감용문호 / 높이 23.3, 입지름 103, 바닥지름 9.7

문양은 크게 3단으로 구성되며 동체부의 용문(龍文)을 중심으로

상하 연판문대가 흑백상감되었다.(부분 복원)

 

 

■ 고려석조보살두(高麗石造菩薩頭)

B지구 중앙건물지 불단의 내부토에서 출토된 것으로

후대에 불단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매납된 것으로 보인다.

높이 3.7cm의 소형이나 지금까지 출토된 바 없는 특이한 도상으로 주목받고 있다.

보통 오불보관(五佛寶冠, 보관에 다섯 부처가 장식)이나

칠불(七佛, 석가모니 등 과거에 출현한 일곱 부처)을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반하여

이번에 출토된 보살두(菩薩頭)는 삼불보관(三佛寶冠)을 갖추고 있어

三佛寶冠이 표현된 소형 보살두는 한국에서 출토된 바가 없는 형태로

불교미술사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줄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입술과 화불의 일부분에 붉은 채색을 하였던 흔적이 보이며,

머리 부분에도 검은색으로 채색한 흔적을 살펴 볼 수 있다. 

 

   

 

석조보살두(頭)  /  고려, 높이 3.7

B지구 중앙건물지 불단 내부흙에서 출토된 것으로

후대에 불단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매납된 것으로 보인다.

삼불(三佛)보관이 표현된 특이한 예의 소형 보살 두(頭)로

입술과 화불이 일부에 붉은 채색을, 머리 부분에도 검은 채색을 한 흔적이 발견된다.

 

 

■ ‘가순궁주’명금니목가구편(‘嘉順宮主’銘金泥木家具片)

목가구편의 일부분으로 추정되며 목심은 부식되어 남아있지 않고

목가구 겉면 칠막에 금니(金泥)로 “嘉順宮主王氏 我嘉耦新安公 ○○世時○○”라는 문구가 남아 있다.

<高麗史>에 가순궁주(嘉順宮主)는 고려 21대 희종의 4째 딸로서

신안공(新安公) 왕전(王佺, ?~1261)과 혼인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명동칠기편 / 고려, 가로 4.8㎝, 세로 7

목가구 겉면 칠막에 금니(金泥)로 “嘉順宮主王氏 我嘉耦新安公 ○○世時○○” 문구가 남아 있다.

<高麗史>에 가순궁주(嘉順宮主)는 고려 21대 희종의 4째 딸로서

신안공(新安公) 왕전(王佺, ?~1261)과 혼인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금니가구편의 연대는 적어도 13세기경에 해당됨을 알 수 있으며,

고려시대 목칠공예 편년 및 기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다양한 문양의 금동목가구장식(金銅木家具裝飾)이 여러 점 출토되어

例가 희소한 고려중기 목가구 및 문양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금동투각목가구장식편 / 고려, 길이 11.5-22.6㎝, 너비 1.7-5.2

당초문을 투각기법으로 장식하였으며 가장자리는 금동못으로 고정시켰다.

금동투각장식은 가구의 모서리나 결구 부분 등을 보호하거나

외부를 화려하게 장식하는데 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 은제투각칠보문장식(銀製透刻七寶文裝飾)와 철제공구류(鐵製工具類)  

은제투각칠보문구슬 3개와 청동제16화형의 고리 1개, 3개의 은제사다리꼴 장식편으로 구성되었다.

구슬의 표면에서 금박의 흔적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원형을 은으로 성형한 후 금도금한 것으로 생각된다.

투각칠보문구슬 중 크기가 큰 것은 사슬통로(구멍)가 5개 뚫려있고 작은 것은 각 3개와 4개가 뚫려있다.

사슬의 두께는 0.24cm에서 0.35cm에 해당한다.

사다리꼴 장식편은 상단에서 사슬의 흔적이 확인 되는 것으로 보아

사슬 끝단 마무리 장식으로 이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유사한 유물로 3점이 있는데 이 중 2점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유물로

고려시대 목걸이와 은제향합의 장식이 있으며,

나머지 1점은 일본 동경박물관에 소장된 오쿠라컬렉션의 부채장식구로 남아있다.

 

 

 

 

 

 은제투각장식구 / 고려, 구슬지름 2.1㎝, 1.9㎝, 1.84

은제투각칠보문 구슬 3개와 청동제 16화형의 고리 1개,

3개의 은제 사다리꼴 장식편으로 구성되었다.

