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부석사 괘불

Gijuzzang Dream 2007. 11. 22. 11:41

 

 

 

 

 

 

부석사 괘불, 조선 1684년,

925×577.5㎝, 비단에 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61년의 세월이 흐른 후 부석사에서는 괘불을 새로 조성하게 된다.

전란과 화재로부터 살아남은 두 점의 괘불은

우리에게 과거의 신앙과 교리, 괘불 제작에 관해

궁금증과 더불어 상상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새로 불화를 조성할 때 과거의 도상을 답습하는가.

혹은 당시의 필요에 따라 전적으로 다른 도상의 괘불을 조성하는가.

60년 전과 후는 어떤 면에서 서로 닮았고, 어떤 면에서 또 서로 다른가.

 

  

1684년에 조성된 <부석사 괘불>은 현존하는 조선시대 괘불 중 시대가 올라가는 작품 중 하나이다.

석가모니불의 설법을 듣기 위해 영취산에 모여든 청중의 모습은

부석사 괘불의 중심 장면으로 많은 비중을 할애하여 장대하게 재현되었다.

그러나 설법회 너머로 모든 시공간의 세 부처를 다시 표현하였다.

무수히 많으면서도 사실은 하나인 조선 사람들의 부처에 대한 사고는

부석사 괘불을 통해 훌륭하게 도해되었다.

괘불의 화기에는 1745년 괘불을 중수하여 청풍 신륵사로 보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짧은 한 줄의 기록은 괘불이 오래되자 보수를 거쳐

다른 사찰로 이동되었던 과거의 사실에 대한 상상의 여지를 제공한다.

 

현재 부석사에는 보수가 이루어지던 해에 제작된 또 한 점의 괘불이 전해지고 있어서,

옛 괘불의 보수와 새 괘불의 조성이 동시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옛 괘불은 새로운 승려들의 손을 거쳐 다시 태어났다.

이들은 두 세대 전에 괘불을 그렸던 화승들의 양식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보수를 진행하였다.

두 화승 그룹은 선호하는 안료와 필선의 구사, 같은 도상의 인물을 그려내는 방식에서

확연히 다른 스타일을 지녔지만 옛 것을 자의적으로 고쳐 그리지 않았다.


전란과 화재로부터 살아남은 두 점의 부석사 괘불은

우리에게 과거의 신앙과 교리, 괘불 제작의 궁금증을 풀어준다.

 

새로 불화를 조성할 때 과거의 도상을 답습하는가?

60년 전과 후는 어떤 면에서 서로 닮았고, 어떤 면에서 서로 다른가?

신륵사로 가는 길은 그 옛날 얼마나 되는 거리였을까?

사람들은 어떻게 괘불을 옮길 결심을 했을까?

이번 전시에서는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는 괘불의 궁금증을 밝히기 위해

부석사 괘불을 심층 분석하여 제시하였다.

- 정명희(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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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불(掛佛)은 야외의식에 걸기 위해 제작한 대형 불화로,

<부석사 괘불〉은 현존하는 괘불 중에서도 시대가 올라가는 작품 중 하나이다.

 

펼친 높이가 10미터에 달하는 이 괘불은

70여 명의 인물이 정연하게 자리한 대규모의 설법모임을 보여준다.

석가모니불의 설법을 듣기 위해 영취산(靈鷲山)에 모여든 청중의 모습은

부석사 괘불의 중심 장면으로 많은 비중을 할애하여 장대하게 재현되었다.

그러나 설법회 너머로 모든 시공간에 존재하는 부처를 대표하는 

세 부처를 또 다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이 그림의 특징이다.

무수히 많으면서도 사실은 하나인 조선 사람들의 부처에 대한 사고는

부석사 괘불을 통해 훌륭하게 도해되었다.

 

 

석가모니불 - 최고의 가르침을 설하다

고대 인도의 영취산에서 있었던 석가모니불의 설법회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이 펼쳐진 것으로 유명하다.