구슬의 표면에서 금박의 흔적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원형을 은으로 성형한 후 금도금한 것으로 생각된다.

투각칠보문구슬 중 크기가 큰 것은 사슬통로(구멍)가 5개 뚫려 있고

작은 것은 각 3개와 4개가 뚫려있다.

 

 

 

 

 

 

■ 고려시대 불교 - 법상종의 발전

 

통일신라 때 성립된 법상종(法相宗)은 고려에 들어서도 영향력을 유지했다.

고려시대 법상종의 특징은 유식학(唯識學)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여

진표(眞表)스님 계열의 점찰신앙을 계승하고 있다.

 

진표스님은 법상종을 창시했으며, 불사의암에서 지장보살(地藏菩薩)의 수계(授戒)를 받았다고 한다.

스님은 이후에 김제 금산사를 창건했다.

진표스님 사상을 계승한 석충스님은 ‘점찰간자’를 왕건에서 전한 것이 인연이 되어

고려 왕실과 조정의 후원을 받았다. 이로 인해 법상종은 개경에 들어왔지만 활동 반경이 넓지는 않았다.

 

법상종이 영향력을 확대한 것은 고려 7대왕 목종이 원찰(願刹)로

숭교사(崇敎寺)라는 법상종 사찰을 창건하면서다.

목종의 뒤를 이은 현종은 한때 숭교사로 출가해 승려 생활을 했을 만큼 법상종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왕위에 오른 현종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법상종은 고려불교의 중심 종파로 부각됐으며,

개경 인근에 법상종 중심사찰인 현화사를 창건하기도 했다.

 

진표스님 계열 점찰신앙 계승 목종-현종 지원 영향력 증대

 

현화사(玄花寺)는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현화리에 자리했으며, 현종 8년(1017년)에 창건됐다.

석비(石碑)와 당간 지주가 현지에 남아 있고,

석등(石燈)은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특히 현화사 석등은 당당한 품격과 세련된 조형미를 뽐내는데,

고려시대 문화 전성기를 잘 대변하고 있다.

석등의 웅장한 규모는 국가 대찰로 창건된 현화사의 명성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현종 이후 고려 법상종의 중심도량이 된 현화사는 중국 대장경을 수입, 봉안하고,

각 지역에서 모셔온 사리를 안치했다.

또한 2,000여 명의 스님들이 머물며 법상종 종풍을 선양하고 고려불교의 발전을 모색했다.

 

법상종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법상종으로 출가하는 스님들의 숫자도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특히 소현(韶顯, 1038~1096)스님의 출현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소현스님은 1038년(정종 4) 7월3일 개성의 남쪽 불영리에서 당대의 실력자였던

이자연(李子淵)의 아들로 태어났다.

11세 때 출가해 진표율사의 법상종을 계승한 지광국사 해린(海麟)스님의 제자가 됐다.

1079년(문종 33)에 김제 금산사 주지로 부임해 절을 크게 중창했고, 가람의 남쪽에 광교원을 창건했다.

이어 광교원에서 <법화현찬(法華玄贊)> <유식술기(唯識述記)> 등을 비롯한

장소(章疏) 32부 353권을 간행했다.

1083년(순종 1)에는 개국사(開國寺)와 자운사(慈雲寺)에서 열린 승과시험의 회주를 맡았고,

그해 승통(僧統)에 임명되어 현화사(玄化寺)에 머물기도 했다.

1096년(숙종 1) 금산사 봉천원에서 세수 59세, 법랍 48세로 입적했다.

-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 불교신문 2458호/ 2008년 9월10일자

 

 

 

 

■ 고려 전기의 숭불정책과 의례

 

후삼국의 혼란은 고려의 등장으로 점차 수습됐다. 태조 왕건 즉위 후 불교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적극적인 숭불정책(崇佛政策)을 폈다.

 

고려 태조가 남긴 ‘훈요십조(訓要十條)에는 불교에 우호적인 내용이 다수 포함돼 있다.

△대업은 제불(諸佛) 호위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사찰을 보호하라

△사찰의 창건은 도선(국사)의 설에 따라 함부로 짓지 말라

△연등과 팔관을 함부로 가감치 말라.

 

훈요십조는 이후 고려 운영의 중심 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불교 입장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10가지 조목 가운데 불교와 관련된 언급이 세 차례 나온 것은

고려 사회에서 불교가 차지한 위상과 영향력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국가 통합의 원동력 ‘작용’ 정치, 사회, 문화에 ‘큰 영향’

 

그렇다면 태조 왕건은 어떤 이유로 불교를 중요하게 여겼을까. 의문이 든다.

무엇보다 혼란스런 정국을 빠르게 안정시키기 위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계속된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을 위로하려면 당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던

불교를 통해야 가능했던 것이다. 고려의 통일대업 완수가 부처님의 위신력에 기인한 것이며,

고려의 안녕과 발전은 당연하다는 확신을 심어주려는 취지도 있었다.

 

물론 왕건을 비롯한 고려 건국세력이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었던 것을 묵과할 수 없다.

태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많은 스님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즉위 후에도 고승들의 비문을 직접 쓰는 등 각별한 관심과 신심이 있었다.

 

태조 이후의 역대 임금도 원찰(願刹)을 비롯해 대규모 사찰을 창건하는 등

불교는 국가와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발전을 거듭했다.

임금의 사후에는 영정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진전사찰(眞殿寺刹)이 세워졌다.

또한 왕실에서는 스님들을 초청해 재(齋)를 여는 반승(飯僧)법회를 거행하기도 했다.

 

왕실의 숭불정책을 관료들이 비판하는 경우도 발생 했지만,

이같은 입장도 불교 자체에 대한 반대 보다는

지나친 사찰건립과 불교행사로 인한 재정압박을 염려하는 차원이었다.

대부분의 관료들은 장례식을 사찰에서 치르거나 은퇴한 뒤 절에 머물며 여생을 보내는 경우도

많았으며, 집안에서 출가자가 나오는 것을 탓하지 않았다.

 

왕실과 관료뿐 아니라 일반 백성도 불교에 우호적인 입장을 가졌다.

지역마다 건립된 사찰은 백성들의 정신적. 신앙적 구심점이 됐고,

지역 단위로 향도(香徒)를 만들어 불사에 참여하는 경우도 많았다.

 

연등회 또는 팔관회는 왕실과 국가에 대한 충성과 번영을 기원하고 주민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대표적인 법회이며 대규모 행사였다.

이처럼 불교는 정치. 사회. 문화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며

‘고려의 중심’으로 확실한 위치를 구축해 나갔다.

-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 불교신문 2450호/ 2008년8월13일자

 

 

■ 고려시대 불교 - 승과제도

 

교종과 선종으로 나눠 실시, 교단발전 국가예속 ‘양면성’

 

고려는 불교를 숭상하고 스님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폈다.

그러나 교단의 자유를 인정하기 보다는 국가 차원에서 통제, 관리하려는 목적을 우선했다.

고려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불교를 ‘보호와 통제’라는 수단으로

적절히 관리하려고 했던 것이다.

 

고려 건국 이후 도입된 승과(僧科)제도는 앞서 밝힌 불교정책을 운영하는 중요한 근간이 됐다.

과거는 광종 9년(958)에 처음 실시한 관료 선발 시험으로 승과도 함께 치렀다.

 

〈고려사〉에 따르면

선종 1년(1084)에야 삼년일선(三年一選) 즉 3년에 1번씩 정규적으로 승과를 실시했다고 한다.

승과는 교종선(敎宗選)과 선종선(禪宗選)으로 나눠 실시됐으며,

승계(僧階, 법계)는 원칙적으로 승과에 합격한 스님들만 받을 수 있었다.

 

승과에 합격하면 대덕(大德) 승계를 받았으며,

이후 대사(大師), 중대사(重大師), 삼중대사(三重大師)의 순으로 올라갔다.

대덕을 받은 후 수행기간과 능력에 따라 상위 승계로 올라갔는데, 교종과 선종 모두에게 적용됐다.

삼중대사 위로는 선종과 교종의 승계가 달랐는데,

선종은 선사(禪師), 대선사(大禪師)로, 교종은 수좌(首座), 승통(僧統)의 법계를 받았다.

승과 초기에는 화엄종, 법상종, 선종이 시험을 보았으며, 숙종 4년(1099)부터는 천태종이 포함됐다.

 

고려시대 스님들은 승과에 합격해야 사찰 주지 소임을 맡을 수 있었으며,

사찰 규모에 있어서도 차등 대우를 받았다.

상위 승계인 선사, 대선사, 수좌, 승통 등의 임명절차나 대우는

조정의 재상(宰相)들과 차별이 없을 만큼 우대를 받았다.