연꽃에 앉은 석가모니불은 른손을 내려 땅을 가리켜(觸地印)

그가 마군(魔群)의 유혹을 물리치고 깨달음을 이룬 존재임을 나타낸다.

설법공간에는

보살과 천인(天人), 부처를 따르는 제자와 나한, 불법이 베풀어지는 곳을 지키는 사천왕 등이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한 자세로 부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다.

 

약사불 -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약사불의 세계는 질병의 고통이 없는 정토이다.

병을 치료하는 그의 능력을 보여주듯 약사불의 손에는 약함(藥函)이 놓여 있다.

약사불 앞에는 해를 상징하는 일광보살과 달을 상징하는 월광보살이 있으며,

약사불을 따르는 십이신장(十二神將)이 설법모임을 호위한다.

 

아미타불 - 태어나고 싶은 다음 세상

아미타불은 ‘즐거움만이 가득한 곳’이란 의미의 ‘극락(極樂)’세계를 다스린다.

극락정토는 사람들이 사후에 가장 태어나고자 열망하는 곳이다.

아미타불의 광배에는 좌우 3구씩 작은 부처(化佛)가 표현되었다.

아미타불 주변에는

현실세계와 지옥세계의 고통으로부터 구제하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세지보살, 미륵보살 등이 함께 하고 있다.

아미타불의 서방정토와 약사불의 동방정토는

방위에 따라 여러 정토가 있다고 본 불교의 세계관을 보여 준다.

 

비로자나불 - 진리와 불법의 상징

비로자나불은 부처가 깨달은 진리(法), 그 자체를 상징한다.

그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의 경계는 없어지고,

중생 모두는 하나로 포용된다.

부처의 몸에서 발하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 대좌의 높이, 부처의 크기에서 보이는 차이는

비로자나불이 다른 부처에 우선한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괘불의 화기

1745년 이 괘불을 중수하여 청풍 신륵사로 보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짧은 한 줄의 기록은 괘불이 오래되자 보수를 거쳐 다른 사찰로 이동되었던

과거의 사실에 대한 상상의 여지를 제공한다.

 

현재 부석사에는 보수가 이루어지던 해인 1745년에 조성된 괘불이 또 한 점 전한다.

괘불의 제작을 이끈 우두머리 화승은 1684년 괘불의 보수 기록에도 등장해

옛 괘불의 보수와 새 괘불의 조성이 동시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옛 괘불은 새로운 승려들의 손을 거쳐 다시 태어났다.

이들은 두 세대 전에 괘불을 그렸던 화승들의 양식을 헤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보수를 진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두 화승 그룹은 선호하는 안료와 필선의 구사, 같은 도상의 인물을 그려내는 방식에서

확연히 다른 스타일을 지녔지만 옛 것을 자의적으로 고쳐 그리지 않았다.

보수는 불화 뒷면의 배접지를 새로 하는 것이 가장 큰 관건이었고,

화면은 옛 분위기를 헤치지 않는 선에서 최소한으로 이루어졌다.

 

전란과 화재로부터 살아남은 두 점의 부석사 괘불은

우리에게 과거의 신앙과 교리, 괘불 제작의 궁금증을 풀어준다.

 

새로 불화를 조성할 때 과거의 도상을 답습하는가?

혹은 당시의 필요에 따라 전적으로 다른 도상의 괘불을 제작하는가?

60년 전과 후는 어떤 면에서 서로 닮았고, 어떤 면에서 서로 다른가?

신륵사로 가는 길은 그 옛날 얼마나 되는 거리였을까?

사람들은 어떻게 괘불을 옮길 결심을 했을까?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관 2층 불교회화실에서 테마전시 중, 10월23일-2008년 4월27일까지)

  

 

 

 

 

- 2007년 12월19일, <큐레이터와의 대화, 제67회>

-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관 불교회화실 정명희

 

 

 

오랜 시간이 흘러 괘불은 낡고 퇴색하였다. 승려들은 다시 일을 도모하였다.

이 불화를 그렸던 화승, 일을 주도한 승려는 이미 세상을 뜨거나 연로해졌다.