하지만 계율을 어기거나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승계를 강등 또는 박탈당했으며,

심지어 승려 신분 자체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승계 외에 국왕과 조정의 자문 역할을 수행하는 왕사(王師)와 국사(國師) 제도가 있었다.

명망 있고 존경받는 스님이 왕사나 국사로 모셔졌으며, 왕사 보다는 국사가 보다 나은 예우를 받았다.

 

한편 고려는 승록사(僧錄司)라는 관청을 두어 교단을 관리했다.

승록사에는 좌가(左街)와 우가(右街)를 두고 그 아래에

각각 도승록(都僧錄) - 승록(僧錄) - 부승록(副僧錄) - 승정(僧正) - 승사(僧史) 등의 직제를 두었다.

승록사의 업무는 불교계의 중요한 의식이나 행사를 주관하고 승적을 맡아 관리하는 일이었다.

 

고려의 승과 실시와 각종 승계, 그리고 왕사(王師)와 국사(國師)제도는

불교가 뿌리를 내리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 같은 제도와 관습들이

교단과 스님들을 국가체제에 예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지적도 있다.

승계 상승과 주지 임명에 따른 부작용이 발생했으며,

정치세력에 영합하는 ‘비불교적인 모습’을 자초했다는 비판이 바로 그것이다.

-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 불교신문 2452호/ 2008년 8월20일자

 

 

■ 고려시대 불교 - 구산선문과 조계종

 

고려 사회가 안정에 접어들면서 불교계 또한 교단을 정비하고 다양한 종파가 활동을 시작했다.

고려 전반기에는 화엄종(華嚴宗), 법상종(法相宗), 선종(禪宗) 등

신라시대 창종된 종파가 주로 활동했다.

12세기 접어들어서는 의천스님이 개창한 천태종(天台宗)이 자리 잡으면서 4대 종파가 중심을 이뤘다.

 

신라 후기에 문을 연 선종은 고려시대에 들어서도 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혼란한 신라 후기에 지방귀족들의 후원을 받은 것은 물론

고려 건국 후에는 왕실의 지원으로 보다 안정적인 여건에서 불법을 펼 수 있었다.

 

선종은 중앙과 지방을 통합하는 촉매제 역할도 담당했다.

선종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은 다음과 같다.

사굴산문(山門, 굴산사), 성주산문(聖住山門, 성주사), 희양산문(曦陽山門, 봉암사),

봉림산문(鳳林山門, 봉림사), 동리산문(桐裏山門, 대안사), 가지산문(迦智山門, 보림사),

사자산문(獅子山門, 흥령사), 수미산문(須彌山門, 광조사), 실상산문(實相山門, 실상사).

 

중앙과 지방 촉매제 역할 담당, 조계종 시원 ‘가지산문’도 개창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구분하는 중국 선종과 달리 고려의 구산선문은

사자상승(師資相承)을 중시하며 가르침을 이었다.

사자상승은 “스승의 가르침을 제자가 계승하는 것”으로 사자상전(師資相傳)이라고도 한다.

구산선문의 사자상승 전통으로 같은 산문에 속해도 중국에서 공부한 선풍(禪風)이 다른 경우도 있었고,

다른 산문에 있어도 중국에서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고려시대 구산선문은 선사상을 공통분모로 하면서,

지금의 조계종(曹溪宗)에 이르기까지 선종 가풍을 면면히 이어오는 밑거름이 됐다.

‘조계’라는 이름은 육조 혜능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다.

혜능스님이 주석했던 중국의 광동성에 있는 조계산 이름에서 유래했다.

구산선문은 조계종으로 결집됐으며, 이후 한국불교는 선(禪)이 큰 흐름을 형성하게 됐다.

 

구산선문은 고려 후기에 보조지눌 국사의 정혜결사운동으로 계승됐고,

태고보우스님과 나옹혜근스님이 간화선 수행을 주창하면서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조계종 종헌에는

“본 종은 신라 도의국사(道義國師)가 창수(創樹)한 가지산문(迦智山門)에서 기원하여…”라고 되어있다.

조계종의 시원이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가지산문에서 비롯됐음을 보여준다.

또한 조계종이 선문(禪門)의 전통을 계승한 유구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 불교신문 2454호/ 2008년 8월27일자 

 

 

 

 

 

 

 

 

 

*** 아래 내용은 삼천사지 발굴조사(2005년~ )가 실시되기 이전,

1995년의 조사내용으로 오늘날과 많은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삼천사지의 상태를 이해하기 좋은 기록이라 참고자료로 올립니다. ***

 

 

 

 폐사지를 찾아서 - 북한산 삼천사지(三千寺地)

 

 

북한산을 4백여 년 동안 오르내리면서 아직 폐사의 내력이나 사지(寺址)를

정확히 복원해내지 못한 삼천사.

석축군이 형성되어 있는 계곡과 와편들의 사열식을 보는 듯한 능선을 따라 걸으면서

삼천사지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설득력 있는 몇몇 가설을 세울 수 있었고,

발굴과 연구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서울시민들이 가장 즐겨 찾는 휴식처 가운데 하나가 북한산이다.

북한산은 육백여 년간 서울을 지켜온 방패막이산이라는 점에서 더욱 사랑스러운 곳이기도 하다.

북한산의 절경 속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폐사지의 절터들, 기와조각, 석재류들을 보면서

그야말로 무상(無常)의 진리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지금은 은평구 진관외동인 속칭 북한산 삼천리골에 삼천사가 세워져 있다.

이 삼천사의 원래 절터를 찾아가기로 한다.

 

10여 개에 달하는 북한산의 폐사지는 거의 산성(山城)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데,

삼천사지는 산성 바깥에 있으며 산내에서도 역사가 가장 오래된 사찰이기도 하다.

폐사지를 대하는 서글픔이야 어느 경우이건 마찬가지지만,

학술적인 조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사지를 보노라면 더욱 큰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삼천사지 역시 그런 아쉬움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과연 어느 곳이 삼천사의 원래 절터였는지,

또는 삼천사의 규모는 어느 정도에 달했는지 문제에 대하여

그 어떠한 결론도 내리기 어려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4백년 폐사에도 얕기만 한 연구 성과

 

우선 삼천사와 관련한 여러 기록을 바탕으로 조사를 벌이는 가운데

삼천사의 정확한 사찰명에 대하여 주목하였다.

'三川寺'와 '三千寺'라는 표기상의 혼동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단편적인 내용의 내용이지만 <고려사>와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는 '川'자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삼천사와 관련한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는

'삼천사 대지국사비(大智國師碑)'의 비편(碑片)에서도 '川'자로 표기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이로 본다면 삼천사의 본래 이름은 '三川寺'로 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언제부터 '千'자로 표기하는 사찰명이 등장하였을까?

우리는 1745년(영조 21)에 편찬된 <북한지(北漢誌)>라는 자료에서

처음으로 '千'자가 사용되었다는 점을 알아낼 수 있었다.

1711년 북한산성을 축조할 때 북한산성에 대한 매우 귀중한 자료 <북한지>는

팔도도총섭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던 성능(性能) 스님이 지은 것이다. 

그런데, 이 <북한지>에 '三千寺'라는 표기가 처음 등장하고 있다.

'三川寺'는 18세기 무렵부터 '三千寺'로 바뀌었고,

그것이 현재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현재 북한산 삼천사는 '三千寺'로 표기하고 있다) 

 

삼천사가 언제부터 지금과 같은 폐사의 모습으로 변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상당히 오래 전부터 폐사된 것은 분명한 듯하다.

즉,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북한지> 모두 삼천사가 폐사로 남아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1530년부터 1745년 사이에는 폐사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삼천사의 중창과 관련한 기록을 전혀 찾아볼 수 없으므로

적어도 4백여 년간 지금과 같은 황폐한 모습으로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4백여 년에 걸쳐 이 산을 오르내리던 수많은 사람들이 초라한 삼천사지를 보면서

계속 지나쳐버린 일을 생각하면 실로 안타까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근대 이후에 몇몇 학자들이 삼천사지를 주목하게 된 계기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 불우조의

"삼천사는 삼각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이영간(李靈幹)이 지은 대지국사비명(大智國師碑銘)이 있다"라는 기록에 나오는

대지국사비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삼천사지를 주목했던 것이다.

 

그 첫번째 시도는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이루어졌는데,

일본인 학자 금서룡(今西龍)을 비롯한 조사단 일행이 근처까지 왔다가

심한 폭풍우를 만나 현장답사를 단념하고 돌아갔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들은 <大正 5년도 고적조사보고>라는 책자를 통해 삼천사지의 중요성과 그 위치 등을

나름대로 정리해 놓았으며, 대지국사비의 몇몇 조각들이 <대동금석서>, <해동금석원> 등의

금석문 책자에 수록되어있다는 사실을 주목하기도 하였다.