부석사의 승려들은 새로 괘불을 그리기로 하였다.

새 괘불을 그리는 데 동참한 사람들에게는 괘불 조성이란 큰 과업 이외에도 다른 업무가 맡겨졌다.

이제는 낡은 옛 불화를 보수하도록 한 것이다.

 

1684년 조성된 '부석사 괘불'의 화기(畵記)에는

1745년 이 괘불을 중수하여 청풍 신륵사로 보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짧은 한 줄의 기록은 괘불이 오래되자 보수를 거쳐

다른 사찰로 이동되었던 과거의 사실에 대한 상상의 여지를 제공한다.

 

 

못 쓸 정도로 훼손되지 않았던 괘불은 그들의 손을 거쳐 손상된 곳을 다시 이었고,

안료가 떨어져 박락된 부분, 희미해진 필선은 붓질을 더해 새롭게 태어났다.

이들은 두 세대 전에 괘불을 그렸던 화승들의 양식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심스럽게 보수를 마쳤다.

 

 

두 화승 그룹은 선호하는 안료, 필선을 사용하는 방식, 면을 채우는 문양 패턴,

같은 도상의 인물을 그려내는 방식에서 확연히 다른 스타일을 지녔지만

자의적으로 고쳐 그리지 않았다. 보수는 불화 뒷면의 배접지를 새로하는 것이 가장 큰 관건이었고,

화면 보수는 최소한의 선에서 이루어졌다.

 

 

 

중수 기록은 시주에 참여한 인원, 제작에 관여한 인원,

사찰의 중요 임무를 맡은 승려들과 당시 부석사의 승려 명단 순으로 기재되었다.

 

일시에 이어 제일 먼저 등장하는 항목은 후배(後排) 시주질(施主秩)이다.

후배 시주에는 일반인의 참여 없이

여상(呂尙), 신오(信悟), 도일(道日), 도안(道安), 혜안(惠眼), 보한(寶閑) 등 승려 6인이 참여하였다.

시주의 주된 물품과 보수의 주된 내용이 배접지(褙接紙)를 새로하는 작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앞으로 두고두고 의식마다 사용될 새 불화를 제작하는 데는 신자들이 적극적이었다면,

오래된 불화의 보수는 부석사 승려들의 주도에 의해 가능했음을 알려준다.

이어서 괘불을 중수하는 일에

화승을 모집하고 청해오는 소임을 맡은 승려(引勸畵員)를 강조하듯 별도로 기록하였다.

 

괘불의 중수작업에 관련한 연화질(緣化秩)에 등장하는 승려들은

1745년 새로 조성된 괘불의 연화질과 일치한다.

1684년 괘불의 보수를 담당한 화승으로는 서기(瑞氣)와 자인(自仁) 두 승려가 기록되어 있다.

특히 서기는 1745년 괘불 조성에 참여한 13명의 화승 명단 중 가장 앞부분에 기재된 수화승이었다.

 

옛 괘불의 보수를 숙련된 화승에게 맡겼다는 점과

괘불을 새로 그리는 작업과 동시에 진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두 불화의 조성 기록에 등장하는 많은 승려가 일치한다.

1745년 새 괘불의 제작과 옛 괘불의 보수라는 두 불사는 애초부터 계획되어 있었다.

두 불사의 계획자, 총괄자, 감독자, 화승들은 동일했으나

괘불을 보수하는 일에는 별도의 시주 그룹이 형성되었다.

그 해 모인 시주자들과 그들이 가져온 총 비용은

옛 불화의 보수와 새 불화의 제작에 각각 나누어 지불되었다.

 

새 괘불의 제작을 일임받은 화승들은 괘불의 도상과 내용에서는 과거의 전통을 따르면서

그 표현과 스타일에 있어서는 그들만의 방식을 구사하였다.

도상을 계승한 것은 부석사 승려들의 의지와 주문사항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각각의 개별적인 존재들을 개성있게 그린 것은

새로 괘불을 그린 화승들의 독자성을 보여준다.