 

이후 한동안 삼천사지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1963년부터 3년여 에 걸쳐

진홍섭(秦弘燮) · 정영호(鄭永鎬) · 최순우(崔淳雨) 선생 등에 의해 중요한 발견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대지국사비의 조각편들을 다수 발견하였던 것이다.

이 때 발견된 비편들을 판독한 내용이 최순우 선생에 의해 발표된 바 있지만

이후로 최근까지 더 이상의 연구는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대지국사는 법경스님일 가능성

 

그런데 지금까지 밝혀진 비문내용은 대지국사 스님의 자세한 행장이라든가

불교사적 위치 등을 이해하는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3백자 넘는 글자 수가 판독되었지만, 워낙 조그만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문장의 연결이 불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비문을 지은 이영간이라는 인물이 고려 문종 때의 관료였다는 사실,

그리고 1021년에 건립된 ‘현화사비(玄化寺碑)’의 내용에

삼천사 주지인 법경(法鏡)스님을 현화사 주지로 임명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대지국사를 법경스님과 동일한 인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대지국사는 1020년에 왕사(王師)로, 1034년에 국사(國師)로 각각 임명되었던

법경스님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지금 상태에서 대지국사의 구체적인 행장을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생존시에 왕사와 국사의 자리를 누렸던 고려초기의 고승이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지난 1960년대에 발견되었던 비편들에 대한 세밀한 검토와 함께

삼천사지 일대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대지국사의 생애와 불교사적 위치는 우리들 앞에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삼천사지에 대한 기초자료를 정리한 후 우리는 북한산을 찾아갔다.

삼천사지의 정확한 위치와 관련유물들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삼천사지의 위치에 대한 기록은 <북한지>의

“소남문(小南門) 밖에 있으나 지금은 폐사되었다”라는 내용이 크게 도움이 된다.

소남문이란 북한산성의 13문(혹은 14문이라고도 한다) 중,

남서쪽의 남장대(南將臺, 해발 715m)와 속칭 눈썹바위 사이에 위치한 암문(暗門)으로,

현재는 서울시에서 복원해두고 있다.

이것으로 본다면 삼천사지는 은평구 진관외동의 속칭 삼천리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물로는 귀부와 이수, 그리고 수조가 있었다는 것이 전부이다.

 

일행은 우선 보물 657호인 마애여래입상이 있는

현재의 삼천사(원래 삼천사가 있던 그 아랫자락에 1960년대에 건립하였음)를 찾아

스님과 주민의 도움을 받아 골짜기 주변에 산재하는 건물터를 돌아보기로 하였다.

삼천사에 머무는 동안 스님은 미리 연락을 받으셨는지 준비해놓은 자료설명과 함께

스님이 보아온 것에 대하여 친절히 설명한다.

아울러 이 골짜기를 터 삼아 13대째 토박이로 살아온 정삼선씨(59세)는

곳곳에 산재하는 유허지를 안내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삼천사에서 골짜기의 절경에 취해 약 30여 분 오르자 남장대가 눈앞에 성큼 다가선 곳에

석축들이 여기저기 보이고, 고려시대의 격자문(格子文)계와 어골문(魚骨文)계의 평기와들이

골짜기 곳곳에 쌓인 낙엽들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스님께서 자신이 확인해 두었다는 석조물을 가리킨다.

낙엽과 잡석더미들 사이로 연화문 석재가 보인다.

주변을 정리해보니 평면사각의 연화대석 중앙에 둥근 모양의 얕은 홈이 있다.

석등의 부재일까, 부도의 하대석일까.

 

이런저런 추측을 하고 있는데 안내인 아저씨도 뒤질세라 여기에도 있으니 빨리 올라와보라고 성화다.

그곳에는 석종형부도의 탑신석과 연화대좌가 괴석 사이에 곤두박질쳐 있었다.

매끄럽게 다듬은 솜씨이다. 종형부도는 삼천사지의 하한연대를 이야기해 준다지만,

팔각 연화대석의 두터운 표현과 판단부의 반전표현이

어눌한 눈썰미에도 고려시대 초기의 화려한 작품임이 느껴진다.

 

조각난 역사의 편린을 꿰며

 

석조물이 방치된 곳에서 북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약 30m 떨어진 곳에 높이 3m 이상의 웅장한 축대가 눈에 들어온다.

화강암재를 비교적 곱게 치석하여 반듯하게 쌓아올렸는데,

특히 남쪽 모서리 부분은 보축을 했다. 정성이 담긴 축대이다.

돌축대 위에 올라서니 방형에 가까운 공간의 북서쪽에 위용을 갖춘 귀부와 이수가

남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귀부는 세월을 못 이기고 누워버린 대형괴석을 받치고 있다.

 

건물지는 남동쪽과 남서쪽이 정연한 축대로 마련되었고. 북서쪽과 북동쪽은 석축의 흔적이 있으나

그 경계가 애매한 방형에 가까운 공지인데, 한 변이 25m 내외이다.

남서쪽의 석축부에 이중의 둥근 초석이 3.2m 넓이로 1매씩 남아있고,

그 아래쪽에는 계단석으로 추정되는 장방형 부재들이 남아 있다.

이런 구조로 보아 문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었다.

 

귀부와 이수의 표현은 “각부는 비례가 바르고 분명하며 또 능숙한 조각법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웅혼한 기백을 나타낸, 직립한 귀두 표현과 아울러

고려시대 초기의 고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지적한 최순우 선생의 조사기(調査記) 그대로이다.

 

또한 귀부 앞에는 부도의 것으로 추정되는 기초부와 하대석이 남아있다.

기초부는 구덩이를 파고 장대석을 井자형으로 배치하였는데, 한 변 길이가 1.8m이다.

그 옆에 방치된 하대석은 한 변 126㎝, 높이 24㎝ 크기로

측면에는 3조의 연화 안상(眼象)이 모각되어 있다.

이외에도 남쪽 모서리 부분에 팔각대좌의 하대석과 부도 팔각지붕돌이 방치되어 있었다.

남쪽 모서리에서 계곡 쪽으로 내려다보니 지붕돌 상륜부가 축대 밑에 뒹굴고 있고,

그 아래쪽 계곡까지는 경사가 가파른 점으로 보아

계곡의 방치된 석재들은 이곳에서 굴러 떨어진 것들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곳에서 수습된 비편에 ‘삼천(三川)’  ‘삼천민사(三川民舍)’  ‘삼천사(三川寺)’ 등의 표기가 있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최순우, 진홍섭선생은 이곳을 삼천사(三川寺)로 비정하였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산재하는 와편을 뒤적이다가

격자문(格子文)과 어골문(魚骨文)이 복합된 타날판(두드리는 방망이)에

‘부(夫)’자가 새겨진 와편을 발견하였다.

문자의 배치로 보아 사찰명을 표기한 것은 아닌 듯싶고, 아마 공방과 관련된 표기이리라.

귀부와 이수부 등 석조물들을 실측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안내자가 말하는 또 하나의 사지(寺址)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 골짜기를 낀 거대한 절터

 

현재의 삼천사에서 귀부가 있는 곳을 향하여 약 10분 정도 오르다 북서편 골짜기를 건너니

계곡 사이에 비교적 평탄한 지형이 나타난다. 군부대가 남긴 시멘트 흔적 사이로

잘 다듬은 석축들이 눈썹바위를 향하여 계단식으로 마련되어 있다.

북한산 내의 풍부한 화강암 때문일까. 석축들은 한결같이 반듯하고 위엄을 갖추고 있다.

이곳 자연을 적절히 이용하여 표현한 석축문화이리라.

이들 정연한 석축에 취해 있노라니 안내자는 자꾸 걸음을 재촉한다.

이 계곡과 능선에 펼쳐진 석축 퍼레이드의 일부라는 말과 함께…

 

계곡의 석축군을 지나 비교적 가파른 능선을 오르니 곳곳에 와편들이 마중을 나온다.

하늘이 가까워지는 곳에 이르니 숲 사이로 장대석들이 2열로 경사면을 따라 누워있다.

다가서서 자세히 살펴보니 아래 축대부에서 능선 정상부로 오르는 계단지인 듯하다.

계단의 유적으로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앞으로 발굴조사가 진행된다면

매우 희귀한 사찰계단 유적이 될 것 같다. 이런 유물들이 잠자고 있다니…

이곳이 군사지역으로 그동안 폐사되어 있던 것이 고맙기도 하고

이러한 문화유산이 잠자고 있는 것에 대한 서글픔이 일기도 하고…

 

보다 더한 것은 계단 유적이 끝나는 축대에 오르니 파란 하늘과 눈썹바위의 절경이 코앞에 다가섰고

널따란 대지가 장엄하게 펼쳐진다. 바로 밑의 계단들은 천상으로 오르던 곳이었던가!

대지에 오르니 서쪽으로는 탁 트인 시야에 멀리 한강이 펼쳐진다.

 

공지는 동서 60m 남북 30m의 장방형으로 되어 있는데,

북동쪽은 눈썹바위로 연결되는 능선이 계속되고, 북쪽과 남쪽의 아래로는 계곡을 끼고 있는데,

남쪽계곡이 석축들처럼 북쪽 계곡에도 석축들이 분포하고 있다.

두 골짜기를 낀 거대한 사찰지이고, 이곳이 경내의 중심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공지의 나머지 3면은 축대로 쌓여져 있는데,

특히 남쪽의 축대는 장방형 석재와 장대석을 이용하여 높이 3m 정도로 장엄하게 쌓은 것이

마치 성벽 같다. 그 아래로는 많은 석재들과 함께 탑의 지붕돌 2점이 방치되고 있다.

지붕돌은 전각부가 날렵하고 지붕받침이 3단인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었다.

3층 지붕돌이 1변 92㎝ 정도인 점으로 보아 비교적 대형석탑이 이곳 천상에 위치하고 있었으리라.

 

주변 석축지와 이곳 공지에 산재하는 와편들은 대부분이 어골문계와 격자문계의 평이한 기와편인데

반갑게 일광문 암막새편도 눈에 띤다.

그리고 작은 편이지만 선으로 된 문양으로 만들어진 평와도 있다.

이곳에 있던 절터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존속하고 있었던 것일까?

두리번거리다 주워든 작은 와편에 ‘夫’자가 쓰여진 것이 눈에 들어온다.

귀부가 있던 곳에서 채집한 와편과 비교해보니 동일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과 그곳에서 같은 시기에 기와를 갈았거나 중수가 있었던 것임이 분명한 것.

 

 

정확한 삼천사지는 어디?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리하니 이곳이 원래의 삼천사일 것이라는 기대감과

‘삼천사(三川寺)’라는 비편이 발견된 귀부가 있던 곳의 삼천사지와 혼동을 일으키게 한다.

먼저 이곳 절터들을 조사했던 분들이 이루어놓은 업적에 후학이 감히 어떻게 항변할까마는,

‘夫’자 명문이 있는 와편으로 추정해볼 때 이곳이 삼천사터이고,

귀부가 있는 곳은 대지국사의 부도와 비를 모시던 삼천사의 부속암자

(최순우 선생이 추정한 塔碑殿址 같은)의 성격일 것이다.

 

북한산의 특이한 지질로 인해 식수를 구하기 쉬운 계곡 주변에

당시 국찰인 현화사 주지를 이 절에서 발탁할 만한,

법도에 걸맞은 거대한 삼천사가 위치하고 있었으리라.

 

서둘러 하산준비를 하는데 일행 중 한 명이 재미있는 표현이 담긴 와편을 주워들었다.

장판의 선문(線文)이 타날된 평와에 뾰족한 도구로 양반의 측면상을 그려놓았는데 매우 사실적이다.

부리부리한 눈매에 뾰족한 코, 넓은 갓을 쓰고 마치 호령하는 듯한 형상이다.

양반의 그림이 그려진 기와를 보며 누군가가 즉석에서 꾸며내는 얘기가 재미있다.

“기와를 만들던 와공(瓦工)이 술을 한 잔 마시고 늘어지게 자다가 관리에게 호되게 야단맞았지.

관리가 가버리고 난 뒤 화가 난 와공은 만들던 와통(瓦桶)에 그 관리를 그려서

와도(瓦刀)로 반을 잘라버렸던 것은 아닐까…”

 

삼천사지를 찾았던 우리 일행은 산을 내려오면서

이곳에 대한 조사와 발굴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특히 대지국사의 귀부가 남아있는 공간만이라도 발굴할 수 있다면

적지 않은 비(碑) 조각(片)들을 더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져보았다.

- 김상영(중앙승가대 교수), 최태선(경북대 박물관 연구원)

- 대중불교 149호(1995년 4월), p64-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